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54)
글래스트 토벌전 (3)
글래스트 교수를 만나러 간 아일라가 돌아오지 않는다.
교정의 한 구석에 앉아 샌드위치를 입에 우겨넣던 테일리는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물생태학 수업이야 내용 자체는 가벼운 교양에 가깝고, 그런 부분의 지식에 정통한 아일라이니 만큼 수업에 빠져도 시험을 치르는 데에는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소학 수업이나 전투 마법학 실습 때조차 교수동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것은 이상했다.
전투계 스킬에 대한 숙련도가 극단적으로 낮은 아일라다. 성실한 그녀가 자기 약점 되는 분야에 대한 수업을 무단으로 빠질 리가 없다.
“…기숙사로 돌아간 건가?”
시원스러울 정도로 길쭉길쭉한 양손검의 검집에 아리따운 보석이 잔뜩 박혀있다.
마법식이 잔뜩 각인되어있고, 마력이 담긴 보석들이 그 마법식을 보조하고 있는 구조였다.
뿐만 아니라 두르고 있는 장신구들 또한 여러 가지 부가 효과가 잔뜩 각인되어 있었고, 유용한 보조 스킬도 제법 익혔기에 이제 어디가서 열등생 소리는 듣지 않는다.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지만, 어쨌든 지난 1년간 충분히 유의미한 단련을 끝마친 와중이었다.
테일리는 식사하느라 근처에 내려놓았던 검집을 들쳐 매고, 몸을 이리저리 꺾어보았다. 검성식이 개방될수록 체력도 좋아지니, 다소 무리해서 수업 시간을 늘려도 몸 상태에는 문제가 없다.
“뭔가 바쁜 일이라도 생겼나?”
테일리는 그리 되뇌이고는, 제 갈길을 따라 걸었다.
이튿날 있을 현자의 봉서 감응식.
두 명의 학생이 글래스트 교수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소문이 테일리의 귀에 들어오는 건 시간 문제였다.
*
예고도 없이 눈이 휙 떠졌다.
숙면을 취한 뒤 맞이하는 아침처럼, 갑작스럽고 전조 없는 기상이었다.
살짝 멍한 느낌 때문에 잠시 정신을 못 차렸지만, 이내 정신을 잃기 전에 어떤 상황을 겪었는지 자각하자마자 억지로 이성을 부여잡았다.
“히익!”
재빠르게 정신을 회복하고 얼른 상반신을 일으키니 기묘한 신음성이 들려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석재로 된 천장. 그리고 시야를 조금 내려 주변을 둘러보면 같은 재질의 반질반질한 벽이다.
철제로 된 창살이 한쪽을 메우고 있다. 감옥 독방이라 하면 바로 떠오를 이미지의 공간에, 나와 더불어서 한명의 소녀가 같이 갇혀있었다.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감옥 벽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소녀가 목소리를 떨며 내게 외쳤다. 딴에는 방어 자세랍시고 잔뜩 몸을 말아대고 있지만, 공포에 떠는 그런 모습은 오히려 저항할 무력이 없다는 뜻을 방증하기도 한다.
정말로 내가 나쁜 마음 품은 범죄자라고 했으면 오히려 이보다 좋은 먹잇감이 없었을 것이다.
뭐, 겁이 많은 게 죄는 아니지만… 현명한 대처는 아닌 셈이다.
“아일라 트리스…. 인가…”
나는 찡하고 올라오는 두통을 누르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훑어내렸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주변 풍경을 다시 한 번 둘러보고, 창살 밖으로 보이는 것들도 체크했다.
아일라가 공포에 떨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맞은 편 창살 너머 다른 방에는… 괴물이 수감되어 있다.
하반신은 사자나 호랑이 형태를 하고 있지만, 상반신은 마물족 중에서도 덩치가 크고 우락부락한 오우거의 모습이다. 그리고 팔뚝에 솟아난 깃털과, 등 한쪽에 돋은 반쪽짜리 악마 날개, 잘려나간 한쪽 귀에선 푸르스름한 진물이 흐르고 있고.. 양팔 뿐만 아니라 온갖 종족의 다양한 형태의 팔이 허리 부근부터 등 부근까지 짐짝처럼 돋아나 있다.
지금은 잠들어 있기에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진 않지만, 겉모습만 해도 보는 이로 하여금 마른침을 삼키게 만드는 비주얼이다.
2막 7장 보스로 등장했었던 ‘지하수로의 악마’다. 지금은 글래스트 교수의 연구진에게 수거당해 마물학 연구에 쓰이고 있는 것이다.
교수의 부름에 응해서 연구실에 찾아갔더니 난데없이 공격받고 정신을 잃고, 그 뒤 깨어났더니 눈 앞 맞은 편 독실에 저런 괴물이 잠들어있다.
