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48)
현자의 봉서 쟁탈전 (3)
– [ 상태 이상 : 탈진 ]
과로로 인한 고열, 소화불량, 만성피로, 편두통, 주기적 혼수 상태, 호흡 곤란, 시력 감퇴, 마력 부적응, 근육 이완 상태에 진입합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해 이상 상태에서 벗어나십시오!
–
사람 체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야 잘 알고 있다.
열심히 생존 활동 해가면서 졸업하는 그 날까지 단련하는 건 좋지만, 결국 건강 관리를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래서 꾸준히 몸 상태도 체크하고, 최대한 규칙적으로 생활하려 하고, 영양소도 다양하게 섭취하려고 노력했다. 허나, 절대적인 노동량이 많다는 점은 어쩔 수 없었다.
과로 증상이라는 게 개인차가 심하다곤 하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피로감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올 줄은 몰랐다. 어떻게 정신을 가다듬어보려고 하기도 전에 기절한 모양인지라, 저항조차 할 수가 없었다.
우리 모두 살다보면 버티기도 힘들 정도로 고열에 시달리는 경험을 해본다.
끙끙대며 누워 있다보면 아무것도 안하는데도 숨쉬기가 힘들다.
몽롱해진 정신을 어떻게든 휘어잡아보려 해도, 다시 우주 공간을 부유하는 느낌에 휘말려 들어가고 만다.
정신을 차렸다가 잃고, 잃었다가도 다시 정신을 차린다.
잠깐 잠깐 시야가 돌아와서 흐릿한 눈으로 풍경을 보면, 심각하게 얼굴이 굳은 예니카나 로르텔이 뭐라고 이야기를 주고 받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다가도 다시 정신을 잃어 몽롱한 세계에 빠져들면, 지나간 옛 기억 따위가 떠오른다.
실베니아의 낙제검성을 플레이 하던 그 예전에 기억, 2막 10장 현자의 봉서 쟁탈전과 글래스트 토벌전.
테일리의 입장에서 휘말려 들어갔던 2막의 최종장은… 분명 글래스트 교수가 테일리의 동반자 아일라를 납치하면서 시작된다.
멍하니 화면으로 보았던 그 최종장의 이야기가 아련한 정신 속에 되새김질 된다.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막대한 학술적 재능을 타고 나서, 그 누구도 쉬이 이뤄내지 못할 마법적 진보를 수십 번이나 이루어낸 희대의 학술가. 그 이름 대현자 실베니아.
세계의 섭리를 비틀어 꺾는 성위 마법의 힘을 연구해서, 실베니아를 다시금 부활시키려 했던 글래스트의 이야기는 똑똑히 기억한다.
학술가의 재능을 타고난 아일라의 육신에, 실베니아의 정신을 주입시켜 다시 한 번 진보의 시대를 열어젖히려 했던… 광인의 서사였다.
끝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본인이 구현해낸 마력탑 꼭대기에서 스스로 추락해 사망하는 자.
대체 그놈의 학술이 뭐고, 시대의 진보가 뭐라고… 연구 윤리고 자기 커리어고 다 내팽개친 채 그런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했는가. 당시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글래스트의 행보에는 물음표를 띄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긴, 그리 쉽게 이해받을 수 있으면 그걸 광인의 서사라고 부를 순 없었을 터다.
무엇보다, 모든 계획을 저지당한 그가 마력탑 꼭대기에서 떨어지기 전에 했던 유언이 좀 뜬금 없었다.
학술의 진전과 시대의 진보만을 꿈꾸고, 오로지 재능 있는 자의 발굴에만 일생을 바친 그가 죽기 전에 내뱉었던 마지막 대사.
성위마법으로 구현된 마력탑의 꼭대기, 양팔을 펼치고, 세계를 논하며, 끝끝내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털어놓았던 그 유언이… 뭐… 였더라…
“Zzzz……….”
눈꺼풀이 휙 하고 올라갔다. 마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젠 일어날 때가 되었다고 일러주는 것처럼.
