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44)
교수는 아무나 하나 (2)
“어머, 정말 죄송해요. 에드 선배님.”
이튿날 아침, 모처럼 주말을 맞아 생활동 쪽으로 나갔다. 번화한 남서편 생활동을 가로질러서, 아켄섬 밖으로 연결된 두 다리 중 하나인 멕세스 대교 가까이까지 나왔다. 거의 두어 시간은 걸어온 느낌이었다.
대교를 지나오면 가장 크게 보이는 엘테 상회 실베니아 지점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직원들은 응접실로 나를 안내했다. 묘하게 깍듯한 것이 오히려 내가 더 불편할 지경이었다.
응접실에서 다소곳이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던 로르텔은 약속했던 계약서를 깜빡하고 준비하지 못했다면서 내게 사과를 건네온 참이었다.
“모처럼 미리 약속까지 잡고 오셨는데, 제가 요즘 워낙 정신이 없어서요.”
“…그래?”
“네. 정말 죄송해요. 아마 다음 주 쯤에 다시 방문해주셔야 될 것 같아요. 사과의 의미로 차랑 다과를 좀 준비했어요. 그리고 장부에서 누락된 마공학 용품 몇 개도 챙겨두었으니 돌아갈 때 창구에서 받아가세요.”
로르텔은 교사동에 있을 때와는 인상이 많이 달랐다.
아카데미 교복에 로브를 두르고 있던 평상시와는 달리, 자락이 긴 플레어스커트에 새하얀 블라우스를 걸치고 있고, 고급스러운 금테가 달린 빵모자를 쓰고 있었다.
지난 사건에 휘말렸을 때에는 허구헌 날 비에 젖어 있거나, 낡은 로브를 두르고 있는 모습밖에 못 봤기에 퍽 인상이 새롭다.
평상복이라 하기엔 좀 과도하게 고급스러운 감이 있어서, 무슨 일정이라도 있냐고 물었더니.
“오늘은 꽤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나름 꾸몄는데요. 어때요?”
하고 빙긋빙긋 웃으며 물어오는 것이다.
“중요한 일정?”
“그런 게 있답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기에 나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나는 호화로운 응접실의 맞은 편 좌석에 앉아서, 로르텔에게 본론을 꺼냈다.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 가구류 상품도 취급해?”
“물론이죠.”
“좀 싸고 괜찮은 가구를 사들이고 싶은데, 지점에서 취급하는 상품들은 너무 다 고급품이더라. 그냥 적당히 제 역할 잘 하는 책상, 의자, 장식장 같은 거 마련해볼 수 없냐?”
“어머,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 보니 오두막 완공 하셨나봐요?”
“거의 다 되긴 했어. 자잘한 마무리만 끝내면 될 것 같아.”
“흐음… 아시다시피 실베니아는 귀족적인 상품이 수요가 많은 편이라, 그런 실용성과 가격 경쟁에 초점을 맞춘 완성품은 잘 납품이 되질 않거든요. 제가 직접 수배하면 되긴 하겠지만, 시간이 좀 걸릴거에요.”
로르텔은 턱에 손을 얹고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으흠 하고 웃어보였다.
“공짜로 매물을 내드리기도 좀 난감하네요. 말씀드렸듯이, 판매용 매물을 공짜로 내드리는 건 상인의 직업윤리에 벗어나는 행위고, 주변 상인들로부터 얕잡아 보일 수 있는 행위랍니다.”
“그런 부분은 어쩔 수 없지.”
“뭐, 좀 더 직관적인 방법이 있긴 하지만요.”
그렇게 말하고 로르텔은 응접실 소파에서 일어서더니, 업무용 책상까지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손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서는 척봐도 비싸 보이는 목제 의자의 발을 마법으로 부러뜨려버린 것이다.
– 콰당탕!
“…”
“목공은 주특기시죠? 부러진 다리만 연결해서 다시 쓰시면 되겠네요. 이제 못쓰는 쓰레기니까, 내일 쯤에 배출할게요.”
음각으로 새겨진 사슴 문양이나, 화려하게 둘러쳐진 금테가 눈에 띄는 의자였다.
