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43)
교수는 아무나 하나 (1)
[ 그 불여우가 에드 도련님과 입을 맞췄댑니다. ]2학기가 개학한지도 사흘이 넘어가고, 슬슬 수업 진도도 순풍에 돛을 단 듯 나아가려는 시기였다.
우등생 예니카에게 수업 진도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기에, 3일씩이나 병환을 핑계로 수업에 빠지고서도 별다른 부담은 없었다.
그래도 마법역사나 마력학 이론 같은 필기 과목은 방심하면 순식간에 성적표를 붉게 물들이기에, 슬슬 펜대를 굴리긴 해야 할 터. 그렇다고 해도 정령과 끊임 없이 교감하는 것은 정령사의 본업과도 같은 일이니 소홀히 할 순 없다. 바쁜 시기다.
생활동 외곽, 오론산 산자락에 비스듬히 지어진 덱스관을 나와 느티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으면 오늘도 여전히 정령들이 모여든다.
오늘도 어찌나 그 수가 많은지 느티나무 근처는 북적거린다. 오늘은 중위 바람 정령 페시나 고위 불 정령 타칸까지도 모여앉아 있어서 마치 군단이 주둔해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뭐라고?”
[ 이거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예니카 아가씨. ]북쪽 숲의 시시콜콜한 일과들을 회의랍시고 하나하나 보고해오는 건 늘상 있었던 일이다. 허나 요즘 들어서 정령들이 들고 오는 이야기에 에드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예니카로서는 그런 이야기들을 안절부절하면서 듣다가도, 막상 싫지는 않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허나, 정령들의 수다에 섞여 들어온 오늘의 속보는 청천벽력과도 같다.
[ 그 불여우 같은 여자가 언제 또 치고 들어올지 모릅니다. 이거, 저희가 손 쓰지 않으면… ] [ 손 써서 어쩔건데요? ]참새 형상을 한 하위 바람 정령 카리스는 날개를 파다닥 대며 울분을 토하지만, 사자 형태를 한 페시가 짐짓 점잖게 받아친다.
[ 예니카 아가씨가 결정할 일이지 우리가 뭘 어쩌겠어요. ]“자, 잠깐. 무슨 소리야? 입을 맞췄다니?”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예니카가 사뭇 다시 묻자, 이번에는 그 거대한 몸뚱아리로 느티나무를 두른 채 누워있는 타칸이 대답했다.
[ 거 나도 봤는데, 화끈하더구만. 청춘이 좋아, 역시. ]“…”
[ 그 불여우 같은 여자, 역시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 줄 알아. 밀고 당기면서 간질간질 사람 마음을 자극하는 게, 거 보고 있자니 에드 그 목석 같은 놈이 아니었으면 홀라당 넘어갔을 것 같더군. ]“그게 무슨 소리야!”
예니카는 자리를 박차고 타칸의 거대한 목을 꾹꾹 눌렀다.
“그게 무슨 소리냐구!”
[ 거 했던 말 또 하게 만들래, 예니카? 보아하니 그 불여우가 선을 좀 넘었다 이 말이야. ]“에드는? 에드 반응은?!”
[ 오, 확실히 핵심을 꿰뚫는 질문이야. 내가 보고 있을 땐 정말 확실하게 벽을 치더군. 키스까지 냅다 박았는데 표정에 미동 하나 없는 것이… 보던 내가 다 감탄이 나왔다. ]아연실색하는 예니카를 위로라도 하듯이, 타칸은 그 진중하고 중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 어찌나 차갑게 받아치던지. 보고 있던 나까지 오그라들더군. 그렇게까지 치고 나왔는데 반응이 그렇게 시원찮다니. 이건 둘 중 하나지. 그 몰락귀족놈은 애초에 고자였거나, 상대를 아예 여자로 보고 있질 않은 게지. ]“그.. 그건… 다행…”
예니카는 한숨을 돌리려다가 다시 헛숨을 집어삼켰다. 다행이라니. 뭐가 다행이란 말인가. 이걸 지금 다행이라고 한숨 돌리고 있을 때인가.