그리고 같은 방에는 웬수나 다름 없는 몰락 귀족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으니… 호들갑을 떠는 아일라의 반응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정신이 들었나. 에드 로스테일러.”
창살 건너 편에서 관리인 격으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대접이 좋지 않은 건 미안하게 됐군. 그래도 소중한 학생인데 말이다.”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이다. 원소학 연구를 하다 생긴 화상자국을 감추려고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그 외곽으로 슬쩍 드러난 상흔은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굽은 허리와 낮은 키, 잔뜩 빠진 머리칼 등등 세월과 스트레스의 상징은 그를 추레한 늙은이로 보이게 만들지만… 어찌됐든 글래스트 교수의 동업자 내지는 추종자 중에서는 가장 다재다능한 인간이었다.
성위학 연구가 쿰.
2막 최종장, 글래스트 교수의 연구실 페이즈에서 마지막 보스를 담당하는 인간이었다.
꽤나 까다로운 패턴을 가진 적인데, 어쨌든 회피해대면서 시간을 끌면 성위 마법의 마력에 알아서 잡아먹혀 자멸하는 인간이었다. 그 뒤로 지하수로의 악마가 다시금 연구실을 탈출하면서 글래스트 교수의 도주 시간을 벌어주는 시나리오였지.
“글래스트 교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꼭 필요한 인재들이니 반드시 철저하게 관리하라고 지시를 내린 와중이거든.”
“그렇습니까?”
“생각보다 침착하군.”
눈을 떠보니 글래스트 교수의 비밀 연구실이었다… 라는 전개 정도는 정신을 잃기 전부터 예측하고 있었다. 당연한 수순이었으니 당황할 것 까지도 없었다.
“아일라 학생처럼 꺼내달라고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말귀를 알아 듣는게 빠른가.”
듣자하니 아일라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곧바로 꺼내달라고 소리를 질러댔나보다.
고개를 슥 돌려 아일라 쪽을 쳐다보니, 몸을 움찔 떨며 다시 시답잖은 방어자세를 취한다. 내 쪽에선 뭘 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데. 피해망상도 저 정도면 병이다.
“뭐, 글래스트 교수님이 다 뜻이 있겠죠.”
내가 그리 대답하자 아일라는 물론이고 연구가 쿰까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아무리 글래스트 교수의 학술적인 성과나 능력에 대해 신뢰가 있다고 한들, 말 한마디 없이 제압해서 자기를 납치해온 놈을 상대로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정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딱히 나라고 해서 글래스트 교수를 믿는 건 아니고, 애초에 시나리오 말미에 몰락할 것이 정해진 인물에게 그리 대단한 신뢰를 주기도 뭣하다.
“어쨌든 나는 이 복도 끝에서 연구 자료 검토하면서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을 것이니, 괜한 생각은 품지 말도록.”
그리 말하고 쿰은 복도 끝으로 걸어나갔다.
고개를 빼어 복도를 슥 보니 역시나 내가 플레이 했던 그대로의 구조다.
복도를 가로질러 나가면 아마 마물족 연구실이 나오겠지. 글래스트 교수의 비밀 연구실 중에서도 꽤나 중심부에 위치한 장소다.
이런 깊디 깊은 곳까지 아무런 리스크 없이 들어올 수 있다니 동선이 많이 단축됐다.
이제 더 할 일은 없다. 그냥 가만히 갇혀 있으면 그만이다.
멍하니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보면 아일라를 납치당해서 빡친 테일리가 토벌대를 끌고 쳐들어와 연구실에 깽판을 쳐놓을 것이고, 그 틈을 타 적절히 탈출해서 영혼 도서관 쪽으로 가면 된다.
이 마물족 연구실까지 오려거든 영혼 도서관을 반드시 거쳐서 사서를 때려잡고 와야 하니, 테일리가 여기에 도착했을 때 쯤이면 도서관은 이미 초토화되어 있을 것이다.
뭐만 하면 동선을 방해하려 드는 영혼들린 마도서나 책장들도 조용할 테고, 멋대로 도서관을 거닐고 다니면 화를 내는 영혼 사서도 없을 터다.
아무런 방해꾼도 없는 곳에서 여러 마도서의 레플리카와, 마공학 제조식들을 닥치는대로 쓸어담으면 작전 완료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해야할 일? 처리해둬야 할 것? 아무 것도 없다.
….너무 꿀만 빨아서 양심이 좀 아플 지경이다.
“히익…. 이익….”
뭐, 벌벌떨고 있는 아일라와 한참을 같은 공간에 있어야 되는 건 좀 정신적으로 지치긴 하다만…
정말 글래스트 교수도 안타까운 판단을 하고 말았다. 하필 납치를 해도 아일라를 납치하다니.