“그건 얼마짜리 의자냐?”
“비밀인데요.”
화끈하다고 해야 할지, 추진력이 넘친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집단을 이끄는 자 특유의 기백이 넘쳐나는 소녀다.
로르텔의 시선은 의자에서 빠져나와 장식장, 유리창 따위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다 들고 가지도 못하는 입장이라 일단은 로르텔을 말렸다.
“뭐어, 그 외 자잘자잘한 ‘쓰레기’들은 나중에 보내드릴게요.”
“…그래.”
“어쨌든 제 입장에서도 선배님께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이것저것 있어요.”
로르텔은 다시 응접실 소파로 돌아와 앉더니, 찻잔을 들어서 한 모금 머금었다. 나름대로 우아해 보이려고 힘쓰는 모습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의자를 박살내버리는 모습이랑 괴리감만 커질 뿐이다.
“1학년 원소학 담당 교수님인 클레어 조교수님 아세요? 클레어 엘핀 조교수님이요.”
“응? 알지.”
“그 분 행보가 심상치가 않아서… 요즘 좀 주시하는 중이에요. 뭐어, 워낙에 철부지 같으신 분이라 그리 위험하게 느껴지진 않지만…”
클레어 엘핀.
올해 처음으로 교수직에 임용된 젊은 여성으로, 바로 그 글래스트 교수의 수제자로 10년 가까운 세월을 버틴 독종 중의 독종이다.
기억하기로는 2막 최종장인 글래스트 토벌전에서 2페이즈 보스로 출현하는데… 슬슬 시나리오에 얼굴을 내밀 때도 되긴 했다.
“왜?”
“그냥… 그 분은 묘하게 직감이 좋은 편인데, 이번에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의 학사 측 담당자로 배정되셨더라구요. 뭐어,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할 거니까 선배님은 신경 쓸 필요 없는데… 일단은 알아두셨으면 해서요.”
“그래. 알아는 두마.”
그리 대답하고서 나도 차를 한 모금 들이키자, 나를 쳐다보는 로르텔의 눈매가 묘하다.
내가 뭐 할 말 있냐는 듯 한 얼굴로 받아쳐주자, 로르텔은 목을 가다듬고서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응접용 테이블에 걸터앉아서 내게 고개를 쭉 내미는 것이다.
“어쩜, 이렇게 표정 변화 하나 없으실 수가 있어요. 선배님. 이 쪽은 나름대로 승부수였는데.”
불만이 가득 쌓인 얼굴로 볼멘소리를 하자, 무슨 이야기인지 대번에 감이 왔다.
지난 번 헤어질 때, 횃불을 받기 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다.
“애초에 에드 선배님, 저를 여자로 보지도 않죠?”
로르텔은 발을 휙휙 내젓고서는 애꿎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꾹꾹 찔러댔다.
“뭐, 빙빙 꼬고 돌려 말해 뭣하겠어요. 저는 에드 선배님을 이성으로 보고 있답니다. 생각하신 의미 그대로요. 이렇게 부탁을 들어드리는 것도 다 제 흑심이고요.”
“…무슨 대답을 바라는지는 알겠다만…”
“어머,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어요. 아시다시피, 저는 승산 없는 싸움은 안하는 편이라.”
한숨을 푹푹 쉬는 로르텔은 보란 듯이 손으로 내 가슴께를 꾹 눌러보였다.
“지금 대답을 종용하면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저도 잘 알거든요. 승부를 거는 건 제 승리가 명백한 상황일 때가 아니면 안 되는 거죠.”
“…”
“원래 상인이라는 족속들은 이기는 싸움 아니면 안 해요. 지금은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하고 계시지만… 글쎄요.”
로르텔은 빙그레 웃고서, 시원스레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건, 나 혼자만은 아니게 될 걸요?”
자세히 보면 로르텔의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요염한 미소는 승산이 확실할 때에도, 궁지에 몰렸을 때에도 늘 똑같다.
절대로 속을 내비치지 않는 상인 특유의 기질이란, 몸에서 쉽게 떨어져나가질 않는 것이다.
