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42)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 (3)
조교수 클레어 엘핀은 개인 연구실 책상에 가만히 머리를 박고 있었다.
웨이브져서 흘러내리는 금발은 물결처럼 테이블을 수놓고 있고, 머리맡에는 잠시 벗은 안경이 다소곳하게 접어져있다.
원소학 학위를 받고 처음으로 임용되어 교직 생활을 시작한 신임 조교수들은, 대부분 첫 1개월은 혈색 좋고 낭만 가득한 얼굴로 학사를 거닌다.
허나 팔자 좋고 권위만 세우던 교수 양반들이 사실은 얼마나 살벌한 삶을 감내해왔는지 실감하고 나면, 이내 제 공부만 챙기면 되던 학위 과정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조교수 생활도 이제 2학기에 접어든 클레어 또한 마찬가지였다.
“죽고 싶다…..”
뽀얗고 아이 같은 피부와 보는 이로 하여금 순식간에 매료되게 만드는 두 눈망울, 나이를 먹어도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특유의 앳된 미모는 클레어의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잠시 고개를 들어 눈가에 밟히는 손거울에 시선을 당겨보면, 웬 시체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피부가 푸석푸석해질까봐 매일 같이 관리하고 있음에도, 눈 아래에서 서서히 영토를 넓혀가는 다크서클은 조만간 대륙을 통일할 기세다.
“죽고 싶다….!!!”
나지막이 외쳐보지만 들어주는 이는 없다.
학사 수업 과정은 기초 과정이라 할지라도 준비해야할 게 너무 많다.
그러면서도 학생들 하나 하나의 학업 성취도 신경써야 한다.
그 외에도, 한 학기 동안 여러 마탑에 6개가 넘는 연구 제안서를 던졌지만 죄다 반려 당했다.
이유라도 말해주면 좋겠건만, 대부분은 신임 조교수를 믿지 못하는 기조 때문인 듯 하다.
주도적으로 연구데이터를 갱신하지 못하니 논문에 들어갈만한 소스도 제한적이다.
연구 실적이 후달리니 학사에서는 압박이 들어온다.
그 와중에 학생들은 또 무슨 사고를 이렇게 많이 치는지, 그 후처리는 대부분 막내 교수인 클레어의 몫이다.
“…”
이러다 정교수가 될 때 쯤에는 주름살이 가득한 아줌마가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가 등허리를 타고 스물스물 기어 올라온다.
클레어도 한 때는 영재 소리를 들으며 아카데미를 다녔다. 20대의 나이에 고급 학위 과정을 죄다 돌파하고 교수직으로서 제 연구실까지 받았다.
명예직 교수들을 제외하면 적어도 학사 내에서는 가장 젊은 나이에 성취를 이룬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이 모양 이 꼴이다.
이제 인생에도 꽃이 피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설마 그 뒤에 기다리고 있는 시련이 더 고될 줄이야.
– 똑, 똑.
제 삶을 비관하고 있자니, 연구실의 문으로부터 노크 소리가 울렸다. 원소학 수업 비품 확인을 끝마친 조교가 보고하러 온 것일까.
-쾅
클레어는 들어오라고 말하기 전에 시체 같은 몰골을 좀 갈무리 하려고 고개를 들었으나, 문은 양보 없이 제 멋대로 열렸다.
“…쉬고 있었나?”
학위 과정 때부터 쭉 클레어의 지도교수직을 역임해왔던 글래스트, 이른바 ‘싸가지 없는 해골바가지’로 유명한 1학년 담당 선임 교수다.
그 융통성 없는 글래스트 교수 아래에서 5년이 넘는 세월동안 수제자로 살았던 클레어 조교수다. 이제와서 시체 같은 몰골 좀 보였다고 머쓱할 상황은 아니다.
다만, 그의 행차는 불길한 예감을 들게 만든다.
“어, 어머나. 글래스트 교수님. 조교수 개인 연구실까지 오시다니, 무슨 일이세요. 커피라도 한 잔 내드릴까요?”
“아니, 됐다. 클레어. 용무만 전달하고 가지.”
클레어는 팔뚝을 타고 솟는 식은땀이 느껴졌으나, 티 내는 일 없이 미소 지었다.
“무, 무슨…?”
“오필리스관에서 사고난 거 보고 받았나?”
