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46)
현자의 봉서 쟁탈전 (1)
평화로웠던 일상이란 이미 지난 봄가을과도 같다. 추운 시기가 오고 나서야 온화하고 청명했던 지난날이 얼마나 복스러웠는지 깨닫게 되는 법이다.
사실 하루하루 강행군을 하고 있는 내 입장에선 그리 온화한 나날이였다고 표현할 수도 없으나, 처음 생존 생활을 시작했을 때에 비하면 꽤나 상황이 나아진 와중이다.
몸을 뉘일 오두막이 있고, 저장고에는 고기와 채소, 향신료 따위가 제법 축적되어 있고, 땔감도 꽤 쌓여있다. 당장 배곯은 상태로 노숙해야 되는 상황은 탈출한 셈이다.
어느 정도 안정된 이 삶에 일어난 파문은…. 발신인이 다른 세장의 편지에서부터 시작된다.
*
학사 커리큘럼도 슬슬 따라갈만 해졌다.
마법 재능이 그리 출중하지 않은 몸뚱이로도 평균 이상의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특히 필기과목에서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서, 슬슬 조교들 사이에서는 이름이 돌기 시작하는 것 같다.
단순 암기와 이론 배열 수준의 수업은 시간과 노력을 때려박으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잠을 줄이고,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반복 숙달하다 보면 억지로라도 머리에 쑤셔넣을 수 있으니 마법적 재능과는 완전 별개의 문제다.
단련 또한 제법 진전이 되었다.
이미 체력은 많이 붙어서 일반적인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생각해보아도 전혀 꿀리지 않을 정도다. 약골에 멸치였던 봄에 비하면 감동스러울만한 발전이다.
반면, 전투계 스킬은 여전히 지지부진 하지만… 보조해줄만한 수단이 잔뜩 생기긴 했다.
[ 새로운 완성품 ]예식용 단검 : 폭성 예식용 단검에 정령식을 부여해 폭발계 마법을 각인시킨 단검.
일정 거리 안에서 각인된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다. 미리 각인 시켜놓은 만큼 발동 속도가 매우 빠르고, 마력 효율이 뛰어나다.
주입된 정령식 : 정령계 마법 – 폭성 ( 하위 불 정령 머그 )
마력 축적 가능량 : 중 감응 거리 : 좁음 제작 난이도 : ●●○○○ [ 제작을 완료했습니다. 제작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
단검의 표면을 타고 불타오르는 듯 한 문양이 빛을 발하고 있다.
처음 생존 생활을 시작한 뒤로 긴 시간을 함께한 예식용 단검이다. 정이 잔뜩 든 단검의 날을 세워두고, 이런저런 각인까지 새겨두고 나니 뿌듯함이 물씬 밀려올라왔다.
[ 정령식이 꽤 부드럽게 잘 스며들었군요. 술자의 손을 잔뜩 탄 장비일수록 그 효율이 좋아지는 법이니, 긴 시간을 함께 해온 단검이라는 게 여실히 느껴집니다, 에드 도련님! ]어깨에 앉은 머그는 각이 딱 잡힌 목소리로 때려박듯이 이야기했다.
[ 이렇게 또 한 걸음 진보했군요, 에드 도련님! 기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경사입니다! 이 불초 머그, 기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노래 한 곡 뽑겠습니다! 퓰란 지방에서부터 구전으로 전승되어 온 양치기의 노래… 으악! ]나는 머그의 날갯죽지를 휙 잡아서, 옆에 있는 나무 등걸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만히 째려보고 있자, 머그가 불편한지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 에, 에드 도련님! 잘못했습니다! 이 불초의 몸, 죗값을 치르고 싶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부끄러운 것은,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부디 그 죄를 제게 잘 일러주시면, 진심으로 반성하고 시정하여 발전된 모습을…]“야, 말 놔라.”
[ …예? ]확실히 예니카의 정령들 중에서도 엄선되고 엄선된 머그이니만큼, 하위 정령 치고는 대단히 훌륭했다.
마력 감응은 어찌나 능숙한지 도련님 도련님 노래를 부르면서 순식간에 정령식을 각인하고, 사고도 유연하고 행동도 날렵하여 사냥에도 도움이 된다.