저 여자는 이 세계의 주인공에게 총애를 받는 시한폭탄이란 말이다. 잘못 걸려서 연구실 개판 날 각오 정도는 했어야지.
그렇게 말하기에는, 또 글래스트 교수가 그런 사정까지 알고 있을 턱도 없기에 좀 불쌍할 따름이다.
“거기서 한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오면 소리를 지를거에요. 혀를 깨물 거에요. 가까이 오지마세요. 저… 정말이에요! 허… 허세 같아요?! 제가 모든 힘을 다 해 저항하면 당신도 멀쩡하진 않을 거에요! 움직이지 마세요!”
안 움직이고 있고. 한 마디도 안했고, 혀를 깨물든 말든 관심 없고, 그냥 멍하니 허공 쳐다보면서 생각 정리만 하고 있는데 아일라는 제발이 저려서 잔뜩 가시돋친 말들을 내뱉고 있는 와중이다.
내가 도끼눈을 뜬 채 쳐다보자 미약한 마력을 동원해서 조잡한 방어식을 구축해낸다.
이미 기초 원소 마법은 같은 학년 내에서는 거의 따라올 정도가 없을 정도로 숙련되었다. 저런 미약한 방어식은 대충 바람 칼날을 건성으로 발현하기만 해도 산산조각이 날테지만, 아일라는 부들부들 떨면서 최대한의 방어를 해내고 있었다.
이제와서 내가 널 적대할 마음이 없다고 말한들 별반 소용도 없을 것 같다.
굳이 어느쪽이냐 묻느냐면 나는 아일라에겐 호의적인 편이란 말이다.
실베니아의 낙제검성을 몇 번이나 플레이 했다. 모든 루트의 모든 시점과 상황에서 언제나 주인공의 편을 들어주던 그녀의 우직함과 진실된 마음을 수십 번도 넘게 확인했다.
오히려 기특해하면 기특해 했지, 굳이 적대할 건 또 뭐람.
상황과 입장이 이러하니 아일라가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해야할 말 정도는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안 잡아 먹는다. 과민 반응 하지 마라.”
그렇게 짧게, 팩트만 이야기하기로 했다.
“너한테 악감정 없다.”
“뭐…라고요…?”
감옥 구석에 걸터 앉아서, 한숨을 푹 쉬고 천장이나 쳐다봤다.
완전히 관심을 끊은 듯한 내 행동에 아일라는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동안 숨을 집어삼키며 나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불안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팔을 내렸다.
팔을 타고 흐르던 마력이 멈추자 그에 지탱 받던 방어식도 조금씩 희미해져간다. 애초에 아일라 수준의 마력으로 그리 길게 방어식을 구현하고 있을 수도 없으니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거짓말이잖아요.”
“너한테 뭔가 해코지할 마음이 있었으면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도 없지. 안 그러냐?”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장소. 아무런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아일라. 막대한 힘의 차이.
아일라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공포에 떨고 있었을 것이다.
“주접도 좀 작작하고, 괜시리 체력 빼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
그리고 나는 확신에 찬 어조로 아일라에게 이야기했다.
“기다리고 있으면, 테일리가 반드시 구하러 올 거야.”
“테일리요…? 당신이… 그 애 이름을 논할 자격이 있어요…?”
“없을 건 또 뭔데? 뭐 입학 시험 때 일은 좀 미안하게 됐다만, 그 땐 나름 사정이 있었다고 퉁쳐 줘. 글라스칸 사건 때도 도움 많이 준 것도 팩트잖아..”
“미안하게 됐다고요…?”
아일라는 혼란에 가득찬 눈으로 시선을 내리깔더니, 다시금 나를 응시했다.
“미안하다고 했어요…? 사과했어요? 지금 당신이…? 에드 로스테일러가?”
“사과 하나 하는 데에도 이리 의심을 받아야 하냐? 속고만 살았나 진짜.”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전 에드의 꼴을 생각해보면 저런 반응도 썩 이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거진 1년이나 시간이 지났다.
이제 작작하고 좀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라. 에드라는 인물이 개과천선을 했든, 파문 당하고 헤까닥 해서 정신 상태가 이상해졌든, 아니면 사실 원래는 이런 인물이었든… 알아서 생각하고… 예전처럼 대립각을 세울 맘은 없다는 사실만큼은 좀 받아들여라 이 말이다.
메인 시나리오만 안 틀어졌으면 너네들이 뭘 하든, 전봇대로 이를 쑤시든 말든 아무 관심이 없다 이 말이야.
“나는 못 믿겠어도, 테일리는 믿을 수 있지?”