* [ 고급 제작 스킬 ‘마공학’을 습득하였습니다. 고급 제작 스킬 슬롯 하나가 소모되었습니다. ]
내 손바닥만 한 유리구슬과 거치대로 이루어진 마공학 용품은 생각보다 구조가 간단해서 금방 분석할 수 있었다.
드디어 제대로 된 고급 스킬 하나를 배웠구나 싶어서 묘한 성취감이 가슴을 간질인다.
나머지 마공학 용품들도 오두막 안에 정리해놓는 게 좋을듯 해, 짐을 잔뜩 싸든 채로 캠프를 가로질렀다.
해가 떨어지고 나면 슬슬 쌀쌀한 기운이 올라온다. 바야흐로 가을이었다.
처음 숲 생활을 시작할 때가 초봄 무렵이었다. 당시에는 당장의 의식주를 확보하느라 추위에 대한 대책은 뒷전으로 밀려있었다.
허나, 나뭇잎의 색깔들이 제각기 화려해져가기 시작하니 이제 흙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흐음…”
이제 정말 야외취침을 할 수 없는 시기가 온다.
뿐만 아니라 겨울이 되고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숲의 동물들을 사냥해 고기를 조달하기 더 힘들어지고, 식용식물들의 수도 시원찮아지기 때문에 식량 자체가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겨울을 대비해야한다.
사뿐 사뿐히 내려앉는 눈발의 포근한 분위기… 겨울하면 으레 떠올렸던 그런 따스한 낭만은 튼튼한 집과 냉장고에 가득한 식량이 전제되었기에 아름다웠던 것이다.
그래도 마냥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보험이 있기 때문이다.
“열 여덟…. 열 아홉… 스물.”
나는 로르텔이 건네준 가죽주머니를 펼쳐 보았다. 말끔한 금화 20닢이 그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정 극한의 상황까지 몰리면, 돈을 쓰면 된다. 그러나 낭비는 금물이다. 일회성 소비에 들어가는 물품에 대한 지출은 최소화 하는 것으로 방침을 잡았다.
이번 학기까지는 글록트 장학 재단에서 제공해준 장학금으로 버틸 수 있지만, 다음 학기가 되면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매 학기 나가는 학비를 감당하려거든 지출은 반드시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로르텔이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 명백해 보인다. 허나 그 호의에 기대는 것은 너무 불확실한 방안이다. 설령 그리 하게 될지라도 시나리오가 모두 마무리 된 이후다. 그 전까지는 무리가 있다.
사람의 호의를 타산적으로 이용하면 안된다는…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만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일단 시나리오 메인 인물에게 지나치게 깊게 다가가는 것도 방침상 어긋나는 일이고, 설령 그 방침을 때려친다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이란 갈대 같아서 언제 쉽게 변할지 모르는 것 아닌가.
자급자족은 생존생활의 핵심이다. 누군가의 일시적인 호의에 삶의 주도권을 쉬이 내주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천만한 판단이다. 누가 뭐라해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만 한다.
뭐, 그래도 오두막을 보강한다든가 좋은 목공 도구들을 마련한다든가 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돈을 쓸 의향이 있다.
앞으로 꾸준히 활용해야할 물건들이고, 당장 내 생활계 스킬의 숙련도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식량이나 땔감 따위를 사는데에 지나치게 돈을 쓸 수는 없다. 백보 양보해서 향신료나 기름 따위는 요리 스킬 숙련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가능할지 몰라도, 숲에서 조달할 수 있는 물건에 돈을 쓰는 짓은 절대 안한다.
“발화.”
이제는 숨 쉬는 것보다 간단하게 구사할 수 있는 발화 마법을 벽난로 안에 대고 발현시켰다.
– 화르륵
적당히 잘 완성된 벽난로 안에 불이 타오르고, 연기는 꼬박 이틀이 걸려 완성한 굴뚝을 타고 잘 올라간다.
벽난로 자체는 생각보다 더 크게 완성되어서, 거의 벽 한 면의 3분의 2는 차지하는 것 같다.