난로로서의 활용 가치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사회생활도 잘하니 뭐 백점 만점이다.
그래도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고 하면, 지나치게 깍듯하다는 점이다.
“말 놓으라고. 듣는 내가 다 불편하잖아, 진짜.”
[ 그, 그럴수가! 그럴 순 없습니다! ]“왜?”
본디 정령사와 정령 간의 관계는 상하관계라기보단 단순 계약 관계다.
그런 것 치고는 예니카를 대하는 하위 정령들은 무지하게 깍듯한데, 그건 예니카가 이례적일 정도로 막대한 힘을 가진 정령사이기 때문이다.
유체 정령에서 벗어나 하위 정령의 길에 들어선 정령들은, 정령사와의 계약을 통해 마력을 제공 받아 제 위상을 높여 나간다.
유능하고 감응력 높은 정령사와 계약할 수 있다면… 오히려 정령 쪽에서 감사하고 고개를 숙이는 게 관례인 것이다. 따라서, 예니카같이 막대한 감응력을 지닌 정령사와 대등한 관계에 있으려거든 그래도 고위 정령 급은 되어야한다.
예니카가 항상 수많은 정령에 둘러싸여 있는 이유는 단순히 정령을 끌어들이는 체질인 것도 한 몫 하지만… 결국 타고난 그 감응력 자체가 정령들에겐 한없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위정령에 이르러서는 무려 그 예니카가 나 같은 것과 계약을 해줬다는 사실 자체가 감지덕지한 것이므로… 당연히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허나 나는 아직 여정의 초입에 들어섰을 뿐인 정령사이니, 굳이 이렇게까지 깍듯하게 대할 필요가 없다. 굳이 쓸 데 없는 권위만 잔뜩 세웠다가 교감에 문제만 생길 가능성이 크다.
“자, 불러봐. 에드. 딱 두글자만.”
“애초에 좀 이상하지 않냐? 이렇게 철저하게 존대할 이유도 없고, 또 나랑 계약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면접이니 선출과정이니 호들갑을 떠냔 말이야.”
[ 어… 음… ]정곡을 찔렸는지, 머그는 날개를 푸드덕 대며 말끝을 흐렸다.
“뭐 따로 약속 받은 거 있냐?”
[ 그, 그건… ]“시원하게 다 털고 가자. 우리 하루 이틀 볼 사이 아니잖아, 그치?”
그렇게 말하고 가만히 머그를 내려다 봤다.
머그는 움찔 움찔 몸을 떨더니,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 아이고, 에드 도련님! 숨겨 무엇 하겠습니까! 에드 도련님과 계약해 그 능력을 인정받으면, 예니카 아가씨의 정제된 마력을 다른 하위 정령에 비해 거의 갑절은 보장 받을 수 있으니… 결국 출세길을 빨리 앞당기기 위해서입니다…! ]“…”
혹시나가 역시나다.
[ 그렇습니다! 에드 도련님을 향한 넘쳐흐르는 이 존경심과 충성심은 순수한 경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 더럽고 미천한 불초의 몸에 아로새겨진 출세욕 탓입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래… 솔직하게 털어놓는 건 좋네. 더 털어놓을 건?”
[ 그 외에도… 학사에 도는 평판을 수소문 해본 결과, 권위적인 기질이 강하다는 말이 자주 들리기에… 그 비위를 맞추기 위함이었습니다… ]“역시 그런가.”
나는 정령식이 잘 각인된 단검을 들어 올려 보았다. 이러저리 돌려보고, 가볍게 한 두 번 휘둘러보았지만 평소에 휘둘렀던 감각과 별로 다를 게 없다.
본디 정령식 주입이 미숙하면 장비 자체에도 영향이 가서, 괜히 더 무거워지거나 가벼워져 다루기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허나 머그를 이용해 진행한 정령식 주입은 깔끔하게 잘 마무리 되어 이렇다 할 영향이 보이진 않는다.
그대로 단검을 휙 던져서 주변 나무 등걸에 꽂아 넣었다.
– 쾅!
그리고 연결된 정령식에 아주 약간만 마력을 밀어 넣자, 자그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 정도 마력으로 이만한 폭발이면, 작정하고 밀어 넣으면 소형 폭약 정도의 역할은 할 수 있을 터다.