“…네.”
“그 쪽 진상 관련해서 감찰부의 조사가 끝났다. 주모자의 처분에 대한 징계위원회 날짜도 결정되었는데, 학사 측에서 참관할 인원이 모자라더군. 이러다간 달랑 학장님만 현장에 나가게 생겼다.”
“그, 그렇군요. 3학년 선임 교수신 올베이그 교수님은…”
“학회 일 때문에 마탑에 나가있다.
“켈브레임 교수님은….”
“클로엘 황실 쪽 자문 때문에 바쁘시다. 황가의 일을 처리하는 데 괜한 방해를 할 순 없지.”
“앗! 그러고보니 델피나 교수님이 휴가에서 복귀하셨던대요!”
“다쳐서 허리가 아프댄다.”
그럼 글래스트 교수님 본인은요. 라는 말까지는 차마 꺼내지 못했다. 보나마나 말도 안되는 이유로 쳐내고 본인의 성위학 연구나 하러 갈 게 뻔했다.
“사건 정리안 보고 받고, 진상 판단하고, 의견 제출서 작성하고, 그 외 간단한 서류 업무는 네 아래에 있는 조교에게 맡겨도 상관 없지만, 중요한 판단은 스스로 내려야 할 거다.”
“글래스트 교수님. 죄송한데 지금이 학기 초인데다가 하필 제가 기초 과정 담당까지 맡아버려서… 요즘 정신이 없긴 하거든요… 또 연구 제안서 초안 작성할 것도 세 개나 남았고, 이번 학기 내로 원소학 논문 작업 안 들어가면 저도 좀 위태위태한 상황이라…”
“그렇군. 그렇다면 잠을 줄여야겠군.”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한 채, 글래스트 교수는 관련 자료들을 모아놓은 서류철을 내려놓고 휙 연구실을 나갔다.
“…”
클레어는 표정 변화 없이 서류철을 펼쳐보았다. 대충 스르륵 넘기며 확인해보니,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에 대한 진상이 간략히 요약되어있다.
오필리스관 메이드 장 엘리스의 ‘단독 소행’.
셰니와 켈리를 설득하고, 윌레인과의 협상을 통해 오필리스관 시설을 인질로 삼아 불만을 표출하려 했다.
악화되는 건강 상태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격무를 강요해온 학사에 대한 불만이 주요 동기.
평소 근무 태도가 성실하고 품성이 좋아 아무도 이런 일을 예상치는 못했기에, 그만큼 피해는 막심하다.
그 외 상점 부여 안건에 테일리, 아일라, 엘비라가 대상자로 올라와 있었고, 추가 조사 협의 대상자로 에드, 예니카, 직스 등이 올라와 있지만… 진상이 명확하다면 추가적인 조사 인력 투자는 생략하는 것도 생각해보고 있는 듯 하다.
ㅡ그 어디에도 로르텔의 이름이 거론되어 있지 않은 것에 대해, 클레어가 이상함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어쨌든 대충이나마 스윽 훑어보고 나니 작업량에 대한 견적이 잡힌다.
“뭐야, 별 거 아니네.”
클레어는 도수가 높은 안경을 딸깍 대며 벗었다.
“조사안 체크 해보고, 학사 의견 취합해서 의견 서류 제출하고, 학생 징계안 구체화 시키고, 추가 조사 필요 여부 판단하고, 위원회 출석 하고, 속기록 확인해서 잘못 된 거 없나 검토하고, 학사 운영진 쪽이랑 학장 사무실 쪽에 보고하고, 글래스트 교수님한테도 일처리 잘 된 거 보고하고, 업무 처리 번호 부여해서 기록실 쪽에 자료 취합한 거 제출만 하면 되네…!”
그러면서 본래 학사 업무, 연구 업무를 병행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클레어는 안경을 접어서 다시 집무용 책상 위에 올려놓고, 뒤편의 창문을 열어제끼더니 소리를 질렀다.
“막내 교수도 사람이야…!! 살려줘…!!!!!”
“맞다. 깜빡하고 말 안했는데, 이번 학기 예산 부족으로 여러 연구안들 반려 됐으니 확인해보고, 또 예산 부족 관련해서 학사에서 매각할만한 자산들 취합해서 보고하라고 하는군. 이건 조교들한테 시키게.”
