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55)
글래스트 토벌전 (4)
너무 많은 일이 한 번에 일어나서 머리가 과부화되면, 이성은 항상 시간차를 두고 뒤늦게서야 찾아온다.
때문에 아일라가 이성을 되찾는 건 시간이 좀 지나서야 가능했다.
눈 앞 건너편에 보이는 저 지하수로의 악마는 완전히 수면 마법에 취해 잠들어서 깨어날 일이 없다는 점.
저항하지 않고 감옥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다면 당장 신변의 위협은 없을 것 같다는 점.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리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는 점.
이런저런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해서 겨우 진정을 하니 다리의 떨림도 멈췄다.
“테일리…”
무릎에 얼굴을 묻고 구슬피 그 이름을 불러오지만, 테일리가 도착하려거든 아직 한참이나 시간이 남았다.
아일라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테일리는 반드시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다.
그러나, 매번 짐덩어리만 되는 자기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꼴사납고 원망스럽다. 슬픔과 자괴감이 함께 가슴을 치고 올라온다.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일라는 전투 분야에 대한 재능을 절망적일 정도로 타고나지 못했으나. 그 외의 지적인 학술 분야는 절대로 얕볼 수 없는 수준이다.
마법지식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그 흡수력은 글래스트 교수마저 인정한 학술가의 재목이다.
그러나, 매번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제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사실이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다.
그 누구의 무능보다도 가장 분하고 원통한 것이 자기 스스로의 무능이다.
이번에도 또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게 되겠지.
심지어는, 웬수처럼 생각하고 얼굴만 봐도 이가 갈리던 에드 로스테일러의 도움마저 받고 말았다.
그 남자는 아일라만을 안전한 감옥 안에 남겨놓고, 제 스스로 상황을 타개하러 뛰쳐나간 것이다.
이제와서 에둘러 표현할 것이 뭐가 있을까.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그는 혼란에 빠진 아일라를 배려한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듬직하기 보다는 무섭다. 손 한 번만 올려도 손찌검을 당할까 무서워 몸을 말게 된다.
“분해…”
감정에는 언제나 기대가 따른다.
그 기대의 형태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올바르고 선한 사람이길 바라듯.
내가 원망하고 증오하는 대상은 언제나 악하고, 비뚤어져 있으며, 심보가 고약해야만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을 적대하는 나에게 당위성과 정당성이 부여되는 거니까.
그 사람 또한 올바르고, 그 사람만의 신념과 정의가 있으며, 관점에 따라선 그 사람이 정당할 수 있다는 사실… 자존심을 꺾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그러나, 아일라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사에서 들려오는 에드에 대한 평판,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2학년 수석, 글라스칸 사건 때 보여주었던 뚝심 있고 침착한 모습.
뿐만 아니라, 같이 납치되어온 입장인 주제에 당황하는 모습은 일절 보이지 않고, 침착한 자세를 견지했다.
떽떽대고 적대하며, 에드를 경계하기만 하던 아일라에게 감정이 상하는 듯한 기색조차 없다.
아일라는 그런 품성을 더러 뭐라고 부르는지 잘 알고 있다.
포용력이다.
해코지를 하든, 책임전가를 하든, 나쁜 소리를 하든, 희생시키려 들든… 뭘 하려거든 뭐든지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힘의 균형은 완전히 에드 쪽에게 쏠려 있었다. 단순한 완력이든, 마법적인 능력이든, 심지어 정신적인 부분까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라를 오히려 도와주고 구해주려는 듯한 모습은 입학 시험 때 보았던 오만방자한 모습보다는, 건실하고 듬직한 선배에 가까웠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러든가.
입학시험 때 왜 그런 되도 않는 기행을 부려서, 사서 원망을 받았는가.
중요하고 급박한 순간이 오면 선배다운 모습으로 무겁고 진중하게 상황을 해결하려 드는 주제에, 테일리는 반드시 구하러 올 거라는 둥, 그런 말을 하면서 테일리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내비치고 있는 주제에…
왜 입학시험때는 그리 테일리에게 못되게 굴어 자기 평판을 바닥에 쳐박았을까.