처음에 설계한 것보다 더 크게 완성된 이유는 결국 더 큰 불을 내기 위해… 즉, 화력을 세게 하기 위해서다. 이쯤 되니 벽난로 라기보단 화덕이다.
땔감 자체는 꾸준하게 수급할 수 있으니, 당장은 화력에 집중하는 선택을 하긴 했는데.. 그 덕에 연기를 배출하기 위한 굴뚝 크기도 더 커져서 정말 고생스러웠다.
– 타닥, 타닥.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가 오두막 내부에 아련하게 울려 퍼진다.
아직 초저녁도 안 됐는데 오두막 내부는 영 어둡다. 그래도 따스한 불빛이 내부를 채우니, 그럭저럭 밝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5분 정도 멍하니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다가, 이내 오두막 벽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에휴…”
벽에 기대서 주저앉은 채 한숨을 푹 쉬다가도, 다시 흡족한 기분에 씩 웃었다.
그간 야외 캠프 활동을 하면서 ‘공기를 데운다’는 발상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따스한 온기라는 것은 내가 누워있으면 자연스레 찾아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불가에 가까이 다가가서 적극적으로 취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허나, 이제는 지붕이 있고, 천장이 있다.
벽과 지붕을 진흙으로 마감했고, 바닥은 가죽들을 카펫 삼아 깔아놓았다.
열용량이 많은 재질의 물건들이니, 일단 데워지기 시작하면 쉽사리 차가워지지 않는다. 한 번 공기를 뜨겁게 데워놓으면 그 포근한 감각은 집안 전체에 퍼지는 것이다.
문제는 생각보다 연료 효율이 좋지 않다는 점인데… 이 부분은 땔감 조달에 더 시간을 쓰는 것 밖에는 해결 방법이 없어 보인다. 정 시간이 없으면 마법을 활용해 나무를 베어대는 수밖엔 없다. 불을 피우는 것 자체는 발화 마법을 활용하면 되니 크게 불편하진 않을 것 같다.
역시… 마력 효율을 늘리는 과정이 필요할 듯하다.
아직은 땔감을 좀 아껴서 써야겠지만, 그래도 드디어 입주다. 가구들만 좀 마련하면 드디어 안정적인 주거 환경이 보장되는 셈이다.
따스한 온기가 얼굴 한쪽을 데워온다.
그 사실이 대체 뭐라고, 퍽 안심이 되어 마음 한편의 짐이 내려간 것만 같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일단 덫부터 체크해야겠네.”
최근에는 자그마한 동물을 위한 올가미 덫 뿐만이 아니라, 제법 큰 동물들을 타겟으로 한 덫도 한둘씩 설치해두기 시작했다.
좋은 수확이 있었으면 좋겠다.
*
– ‘자네가 그리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
클레어 조교수는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에 아직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남아있는 것 같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글래스트 교수는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리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 ‘클레어 조교수. 자네는 묘하게 감이 좋고, 가끔가다 꽤나 그럴싸한 가설을 내놓기도 하지만… 중요한 부분에서 헛다리를 짚는 부분이 있지. 제발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판단을 과신하는 일은 좀 자제하게.’
“말을 너무 막 하시잖아! 그치? 응?”
“…”
트릭스관 학생 상담실.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클레어 조교수와 직스 에펠슈타인은 마주보고 있었다.
“그, 그렇군요.”
“내 말 좀 들어봐, 직스. 너도 글래스트 교수님의 수업에 들어가니까 알겠지만, 그 분은 진짜 왜 항상 그런 식이냔 말이야. 나는 거진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수제자로 있었던 사람 아니냐고, 안 그래도 일까지 잔뜩 떠맡아서 힘들어 하는데 격려 한 두 마디가 그렇게 어렵냐구.”