약간 피어오른 연기가 흩어지자, 박혀 있는 단검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흠 하나 없이 말끔하다. 화염 내성까지 잘 부여되어 폭발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다. 마무리까지 깔끔하군.
“뭐, 솔직하게 다 말해줘서 고맙다. 뭘 그리 죄송하다고 빌빌 기고 있냐.”
사람을 사귄다는 행위에 순수성이 지켜지는 것은 딱 초등학생 때까지라고 하지 않나. 어차피 사람 철들면 누군가를 대하는 데에 크든 작든 사심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인간관계에 철저한 순수성을 요구하는 촌스러운 사고는 진즉 졸업했다. 결국 중요한 건 실력과 태도다.
정령식 자체도 깔끔하게 잘 각인되었다.
나랑 계약하기 전에 나에 대한 평판을 수소문 해본 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얌체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또 다른 관점에서는 철저한 준비성과 성의를 방증하기도 한다.
나라는 인간을 미리 알아보고, 맞추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인 셈이니… 그런 점에서 보면 얼마나 철저한 타입인지 알 수 있다.
다소 속물 같은 점이야 과하지 않으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많다.
“알았으니까, 말 놔.”
[ 그, 그건… ]“다 이해 한다니까? 말 놓아도 된다니까? 네 사정이야 뻔하지. 안 그래?”
[ 에드 도련님…! ]머그는 감동을 받고선 억하심정이라도 쌓여있었는지, 복받친 어조로 이야기 했다.
[ 사실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크흑! 애초에 정령 위계가 높은 게 벼슬이냔 말입니다! 좀 더 일찍 태어났다고 무슨 텃세는 그리 부리는지…! 으흐흑! ]“…”
[ 그, 그래도 말은 못 놓겠습니다. 저는 이게 더 편합니다! ]나는 뭐라 말을 하려다 말았다.
신입사원이나 신병들에게 편히 있어라, 말 놔라 라고 말하면 오히려 그게 더 부담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다.
세상엔 불편한 게 당연한 입장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오히려 편하게 있으라고 강요하는 게 더 불편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 불편한 게 오히려 더 편한 상황이라니… 어려운 문제다.
뭐, 지가 알아서 하겠지. 보아하니 사회생활은 이미 만렙인듯하니, 알아서 잘 처신할 눈치 정도는 있는 것 같다.
나는 단검을 다시 뽑아서 가죽 검집에 집어넣은 후, 허벅지 부근에 끈으로 동여매었다. 그대로 똑바로 서보니 언제든지 단검에 손이 닿을 수 있는 자세다. 나쁘지 않은 모양새다.
[ 그나저나, 그 편지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당장 확인하실 거 아니면 제가 오두막에 가져다 놓을까요? ]머그는 캠프파이어 기준 반대쪽에 있는 나무등걸로 휙 날갯짓을 해 옮겨 앉더니, 거기 놓인 편지 세 장을 물고 흔들어 보였다.
하나는 사무적이고 깔끔한 형식의 봉투에, 인장 하나 없이 대충 접혀서 배달되었다. 학사의 조교 아니스가 손수 가져다주었다.
또 다른 하나는 나름 금테가 둘러쳐져있고 깔끔한 밀랍 인장도 하나 찍혀 예가 갖춰진 모습이다. 엘테 상회의 중년 직원이 배달해주었다.
마지막 하나는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고급 용지에 번쩍거리는 잉크가 휘황찬란하다. 페니아 황녀의 호위대장 클레르가 직접 전달해주었다.
“지금 확인해봐야지.”
그 내용은 제각기 달랐지만, 아무래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마지막 편지였다.
*
실베니아의 황족 숙소는 꽤나 으리으리한 저택이지만, 오필리스관에 비하면 그 크기가 비할 바가 못 된다.
허나 크기는 더 작은 주제에 건축비는 비슷하게 들어갔으니, 그 내부가 얼마나 호화로울지는 들어가 본 자가 아니면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말총머리를 늘어뜨리고 가볍게 개량된 갑옷을 입은 사내 하나가 황녀의 방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북쪽 숲에 다녀왔습니다. 지시하신대로 친서 전달 마쳤습니다.”