[ 타칸님. 여전히 말을 너무 직설적으로 하시는 것 같아요. ] [ 거 새삼스럽게 왜 그러나, 페시. 이런 건 배려하겠답시고 빙글빙글 돌려 말하는 게 더 나쁘다. 그렇게 안심한 얼굴 하고 있을 땐 아닌 듯 하더군, 예니카. 그 몰락귀족놈이 불여우에게 벽을 쳤다는 건 별로 호재가 아니야. ]“…뭐?”
타칸은 손으로 다 헬 수도 없을 정도로 긴 세월을 살아온 고위 정령이다. 온갖 인간상을 바라보고 살아온 그 연륜은 물로 볼 수가 없다.
[ 경험상 그 불여우 같은 인간은 쳐내면 쳐낼수록 더 집착하고 불태우는 타입이야. 욕심보만 가득한 인간처럼 보이지만, 일단 제 사람으로 만들겠다 결심했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는 타입이 분명하다. 가만히 있으면 홀라당 뺏긴다 이 말이야, 예니카.]“그,.. 그래도… 에드는 반응이 시원찮았다며…”
[ 원래 수컷 놈들은 공격은 잘하는 주제에 방어가 약해. 아무리 목석같은 인간도 저렇게 일편단심으로 나 보란 듯이 밀어붙이면, 결국 무너지지 않는 성채라는 건 없는 법이다 이 말이야, 예니카. ]영 자세가 불편한지, 타칸이 몸을 고쳐 눕자 주변의 하위 정령들이 쓸려서 내려간다. 그 거대한 몸체는 자세 한 번 바꾸는 것 만으로도 주변 정령들의 눈치를 보게 만든다.
[ 동화 속 공주님 마냥 다소곳이 앉아서 언젠가는 날 봐주겠지~ 하는 낭만에 빠져 있으면 관계가 성취될 것 같지? 현실은 안 그래. 질척질척하고 추잡하게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법이야. ] [ 타칸님. 말하는 투가 너무 꼰대 같아요. ] [ 내가 틀린 말 했나? ] [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왜, 좀 더 돌려서 말할 수 있잖아요. ] [ 굳이 왜 빙빙 꼬냔 말이다. 답답하게시리. ]타칸은 꼬리를 휘적이며 그 파충류 특유의 빨려들어가는 듯한 동공을 예니카 쪽으로 향했다.
예니카는 페시와 타칸의 말에 이미 안색이 새파래져 있었다.
[ 어쨌든 예니카.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진전을 좀 하란 말이다. 듣자하니, 정령계 마법을 좀 가르쳐주기로 했다며? 그럼 당분간은 단둘이 있을 명분도 있겠군. 이런 좋은 기회를 날려 먹을 셈인가? ]“그, 그래두… 나보고 뭘 어쩌라구…”
[ 어쩌긴 뭘 어째. 다음에 만나면 너도 일단 키스부터 갈겨야지. 뒤쳐졌으면 좀 분한 티라도 내라, 예니카. ]그 말에 예니카는 뭐라도 상상한 듯, 입을 벌리고는 다시 느티나무에 걸터앉았다. 딱히 누가 추궁하지도 않았는데, 나무에 몰린 듯 뒷걸음질 치고는 말을 더듬어댄다.
“무슨 그런 낯부끄러운 소리를 해…!”
[ 그 불여우가 다짜고짜 키스부터 갈기는 건 말이 되는 상황이었고? 일이 이렇게 됐는데 사람 좋은 웃음이나 짓고 있을 건가? ] [ 타칸님… 순진한 예니카 아가씨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거 아닌가요. ] [ 거 뭐 잘되면 좋은 일 아닌가. 그 몰락귀족 놈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지만… 뭐, 수컷으로선 나름 훌륭하지. 광폭화 상태인 내 목을 베어버리던 결단도 그렇고, 침착한 품성도 타고난 듯 하니… 좀 감정적인 예니카랑은 궁합이 잘 맞아. ] [ 진짜… 손녀 신랑감 찾는 듯한 그런 품평은 너무 늙은이 같으니까 자제 좀 해주세요. ] [ 뭐 어떤가, 실제로 늙었는데. ]틀.