직스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 땀을 삐질 흘렸다.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에 대해 교수진측 담당자가 된 클레어 조교수는 자료철을 읽으면서 묘한 위화감을 느껴, 독자적인 추가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아직 학사 감찰부가 조사 대상자로 올려놓진 않은 에드, 직스, 예니카에 대한 사정 청취를 진행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첫 번째 타자로 직스가 트릭스관으로 불려왔지만, 정작 펼쳐진 것은 사정청취나 조사라기보다는 신세 한탄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꼬박꼬박 위엄을 갖추고 존대로 주고 받던 대화였는데, 어느 샌가 말을 놓더니 자기 처지를 털어놓으며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것이다.
조교 아니스나 다른 담당 학생들이 보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쓸어내릴 게 뻔했다.
“헉, 이럴 때가 아니네. 직스는 이미지가 너무 듬직하니까 나도 모르게 하소연을 하게 된단 말이지.”
“과, 과찬이십니다.”
“그래서 나는 좀 묘한 느낌이 들거든. 지금은 착각으로 결론이 나는 분위기지만, 현장에서 황금왕 엘테를 봤다는 목격 증언도 한 둘 정도 보이고… 엘리스의 행동 동기가 빈약한 느낌도 들어. 뭐, 엘리스가 전부 시인해버렸으니까 추가적인 조사의 여지는 없어 보이지만…”
직스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클레어 조교수는 겉보기로는 허당에 백치다. 교수진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다.
학술적인 지식의 양과, 그냥 그 사람 자체의 냉철함은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라는 점을 여실히 깨닫는다.
그녀가 내놓은 논문이나 학술적인 연구결과는 확실히 대단하지만… 사람 자체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나사가 빠져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묘한 직감만큼은 왠지 모르게 폐부를 꿰뚫는 경우가 많다.
“뭔가 보이지 않는 흑막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안 들어?”
“그… 예를 들자면요?”
“음.. 예를 들자면… 왜, 황금왕 엘테라고 하니… 오필리스관에는 그 딸이 있잖아. 로르텔 말야, 로르텔.”
그 말에 직스는 헛숨을 삼켰다.
“분명 테일리가 엘리스에게 잡혀있는 로르텔을 목격했었다고 증언도 했지 아마? 그 뒤로 오필리스관을 뛰쳐 내려가서 행방은… 알 수가 없네.”
“그, 그건…”
“하지만, 로르텔이 그렇게 나쁜 애일 리가 없지. 음! 성적도 좋고, 성격도 싹싹한 걸! 저번에 야근하고 있으니까 힘내라고 타르트를 잔뜩 가져다 주기도 했고.”
“…”
그리 말하고 클레어 조교수는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어간다.
“내 생각엔 에드 로스테일러가 수상해. 지금은 파문당해서 에드지.”
혹시나 누군가 들을까봐 조용히 속삭이는 모습은 여전히 허당이다. 애초에 여기엔 직스와 클레어밖에 없다.
튀어나온 이름이 영 뜬금없어서, 직스는 오히려 표정이 굳었다.
“에드 선배님 말입니까?”
“그래. 내 말이 음모론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잘 들어봐. 직스.”
애초에 직스는 조사 받으러 나온 신분일 뿐인데, 왜 저런 이야기까지 들어줘야 하는가.
위엄이라곤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조교수의 행보였지만, 직스는 차마 반항하진 못했다.
“현장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오필리스관 학생이거나, 아니면 관계자들 뿐이었거든. 오필리스관 사태에 휘말려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들이지.
근데 테일리와 에드, 이 둘은 오필리스관과는 별 접점이 없는데도 일에 휘말렸단 말이지. 그나마 테일리는 엘비라에게 끌려간 사정이 명확하고, 또 직접 이 일을 해결한 당사자니까 용의선상에서는 제외되어야지. 그럼 남은 건 에드야. 에드가 왜 그 시간에 오필리스관에 있었을까?
”
“…”
“그건 바로, 에드가 이 모든 사건의 흑막이기 때문이야! 범인은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고 하잖아!”
빠밤- 하고 입으로 효과음 비슷한 것을 내고서는 나 잘났다는 듯이 웃어보이는 모습은 영락없는 철부지다.
“그… 행동에는 동기가 있기 마련 아닙니까? 에드 선배가 그런 일을 사주해서 무슨 이득을 볼 게 있다고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건 지금부터 알아내야지! 에드 본인을 추궁해서!”