문득 돌아보니, 글래스트 교수가 연구실에 돌아와 있었다.
클레어 조교수는 딸꾹질을 하며 고개를 돌려보았으나, 여전히 무뚝뚝한 해골바가지 교수는 별로 신경도 안쓴다는 듯이 가만히 서있었다..
“…죄송합니다.”
“하루 이틀인가. 신경 안 쓰니까 일 처리나 잘 하도록.”
“…네에..”
클레어는 자리에 착석해서 고개를 떨궜다. 이미 살아있기를 포기한 자의 모습이었다.
*
이튿날 밤, 전서구가 날아왔다.
– ‘장구류 매각안 통과 완료. 회주 실각안 검토 완료. 엘테의 실권은 거의 제한됨. 실각이 확실시 됨, 대세는 넘어오는 분위기. 신변 상태 보고 바람,’
자그마한 양피지에 압축적으로 정보를 때려넣고 발송한 흔적. 암투라는 것은 그 무시무시한 이미지에 비해 이리도 간단히 진행되는 법이었다.
“여기까지 상황이 진행됐으면, 아버지는 상회 본점 쪽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고 있겠네요. 부질 없는 발버둥이겠지만… 어쨌든 여기 실베니아까지 신경을 쓸 겨를은 없겠죠,”
“엘테 쪽에서 뭔가 다른 수를 숨겨놨을 확률은?”
“그 사람도 저 못지않게 무척이나 간사하니까… 아예 제로는 아니겠죠. 그래도 차기 회주자리를 노리는 슬로그를 믿어보는 수 밖에요. 저는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입장이니까 그거 외에는 할 게 없네요.”
일렁이는 모닥불이 밤의 어둠을 쫓아낸다. 시간이 늦어 예니카는 진즉에 돌아갔다.
늦여름, 혹은 초가을.
그 경계선 위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 북쪽숲이다. 벌써부터 외곽의 몇몇 활엽수는 그 잎의 색깔을 달리하기 시작한다.
정감가던 풀벌레 소리도 한 여름에 비하면 많이 줄어, 밤의 숲은 더 한적해졌다.
옷을 갈아입은 걸 말하자면, 숲 뿐만이 아니라 나 또한 그렇다.
“수선 끝난 교복 치고는 좀 낡지 않나요?”
“이 정도면 뭐, 입을만 하지.”
“음…. 흠….”
결석이 길어져서 좋을 것도 없으니, 내일부터는 바로 등교할 예정이다. 교복도 시험 삼아 입어봤는데 나름 깔끔해서 괜찮았다.
“뭐, 당장에 저는 그래도 좀 안전해진 입장이니… 마음은 놓이네요.”
빙그레 웃으며, 로르텔은 로브 자락을 잡아 당기고 앉았다.
“당장에 할 일이 많네요. 일단 거취도 문제고…”
“오필리스관 복구는 제 아무리 총력을 다 해도 한 학기는 걸린다더라.”
“맞아요. 임시 숙소에 자리가 남아 있을지도 체크 해봐야 하고… 사건의 뒤처리도 해야겠죠… 대부분은 잘 마무리 된 듯 하지만,”
교수동의 빈 학사 사무실이나 섬 남부의 폐관동을 급하게 리모델링해서 임시 숙소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제 나름대로 깔끔하게 꾸렸지만, 급조한 숙소가 오필리스관 학생들의 성에 찰 리는 없었다. 그래도 상황이 이러하니 감내할 수밖에 없겠지만.
“엘리스씨에 대한 게 가장 큰 고민거리였는데, ‘일단락’된 듯 하고…”
“…”
나는 장작 몇 개를 모닥불에 더 던져넣었다.
“엘리스는 네가 이 일의 흑막이라는 점을 털어놓지 않았다고 했지?”
“그야 그럴수 밖에요. 이건… ‘선불’개념이거든요.”
“선불?”
“생각해보세요, 선배님. 메이드 장 엘리스는 저와 엘테 둘 중 이기는 쪽에 붙으려고 했을 거에요.”
로르텔은 품 속에서 자그마한 양피지 한 장을 꺼냈다.
사건이 끝난 직후 엘리스의 면회를 다녀온 벨 마이아가 전해준 것이다.
