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53)
글래스트 토벌전 (2)
이렇게 나의 남방대륙 마법견문록은 끝을 맺는다.
세상을 둘러보고나니 미처 깨닫지 못한 마법의 진리가 참으로 많았다. 대마법사라는 호칭이 무색하다.
역시 마법이란 학문은 대양처럼 넓고도 깊어 이 늙은이의 흐릿한 눈으로는 그 윤곽을 그리기조차 힘들다.
학문의 깊이를 섣불리 가늠하려 들지 말라는 실베니아님의 깊은 뜻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내가 집필하는 저서는 이 책이 마지막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세월이란 것이 참 무색하다.
한 때는 강철도 으스러뜨릴 것 같았던 손가락의 마디 사이사이가 주름살로 가득하다.
둘도 없을 은사님이자, 모든 학술가들의 우상인 대현자 실베니아님이 보신다면 폭소를 금치 못하겠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실베니아님은 내 기억에 아직 아리따운 미녀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그녀의 죽음을 보고 학술의 길에 뜻을 품은 앳된 꼬마가 어느새 황혼의 시기를 걷고 있으니, 무색했던 세월도 지금이 되어 돌아보니 참으로 파란만장하였구나.
스승을 잃었던 날 가슴을 좀먹던 그 슬픔도 시간 속에 퇴적되어 이제는 낡은 초상으로만 남았다.
그래도, 기나긴 삶을 살다보면 이따금씩 그리움이 얼굴을 내민다.
괜한 감상에 젖어들게 만드는 새벽녘 별빛을 바라보거나, 천천히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는 석양을 보고 있을 때면 그 감정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다.
그리움은 이윽고 사무치는 고독을 동반한다.
상실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때때로 이성을 마비시킨다.
섭리를 깨부수고 진리를 비틀어 다시 한 번 실베니아님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욕구가 불쑥 얼굴을 내밀 때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잃은 것은 잃은 것이다.
잃은 자는 강인해져야만 한다. 슬프게도.
그러니까, 강인해지거라.
내 삶의 마침표가 되어준 네게,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바친다.
루시.
– 『닫는 글』, 남방대륙 마법견문록 (글록트 作) 발췌
*
…문득 아무 이유도 없이 불길한 예감이 솟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좀 신중히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직감이 울부짖을 때는 대개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지금 같은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예시다.
“다, 당신이 왜 여기에….”
문이 열리고 비어있는 연구실로 들어온 소녀는 굉장히 익숙했다.
짧게 웨이브져서 내려오는 밤색 머리칼과 순진무구한 얼굴상이 한 없이 낯이 익다. 애초에 실베니아의 낙제검성을 플레이 해봤으면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얼굴이다.
언제나 주인공 테일리의 옆을 지키고 앉아 그를 지탱해주고 함께 성장해나가는 소녀. 시나리오의 메인 인물 중에서도 메인 인물. 뭘 하든 어떤 루트를 타든 절대로 빠지지 않고 그 존재감을 잃지 않는 사실상 메인 히로인.
아일라 트리스를 교수동 회의실에서 맞딱트린 순간, 오만 생각이 다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당신이 왜 여기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히익…!”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글래스트 교수의 호출에 의해 그의 개인 연구실에 왔지만, 아무도 자리에 없어서 가만히 응접용 쇼파에 앉아 있었던 와중이다. 내가 아일라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오해다.
나는 별다른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쇼파에 앉아 아일라 쪽으로 시선을 꺾었을 뿐인데, 아일라는 몸을 떨면서 뒷걸음질 쳐서 연구실 구석 벽까지 혼자 내몰렸다.
“…”
괴한이라도 만난 듯한 반응이다. 나 진짜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데 이건 좀 취급이 너무한 거 아니냐.
하긴… 최근들어 학생들 사이에서 평가가 한 단계 격상된 느낌은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라가 나를 상대로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줄 리는 없다.
그녀가 나를 적대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인 입학 시험 사건은 이미 열달도 더 된 사건이라 어느 정도는 그 화가 누그러졌을지도 모르나…. 그간 아예 접점이 없었던 것은 또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 때 실질적인 무력이 약한 아일라를 집요하게 약점삼아 공격하던 놈이다.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그녀를 약점으로 이용해먹고, 활까지 쏴댄 전적이 있다.
꼬우면 약하지 말던가… 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 어쨌든 아일라 입장에서는 나를 호의적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뭐, 내가 오만 생각에 빠진 이유는 그런 아일라의 태도 때문은 아니다.