“일단 범인을 특정하고 그 다음 동기나 방법을 캐낸다니…. 순서가 뒤바뀐 거 아닙니까?”
“역순으로 조사해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야. 직스.”
직감대로 행동하는 클레어의 기질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다. 괜시리 에드가 귀찮은 일에 휘말릴까 싶어서 직스는 고민에 빠졌다.
“뭐, 직스는 별로 수상해 보이지도 않고, 상황도 잘 모르는 모양이니까 이대로 보내줄게.”
“그럼 에드 선배도 트릭스관으로 불러내서 조사하시는 겁니까?”
“아니. 이런 건 변명을 준비할 시간이 있으면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가버리기 마련이잖아. 이쪽에서 치고 나가야지.”
미리 에드에게 언질을 주려했던 직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기숙사에서 퇴사 당한 뒤로 어디서 거주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보아하니 북쪽숲 언저리에서 자주 목격된다고들 하더라고. 직접 쳐들어가서 추궁해봐야지.”
*
행동하기로 결심했으면 추진력 있게 진행해야 한다. 클레어의 방침이었다.
틈틈이 연구 제안서를 작성하랴, 다음 주 수업 자료 확인하랴, 학생들 건의 사항 체크하랴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일을 맡긴 했으니 허투루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얼른 북쪽숲을 훑어볼 생각이었으나, 생각보다 처리하고 와야할 일이 많았기에 이미 숲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으음… 역시 내일 올 걸 그랬나. 그래도 주말 아니면 여유가 별로 안 나는데…’
슬슬 어둠에 물들어가는 숲속의 분위기는 여전히 을씨년스럽다. 시야가 좁아서 그다지 수색이 효율적일 것 같지도 않다.
애초에 에드 또한 이 어둠 속에서 숲을 거닐고 다닐 것 같지도 않다. 이 북쪽숲에서 먹고 자는 게 아닌 이상, 이 오밤 중에 숲을 나다닐 이유는 또 뭔가.
그냥 날 밝을 때 다시 찾아와 보자. 그렇게 결심하고 클레어는 발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 사사삭
오솔길 너머에서 풀숲이 흔들리는 소리에, 클레어는 헛숨을 삼키고 얼른 근처의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혹시나 숲을 거니는 야생 동물인가 싶어서 고개를 내밀어 보았더니, 그 안에서 나온 건 소문의 몰락귀족 에드였다.
한 쪽에는 피가 줄줄 흐르는 새끼 사슴의 시체를 겨드랑이에 끼고 있다.
그리고 반대 쪽 어깨에는…. 기절한 인간의 몸을 들쳐매고 있다.
‘뭐… 뭐야 저게…!’
후욱, 후욱.
힘에 부친 듯 숨을 몰아쉬는 에드의 호흡소리는 이미 야수의 것이다. 어둠 속에서 그의 안광이 일순 빛난듯 하다.
클레어는 아연실색하여 숨을 집어삼켰다.
분명 저 소년이 어깨에 들쳐 매고 있는 것은… 글래스트 교수조차 한 수 접고 들어가는 희대의 천재 루시 메이릴이다.
하릴 없이 소년의 손에 제압되어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항의 의사조차 없다. 완전히 굴복한 모습이다.
‘루시… 분명 루시 학생이잖아…!’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학사 교수진 중에 단 한명도 없다.
대마법사 글록트나 대현자 실베니아에 비견될 정도로 위대한 아카데미 교장, 오벨.
그런 그 조차도 전력을 다해야 루시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할 정도다.
그런 말도 안되는 재능을 타고난 소녀가 바로 루시 메이릴이다.
그런 소녀를 한 손 만으로 제압해서 들쳐맨 채… 숲 사이로 사라져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클레어는 제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조차 못했다.
이건 좀 더 파고들어야만 한다. 역시 본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난… 정말로 탐정의 재능을 타고 났을지도 몰라…!’
바로 그 글래스트 교수조차 놀라서 나자빠질만한 소식을 안고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눈에서 불을 밝히며, 클레어는 에드의 뒤를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