그 양피지에는, 엘리스가 평생토록 후원해왔던 여러 고아원들의 목록과 1년 유지비, 후원 방식 따위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제 승리가 어느 정도 확실시 되니까, 다시 제 쪽으로 붙으려 한 것 뿐이에요. 다만… 이미 잃어버린 신용을 되찾는 건 힘든 일이죠.”
엘리스는 이미 로르텔을 한 번 배신했다.
아무리 필요한 일일지라도, 그런 엘리스를 로르텔이 한 번 더 믿어줄 것인가.
설령 필요에 의해 다시금 신뢰를 줄지라도, 이용가치가 사라지면 버려질 가능성이 크다.
한 번 배신한 자를 끝까지 기용하는 사람은 없다.
“엘리스씨는… 제가 엘리스씨를 믿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본보기 삼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거겠죠. 제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요. 뭐어, 제 입장에서도 이번 점거 사태의 흑막이 저란 사실이 드러나는 걸 원치는 않으니 어울려 줄 수밖에 없죠.”
엘리스도 독종이다.
격무는 끊이질 않고, 건강은 악화되지만, 학사는 들은 척도 안한다.
결국 일을 하지 못하게 되고, 자기가 후원하던 고아원을 책임지지 못하게 되자… 아예 자기 인생을 배팅해버린다.
항상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이 적어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꽤나 궁지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 아니,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단 표현은… 잘못 됐을지도 모른다.
비오는 날 오필리스관의 후문.
내 밑에 깔려서 충혈된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던 셰니의 그 얼굴을 아직도 기억한다.
적어도 엘리스를 따르는 자들은 그녀의 처지나 심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엘리스한테 아무런 악감정도 없냐? 배신 당했는데?”
“당연히 무척 화나죠. 만나면 일단 따귀부터 걷어 올려도 무죄 아닐까요?”
“그런 것 치고는 후련해 보이는데.”
“뭐, 지금은 괜찮아 졌어요. 지금은.”
뭐가 그리 좋은지, 나를 쳐다보면서 불가에 앉아 양손으로 턱을 괴고 베시시 웃는 모습이 퍽 여우 같다.
“애당초 저라고 해서 당당히 가슴을 펴고 다닐 만큼 착한 인간도 아니고. 필요하다면 한 번 제 뒤를 쳤던 인간이라도 다시 이용해 먹어야겠죠. 이 바닥이 원래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거든요.”
“그래, 아무쪼록 나랑은 척지지 말자.”
“물론이죠. 선배님.”
헤헤하고 웃던 로르텔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스커트를 털었다.
어쨌든 어느 정도 안전이 확보 됐다면 바쁘게 뛰어다닐 시간이다.
설령 엘테의 실각이 확실시 된다고 하더라도, 로르텔 같이 탐욕적인 소녀가 현자의 봉서를 포기할 리가 없다. 이 정도까지 사건을 벌여놨으면, 필시 그 봉서 또한 손에 넣으려 하겠지.
이제는 다시 상도로 돌아가, 상인의 삶을 살 때다.
캠프에 머무르면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하거나, 멍하니 불가를 쳐다본다거나, 가만히 누워 숲의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을 세본다거나 하는.. 그런 낭만 넘치는 삶도 잠깐의 일탈이었을 뿐.
“슬슬 갈게요. 다음 주 중에 계약서 쓰러 상회 지점에 들르실 거죠?”
“그렇지.”
나는 다듬던 활을 내려놓고, 모닥불 안에 들어있던 부지깽이 하나를 꺼내들어 발화 마법을 부여했다.
당분간은 어느 정도 마력이 유지되면서 횃불 역할을 해줄 것이다. 밤의 숲은 어두우니 지리에 익숙하지 않으면 이 정도 광원은 필요할 것이다.
슬슬 떠나려는 로르텔에게 가서 횃불을 건네주자, 로르텔은 반달눈을 한 채 흐음.. 거리며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냐?”
“아뇨. 선배. 생각보다 키가 크셔서.”
“갑자기?”
“음… 역시 좀 급발진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역시 추월하려면 좀 무리수를 던져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갑자기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기에, 빨리 횃불이나 받아서 갈 길 가라고 손을 내밀었다.
허나 로르텔은 받으라는 횃불은 받지 않고 갑자기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거 알아요, 선배님? 인간관계라는 게 그 본질은 다 밀고 당기기래요.”