“그… 그건…”
“그 녀석은 반드시 구하러 올 거야. 어떻게든 네가 납치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 비밀 연구실의 위치를 파악해서 다 때려 부수고서라도 널 여기서 꺼내줄 거야. 그러니까 괜시리 겁먹지 말고 좀 차분하게 테일리를 믿고 기다려봐.”
작전을 바꿔서 테일리의 이름을 들먹이니 조금은 표정이 풀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어적인 자세가 풀어지지는 않는다. 구석에 앉아서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 맹수를 앞에 둔 새끼 강아지 같아서, 화가 난다기보단 오히려 측은해지고 만다.
“저는 테일리를 믿어요.”
“그래. 잘 됐네.”
“하지만, 테일리가 구하러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또 뭔 소리냐.
아일라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 애한테 저는 짐덩어리만 되는 거 같아요. 안 그래도 테일리는 온갖 시련을 다 겪고 살아왔는데, 급기야는 제가 이런 데에 납치 당하는 바람에 목숨을 걸고 이런 괴물들이 잔뜩 있는 곳을 뚫고 들어와야 한다면… 차라리…”
“아일라 트리스. 너도 테일리를 쭉 지켜봐왔으니까 알겠지만, 그 자식은 시련이 오면 올수록 강해지는 인간이다.”
의 주인공 테일리 맥로어.
평생을 시련 속에서 살아가는, 하지만 그 시련이 있기에 비로소 강해지는 소년이다.
나였으면 그런 삶은 결코 원하지 않았겠지만… 뭐, 내 이야기 아니고 남 이야기니까.
“이것도 더 강해지고 나아가기 위한 시련이라 생각하고 그냥 걔한테 다 맡겨. 알았냐?”
“그건… 도움 받는 입장에서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당연히 고맙단 말은 해야겠지. 어쨌든 지레짐작으로 다 내려놓고 포기하면서 호들갑 좀 떨지 말라는게 핵심이야. 그냥 우직하게 믿고 있어. 그 자식은 널 구하러 올 거다. 알아들었지?”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나니 아일라의 방어 자세가 조금은 더 풀어진 모습이다. 이제 좀 그만 떽떽 댔으면 좋겠는데, 좀 괜찮아 지려나?
“에드 로스테일러.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나?”
“당신은… 테일리를 모욕하고 깔봤잖아요.”
“흠… 그렇긴 해…”
내가 알고 있는 에드라는 인간은 확실히 인간 말종이었다.
“그냥 그런 사정이 있었어. 너무 다 알려고 하지 마.”
설명하기 귀찮거나 설명할 수 없으면 아무렇게나 얼버무리면 된다. 굳이 나에 대해 구구절절 알려줄 필요도 없고 괜시리 깊이 연관되고 싶지도 않다.
그냥 제발 좀 조용히 앉아서 가만히 테일리나 기다리자. 쓸 데 없이 기운 빼지 말고.
나는 불필요한 말을 더 하고 싶지도 않아서, 그냥 그대로 앉아 입을 다물어버렸다.
납치 당하기 전까지 체크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체크했다. 아직까지 커다란 균열이나 비틀림은 없었다. 그냥 이대로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가만히 감옥 속에 앉아있자니 [ 에드 도련님! 몸 건강하십니까! 다친 데 없으십니까! 팔뚝에 긁힌 상처는 없으십니까! 마력 반응 때문에 탈력감 같은 건 안 느껴지 십니까!
시야는 멀쩡하십니까! 후각이나 청각에 별 다른 문제는 없으십니까! 팔이나 다리 끝 부분에 감각은 멀쩡하십니까! 노곤함이나 피로한 감각은 없으십니까! 얼굴이 누렇게 뜨거나 심장이 쿵쾅대거나, 맥박이 빨라지는 감각은 없으십니까! ]
기묘할 정도로 구체적으로 내 몸 상태를 물어보는 머그가 창살 사이로 나타났다.
[ 마력 반응을 쫓아 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에드 도련님의 정령 감응 수준은 아직 무난한 수준이기에 감지해내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 불초 머그! 잠시 모습을 보이지 않아 죄송합니다! ]깍듯하게 인사하는 머그가 뭔가 반가워서 손을 내밀었다. 이 자식 어딜 갔다 왔던 거야.
한 마디 한 마디 앙칼진 반응으로 방어해대는 아일라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피로하던 차다. 구출대가 오기 전까지 말 상대라도 되어줄 놈이 나타난 것 같아 환대해줬다.
“머그, 잘도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아냈네.”
[ 예, 저도 놀랐습니다! 설마 지하수로 깊은 곳에 이런 연구실이 있었을 줄이야! 크기도 이렇게 으리으리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 교수. 그 많은 급여를 어디다 쓰나 했더니 이런 짓을 하고 있었군요! ]자그마한 몸으로 날렵하게 날아다니면서 연구실 최심부까지 숨어들어온 것인가. 확실히… 유능한 정령이라는 예니카의 평가도 빈말은 아니었구나.