– ‘아일라 트리스. 너도 테일리를 쭉 지켜봐왔으니까 알겠지만, 그 자식은 시련이 오면 올수록 강해지는 인간이다.’
급박한 상황이 뭐 어쨌냐는 듯, 뿌리박은 거목처럼 묵직하게 앉아 흔들림 하나 없는 어조였다.
아일라는 알고 있다. 테일리는 시련의 숙명을 타고난 인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생애에 온갖 시련이 가득했다.
그리고 시련을 뛰어넘을 때마다 한 층 더 성장해가는… 그런 빛나는 인간이다.
에드가 그런 테일리의 기질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뒤늦게 의문스러운 감정이 고개를 내밀었으나, 그런 건 사실 중요치 않았다.
입학 시험에서 테일리를 깔보던 모습, 글라스칸 사건 때 테일리를 질책하던 모습,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 때 테일리를 막아서던 모습. 그리고 더 저항할 힘이 있었음에도 테일리에게 패배를 인정하던 모습.
평소엔 말수도 적고, 파문 당한 뒤로는 누군가랑 엮이는 일도 없이 조용히 제 학업에만 집중하던 인간이다. 뭔가 심경에 변화가 생겼는지 제 학업과 삶 빼고는 모든 것에 관심이 꺼진 듯한 모습이었다.
허나 중요한 기점엔 언제나 테일리의 시련이 되어주고, 때로는 채찍이 되어주던 모습들… 굳이 개입할 필요도 없고 그냥 방관하고만 있어도 되는 상황에 언제나 얼굴을 들이밀던 모습.
그제서야 퍼즐이 맞아들어 가는 느낌에 아일라는 확신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에드 로스테일러는 마치 테일리의 성장과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
“…에드 로스테일러…?”
정신이 번쩍 든 아일라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창살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복도 끝에는 성위학 연구가 쿰이 연구자료를 검토하는데에 여념이 없다.
그의 시선 밖에서 조용히 출구의 문을 열고, 자세를 낮춘 채 밖으로 나가는 에드의 모습을 보며, 아일라는 손끝을 떨고 말았다.
상황만 놓고보면 그렇다.
아일라와 테일리가 그에게 준 것은 원망과 증오밖에 없는데 그는 둘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자존심과 원한이 눈을 가려 제대로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으나,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생각해보면 항상 그랬다.
애초에 에드 로스테일러가 그런 부분에 생색을 내는 성격이 아닌 탓도 있었다.
목 끝에 가시가 걸린 듯한 감각에, 아일라는 계속해서 헛숨을 집어삼켰다. 이제와서 찬찬히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결론도 아니었다.
그는 오만방자하고 자기만 아는 몰락 귀족이라기보단, 건실하고 과묵해 자기가 한 일에 별 생색도 내지 않는… 그런 묵직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걸 인정하고 나면, 많은 것을 내려놓은 듯한 감각이 든다.
그간 타인을 얼마나 섣불리 판단하고 있었는지를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아일라는… 그렇게 가만히 창살을 마주한 채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
트릭스관의 메인 회의실에는 규모에 비해 그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 않았다.
봉서의 매각이 그리 자랑스러운 사실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봉서의 감응식은 굉장히 적은 규모로 단출하게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학사 최고 책임자 몇 명과, 상회 측 책임자 몇 명만을 대동한 채로 조용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교장 오벨 포시어스
부교장 레이첼
전투부 학장 스탠
마법부 학장 맥도웰
연금부 학장 에델바이스
감응식 진행 책임자 글래스트
담당 서기 클레어
엘테 상회 측 전권 위임 대리인 로르텔 케헬른.
사업 분야 책임자 타냐
회계 대리인 베니어
기록 관리인 타르스
비서장 멜라니아
학사와 상회. 각 집단의 꼭대기 중에서도 꼭대기만 모여있는 감응식 현장.
그 중에서도 가장 이목이 쏠리는 자는 각 집단의 대표, 오벨과 로르텔이었다.
둘의 인상은 정반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오벨 포시어스는 이 거대한 실베니아의 교장이라는 직책답지 않게 젊어 보이고 허물없으며 털털해보였다.
짧게 깎은 머리와 수염 한 톨 나지 않은 얼굴은 그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게 만든다. 60이 가까워지고 있는 초로의 신사라고 보기는 힘들 정도로 말끔한 모습이다.