“뭐?”
“그 넥타이처럼요. 봐요, 비뚤어졌잖아요.”
로르텔은 베시시 웃으면서 다가오더니, 내 넥타이의 매듭 뒷부분을 잡았다.
“이렇게, 매듭 뒷부분은 당기고 앞부분은 밀듯이 해야 똑바르게 잘 매지는 법이잖아요.”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내 옷매무새가 그렇게 불편하든?”
“뭐어, 항상 몸가짐 정갈히 해서 나쁠 게 뭐가 있겠어요. 저희는 실베니아의 재학생인걸요.”
그렇게 말하고서는,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로르텔은 넥타이를 한 손으로 움켜쥐더니 꽉 잡아당긴 것이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내 고개가 앞으로 휙 당겨지자, 로르텔은 이 때다 싶어서 까치발을 들더니-.
…
“…저녁 때 먹었던 라즈베리가 확실히 맛있었죠? 괜시리 다시 생각나서 좋네요.”
“…”
“어머, 그렇게 정색하실 줄은 몰랐는데.”
“선 좀 지켜라.”
“속상해라…”
그제서야 로르텔은 횃불을 받아들고서는 종종걸음으로 뒷걸음질을 친다.
속상하다는 대사가 무색하게, 한 손으로 슬쩍 입가를 가리고는 피식피식 웃는다. 꼬리라도 달려있었다면 필시 여우의 형태일 것이다.
“너무 당기거나 밀쳐내기만 하면 인기가 없대요. 다음에는 선배가 좀 당겨주는 걸로 해요.”
휙 몸을 돌리지만 여전히 시선은 뒤로한 채로 웃으며 덧붙이는 것이다.
“저도 밀쳐내는 연습 좀 해야 되니까.”
그렇게, 로르텔은 어두운 숲 사이로 사라졌다. 조금씩 멀어져가는 횃불의 빛이 한 번씩 흔들거리거나 바닥에 떨어지곤 하지만, 어쨌든 길을 잃진 않을 것이다.
로르텔을 마중 보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는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뒤통수를 망치로 세게 한 대 맞은듯한 느낌이 드는데, 일단 진정하고 정신을 좀 차려보자.
필요 이상으로 메인 시나리오 인물과 엮이는 일은 기피하려 했으나, 역시나 세상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법이 없다.
무엇보다, 이번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로 인해서 엘테의 실각이 한참은 더 앞당겨 지고 말았다.
다가오는 2막 10장 ‘현자의 봉서 쟁탈전’의 메인 시나리오 중 하나가 바로 엘테의 실각이다.
말하자면, 이야기가 앞당겨 지는 바람에 시나리오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생겨난 것이다.
허나 엘테와 로르텔 둘 중 하나는 퇴장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결국 앞으로의 정사에 맡은 바 역할이 더 많은 로르텔 쪽을 살릴 수 밖에 없었으니… 나로서는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진 않았다.
어쨌든 엘테의 실각은 일어나긴 해야할 일이었으니, 그 순서만 좀 뒤바뀌었을 뿐 시나리오 자체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려 했으나… 역시 이쯤되면 불안한 마음이 더 커지고 만다.
사소한 영향력 하나가 이야기의 큰 흐름을 바꿔버리는 걸 몇 번이고 경험했다.
이론적으로는 무난하게만 흘러가면 큰 흐름 자체는 엇비슷하게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하늘을 본다. 여전히 숲에서 본 하늘의 별은 아름답고, 달은 밝다.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도 여전하고 타닥대는 모닥불 소리도 항상 똑같지만… 내가 몸을 담고 있는 시나리오의 궤도는 계속해서 뒤틀려가는 기분이다.
이야기의 변방에서 시나리오가 무난하게 잘 마무리 되는 걸 지켜보며, 내가 챙길 거만 챙겨두려는 행동방침은 변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위화감이 들어, 나는 얼굴을 한차례 쓸어내릴 수밖에 없던 것이다.
야망은 없다. 졸업장이나 잘 따고, 내 스펙이나 잘 챙기면 그만이다.
그 쉽디 쉬워보이던 방침이… 어찌나 무모하고 어려운 도전이었는지 깨닫는 것은 그리 먼 미래가 아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
이제 2학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