“고생했어요, 클레르.”
제 3황녀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의 호위대장, 클레르는 최근 들어 복잡한 심경이었다. 오로지 페니아를 위해서만 헌신하는 그에게 있어서 근래의 상황은 썩 달갑지 않다.
그의 주군이 처음 이 실베니아에 면학을 위한 여정을 왔을 때는, 오히려 달가운 기분이 들었다.
황실에서 지켜본 페니아 황녀의 삶은 겉보기에는 화려했으나, 그 속사정을 살펴보면 결코 부러워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클로엘 황제의 독자 린돈이 황위의 계승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뒤부터, 황녀들 간의 신경전은 지켜보고만 있어도 숨 막힐 지경이 되었다.
서리의 황녀 셀라하, 지성의 황녀 페르시카. 그 둘이 페니아 황녀를 보는 눈은 언제부터인가 의심의 눈초리로 가득해져있다.
본인이 아무리 옥좌에 욕심이 없다고 피력해도, 백성의 지지를 받는 페니아 황녀의 위치는 이미 언제든지 옥좌를 향해 손을 뻗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암투가 필요하겠지만, 페니아에게 줄을 대고 싶어 하는 유력인들은 널리고 널렸다. 계승 순위는 언제든지 ‘조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물론 페니아가 그런 수에 손을 댈 리는 없다. 그렇다고 의심받지 않을 수도 없다.
실베니아 입학은 그런 페니아 황녀의 진정성을 납득시켜줄만한 묘수였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황실을 떠나 학업의 길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것은 정말로 옥좌에 욕심이 없는 자들이나 가능한 짓이다. 최소 4년은 이 학교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실베니아가 어떤 곳인가.
무엇보다 배움의 미덕이 강조되는, 학업의 땅 아니던가.
멀고 먼 클로엘 황실의 권위적인 분위기에서 빠져나와, 몇 년 정도는 추억도 쌓고 소양도 기르는 시간이 될 거라고 생각했건만… 세상 일이라는 게 항상 의도대로 되지는 않는다.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황녀님. 주제넘은 질문이지만,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글쎄요.”
페니아 황녀는 백금발 머리칼을 한 데 묶어서 올리더니, 호화로운 소파에 몸을 묻고 한숨을 푹 쉬었다.
솔직히 인정하기로 했다.
클로엘 황실에서 뛰쳐나온 결단은 이 배움의 땅에서 학업을 닦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도피의 성질도 강했다.
틈만 나면 암투에 휘말려야하고, 권위를 세워야하며, 군주로서의 자질을 증명하지 않으면 도태되어야 하는 황족의 운명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평생을 그리 살아왔으니, 몇년 정도의 휴식은 괜찮지 않나 하고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몇년이면 그 지긋지긋한 황위 계승 분쟁도 알아서 끝나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나먼 실베니아까지 와서도 결국 이 모양 이 꼴이다. 사람이란 자고로 제 본성을 버리지 못한다. 그게 본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저는… 결국 평생을 암투 속에서 살아야 할 운명인가보다 해서.”
“황녀님.”
“굳이 위로할 필요 없어요, 클레르.”
간밤에 교장 오벨이 찾아와 털어놓은 말이 귓가에 아른거린다.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재정 상태는 이미 궁지에 몰려있다. 적어도 이번 분기의 각종 지불기일 만큼은 버텨낼만한 자금이 필요하다.
끝끝내 페니아 황녀에게까지 찾아왔지만, 당장에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페니아 황녀의 입김으로 어느 정도 자금을 끌어올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지불기일에 맞춰서 제대로 도착하리란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 명분 자체가 없다.
황실의 지원을 꽤나 받고 있지만, 결국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본질은 대현자 실베니아가 세운 사설 교육 기관이다. 그런 기관에 황실의 자금을 끌어 추가적인 지원을 넣으려거든, 그에 합당한 명분이 필요하다.
일개 제 3황녀가 황실의 곳간을 쥐락펴락할 수는 없을뿐더러, 지금은 몸마저도 황실과는 떨어져 있지 않은가.