[ 트릭스관에서 제압당하셨을 때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다친 데가 없어 보여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 걱정해줘서 고맙다, 머그.”
“그. 그건… 정령…? 정령이에요?”
정령학에도 조예가 깊은 아일라다. 어느 정도의 감응력은 있는 것인지 머그의 모습을 보고는 반응해왔다.
그래도 머그와 소통을 할 정도로 충분한 감응력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머그의 말이 들리지는 않는 모양이다.
“에드 로스테일러. 당신 정령도 다를 줄 알아요? 분명 저번 학기까지만 해도 기초 원소 마법만 겨우 다루는 수준 아니었어요?”
“그게… 네 알바는 아니지 않냐?”
“그, 그건…”
이번엔 내 쪽에서 툭 쳐내자 아일라는 주눅이 들었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주눅이 들 때는 또 완전히 쫄아있으니,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할지 알 수가 없다.
“그, 그래도… 정령이라면… 다룰 수 있는 정령이 있다면 외부에 구조 요청을 보낼 수 있어요…! 정령을 다룰 줄 아는 학사 직원 분들이나 다른 교수님들에게 상황을 알릴 수 있다구요!”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쨌든 내가 굳이 변수를 늘리는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어떻게 둘러댈까 고민을 좀 해보던 차에, 대답은 머그에게서 튀어나왔다.
[ 걱정하지 마십시오! 에드 도련님! 이미 가장 믿음직한 분… 바로 예니카 아가씨에게 모든 상황의 전말을 전달해두었습니다! 이 불초 머그, 에드 도련님의 안전을 지킬 수는 없지만… 비상시에 보고 체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교육받아 왔습니다! ]“…뭐라고?”
[ 하하, 쑥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이럴 때에는 아주 침착합니다. 뭘 해야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는 메뉴얼화 된 규정을 끊임없이 암기하면서 완전히 체화시켜 두었습죠! 곧 있으면 예니카 아가씨가 구하러 오실 겁니다! 직접 구하러 오시든, 아니면 일행을 이끌고 오시든 어떻게든 구원의 밧줄이 내려올테니… 겁먹지 말고 침착하게 여기서 기다립시다! ]….뭐라고?
…이 자식이?
“…예니카한테 보고 했다고? 언제?”
[ 제가 수많은 마물들과 문지기 골렘, 연구진들의 눈을 피해서 여기까지 들어오는데 얼추 한나절은 걸렸으니… 지금으로부터 이틀 쯤은 지났겠군요! ]생각해보면 그랬다.
아일라의 납치가 끝나서 연구실에 가둬두었다는 이야기는, 봉서의 감응식이 예정대로 잘 진행되었고 시나리오 1페이즈에는 이미 돌입해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테일리의 구출극은 이미 현재진행형이라는 이야기다.
[ 예니카 아가씨의 그 뿔난 모습은 정말 아리따우시고 앙증맞으시지만… 그 분노의 차가움만큼은 진짜배기였습니다. 그러니… 금방 구하러 오겠지요! ]“에드 로스테일러… 당신 표정이 왜 그래요…?”
[ 뿐만 아니라 그 불여우 상인이나, 허구헌날 캠프에 들르는 그 마녀 모자 쓴 꼬마 마법사 까지 가세시킬 뜻이 있다고 하니…. 이 정도 쯤 되면 백만 군세를 얻은 거나 다름 없는 셈이지요!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에드 도련님! 이 불초 머그, 힘은 미약하나 발만큼은 빠릅니다! 하하하! 아하하하하하!]나는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뺨을 두어번 툭툭 두들겼다.
아….
“생각이 바뀌었어! 난 여기에 갇혀 있으면 안 돼! 나가야 해!”
[ 에, 에드 도련님?!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가지고!
상황이 급박하니 질책이나 호들갑은 일단 나중으로 미뤄둔다.
어쨌든 연구실의 구조와 핵심 기물의 위치는 훤히 꿰고 있다. 뭐가 어디에 있는지야 불보듯 뻔하다.
“잘 들어라, 머그…”
당장 이 웬수한테 딱밤이라도 후려갈길까 생각하다가 일단 침착했다. 감정에 휘둘려서 행동하지는 말자.
나는 머그에게 이런 저런 지시를 속삭였다.
[ 아, 알겠습니다! ]“이봐! 이보세요! 거기 복도 끝에 있는 연구원! 쿰!”
-쾅! 쾅! 쾅!
나는 잠시간 호흡을 정리한 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창살을 두들겨댔다.
갑자기 얼굴을 싹 바꿔서 창살을 두드려대는 모습에 아일라는 완전히 벙찐 얼굴이 되었다.