바로 시기 때문이다.
현자의 봉서 감응식이 정말 코앞까지 다가왔다. 2막 최종장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은 이벤트다.
감응식 시작 시점에서는 이미 아일라는 글래스트에게 제압된 상태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감응식 전후로 아일라의 동선이 어떻게 되더라?
물론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떠올리기는 상당히 힘들지만… 대강 감응식 당시의 풍경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당장 앞으로 일어날 일이다.
학사 행정의 중심지인 트릭스관의 메인 로비에서 현자의 봉서 감응식이 진행된다.
학사 대표와 상회 대표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글래스트 교수의 주도 아래에 봉서의 봉인이 풀린다.
그리고 현재 감응자인 교장 오벨이 감응자 권한을 내려놓고, 로르텔이 감응자 권한을 이어받기 위해 연단으로 나선다.
그 때 전후로 폭발이 일어난다. 트릭스관과 봉서 진열대를 중심으로 미리 각인되어있던 온갖 법진들이 마력을 발산하며 로비를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그 사이에 감응자 권한이 비어있는 봉서를 글래스트가 탈취, 트릭스관 개인 연구실에 ‘시간 감옥’ 마법으로 제압되어있는 아일라를 데리고 지하수로를 향해 도주한다.
“야.”
거기까지 생각해보고 나니, 아일라의 동선에 자그마한 의문이 생긴다.
아일라는 봉서 감응식이 진행될 때 이미 글래스트 교수에게 제압당해 트릭스관 개인 연구실에 봉인되어 있었다.
감응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생각해보면, 슬슬 아일라는 제압되어 있어야만 했다. 저렇게 자연스럽게 학사를 노니는 모습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너는 여기 왜 왔냐?”
“저는… 그냥… 글래스트 교수님이 호출해서… 아니, 당신이 알 바는 아니잖아요.”
불길한 예감이 조금씩 현실화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뇌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약속 시간이 다 됐다. 슬슬 글래스트 교수가 개인 연구실로 돌아올 것이다.
귓가에 정신을 집중하자 복도 끄트머리에서부터 힘 없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학사 업무를 마친 글래스트 교수일 가능성이 컸다. 이제와서 복도로 뛰쳐나가 일대일로 그와 대면하는 건 악수일 가능성이 컸다. 구석진 곳에 위치한 이 연구실 쪽 복도엔 목격자가 되어줄 만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아일라가 있는 입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허벅지 춤에서 단검을 꺼내들자 아일라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휙 말았다.
“꺄아아악! 뭐, 뭣하는 거에요!”
나는 아일라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대로 입구 벽 언저리에 단검을 박아 넣고, 휙 몸을 돌려서 비어있는 연구실 쪽을 보았다.
네 평 남짓한 글래스트 교수의 개인 연구실은 책과 서류들의 무덤이다.
온갖 학사 행정 서류와 학술서, 개인 연구일지, 보급형 마도서 따위가 서로가 질세라 넓은 연구실을 꽉꽉 채우고 있었다.
그대로 연구실의 진열장 따위를 하나 하나 살펴보고, 글래스트 교수의 책상에 있는 서류들을 빠른 눈으로 훑어보았다.
서랍 한 켠에 있던 개인 연구 일지도 재빠르게 훑어보고, 그가 참고하던 서적이나 개인적으로 써내려간 메모들도 재빠르게 속독했다.
애초에 대부분이 아는 내용이었기에 읽는 것 자체는 순식간이었다. 상황 파악은 이미 90프로 이상 마무리 되어 있었다. 혹시 내가 아는 미래에 변동이 생기진 않았을까 체크하는 습관은 이미 습관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변수가 보이지 않는다.
대체 글래스트 교수가 나를 개인 연구실로 불러낸 이유가 무엇인가. 지금 당장은 그 원인을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지만, 아무리 봐도 시나리오는 정사대로 잘 흘러가고 있다.
이대로 무난하게 잘 흘러가서 글래스트가 테일리에게 토벌 당하는 미래 자체는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허나, 자그마한 균열이라도 있다면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야만 한다.
정황을 통해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판단해보면, 글래스트 교수가 아일라를 개인 연구실로 불러낸 것은 그녀를 납치하기 위해서다.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봉서 감응식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생각해보면 슬슬 행동에 옮겨야 하니까.
문제는 그 현장에 왜 나를 불렀냐는 것이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직감이 말한다. 내 신변 또한 그리 안전한 상황은 아니다.