이야기의 틀을 못 따라가겠다. 예니카는 그리 생각하고는 고민에 잠겼다.
‘지… 진짜 뭐라도 해야 되는 거야? 근데 뭘 해…?’
손만 잡아도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예니카에게 있어서, 입맞춤이란 이미 저 아득한 하늘 위 우주의 영역이다.
심지어는 그 이상의 것까지 고려해야하는 상황이라면…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에 대한 공포… 이른바 코스믹 호러의 영역에 도달해야만 한다.
식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예니카의 모습이 퍽 안쓰러운지, 결국 중위 바람 정령 페시가 말을 덧붙였다.
[ 뭐, 너무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는 없어요, 예니카 아가씨. 타칸님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이야기하는 분은 잘 모르겠지만… 저는 예니카 아가씨를 대하는 에드 도련님의 태도에서 묘한 편안함을 느꼈거든요. 그 불여우를 대할 때랑은 다르게요. ]“…그래?”
[ 네. 이건 정말 빈말이 아니거든요. 섬세한 눈으로 천천히 보고 있자면 확실히… 에드 도련님은 유독 예니카 아가씨를 대할 때는 뭔가 편해 보여요. 다른 1학년들을 대할 때는 묘하게 심리적인 선을 그어놓는 느낌이지만, 그 선이 예니카 아가씨에게는 없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섬세한 페시는 직감적으로 그 차이를 깨달았지만, 그 편안한 감정이 무엇인지 구체화 시킬 수는 없었다.
예니카를 대하는 에드의 태도가 유독 가볍고 편안한 것은, 결국 시나리오에서 벗어난 그녀의 입장 덕분이다.
그러나 참 불행하게도, 이중에서 그게 얼마나 강력한 이점인지 깨달은 자는 없었다. 애초에 깨달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그러니 너무 마음 급하게 먹을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예니카 아가씨는 예니카 아가씨 다울 때가 제일 매력적이니까요. ]“….그래? 정말로? 그… 로르텔이 아무리 날뛰어도 에드는 꿈쩍도 안할까…?”
[ … ]“왜! 왜 대답 못해! 왜!”
섣불리 확신했다가 무슨 결과가 나올지 모르니 페시도 이 이상의 확언은 할 수가 없었다.
애석하게도 예니카의 불안감을 증폭시킬 뿐이다.
[ 어휴, 답답이들. ]머리를 베베 꼬며 뭘 어떻게 해야할지 혼란에 빠져있는 예니카와, 난처한 듯 나무 줄기에 등을 긁고 있는 페시.
그냥 시원하게 자빠뜨려버리면 안되나. 고루한 방식이지만 그게 제일 확실한데.
그런 덧없는 생각을 하며. 타칸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더 말해 뭣하겠냐는 투였다.
[ 그러고보면, 북쪽숲 외곽에서 이상한 마력 흐름이 좀 감지됐다. 시간 나면 확인해 봐야겠더군. ]생각해보면 이렇게 주기적으로 모여서 보고하는 일은 결국 정령들의 행동에 이변이나 장애가 생기지 않았나 확인해 보기 위함이다.
최근들어 한 몰락귀족 때문에 주객이 전도되어버린 느낌이지만, 해야할 일은 하는 게 맞으니 타칸은 얼른 말을 이어갔다.
“…응?”
[ 유독 밤에 활발해지는 걸 보면 성위 마법에 관련된 법진인 것 같던데. 정확한 위치는 메릴다가 특정해줄 거다. 요즘 모습을 보이질 않는 걸 보면 그 쪽에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이지. ]“위험해보여?”