그런 거에 신경쓰고 있을 틈이 없기에, 나는 머그를 움켜쥐고 꾸욱 누르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안 돼! 여기서 날 꺼내달라고! 나 여기에 있으면 진짜로 안 돼! 이거 농담 아니야!”
“에드 로스테일러. 시끄럽다. 그렇게 떠들면 맞은 편의 악마가 깨어난다.”
반대 편에서 자고 있는 악마는 수면 마법을 이용해 의도적으로 재워둔 상태다. 그러나 절대적인 효능을 가진 마법은 아니기에 쿰이 주의를 주러 왔다.
“방금은 조용하고 시원스럽게 지금 취급을 받아들인 모습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소란을 떨다니… 역시 생각을 정리하고 보니 상황이 많이 무서운가?”
“그런 게 아니라고! 난 여기서 나가야 한다고!”
“하, 참나… 역시 한꺼풀 벗겨보면 다 그 나잇대의 학생인가. 어쩔 수 없지…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시키는대로만 하면 별 다른 해코지는 없을…”
“정말 진지하게 이야기 하는 건데, 제가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큰일 나요. 내가 아니라 당신네들이 다 큰일난다고요.”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아니지, 후. 그래. 지금 상황에서는 제 정신머리 붙들고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어느 정도는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다.
각 학년의 수석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정말 크다.
충실히 학업 생활을 유지해오며 그에 합당한 성과를 낸 인물들.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가장 큰 실적이 되어줄 그들을 학사 차원에서는 진심을 다해 배려한다.
최고로 호화로운 학사 시설인 오필리스관에서의 거주가 허락되는 데다가. 모든 학사시설에 이용 우선권이 주어지거나, 별다른 징계 사항이 없으면 모든 교재비나 학비, 생활비까지 지원해준다.
심지어는 생활 편의를 넘어서 실질적인 영향력까지 주어지니, 그 대표성을 인정해 학생 회장 선거에서 혼자 수십표를 행사하거나, 학사 회의에 공식 건의를 제기할 수 있는 특권까지 있는 것이다.
대개는 공부하느라 바쁘거나, 학생 신분 달고 앞서서 나서기에는 영 낯뜨겁기에 그런 권한을 나서서 행사하진 않지만… 어쨌든 각 학년 수석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인재들이다.
어디 권한이나 사회적 인정 뿐인가, 그 무력마저도 어딜 가서 꿀리지 않는 인물들이니…
1학년 수석 루시 메이릴, 2학년 수석 예니카 페일로버, 3학년 수석 다이크 엘펠란, 4학년 수석 에이미까지… 실베니아의 이름에 걸맞게 하나 같이 학생 수준을 넘어선 무력을 지닌 자들이다.
그 중에서도 한층 더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1학년 수석과 2학년 수석이 참전한다.
내가 여기에 잡혀 있으면 지금 일어나는 시나리오 수준에 비해 토벌대가 지나치게 강력해진다.
나도 나지만, 너네들도 싹 다 개박살이 나는 거라고… 그리 외쳐봐야 별 의미도 없는가. 어차피 테일리한테 개박살 날 예정이었고.
“더 시끄럽게 굴면 무력을 행사할 수 밖에 없다. 조용히 하도록.”
-쾅!
그렇게 창살을 쳐서 위협한 뒤, 쿰은 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거에요! 에드 로스테일러! 아까는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면 반드시 테일 리가 구하러 와줄 거라고 이야기 하더니!”
“쉿.”
내가 조용히 하라고 말하며 팔을 휘적이자, 아일라는 또 괜시리 과민 반응해서 히익 대며 몸을 웅크린다.
대체 쟤 안에서 내 이미지는 어디까지 바닥에 떨어진 걸까…?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고, 나는 다시금 방구석에 와서 팔을 내밀었다.
[ 저, 정말로 있었습니다! 열쇠 보관 걸이! 챙겨왔습니다! ]머그는 내가 간수의 시선을 끈 사이에 조심스레 현현(顯顯)해서 구석에 있던 열쇠 걸이에서 열쇠뭉치를 뽑아왔다.
글래스트의 비밀 연구실에 있는 주요 기물들과 핵심 요소들을 줄줄이 꿰고 있었기에 머그에게 적절히 지시할 수 있었다. 이 감옥에도 몇 번이고 진입해봤다.
하여튼 이런 부분에서만큼은 에 대한 기반 지식이 유용하게 작용한다.
나는 열쇠 뭉치를 받아들고 쿰에게 들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열쇠를 하나씩 꽂아넣기 시작했다.
얼마 오래가지 않아 한 열쇠가 턱하고 걸리더니, 끼익하고 문이 열렸다.