– 또각 또깍 또깍
복도를 가로질러서 연구실로 다가오는 글래스트 교수의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져 온다.
“히이익… 히익… 도와줘…”
연구실 구석에서 눈물을 머금은 채 벌벌 떨고 있는 아일라가 벽을 타고 그대로 미끄러져 앉았다.
단검 하나 뽑아서 스윽 다가갔다고 저렇게까지 무서워할 노릇인가… 하고 생각하다가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니 충분히 그럴만 하다는 생각이 들고 만다.
거 미안하게 됐다, 나도 좀 급해서.
나는 글래스트 교수의 집무용 책상을 이리저리 들춰보고, 서랍들도 재빨리 다 열어봤다. 보이는 서류들을 죄다 펼쳐서 대각선 방향으로 읽고 집어던지고, 마도서들도 휘리릭 펼쳐 넘기면서 대충 무슨 내용인지 파악했다.
장식장을 열어제껴서 내용물을 쏟아내고, 처리 완료된 서류철들을 죄다 들춰보고, 공문들을 전부 훑어 본다.
알고 있거나, 별 거 아니거나, 이번 사건과 상관이 없는 내용들이 태반이다.
그렇게 마치 귀중품을 찾는 도둑처럼 서류들을 뒤져대고 있다보니, 서류 보관함 구석에서 서류철 하나가 눈에 밟혔다.
– ‘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 조사 기록 및 조치 현황 ‘
커다란 수정 구슬 아래에 깔려 있던 그 서류들을 펼쳐보니, 내가 오필리스관에서 저질렀던 일에 대해 조사한 흔적들이 가득했다.
글래스트 교수의 작품은 아니었다. 학사 측에서 이 서류를 처리한 자가 누군지 그 이름을 살펴보니, 아는 이름이었다.
– ‘어저께 클레어 조교수님이 북쪽 숲에 갔다던데, 혹시 만났어? 에드?’
문득 예니카가 일러주었던 정보가 뇌리를 비집고 제 존재감을 어필한다.
서류를 깔고 있던 수정구슬을 보아하니, 학사에서 사용하는 염사용 수정구슬이다. 지금은 그 마력 작용이 시효를 다해 아무런 풍경도 내비치지 않고 있지만, 이 수정구슬에 어떤 장면이 잡혔을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일의 경위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빠르게 판단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 쾅!
문을 열고 글래스트 교수가 들어와 있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교직원 복장에 새하얀 마법사 로브를 두르고 있고, 비쩍 마른 몸과 뻗친 머리는 여전히 까탈스러워 보인다.
“그, 글래스트 교수님!”
화들짝 놀란 아일라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공포에 떨던 몸을 가누며 얼른 글래스트 교수의 뒤에 숨었다.
“도, 도와주세요! 저 사람이 단검을 들고…!”
– 휘이이이이이익!
– 화아아아악!
마력 반응이 연구실을 가득채운다. 마치 우주공간에 와있는 것처럼 글래스트 교수의 옷깃이 부유하더니, 일순간 큰 압력이 몸을 덮쳤다.
“꺄아아아아악!”
그대로 나자빠진 아일라를 향해 글래스트 교수가 손을 뻗었다.
일반적인 마나가 본디 청명한 색을 가진 것과 달리, 성위 마법을 구사할 때 사용하는 마력은 불그스름하다.
진흙처럼 걸쭉한 마력의 감각이 아일라를 감싸고, 이내 성위 마법의 힘이 그대로 쓰러진 아일라를 눌러버렸다.
성위계 마법 ‘시간 감옥’
일단 시간 감옥에 의해 제압 당한 자는 마치 돌덩어리처럼 굳어 제 자리에 박혀 있게 된다.
특이하게도 그 효과가 끝나기 전까지는 외부에서도 어떤 영향을 줄 수가 없다.
밀어보고 긁어보고 돌로 내려치고 칼로 베어보아도, 지금의 아일라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가지 않는다.
“…”
글래스트 교수의 표정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마치 일상적인 일을 처리 하듯이, 그 다음은 너라고 선언하는 일조차 없이 내게 손을 뻗는다. 검붉은 마력이 글래스트 교수의 몸을 타고 올라, 이내 그 방향을 내게로 한다.
“머그!”
판단까지는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입구 언저리에 박아놓았던 내 단검이 각인되어있던 정령식 ‘폭성’을 발현한다.
본디 폭발 마법은 꽤 긴 시간의 영창을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미리 각인되어 있던 정령식은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을 내놓는다.
– 쾅!