온 몸이 무겁고, 특히 아랫배 부분이 뜨겁다. 하복부 부분을 덮고 있는 이 고깃덩어리는 무엇인고 하고 어렵사리 상반신을 일으켜보니, 제 머리통만한 마녀 모자를 얼굴에 올린 소녀 하나가 배를 깔고 드러누워 있었다.
“….”
“우음…. 너무 짜… 소금… 조금만…”
이 자식, 어떻게 잠꼬대까지 이렇게 아니꼬울 수가 있지???
평소처럼 통째로 들어올려서 집어 던져버릴까 하고 팔에 힘을 줬는데, 웬 걸 루시가 들리질 않는다.
루시는 외관처럼 무척이나 가볍다. 이게 사람이긴 한 건가 싶을 정도로… 휙 들어올리면 들썩들썩 들리는 수준이다.
루시는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인 듯하니, 아마도 루시를 들어 올릴 수 없는 건 내 몸 상태가 원인일 것이다.
완전히 쇠약상태다. 할 일은 잔뜩인데 몸은 한계에 몰려 있었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그대로 다시 몸을 뉘었다.
풍경은 익숙하다. 내 오두막이고, 이 이불은 새 것인 걸 보아하니… 엘테 상회의 비품일 것이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예상은 간다.
호들갑을 떠는 예니카와 로르텔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으음…”
내 움직임에 반응한 것인지, 루시가 멍한 눈을 휙 하고 떴다.
그리고 부스스한 눈을 몇 번 부비더니, 내 아랫배에 눌러 앉은 채로 상반신을 일으키고는 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는 멍한 얼굴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가, 이윽고 내뱉은 말이…
“…배고프네.”
“넌 진짜 먹고 자는 거 말곤 하는 게 없니?”
“축하해. 정신 차렸네.”
그리고는 남아도는 소매를 걷어 올리기 위해 허공에 손을 휙 내젓더니, 내 명치 언저리에 검지를 가져다 대고 꾹꾹 눌러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마력이 엄청 꼬여 있었어. 무리하게 마력 단련하면서, 정령술까지 익히고, 몸은 쉬지도 않고, 그걸 몇 달이나 반복하니까 이렇게 된 거야.”
“…”
“마력의 흐름은 잠들어 있을 때 조금씩 꺼져가고, 그 틈을 타서 다시 효율적으로 몸을 돌 수 있도록 재정립 되는 거잖아. 마력학 수업 때 배우지 않았어? 자기 직전까지 극한으로 마력 수련을 하고, 또 잠은 잠깐 잠깐씩 자는 듯 마는 듯 하니까 이렇게 되는 거야.”
“너, 수업시간에 맨날 잠만 잔 다면서 은근히 수업 내용은 다 알고 있네.”
“다 아는 내용이라서 안 들을 뿐인걸.”
내 명치를 꾹꾹 누르고 있는 루시의 손가락을 중심으로, 마력의 흐름이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루시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멍한 얼굴로 가만히 있을 뿐이지만, 이윽고 옷깃과 모자챙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괜히 마력 흐름 더 꼬이지 않도록 꾹꾹 누르고 있었어. 이제 좀 풀려가는 것 같네.”
“내가 자는 동안 계속 이러고 있었냐?”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닌데 너어무 지루해서 몇 번씩 잠들었어.”
루시의 손가락을 중심으로 다시금 몸의 청량감이 퍼져나가는 느낌이다. 기절해 있는 동안 간헐적으로 몸의 기운이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곤 했는데, 루시의 공덕이었던 모양이다.
“눈치도 보였구.”
“눈치?”
“으음… 네 옆에 있으면 자꾸 눈치를 주는 사람들이 있어. 귀찮단말야. 뭐어, 필요한 일이라 걔네도 뭐라 말은 못했지만.”
다시금 몸 사이에 편안한 감각이 스며들어서, 한 결 편안해졌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자, 이젠 몸에 힘이 좀 돌아오는 느낌이다.
“직접적인 체력 저하는 휴식을 취하는 거 말곤 답이 없지만, 마력적인 부분은 좀 해결이 됐을 거야.”
“야.”
공연히 루시를 부르자, 루시는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얼굴로 나를 지그시 내려다 본다.
연회색 눈동자는 정말 미동도 없는 명경지수 같아서, 오히려 그런 무미건조한 느낌이 나를 더 편안하게 했다.