나는 고개를 빼서 복도 끝에 있는 쿰의 모습을 슬쩍 보았다. 연구자료에 집중하느라 문이 열리는 소리는 못들은 듯 했다.
“좋아, 탈출하자. 머그. 쿰은 한 번 연구 자료에 몰입하면 아까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는 이상 미동도 안한다.”
[ 과연! 역시 에드 도련님이십니다! 이런 재빠른 상황 판단! 대체 어떻게 열쇠의 위치를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불초 머그의 눈에는 그 적절한 지시와 행동력이… ]또 입 발린 찬사의 말을 줄줄 늘어놓을 게 뻔하기에 얼른 머그를 역소환 시켜버렸다. 어쨌든 당분간은 근처에 따라다니겠지. 쓸 데 없이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한 건 다음에 얘기해두자.
열린 문으로 슬쩍 나서고 나니, 문득 감옥 안에 아일라가 벌벌 떨고 있는 게 보였다. 혼란스러운 와중인 듯 하다.
아무것도 안한다던 인간이 갑자기 정령이랑 대화를 좀 나누더니 호들갑을 떨고, 난리를 피우고, 급기야는 몇 분만에 열쇠를 확보해서 탈출해버린다.
그리고 나서 상황을 보니 눈앞에는 열린 감옥 문이 있다. 감옥 문을 열어제낀 인간은, 웬수 같이 생각하던 바로 그 에드 로스테일러다. 혼란스럽겠지.
– 끼익
나는 그대로 감옥 문을 닫아버렸다.
“다, 당신…”
“잘 들어라, 아일라 트리스.”
나는 감옥 안의 아일라에게 똑바로 이야기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너는.”
아일라를 데리고 나갈 이유가 없다. 아일라는 정사대로 여기 갇혀있다가 테일리에 의해 구출당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
마력탑 꼭대기로 이어지는 시나리오 흐름이 끝까지 유지되려거든, 아일라가 계속 인질로 남아있어줘야 하는 것이다.
근데 그렇다고 나 몰라라 얘만 가둬놓고 가는 것도 너무 쓰레기 같고… 혼자 남겨져 불안에 떠는 아일라가 어떤 극단적인 행동을 할지 영 알 수가 없으니 일단은 안심을 시켜놓긴 해야겠지.
“이 연구실 밖으로는 온갖 마물 실험체나, 성위학 연구가, 영혼 들린 마도구, 골렘들이 날뛰거나 보초를 서고 있어. 혼자서 움직여도 위험한데 같이 움직이다 들키면 너까지 덩달아 위험해진다. 알아들었냐?”
“그… 그건…”
“일단 인질로 잡혔으면 복종하는 게 최우선이야. 괜히 이상한 짓해서 반항하다 해코지 당하지 말라고. 만약 쿰이 보초를 서다가 내가 없어진 걸 눈치채면… 내가 탈출했다고 날 팔아먹어라. 그럼 어쨌든 너는 그 와중에 허튼 생각 안하고 감옥에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할테니… 너한테는 별 해코지가 가진 않을 거다.”
문 잠금쇠를 걸고, 열쇠를 다시 채웠다.
“그리고 어차피 다리에 힘 안 들어가서 뛰지도 못하지?”
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 것을 들켜서인지, 아일라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웅크렸다.
“내가 책임지고 구조대를 데리고 오든, 테일리를 데리고 오든 할테니까 너는 그냥 여기 눌러 앉아서 그냥 숨만 쉬고 있어. 알겠냐? 굳이 설명 안해도 알겠지만 이 비밀 연구실 안에서 이 감옥이 제일 안전해. 괜히 나가려드는 건 목숨가지고 외줄타기 하는 짓이야. 알았어?”
“하지만… 에드 당신은…”
“제발 쓸 데 없는 말대답 하지 말고 예 아니오로 대답해라. 알아 들었냐? 그렇게 질문했다.”
내가 그리 밀어붙이자, 아일라는 벌벌 떨다가 기어이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야 좀 순종적이네.
“그래. 숨 죽이고 잠자코 있어. 내가 알아서 잘 해볼테니까.”
그리 말하고 나는 자세를 낮춘 채 복도의 장식장 쪽에 몸을 숨겼다.
복도 끝에는 쿰이 연구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다음 순찰 때 동선을 잘 맞춰서 책상 옆 쪽 출구로 나아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말 그대로 정말 목숨을 걸고 저울질 하는 행동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지금 당장은 행동해야만 하는 명분이 생기고 말았다.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시나리오 흐름에 변동이 생기는 일이야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간 휘말렸던 여러 에피소드들을 생각해보면 아무런 사건 사고도 없이 순탄하게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란 생각을 할 순 없었다.