“큭!”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대로 폭발 마법에 휘말린 글래스트 교수가 연기 속으로 묻혀 사라졌다.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에 방어 자세를 취한 것을 확인했다. 저거 한 방으로 제압됐을 리가 없다.
애초에 폭발의 순간, 소동이 커지지 않도록 소음 억제 마법까지 순식간에 발현해버렸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엄청난 반사신경과 순발력이었다.
어쨌든 저 쪽이 입구를 막고 있는 입장이니,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다. 나는 그대로 몸을 날려 글래스트 교수의 책상 밑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시간 감옥’은 직접적으로 성위계 마력에 몸을 대지만 않으면 효력이 없다.
기본적으로 저 검붉은 마나는 정말 다루기 미친 듯이 어렵고, 조금만 집중이 풀려도 흐트러져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재빨리 회피하면 절대 당하지 않는다.
“상황 파악이 무척 빠르구나, 에드 로스테일러. 대처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매끄럽군.”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일순 안광이 빛난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내 연구 자료나 학사 업무 처리 일지를 전부 훑어본 건가.”
내가 글래스트 교수의 서류들을 훑어 본 뒤 그의 의도를 헤아렸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미안하지만,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글래스트 교수가 어떤 행동 방침을 가지고 움직이는지는 진즉부터 다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불똥이 나한테까지 튈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움직임이나 대처에서 내 공격을 미리 예상하고 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허나 이상하군, 서류 몇 개 훑어보았다고 내 의중을 전부 헤아릴 수는 없었을텐데.”
“글래스트 교수님. 굳이 저를 제압할 필요가 있습니까?”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 채로 나는 손끝에서 발화 마법을 구현했다.
글래스트 교수가 연구실에 도착하기 전, 나는 서류들을 죄다 끌어모아서 연구용 책상 근처에 쌓아두었다.
지금 시점에서 뭐가 중요한 서류고, 뭐가 불필요한 서류인지 일일이 구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만한 양의 서류더미를 통째로 태워버리면 곤란한 것은 확실할 터.
사실 서류 좀 유실되는 게 그리 큰 일은 아니다.
서류 좀 태워먹었다고 당장 모든 계획이 와해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일에 차질이 생길 거란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당장 감응식이 오늘 내일인데 이런 식으로 일에 차질이 생기면 영 곤란하겠지.
그러니, 아주 미약한 수준이지만 이 서류들이 어느 정도 인질 역할을 할 수는 있을 터다.
물론 정말 미약한 수준이다.
수틀리면 서류들을 희생하고 나를 제압해버리면 그만이다. 허나, 글래스트 교수는 되도록 서류들의 피해가 없이 성위 마법으로 깔끔하게 나를 제압하고 싶을 것이다.
그 심리의 빈틈을 파고든다. 아주 약간의 망설임이 생겼다면, 그 순간 교섭의 기회가 피어난다.
“글래스트 교수님. 근거 없는 유추긴 하지만, 글래스트 교수님은 아일라가 가진… 성위계 마법에 대한 감응력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아일라를 제압했으니 목적은 이루신 셈입니다. 저까지 제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 입이 무거우니까요.”
“만약 그렇다면, 내가 자네를 이 연구실에 불러내지도 않았겠지.”
아일라만 있으면 모든 계획은 차질없이 진행되는 것 아닌가.
왜 굳이 나까지 불러내서 제압하려 드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내게는 뜻이 있다. 그 뜻을 위한 것이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도록.”
그런 두루뭉술한 말로 퉁치려고 하다니 너무한 것 아닌가. 뭐라도 좀 설명을 하든가.
하긴, 아일라를 제압할 때도 일언반구조차 없었으니 당연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제압당하면 아일라와 함께 글래스트 교수의 비밀 연구실까지 끌려가게 될 터.
글래스트 교수가 구사하는 마법들의 일람과 그 대처법은 지긋지긋하게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이 곳은 트릭스관 한가운데에 있는 연구실이다. 일이 커져봤자 좋을 게 없으니, 최대한 여파가 없고 규모가 작은 마법으로만 나를 제압하려 하겠지.
그렇다면, 글래스트 교수를 제치고 트릭스관을 탈출할 방법이야 떠오를 법도 하다. 아예 벽을 부숴버릴 방법까지도 생각하고 있자니, 문득 새로운 가능성이 머리 한 켠에 떠오른다.
…그냥 납치 당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역발상이었다.