“…고맙게 됐다.”
“아프지 마. 아프면 힘들어. 아파서 죽는 사람도 있어.”
그 대사는, 루시 메이릴의 과거사를 알고 있다면 쉬이 흘려들을 순 없겠지.
그녀에게 별의 축복을 전해준 대마법사 글록트.
비가 오는 날 밤.
할아버지와도 같았던 존재인 글록트가 침대에 누워 병사하는 모습을, 루시는 바로 옆에서 지켜봤던 것이다.
내가 며칠이나 혼수상태로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짧지 않은 시간이었음은 분명했다.
그 시간 내내 내 꼬인 마력을 눌러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주변의 누군가가 아프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쉬이 넘길 수 없는 역린이었던 것일테지.
제 아무리 육포 도둑에, 틈만 나면 주거 침입하고, 제 멋대로 구는 길고양이 같은 녀석이라고 해도… 그리고 일절 표정 변화가 없어서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을지라도… 그 속을 가늠해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일단은 고맙다는 말을 해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끼익.
“오, 선배님. 정신이 드셨군요. 오두막 난로를 사용해도 될지 모르겠어서 일단 바깥에 불을…”
그 때, 오두막 문이 열리더니 의외의 인간이 들어왔다.
목 언저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더벅머리를 쓸고서는, 활기찬 인사와 함께 들어오던 직스 에펠 슈타인은 잠시 굳었다.
내 아랫배에 올라타서 명치를 꾹꾹 누르고 있던 루시가 휙 고개를 돌려 직스 쪽을 봤다.
멍한 얼굴에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가만히 있더니, 모자를 챙겨서 순식간에 휙 하고 사라져 버렸다. 잠시간 남아있는 바람의 잔상만이, 방금 전까지 나태한 천재가 이 자리에 있었음을 방증하고 있었다.
“…”
직스는 앞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들어와서 목제 의자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선배님, 이게 대체 몇 명 째 입니까…. 하, 하긴. 강한 수컷이 암컷을 여럿 거느리는 건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니었을 터.”
“…”
“이것이… 문명의 개방감이라는 것인가… 나는 어쩌면 문명이라는 것을 너무 틀에 박힌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저대로 가만히 놔뒀다가 직스가 여자 여럿 손 대고 다녔다가는 엘카가 게거품을 물테다.
나는 일단 오해부터 풀어둬야 했다.
*
“예니카 선배님은 안 그래도 학기 초에 병결이 잔뜩 쌓여있는데, 더 수업에 빠지면 위험한 상황이라 일단 학사로 보냈습니다. 로르텔은 상회 일을 미루고 미루다가, 더 미룰 수가 없어서 생활동으로 갔고요.”
“그래. 근데 너는 어쩌다가 오두막에서 내 병간호를 하게 된 거냐?”
“로르텔이 찾아와서 부탁했습니다. 근데 제가 병간호 같은 섬세한 일은 좀 무디거든요. 원래 사내놈들 보다는 그래도 여자들이 더 손재주도 좋고 섬세한 법이잖습니까. 그래서 엘카나 아니스 선배님, 혹은 클라라 선배님 같은 여성분한테 부탁 드려보면 어떠냐고 말은 해봤는데, 절대 목숨을 걸고 안 된다고 노래를 부르기에… 이렇게 됐습니다.”
직스는 투박하게 끓인 수프를 냄비에서 퍼내더니 내게 건네주었다.
그래도 그릇이랑 스푼은 들어 올릴만한 힘이 있어 한입 떠먹었다. 그다지 맛있지는 않았다.
투박한 실력으로 이런 저런 재료를 다 때려박아서 만든 느낌이었다.
“애초에 선배님이 좀 학사 생활을 마이웨이로 하시잖습니까. 별로 선배님이랑 알고 지내는 사람도 많이 없고, 그 중에서도 협조해줄 만한 사람 찾다보니 제게로 온 것이지요.”
“그래. 귀찮았을텐데 고맙게 됐네.”