전투, 마법, 연금 분야를 모두 섭렵한 인재로 그 이름이 드높고, 그 명성만큼이나 덩치도 컸다. 실베니아의 인장이 새겨진 화려한 로브를 두르고 있지만, 그 쩍 벌어져 넓은 어깨는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반면에 상회 측 전권 대리인은 너무나도 왜소하다. 허나 왜소한 몸집에 맞지 않는 요염한 기색은 굳이 꽃에 비유하자면 장미다.
손짓 한 번에 툭 꺾여버릴 것 같이 연약한 모습에 혹해 섣불리 다가가면, 가시에 찔려 피가 흐르는 꼴을 보게 된다.
착 가라 앉은 적갈색 머리칼. 전체적으로 화려하지만 절제할 부분에선 착실히 절제 되어 있는 프릴 드레스와 세미 로브.
나이도, 키도, 연륜도, 경력도, 힘도, 마력도 모두 몇 배는 차이가 나는 오벨 앞에서조차 짓눌린 기색이 전혀 없다.
오히려 로르텔은 조용히 입을 열어… 학사 측 직원들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오벨 교장님. 저는 한 명의 상인이기 이전에 이 위대한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학생이에요. 귀중한 가르침을 주시는 학사 측 교직원 분들에게는 언제나 마땅한 경의를 표해야 함을 절대 잊지 않는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학생과 교사의 입장 이전의 문제잖아요?”
로르텔을 따라 현장에 나온 상회 측 직원들이 몸을 떨었다. 로르텔의 분노는 언제나 차갑다.
로르텔 케헬른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계약의 불이행이다.
그 어떤 불가항력이 섞여 있다 하더라도, 계약서 내용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반드시 책임자를 찾아 추궁한다.
어린 로르텔의 리더십이 상회 전체를 꽁꽁 묶고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명확함에 있다.
차분하고 아리따운 외관에 어울리지 않게, 그녀의 행동은 언제나 냉혹하고 냉혈하다.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이기에 일단 방침이 정해지고 나면 타협의 여지가 거의 없다.
그 철저한 기질 덕에 상회 직원들은 로르텔이 불리한 계약을 하거나 위험성 높은 투자를 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필요 이상으로 매입액을 높여 부른 이번 계약이 이상해보일 정도였다.
“학사 핵심인력이 모두 모여있는 자리에서 봉서를 탈취 당하다니… 만약 이번 거래가 이렇게 조용하게 이뤄지지 않았다면… 굉장히 큰 모욕거리가 되었을 거에요.”
“수색 인력들이 모두 나가 있는 중이니, 조금 기다려주면 좋겠군. 학사 쪽에서 책임을 지고 봉서를 다시 가져오겠네.”
동등한 계약 관계라 할지라도, 일단은 학생과 교장의 입장이다.
로르텔도 필요 이상으로 예의 없이 굴진 않지만, 할 말은 해두어야 했다.
고개를 들어 트릭스관 회의실 중앙을 보았다.
상황 설명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한참 봉서 감응식이 진행되던 중, 교장 오벨의 감응자 반응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뒤… 메인 회의실에 대규모 시야 방해 마법이 발현되었다.
시야를 가리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강렬한 빛이 난무하며 눈을 멀게 만드는 데다가, 여러 가지 굉음이 울려퍼져서 현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어찌나 요란한지 아마 바깥까지 이 소란이 울려퍼진 모양이다. 근처에 있던 학생들이나 교직원들도 트릭스관에 모여드는 와중이었다. 비밀리에 진행하겠다는 계획도 반 쯤 파토가 난 셈이다.
그 뒤로는 온갖 마성 골렘이 몸을 일으키더니, 닥치는대로 주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모여 앉은 학사 직원들은 하나 같이 강자들이었기에 큰 위협은 되지 않았다.
상황을 정리하고 보니, 봉서의 매각에 반대하는 글래스트 교수가 독단적으로 취한 행동으로 결론이 나는 모양새였다.
현재 글래스트 교수는 봉서를 탈취하고 자취를 감췄다.