‘시간 감옥’ 마법은 마력을 많이 잡아먹기 때문에 제한 시간이 명확하다. 거기다가 둘이나 제압해둔 상태라면 며칠 안에 마력이 동나버린다.
정사에서 그랬듯이, 현자의 봉서를 탈취한 뒤 나와 아일라는 비밀 연구실의 방에 가둬두겠지. 시간 감옥 마법도 해제해버린 상태로.
그렇다면, 별다른 대가도 없이 글래스트 교수의 비밀연구실까지 직행 버스를 끊어준다는 이야기 아닌가…?
설령 일이 잘 안풀린다 하더라도, 테일리 일행이 비밀 연구실까지 쳐들어와서 깽판을 쳐버릴 예정이다. 그 때를 틈타 챙길 거 다 챙겨서 도망쳐버리면 베스트 아닌가.
비밀 연구실 구조는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괜히 머리 아프게 수로에 들어가서 토벌대를 몰래 뒤따라다니며 예니카를 고생시킬 필요도 없다.
테일리의 스펙은 이미 충분하리만치 강하고, 토벌대 자체도 결코 미약하지 않을 것이다.
이거 그냥… 납치 당할까?
“흐음…”
또 다시 뇌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내가 도주하는데 성공한다고 한들 글래스트 교수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글래스트 교수의 본색을 본 나를 제압하겠답시고 뛰어다니느라 감응식 일정에 지장만 생길 가능성이 더 크다.
반대로 일부러 납치 당하는 것에도 리스크가 없진 않다. 내가 없는 사이에 일이 틀어져서 시나리오가 이상해지면, 실질적으로 조치를 취할 사람이 없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되나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이야기의 흐름을 확인하고 있지만, 일이라는 게 어떻게 꼬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쪽이 더 리스크가 큰지 잘 저울질하고, 결국 한 쪽을 취사선택 하는 수밖에 없다.
“괜한 저항은 하지 않는 게 좋겠군.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어서 생략하겠지만, 네게도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에드 로스테일러.”
그리 말하고 다시 한 번 검붉은 마력을 끌어내는 글래스트 교수가 눈에 밟혔다.
나는 조심스레 엄폐를 풀고 책상에서 벗어나, 글래스트 교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호오, 대적할 마음이 들었는가. 아니면 어떤 계획이라도 떠오른 것인가.”
글래스트 교수를 마주보고서, 나는 눈을 부릅 뜬 채로 가만히 서있었다.
피어오른 마력이 나를 향해 발사되기 시작한다.
*
– 휘이이이익!
글래스트 교수의 염동 마법에 의해 온갖 서류들과 마도서들이 제 자리를 되찾아간다.
어느정도 말끔하게 정리가 끝난 개인 연구실에는 완전히 굳어버린 두 사람이 있었다.
공포에 찬 얼굴로 바닥을 구르고 있는 아일라의 형상이 하나.
그리고 꼿꼿이 서서 글래스트 교수의 마법을 피하지 않은 채 정면으로 받은 에드의 형상이 하나.
글래스트 교수는 업무용 책상에 앉아서, 에드의 조사 기록을 다시 한 번 펼쳐보았다.
기록을 정리해온 클레어 조교수와 나누었던 담화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 ‘마법역사, 정령학 개론, 원소학 필기, 마물 생태학, 공통 마력학, 감응 원리 분석, 마도학, 마공학 개론, 약초학, 법진 개론, 상이 원소학…. 필기 분야는 전부다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군.’
– ‘맞아요! 그것도 2학년 들어서 하나 같이 성적이 수직 상승했다니까요! 실기 수업은 성적이 좀 애매하지만, 여전히 꾸준한 상승세구요. 전체적인 마력 자체는 아직 2학년 평균 수준에 약간 미달이지만, 성장하는 속도가 말도 안돼요. 보아하니 정령계약까지 한 모양인데, 과로로 쓰러진 게 이해가 되더라구요.’
조교수 클레어는 서류를 탁탁 쳐대며 흥분해서 이야기 했다.
– ‘저도 처음에 성적 변동 추이를 봤을 때 눈을 의심했어요. 그런 야생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로 학업에 성과를 내다니. 혼자 하루를 48시간으로 살고 있는 건가 싶었다니까요! 진짜로!’
클레어 조교수는 학사 본부 측에서 제공 받은 에드의 성적 자료를 훑고 있었다.
애초에 담당 학년도 아닌데다가, 학생들의 숫자도 한 둘이 아니기에 일일이 성적 변동 추이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을 순 없었다.