[ 글쎄… 위험해 보이진 않지만, 알아둬서 나쁠 건 없겠지. ]일개 학생인 예니카가 딱히 학사의 안전에 대해서 책임질 필요는 없지만, 북쪽숲의 이변은 정령사인 예니카에게 있어서 남의 일이 아니다.
4학년까지 적어도 2년은 더 이 학교에 있어야 하니, 그 동안은 정령들의 집이나 다름 없는 북쪽 숲에도 신경을 놓을 순 없다.
[ 자세한 건 뭐, 나중에 일러줄테니. 다음 그 몰락귀족을 만났을 때 키스를 갈길 건지 자빠트릴 건지 뭐 그런 부분이나 좀 구체적인 안을 마련해 봐라. ]그 말에 예니카는 홍당무처럼 볼을 붉히며 타칸의 껍질을 발로 차댔지만, 부끄러움에 못 이겨 튀어나오는 그런 투정은 타칸의 몸에 상처조차 내지 못했다.
예니카도 알고 있지만, 벽을 차는 심정으로 쳐댈 뿐이었다.
[ 애시당초 뭘 해야 한다는 거에요, 타칸님? 그 불여우가 벌써 이렇게 진도를 빼놨으면, 이 쪽에서 할만한 것도 마땅치가 않아요. 이제와서 키스를 한들 후발주자밖에 안되잖아요. ] [ 오, 확실히 예리한 지적이군. 페시. 사실 자빠트리니 뭐니 이야기를 했지만, 굳이 그 불여우가 하는 행동보다 더 강렬할 필요는 없거든. 오히려 순진하거나 풋풋한 느낌을 살리는 것도 나쁘진 않아. 어쨌든 이 쪽도 급발진을 한 번 하긴 해야 하는 상황이니.. ] [ 호오…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가진 타칸 치고는 제법 괜찮은 지적이었다. 페시 또한 동감했다.
행동의 수위보다는 본인의 매력이 더 중요한 법이니까.
[ 그러니, 예니카… 잘 생각해 봐라. 너가 생각하는… 두근 두근 거리고 풋풋한 그런 상황이나 풍경은 대략 어떤 느낌이냐…? ]이미 과부하 상태인 예니카에게 물어봤자 그럴싸한 대답이 나오긴 힘들거란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묻지 않을 순 없었다.
예니카의 낭만이란 어떤 형태인가. 앞으로의 진전에 있어서 그 점을 확인하고 가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다. 그런 본인의 음습한 로망을 털어놓는 건 생각보다 부끄럽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확실히 짚고 넘어가긴 해야 하는 것이다.
느티나무의 줄기에 몸을 꾹꾹 밀어 붙이며 한계까지 몰려있던 예니카는… 결국 어렵사리 대답을 내놓는다.
“밥… 서로 떠 먹여준다든가…”
[ …. ] [ …. ]애초에 제 주인님이란 인간은 이런 인간이었던 것이다.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달아서, 타칸과 페시는 한숨을 푹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
“자… 아- 해라. 아-.”
“아 – ”
수프를 후후 불어서 루시의 입에 밀어 넣었다. 조막만한 입은 자그마한 사이즈의 스푼으로도 꽉꽉 들어찰 것 같다.
루시는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새마냥 수프를 머금고서는…. 이내 꿀꺽 삼키고 혓바닥을 비죽 내밀었다.
“우에엑- 맛 없어-.”
“확실히, 향신료가 다양하질 않으니 맛내기가 힘들군. 요리 숙련도 단련은 식재료가 더 다양해질 때까지 좀 미뤄두어야 하나.”
“사람을 맛보는 기계처럼 활용하지 마.”
잔뜩 약이 올라서 발로 꾹꾹 허리를 밀어대지만, 나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남은 수프를 냄비에 부었다.
루시는 그렇게 안보이지만 일단 입맛 자체는 고급이다. 다만, 온갖 건강 식단에 절여져서 맵고 짜고 단맛이 강한 자극적인 음식에 쉽게 혹할 뿐이다.
그래도 요리 숙련도를 좀 제대로 채워놓으려면 자극적인 보존식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요리를 자주 해야할 필요가 있다.