그저 비교적 순탄하게 잘 흘러가고 있는 상황에 좀 안심했을 뿐이다. 그러나 여지 없이 새로운 비틀림은 찾아온다.
자잘한 변수들이야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다.
내 스펙도 제법 올라올만큼 올라왔으니, 알고 있는 미래지식을 잘 활용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대부분이다.
예니카나 로르텔의 참전? 어떻게든 두 사람을 만나서 잘 이야기 하면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손으로 절대 해결 할 수 없는 변수라는 것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실베니아의 낙제 검성, 2막 최종장. 글래스트 토벌전.
그 시나리오 흐름에는, 일단 진입하고 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탈출할 수 없는 배드 엔딩 루트가 있다.
– ‘허구헌날 캠프에 들르는 그 마녀 모자 쓴 꼬마 마법사까지 가세할 뜻이 있다고 하니…. ‘
1학년 수석이자 3막 최종 보스, 희대의 천재 루시 메이릴.
그녀의 참전은 결코 희소식이 아니다.
그녀의 막대한 힘 탓에 아무렇지도 않게 휩쓸려 나갈 보스들이 문제가 아니다.
메인 시나리오에 없었던 변수로 인해 갑작스럽게 틀어지는 일들이야 내가 발로 뛰면서 어떻게든 땜빵을 놓을 수 있다.
이미 존재하는 ‘배드엔딩’ 시나리오도, 대부분은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러나, 내 선에서 무슨 수를 써도 해결하기 힘든 배드 엔딩 루트도 몇 없으나 분명 존재하긴 한다.
배드 엔딩 27번. ‘나태한 루시’
진입 조건은, 글래스트 교수와 루시 메이릴이 사건 발생 이후 어떤 식으로든 맞닥트리게 되는 것.
궁지에 몰린 글래스트 교수에게 설득당한 루시가 적으로 돌아서게 되는 루트로… 일단 진입하게 되면 루시와의 이벤트 전투 이후 배드 엔딩이 뜬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글래스트 교수의 회심의 제안에 넘어가 완전히 적대상태가 되는 루시.
2막의 루시 메이릴은 이기라고 만들어놓은 등장인물이 아니다.
그런 그녀를 2막 시점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온갖 고인물과 골수 유저들이 몇백시간을 박아가며 고민했음에도 그 어떤 활로도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글래스트 교수와 루시 메이릴이 만나게 되는 일만큼은 저지해야 했다.
*
– ‘머그의 반응이 느껴져, 지하수로 쪽이야. 뭔가 학사 직원들의 반응은 시큰둥하고 시원찮아서… 직접 가야할 것 같아. 도와줄거지, 루시? 네가 있으면 정말 안심이야.’
굳이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예니카 페일로버는 충분히 강하고, 루시는 한 없이 게으른 인간이다.
허나, 예니카 페일로버의 말에는 신기한 힘이 있다.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어조 속에서도 묘한 진중함이 느껴지는 얼굴은, 세파에 아무런 관심이 없던 루시의 마음도 동하게 만든다.
애초에, 근래 들어 허한 기분이 들긴 했다.
“으하암.”
서툰 솜씨로 만든 오두막 옥상에 드러누워, 끼아악 대는 병아리 같은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한다.
마녀 모자를 품에 안고 부스스한 눈으로 고개를 털더니, 루시는 뒤집어진 채로 멍하니 캠프파이어 쪽을 본다.
벌써 며칠 째, 모닥불 터에 불이 붙질 않는다.
그게 뭐 별 대수로운 일인가 싶지만, 낮잠을 자고 있을 때 들려오던 타닥대는 소리를 썩 좋아했던 루시다.
그 외에 알싸하게 감도는 육포의 쓴맛을 좋아했고, 길바닥에 누워있으면 한숨 푹푹 쉬면서 루시를 들어다가 모피 침대에 던져놓는 그 손길도… 뭐 귀찮긴 했지만 썩 편했다.
왜소한 체구를 굴려가며, 잠시 별하늘을 올려다 보던 루시는 문득 옛 생각이 떠올랐다. 손가락의 주름이 자글자글하던 한 늙은이의 뒷모습이었다.
하늘은 드높고 커다란 보름달은 청명하다. 발을 휘적대며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이미 하나의 풍경과도 같다.
이윽고 아스라한 목소리가 물감처럼 밤공기 사이에 스며든다.
“보고 싶다.”
잃은 것은 잃은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때때로 피어오르는 고독은 아무리 강인한 자라도 끝끝내 마음에서 떨쳐낼 수 없다.
이미 떠난 사람이다.
그 주지의 사실에 새삼 상심할 시기는 지났다.
그럼에도 떠나간 사람이 남긴 고독은 그 조막만한 가슴에 흔적을 남긴다.
이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그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