결국 에둘러서 오벨의 부탁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실베니아만한 규모의 교육기관 예산이 왔다 갔다 하는 문제를 동정심만으로 처리할 수는 없었다.
거기서 끝났어야할 문제다.
“현자의 봉서 매각 계획은 결국 현실화 되겠군요.”
“예. 물론 학생들이나 학사 직원들의 반발이 심할 테니… 직접 매각이라기보다는 담보나 저당 형태가 되겠죠.”
“꽤나 간사하군요. 점유권은 내버려둔 채로 소유권만 일단 매입한 후, 물건은 순차적으로 받아갈 생각일 테지요. 역시 엘테 상회군요.”
점유와 소유의 개념은 확실히 다르다.
실베니아의 심장과도 같은 현자의 봉서가 돈에 팔려나갔단 소식이 들려오면 학사의 반발이 엄청날 테니, 일단 점유… 즉 물건을 보관하고 있는 행위 자체는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모든 관심이 차차 식어갈 때 쯤, 아무 명분이나 만들어서 트릭스관에 전시된 봉서를 잠시 창고로 옮긴다. 봉서 연구라는 명분이 가장 적당할 것이다.
그 봉서가 다시금 전시되는 날은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페니아 황녀님. 역시…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클레르. 괜찮으니까 들어가서 쉬세요.”
페니아 황녀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서는 어깨에 힘을 뺐다.
페니아는 암투의 세상 속에서 긴 세월을 살아왔다. 오벨이 가져온 자료들이나, 상황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보이지 않는 흑막의 냄새가 난다.
그녀의 직감이 향하는 곳은, 엘테 상회의 어린 실권자 로르텔 케헬른이다.
적갈색 머리를 내려 묶고 여우같은 미소를 흘리며 금화 사이를 노니는 그 소녀는, 절대로 솔직하게 속내를 내비치는 법이 없다.
페니아의 통찰안에 내비친 소녀의 본색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기망하고 갈취하는 사기꾼의 형상이다.
글라스칸의 소환식이 하늘을 뒤덮고, 학사의 건물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다소곳이 앉아 은은하게 미소 짓던 그 모습은 아직도 뇌리에 아로새겨져 잊히질 않는다. 가히 인간을 초월한 수준의 침착함이었다.
현자의 봉서 매입 계획 또한,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만다.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겁이 난다. 정말 무섭다.
페니아의 눈에 비친 로르텔은 금화를 뒤집어 쓴 악마다. 속이고자 하면 신조차도 속여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필시 엘테 상회의 꼭대기에 오르게 될 자다. 로르텔과 같은 자가 누군가의 아래에서 지시를 받고 행동하는 모습은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 소녀를 휘하에 두고 다룰 수 있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할까.
“굳이, 벌써부터 적대할 필요도 없겠지만…”
페니아 황녀는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조용히 말끝을 흐렸다.
어쨌든 현자의 봉서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학사와 상회 간의 협상은 철저히 내부 문제다. 굳이 페니아 황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니아 황녀는 깃펜을 꺼내서 친서를 써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 협상에 뛰어든 ‘또 다른 세력’.
그 제 3세력의 행보에 대해서만큼은,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에드! 에드!
물속에서 빠져 외부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어딘가 아련한 느낌이다. 누군가가 날 불렀나 싶다가도, 지금 당장은 거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머리가 좀 복잡한 이유는 내게 도착한 편지들 때문이다.
첫 번째 편지와 두 번째 편지는 그러려니 했다.
그리 대단한 이야기가 적혀있진 않았고, 그냥 알아두고 있으면 될 뿐인 내용이었다.
허나 세 번째 편지에 이르러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읽어야만 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식으로 굴러가는 정사 흐름에 이제 와서 당황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처음에 비해서 이야기가 많이 꼬인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일단은 상황을 주시하면서 엇비슷한 방향으로라도 나아가게 하면 될 문제다.
어쨌든, 테일리가 모든 일을 다 해결할 수 있는 흐름으로만 가면… 내가 따로 더 손을 쓸 필요는 없을테다.
이번 2막에서는 검성식의 두 번째 기술과, 성위 마법 저항력만 잘 갖추면 될 터.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이미 이야기의 흐름은 많이 꺾였다.
그 증거가, 내 손 위에 들려있었다.