“별 거 있습니까. 그냥 방에서 쉬고 단련할 거, 여기 캠프에서 한 것 뿐입니다. 선배님이나 몸조리 좀 잘하십시오. 처음에 예니카 선배님 표정 보고 무슨 장례식 치르러 온 줄 알았습니다.”
직스는 한숨을 푹 쉬더니, 부지깽이로 불을 툭툭 건드렸다.
“뭐, 지병 같은 게 있으신 것도 아니고 그냥 무리하신 거니 호들갑까지 떨 일은 없겠지요. 그냥 며칠 푹 쉬면 나아질 겁니다. 당분간은 몸에 힘도 잘 안 들어 오실텐데, 그냥 이 기회에 수업도 좀 쉬십쇼.”
“그래. 나도 몸 관리를 좀 안일하게 하긴 했어. 괜시리 주변 사람들한테 걱정만 끼치는 것 같아 마음이 좀 안 좋긴 하네.”
“뭐, 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 그리 마음 쓸 필요도 없습니다. 건강 회복에나 정신을 집중하시면 되겠죠.”
솔직히 말해서 무진장 맛이 없는 스프였지만, 직스 말마따나 몸에 영양소를 조금이라도 더 밀어 넣어야 했기에 억지로 스푼을 계속 움직였다.
일단 그 와중에도 확인해야 할 것들은 확인해 두면 좋을테지.
“그러고 보면… 연금부 학생들이 학회 몰래 만드라고라를 양산하다가 사고를 쳤다고 하던데.”
“아, 엘비라 그 말썽쟁이 녀석… 결국 테일리랑 클레비어스가 일 커지기 전에 해결했습니다. 학사 쪽까지 일이 넘어가진 않았지요.”
2막 5장 ‘연금부 학회 탐색’은 잘 마무리 된 모양이고.
“텔로스 교단 쪽에서 처리한 마물이 학사 지하수로에 숨어들어왔단 소문도 들리던데.”
“그건 저랑 테일리가 처리해뒀습니다. 아일라가 실수로 지하수로에 팬던트를 떨궈 버리는 바람에 찾으러 들어갔다가, 우연히 마물족을 만나서 처리했지요. 근데 그런 소문이 돌았었습니까?”
2막 7장 ‘지하수로의 악마’ 에피소드도 별 문제없이 지나간 듯하다.
그 때 그 때 들리는 소문이나 외부적 상황 변화로 이런 사건들은 해결이 됐겠군, 하고 유추 할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당사자에게 직접 전해 들으니 안심이 됐다.
그럼 이제 큼직한 사건은 현자의 봉서 쟁탈전만 남은 건가 싶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고보니, 문득 제일 먼저 확인했어야 할 사실을 아직까지 확인하지 않았단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나 며칠 정도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냐?”
그래봤자 하루 이틀 정도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질문을 던졌으나, 직스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볍게 대답을 해주었다.
“오늘로 열흘 째군요. 다들 선배 깨어나신 거 보면 자지러질겁니다.”
“뭐?”
“그래도 오늘 중에는 얼굴을 못 보겠지만요. 예니카 선배는 이 시간에 학사에 계셔야 하고, 로르텔은… 내일 준비해야할 중요한 협상이 있다고 어렵사리 자리를 뜨던데요. ”
현자의 봉서 매입 협상.
그게 바로 내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잠시간 헛숨을 집어삼켰다.
아직 제대로 된 상황 파악도 끝나지 않았다.
내가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판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도저히 알 방도가 없다.
“야, 직스. 로르텔한테 말 좀 전해줄 수 있어?”
“예? 급한 겁니까?”
“그래…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시간이 충분했다면 이것저것 다 고려해보고 최대한 안정적인 방법을 강구해보겠지만, 당장에 상황이 들이닥쳤다면 일단 되는 방법은 다 동원하는 수밖에 없다.
“그… 내가… 가지고 싶은 게 생겼다. 그거 하나만 있으면 정말… 어떤 부탁이든지 들어줄 수 있을 거 같다… 정말 뭐든지…”
“…갑자기요?”
*
협상단 소집.
오찬.
현자의 봉서 상태 확인.
매입 방식 확인.
각자의 호가(呼價)를 양피지에 적어서 취합한 후,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자가 매입.
‘감응자’ 이관 작업 진행.