다만, 나는 야생에서 긴 시간 생존하느라 입맛 자체가 많이 퇴화된 느낌이다. 어지간한 음식은 다 맛있게 먹는 통에 제대로 된 미식은 입맛이 좀 살아 있는 인간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
요리 스킬 숙련도가 재주 스탯에 주는 영향을 생각해보면 소홀히 할 수도 없는데… 역시 식재료의 종류는 아무리 다양화시켜도 항상 부족한 느낌이다.
[ 생활 능력 상세 ]등급 : 중급 장인 전문 분야 : 목공 손재주 Lv 14 설계 Lv 9 채집 능력 Lv 12 목공 Lv 13 사냥 Lv 10 낚시 Lv 7 요리 Lv 6 수선 Lv 5
“흐음…”
오늘의 장작패기를 끝마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생활계 스킬을 체크했다.
내 성장의 중요 기반이 되어줄 제작 스킬들은 최대한 자주 체크하는 편이다. 요즘들어 대두되는 새로운 문제점은 스킬 간의 숙련도 편차다.
말했듯, 스킬의 숙련도는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성장폭이 더뎌진다. 핵심 능력치인 재주 스탯은 생활계 스킬 숙련도의 합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따라서 자연스레 재주 스탯의 성장폭도 더뎌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그러니, 아직 숙련도가 낮은 스킬들을 최대한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다른 스킬에 비해서 성장 효율이 아직 괜찮기 때문이다, 아직 해금되지 않은 기초 제작 스킬들을 해금하고, 요리나 수선처럼 뒤쳐진 스킬들을 단련해야할 필요성이 느껴지는데… 문제는 먹고 사느라 너무 바쁘다는 점이다.
로르텔에게 약속된 금화를 지불 받으면 식재료나 생필품 따위에 돈을 좀 쓸까 싶지만… 아직 오두막 공사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소모품에 돈을 낭비하기는 싫다.
“역시… 너무 시간이 모자라군…”
설상가상 개학까지 했다. 하루 중 내가 온전히 생존활동에 쓸 수 있는 시간은 그래봤자 대여섯시간 남짓이다. 그나마도 잠을 줄였을 때의 이야기다.
좀 더 생존 활동의 효율을 고민해야 될 시기가 온 것이다.
“시나리오는… 아직까진 괜찮나.”
엘테가 일찍 실각해버리는 최고의 이변이 일어났다. 나는 아직도 그 원인까지는 모르겠만, 어쨌든 문제 자체는 잘 봉합해 두었다.
이 이변이 어떤 식으로 작용할 줄은 모르겠으나, 당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없어보인다.
시나리오 메인인물들은 틈이 날 때마다 잘 주시하고 있다. 어쨌든 별 문제는 없는 것 같다.
정사에 가장 중요한 인물들은 결국 주인공 테일리와 4대 히로인들이다.
테일리는 뭐… 전투부라서 얼굴을 잘 볼 순 없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열등생 딱지는 진즉 뗐다고 한다. 그 재능과 기세면 3학년 때 쯤이면 B반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반자 아일라’는 여전히 테일리의 버팀목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 같다. 수소문 해보면 항상 테일리와 딱 붙어서 그를 걱정하거나 지지해주는 모습을 보이는 듯 하다.
‘자애의 황녀 페니아’ 또한 별 문제 없이 잘 생활하고 있는 듯 하지만, 슬슬 로르텔과 충돌하기 시작할 때가 됐으니 주시해야만 한다.
‘황금의 딸 로르텔’은 가장 불안불안한 상황이다. 엘테의 조기 실각으로 행보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모르겠다. 엘테와는 별개로, 당장 현자의 봉서를 탈취하려는 계획에 변동은 없어 보인다. 당장 2막 10장에서 중간보스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데, 부디 별 이변이 없길 기도할 수 밖에 없다.