15년 넘게 근속한 원로급 교수인데다가, 학사가 돌아가는 방식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참으로 간단하게 학사의 뒤통수를 쳤다.
글래스트 교수는 진즉에 학장이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긴 경력과 많은 실적을 가지고 있다.
승진조차도 거부하고 연구직으로서 봉서 연구에 몰입할 정도로, 그가 봉서에 두는 가치는 컸던 것이다.
봉서의 매각을 앞두고 이런 독단적인 행동까지 하게될 줄은 몰랐으나. 그래서 봉서를 가지고 가서 뭘 하려는 건지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글래스트 교수가 봉서의 금전적인 가치만을 보고 탈취했을 것 같진 않고… 무언가 목적이 있을 것 같긴 한데요.”
“그럴테지.”
오벨은 턱을 쓸고 아수라장이 된 회의실 한쪽 탁자에 가만히 앉았다.
주변 시선을 인식하지 않고 편히 앉은 것이, 권위와는 꽤나 거리가 멀어보이는 모양새다.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 상회 측에도 최소한의 사실은 일러주는 것이 옳을테지.”
어차피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각 집단에서 꼭대기에 근접한 최고 책임자들이다. 오벨은 그 사실까지도 감안하고 있을 터였다.
“글래스트 교수가 뭘 계획하고 있든, 그 말로는 썩 좋지 못할 것이 확실하네. 그러니 조금 정도는 기다려보지 않겠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봉서 자체는 내가 책임지고 다시 확보하도록 하지.”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죠?”
답답한 감정이 로르텔의 가슴 안쪽을 치고 올라왔다.
이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교장 오벨 포시어스는 모든 방면에서 대가의 반열에 오른 그야말로 괴물이다.
실질적인 전투력이든, 마법적인 능력이든 간에 이 오벨과 제대로 견주어 볼만한 자는 학사의 교수진과 학생들을 통틀어 생각해보아도 1학년의 게으른 천재 루시 메이릴 뿐이다.
그러니 오벨 포시어스가 직접 팔을 걷고 나선다면, 글래스트가 뭘 하든 간에 순식간에 제압 당해버릴 것이 뻔했다.
허나 오벨은 직원들에게 수색 지시만 내릴 뿐이고, 직접 나설 생각은 하질 않는다.
그런 모습을 본 로르텔은, 당신이 좀 직접 나서서 봉서를 가져오든가 하라고 닦달을 놓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추궁하기엔 입장 차이가 애매하다.
그래서 로르텔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태도로 귀를 기울였고. 도저히 믿기 힘든 사실이 귓가를 파고 들어왔다.
“글래스트 교수가 성위 마력을 통해 연구하던 것은 전통적으로 금지된 분야인, ‘소생’ 분야의 마법이지.”
제 아무리 학술의 뜻엔 끝이 없다 할지라도, 긴 마법의 역사에서 금기시 여겨지던 마법 분야는 분명히 존재했다.
세계의 섭리를 비틀어 꺾어, 현재의 시간 흐름을 흐리고 인간으로서 운명의 틀을 거부하는 3대 분야.
영생 추구, 사자 소생, 시간 역행.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족에게 부여된 신의 뜻을 거부하고, 운명을 비틀어 꺾어 섭리에 도전하는 금기로 받아들여진다.
제 아무리 시간 그 자체를 다루는 마법이 많은 성위계 마법이라 할지라도, 이미 정해진 과거를 비틀어 꺾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애초에 그 정도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 자체가 없다시피 하기도 하지만.
“그걸… 알고도 방치했어요. 교장님?”
“그건 애매한 문제지. 나는 글래스트 교수의 연구 기록에 대한 보고를 전부 받긴 했지만, 그런 그릇된 연구를 대놓고 서면 보고를 할 리가 없지 않나. 다만, 추측했을 뿐이지… 지금에 와서는 확신이고. 그는 버릇처럼 대현자 실베니아님을 찬양했거든.”
글래스트 교수의 연구실적 관련 보고 사항들과, 그의 과거사, 행보, 성향들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리 생각할 수는 있다. 다만 확신을 가질 순 없을 뿐이었다.
로르텔은 휙 고개를 돌려 다른 학사 직원들의 표정을 보았다.