그러나 에드에게로 시선이 한 번 쏠린 것을 계기로 그에 관한 인적 사항을 체크해보고 나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클레어 조교수도 자기 관리에는 제법 일가견이 있는 편이다.
나사 빠진 사람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이 젊은 나이에 교수 직함을 달고 있다는 것 만큼은 사실이다.
그런 그녀이기에 에드의 일과나 생활 패턴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노력의 산물인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 ‘이건… 정말 죽을둥살둥 노력했다는 근거겠죠. 글래스트 교수님도 잘 아시겠지만, 에드 학생의 재능은 빈말로도 출중하다고는 못할 수준이거든요.’
어느새 클레어의 어조는 자그맣게 잦아들고 있었다.
– ‘얼마나 피를 토하는 노력이 있었을지는… 감히 가늠할 수가 없어요.’
– ‘흑막이니 뭐니 신나게 떠들어댈 때랑은 또 이야기가 다르군. 클레어 조교수.’
– ‘아, 아니 그건 그렇지만…! 기록이 이럴 줄은 몰랐죠…!’
글래스트 교수는 서류들을 덮어서 그대로 책상에 툭 던졌다.
그대로 의자에 몸을 묻은 채로, 시간 감옥에 의해 완전히 굳어버린 에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불길한 마력이 몸을 덮치는 그 순간이었건만, 눈 하나 깜박이질 않았다. 표정에는 일말의 불안감도 느껴지질 않는다. 글래스트의 마법에 당하는 순간이었던 주제에, 모종의 확신마저 느껴지는 모습엔 혀를 내두르게 된다.
온갖 고귀한 대접은 다 받고 자란 로스테일러 가문의 후손으로, 파문 당하기 전까지는 정말 왕이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허나 1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손에는 굳은 살이 가득하고, 몸에는 온갖 생채기 뿐이다.
호리호리하고 유약해보이던 몸에는 이미 잔근육이 가득해, 옷깃 위로도 그 형태가 어렴풋이 보일 정도다.
수정구슬 너머에서 보았던 그의 전투센스 또한 쉬이 넘길 수 없다.
전장을 조율하고, 상대를 철저히 분석하고,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승부에 나서는 그 방식은 타고난 재능만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자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능력이다.
그것은 약자의 전투 방식이다.
내가 상대보다 유약하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부를 포기하지 않고서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몸보다도 마음이 강해야만 한다.
생각나는 것은 ‘잃은 것’이다.
이제는 아물었다고 생각한 상처다.
전공을 세워 아버지의 이름을 드높이겠다고 외치던 딸이, 마물족 토벌을 위해 길을 나서던 그 뒷모습의 기억이 다시금 고개를 내민다.
“…”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하는 글래스트는 끝끝내 눈치채지 못한다.
─에드의 옷깃 아래로 튀어나와 재빨리 문 밖으로 날아가는 자그마한 박쥐의 모습.
기본적인 정령 감응은 갖추고 있는 글래스트 교수일지라도, 그 잠깐의 틈을 캐치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았다.
애당초 계획은 아일라만을 납치하는 것이지만, 갑작스럽게 에드까지 제압하는 것은 조금 즉흥적인 행동이었다.
그래도 에드는 인간관계가 그리 넓지 않고, 평판도 복합적인 인물이라 당장 사라졌다고 큰 소란이 일어나진 않을 터. 며칠 정도는 문제 없을 것이다.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 정도의 변덕은 아니다.
그리 생각하며, 글래스트 교수는 조용히 몸에 긴장을 풀었다.
모닥불 연기가 피어오른다.
북쪽 숲의 캠프. 모닥불 위에는 잘 끓고 있는 닭고기 수프가 시식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콧노래를 부르며 수프를 휘젓는 소녀 정령사와, 오두막 옥상 언저리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왜소한 체구의 마법사.
둘의 모습은 일상적인 것처럼 자연스러우나… 정작 캠프의 주인은 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시험기간도 가까워지고, 학기말이 되면서 할 일도 많아지니 귀가가 늦어지는 건 자연스럽다.
언제나 바쁜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그런 독백을 하며, 소녀 정령사는 멍하니 밤하늘을 쳐다본다.
그러고 있자니, 풀숲을 헤치고 불타는 박쥐 하나가 급하게 날아들어 소녀의 어깨에 앉는다.
절박한 모습으로 소녀의 귀에 뭐라 속삭이자, 조금씩 소녀의 움직임은 잦아든다.
바람이 불고, 숲의 나무들은 몸을 흔든다.
가을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