클라리스는… 내년에나 입학할테니 지금은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당분간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상황을 주시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2막의 최종보스 글래스트는 테일리의 검성식으로만 피해를 입는 패턴이 무척 많다. 애초에 성위 마법 자체가 구조가 특이해 마력만으로는 제압하기가 힘들다.
테일리 세력도 문제지만, 학사 교수진들의 행보도 그만큼이나 중요하겠지.
“한 번 날 잡고 체크해봐야겠군. 그래도… 필요 이상으로 엮이지 않도록 조심하자.”
어쨌든 지금 당장 할 일은 덫을 체크하고, 고기들을 손질하는 일이다. 나는 어깨를 휘어꺾으며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두막 굴뚝도 완성 되었으니, 이제 벽지와 바닥 작업만 마치면 입주 가능이다.
곧 있으면 생활이 안정될 시기가 온다. 힘내자…
*
“사정 청취록 여기에 모아놨어요. 클레어 조교수님.”
“고마워요, 아니스.”
1년차 조교수가 가장 많이 곤란해 하는 일 중 하나가 자기 밑에서 일해줄 조교를 찾는 것이다.
신입 교수를 지도 교수로 배정 받고 싶어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으므로, 베테랑 교수들에 비해서 아무래도 인력이 달리는 것이다.
그런 클레어에게 있어서 아니스는 참 고마운 학생이었다. 나긋나긋한 성격에, 일처리도 깔끔하고, 교수를 경력으로 판단하지 않고 착실히 공경하는 모범생인 것이다.
“그 외에 학사 감찰부에서 따로 받아온 건 없지요?”
“네. 혹시나 따로 필요하신 거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밝은 웃음과 함께 인사하고 나가는 아니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쨌든 조교수도 교수이니, 최소한의 위엄은 유지해야할 터.
사실 클레어는 위엄 넘치는 교수보다는 친한 언니처럼 인식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친숙한 사이가 되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후음…”
클레어는 잔뜩 쌓인 서류철 사이에서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생각보다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 당시의 자료가 많다. 하나 하나 꼼꼼히 읽어봤으나,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온갖 잡무를 다 맡고 있는 막내 교수 입장에서 그냥 대충대충 일처리를 할까 싶다가도… 끝끝내 가슴 한 켠에 남아도는 의혹이 클레어를 괴롭힌다.
뭔가 일의 전말이 시원스럽게 풀린듯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엘리스의 청취록을 확인해보고, 시간대 순으로 사건을 정렬시켜보고, 목격자의 증언을 대조해본다.
이야기의 아귀 자체는 잘 맞아떨어지지만, 왜 비어있는 퍼즐 조각이 남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일까.
“애초에 어느 정도 결론이 난 사건에 내가 이렇게까지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나 정말 너무 피곤해서 죽을 것 같은데…”
글래스트 교수가 떠넘긴 잡무일 뿐이니, 대충 처리하고 글래스트 교수에게는 잘 끝났다고 보고하면 되는 일 아닌가?
그런 생각이 자꾸 들지만, 클레어는 일을 대충대충 처리하질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우음… 흐음…”
자료철을 계속 쳐다보면서 위화감의 정체를 고민한다. 뭔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흑막의 존재가 느껴진다고 하면… 그건 너무 과민 반응일까. 음모론 가득한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것일까.
그래도…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면 확실히 해결해두는 게 좋을 것 같긴 하다.
클레어는 자료철의 ‘추가 조사 대상자’까지 만나서 사정을 청취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 예니카, 직스였다.
다 끝난 사건이니 무슨 흑막 같은 게 존재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서 나쁠 건 없었다.
“예니카랑 직스는 유명한 애들이니까 알겠는데… 에드… 에드… 어디서 이름을 많이 들어봤는데…”
그제서야, 이제는 자칭할 수 없는 그의 풀네임이 떠오른다. 에드 로스테일러.
그 로스테일러 가문의 후손으로서, 지금은 파문당한 몰락 귀족이었다.
“…”
클레어는 턱을 감싼 채 자료철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뭔가… 보이지 않는… 빙산의 밑바닥이 남아있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