이후 해산.
현자의 봉서 매입 협상, 그 진행 순서에 대한 보고 서류를 다 읽자, 페니아 황녀의 손에 있던 종이는 불타서 사라져버렸다.
어쨌든 현자의 봉서가 매각된다는 사실은 아직까진 공론화 시키고 싶지 않을 것이다.
“…”
페니아 황녀는 참관인 신분으로 협상 현장에 참가하게 해줄 것을 학사에 요청했다.
황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집단 간의 매입 협상에 황녀가 입회해야할 필요성은 없지만, 황족의 청이니 만큼 학사는 들어주었다. 명분이야 만들면 생기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 정도 액수의 돈이 왔다갔다 하는 협상에는, 공신력 있는 입회인의 참관을 동반하는 경우도 많았다. 무려 황족이니만큼, 그 공신력이란 혈통의 무게만큼이나 무겁다.
현자의 봉서 매입협상에 참여하는 자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애초에 그만한 돈을 지불할만한 집단이 많지 않다.
결국 쳐낼 곳을 다 쳐내고 남은 곳은 엘테 상회와 로스테일러 가문 뿐이다.
그 둘 간의 치열한 매입 협상을 상상했으나, 의외로 결판은 순식간에 날 것 같았다.
젊은 교장 오벨 포시어스는 꽤 현명한 방안을 생각해냈다. 아예 경매처럼 가격을 부르는대로 팔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매입가의 적정선은 밝히지 않는다.
엘테 상회와 로스테일러 가문. 두 입찰자가 종이에 입찰액을 써서 제출하면, 더 높은 가격을 부른 쪽에 팔겠다는 것이다.
“이건… 크레핀 쪽으로 입찰될 가능성이 크겠구나.”
그게 현재 페니아 황녀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유였다.
기본적으로 엘테 상회는 더 큰 이윤을 남기기 위해 ‘상품’을 매입하는 개념으로 이번 협상에 임하고 있다.
그러나, 로스테일러 가문은 뭔가 더 큰 목적이 있어서 현자의 봉서를 손에 넣고 싶어하는 것 같다. 차익을 남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큰 액수를 부를 가능성이 있다.
설령 이번 매입 협상에서 지더라도, 봉서의 소유주가 된 엘테 상회와 한 번 더 협상을 진행할 각오까지 하고 있겠지.
물론 적정가라는 게 얼마인지 모르고, 무작정 아무렇게나 큰 액수를 써낼 수도 없으니 서로 간의 신경전은 치열할 것이다.
“이런 방식을 하루 전에 알려주다니. 지금쯤 엘테 상회와 로스테일러 가문은 머리가 아프겠군요.”
“당연하죠, 클레르. 이런 걸 미리 알려줘버리면, 자기네들끼리 만나서 얼마를 부를 건지 미리 협상해버릴 수도 있잖아요.”
학사가 이득을 보려거든 상회와 가문이 ‘미지의 적’과 싸우는 느낌에 빠져야 한다.
상대가 얼마를 써낼지 모른다는 그 압박감. 얼마나 올려서 불러야 안정적으로 봉서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아야 한다.
“오벨 교장이 머리를 좀 썼군요. 괜히 협상을 질질 끌고 가서 묘한 소문이 퍼지는 것도 싫을테니, 이렇게 재빨리 입찰을 끝내버리는 게 여러모로 좋겠지요. 손해를 볼 가능성도 적고요.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식대로라면 크레핀이 봉서를 얻게 되겠네요.”
엘테 상회 쪽에서 현자의 봉서에 필요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진 않을 듯 하다.
“역시, 불안하네요…”
현자의 봉서를 손에 넣은 크레핀이 대체 뭘 하려고 하는 것인가.
역시 크레핀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게 너무나도 불안하다. 정체불명의 가주인 그가 무슨 심산으로 행동하고 있는지만 알 수 있어도… 좀 더 상황이 명확해질 것만 같다.
불행하게도 그 단서 역할을 해줄 에드 또한 열흘 가까이 혼수 상태에 빠져있으니, 지금 당장은 막막한 안개 속에 빠져있는 느낌이었다.