“에드.”
이변의 원인을 찾아보자면, 엘테의 조기 실각이다.
황금왕 엘테는 본래 이번 현자의 봉서 쟁탈전 이벤트에서 로르텔에게 뒤를 맞고 실각 당할 운명이었다.
허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그 흐름은 꺾여,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 때 더 일찍 실각당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가?
엘테가 현자의 봉서를 매입하려 했던 것은, 더 비싼 값을 치르고 되팔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그에게 현자의 봉서를 조달해오도록 요청했던 자가 있었다.
그 자의 이름은… 애석하게도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들어보았다.
어째서 황녀가 내게 친서를 보냈는지도 순식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어찌보면 나는 그 내부자이기 때문이다. 그 자의 행보에 대해, 내게서 뭔가 청취해낼만한 정보가 없는지 찔러볼 심산이었겠지.
“에드!”
퍼뜩 정신이 들었다.
예니카가 울 듯한 표정으로 내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보아하니 내 어깨를 흔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헉.”
“정신 좀 차려봐! 왜 그래!”
“미안하다, 예니카. 내가 좀 골똘히 생각할 게 있어서, 정신을 놓고 있었네.”
언제 왔는지, 어깨에 머그를 올려놓은 예니카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얼굴 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게 의식됐는지, 헉 하면서 다시 뒷걸음질을 친 것이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야지! 열심히 사는 것도 좋지만… 건강이 최고란 말야!”
양 허리에 손을 얹고 뽈뽈대며 화를 내는 예니카에게 고개를 끄덕인 채, 나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그 언젠가 언급했듯, 엘테 케헬른에게 현자의 봉서 매입을 의뢰한 것은──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주 크레핀 로스테일러다.
영생의 마법을 연구하는 크레핀에게 있어서, 성위 마법을 다루는 현자의 봉서는 충분한 연구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허나, 엘테가 실각 당해버렸다면… 의뢰인이 직접 손을 걷어붙이고 나설 수밖에 없다.
“에드, 너 지금 표정 너무 안 좋아.”
예니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야기했다. 그럴 만 했다.
황녀가 보낸 친서에는, 과거 내가 몸담았던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주에 대해 물을 것이 많으니, 필히 황족 숙소로 찾아와 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덧붙여서 크레핀의 행보에 대한 의심도 몇 적혀있다.
본디 현자의 봉서 매입 협상이란 학사 – 상회 간의 줄다리기 구도였다.
허나, 학사 – 상회 – 로스테일러 가문 간의 삼파전 구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가주 크레핀 로스테일러는 ‘실베니아의 낙제검성’ 4막에서야 등장하는 보스다.
학사 내부 권력과 황실 권력을 동시에 쥔 페니아 황녀에 의해, 모든 악행을 폭로당하고 몰락하는 후반부 보스다. 그 공략 난이도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지금 시점에서 그를 제압할 방법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행스러운 점은 그의 목표가 단순히 현자의 봉서뿐이라는 것이다. 봉서를 손에 넣는다면, 그냥 쿨하게 돌아가겠지.
허나, 봉서를 손에 넣은 그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미지의 세계다.
모든 미래지식을 꿰고 있다는 정보 우위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클리어 가능 여부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애초에 정사의 차원에서도, 페니아 황녀와 크레핀 로스테일러 간의 대립은 벌써부터 다루어져서는 안 되는 시나리오다.
크레핀 로스테일러. 만약 그가 정말로 이번 봉서 협상에 한 다리 걸치려는 속셈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배제해두어야 한다.
그는 벌써부터 이야기의 무대에 올라와서는 안 된다. 후반부의 인물은, 후반부까지 그 이야기를 유예해 두어야만 한다.
“미안하다, 예니카. 괜히 걱정시켰네.”
나는 표정을 풀고, 다시 땔감 몇 개를 불에 던져 넣었다.
조용히 고개를 내리깔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예니카는 모닥불 맞은 편에 무릎을 안고 앉더니, 갑자기 뚱한 얼굴로 표정을 바꾸고서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 에드가 뭐 고민했는지 말해주기 전까지는 안 움직일래.”
고집 부리는 모습이 영 어울리질 않아서, 헛웃음이 나올 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