에드에게 직접 물어볼 수 없다면, 그 주변인물이라도 수소문 해볼까? 그런 생각도 했던 적은 있다.
에드와 가까이 지낸 사람이라면 에드의 속사정이나 뒷배경을 지나가는 말로나마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에드는 학사 생활을 할 때도 언제나 과묵하고, 수업과 실습에만 집중하는 스타일이라 인간관계가 그리 넓지 않다고 했다. 항상 바쁘고, 하루 하루 충실하게 살고자 정신없어 보이는 모습이였다고 한다.
페니아 황녀는 여전히 학사 벤치 한구석에 앉아서 한숨을 흘렸다.
“학사를 수소문 해보면, 그나마 에드 로스테일러와 친하다 할만한 사람은 2학년 수석 정령사, 예니카 페일로버 뿐이라고 하더군요.”
옆에서 가만히 서있던 클레르가 진언을 했다.
“그녀를 호출해볼 수는 있겠습니다만,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이미 저번에 학사를 거닐다 한 번 만난 적 있거든요.”
이 실베니아에서 수석 정령사 예니카 페일로버를 모르면 간첩이다.
글라스칸 사건 때도 한 번 엮였었지만, 그 이후 징계위원회 때도 페니아 황녀가 한 번 도와준 적이 있었다.
진심을 담은 감사의 편지를 보내고, 황족 숙소 앞까지 찾아와서 감사 인사를 건네던 그 연분홍빛 머리칼의 소녀는 인상이 깊었다.
모두의 사랑을 받고, 모두에게 사랑을 주는 그 소녀를 보면서… 한 편으로는 부럽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노니는 장소는 모두 꽃이 피어나는 것만 같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면 모두 화사하게 웃는다.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런 멘트로 끝나는 동화의 주인공과도 같은 소녀였다.
“일주일 쯤 전에, 합동 원소학 수업에서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소식을 물었던 적이 있어요.”
다만, 에드 혼절 이후.
학사에서 마주쳤던 예니카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페니아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어떠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평소처럼 화사하고 발랄한 모습으로 학사를 노니던 예니카였으나, 유독 페니아 황녀에게는 살가운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겉으로 티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페니아 황녀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그 원인이라 할만한 것은…. 결국 뻔했다. 로르텔과 마찬가지였겠지.
학사의 모두를 사랑하는 그 천진난만한 소녀조차도 어쨌든 페니아 황녀의 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사실에, 페니아 황녀는 사뭇 숨을 집어 삼켰다.
가을 하늘은 드높고도 청명한 와중이었다.
“뭐든지?”
정신없이 바쁜 시기였다. 한 번쯤은 오두막에 에드의 상태를 보러 가고 싶었으나, 상회에 잔뜩 쌓여있는 업무가 로르텔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한쪽으로 머리를 묶어 내리고 한숨을 푹 쉬던 로르텔은, 의외의 방문객에게 차를 한 잔 내주었다.
“뭐든지라니, 에드 선배님이 그런 위험천만한 말을 하실줄은 몰랐는데.”
“내 말이 그 말이다, 로르텔. 네 본성을 뻔히 아시는 분일텐데.”
응접용 소파에 앉아서 차를 들이키던 직스는 덩달아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안 그래도 격무에 짓눌려 있던 로르텔은 어깨를 바로세우고, 그 요염한 미소를 양껏 흘렸다.
“뭐든지라. 상인을 상대로 뭐든지 해준다는 말을 꺼내시다니… 어울리지 않는 실수를 하셨네요, 에드 선배님.”
차분하게 어둠이 내려앉는 응접실에서, 로르텔은 음흉하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꾹 내리깔았다.
대관절 무슨 상상을 하는 것인지…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피식피식 흘러나오는 푼수 같은 웃음이, 지켜보고 있던 직스에게는 사뭇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막 병상에서 일어선 에드를 걱정하던 얼굴이 선명하건만.
‘엘카는 순수해서 참 다행이야.’
문명의 세계란 이다지도 불가해하고, 또 무서운 것이었다.
협상의 때가 온다.
애석하게도 모든 키를 쥐고 있는 게 오두막에 드러누워 있는 한 소년이라는 사실은, 지금 시점에선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