부교장 레이첼이나 최고 학장 맥도웰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학사 직원들은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눈을 꿈뻑대고 있었다. 학사 직원들 사이에서도 아는 사람만 아는 극비였던 것이다.
“나쁜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오벨 교장님…”
“미쳤냐고 묻고 싶나, 로르텔 케헬른? 하지만… 나는 적어도 글래스트 교수의 마지막 선택이 궁금하네.”
“그건 대체 무슨 말씀이에요?”
“글래스트 교수가 버릇처럼 하던 말을 기억하나? 학술의 진보에 대한 고뇌. 진정한 지식인이었던 대현자 실베니아에 대한 경의, 그리고… 잃은 것에 대한 회환.”
글래스트 교수의 과거사를 알고 있는 로르텔 입장에선 도저히 흘려들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어느 정도 거짓말을 하고 살지.”
재능에 대한 광적인 집착. 그것이 글래스트 교수라는 인간을 규정하는 한 문장이었다.
그러나, 로르텔 또한 어느 정도는 추측하고 있다.
그 집착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글래스트 교수의 본질인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잃은 것에 대한 아픔에서 우러나온 자기 방어 기제에 불과한 것일까.
애매하고 덧없는 재능에는 그 어떤 가치도 부여해선 안된다고 생각하는 그 광적인 집착.
대단히 독선적이고… 한 켠으로는 숭고해보이기까지 하는 그 뜻의 본질은 생각보다 단순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재능이 없기에 맞이한 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런 덧없는 부성애의 결과물일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고한 학술가인가, 비탄에 빠진 아버지인가.
글래스트 교수를 섣불리 규정할 수가 없어, 로르텔은 혼란스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만약 정말로 그가 죽은 자를 소생시킬 수 있는 성위 마법을 발견해 냈다면.”
세상의 진보를 앞당기고 마법 역사를 획기적으로 나아가게 만들 희대의 성인 대현자 실베니아.
애매한 재능을 믿고 섣불리 밀어줬다가 처참히 죽음을 맞이한 딸 뮤리.
“자네는 글래스트 교수가… 누구를 되살릴 것 같나?”
로르텔은 오벨의 눈을 올려다 봤다.
하해와 같이 깊은 눈동자가 어떤 광경을 보고 있는지, 로르텔은 가늠이 되질 않았다.
– 쾅!
“큰일 났습니다, 오벨 교장님! 학사동 쪽에서 목격 정보가 나왔습니다! 수십 분 전, 지하수로 쪽으로 도주하던 글래스트 교수를 테일리 학생이 추격하고 있는 모습을 봤다고 합니다!”
“목격 증언에 따르면 봉서 뿐만 아니라 학생을 납치했다고 합니다! 신원 파악된 바로는… 마법부 1학년 아일라 트리스… 그리고, 마법부 2학년 에드 로스테일러입니다!”
– 콰아아아아아아앙!
뛰쳐들어온 학사 직원의 보고 사항에 로르텔이 귀를 의심하던 순간이었다.
엄청난 굉음이 교수동 하늘로 울려퍼졌다. 이어지는 진동도 마찬가지였다.
일순 흔들린 대지를 보고, 로르텔은 복도로 뛰쳐나가서 창문을 휙 열었다.
트릭스관은 교수동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언덕에 자리해 있다.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면 얼추 교수동 전경이 전부 보인다.
지하수로 입구가 있을 아켄섬 외곽의 해안선 근처에, 익숙하다 못해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는 고위 정령 하나가 보인다.
거리로만 치면 엄청 멀리 떨어져 있을텐데도, 그 거대한 몸집은 이 트릭스관에서조차 똑똑히 보인다.
고위 불 정령 타칸.
1학년 에이스 멤버가 싹 다 덤벼들어서야 겨우 제압해낼까말까 하던 바로 그 무시무시한 불도마뱀이었다.
꼬리를 내려치며 포효를 내지르는 것이, 마치 누구를 당장 데려오라고 떼를 쓰는 듯 하다.
고위 정령 한 기만 되어도 상위권 학생이 다 튀어나가야 피해없이 제압할 수 있다.
저걸 가만히 놔두면 또 뭐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다.
아켄섬 외곽지역으로 향하는 만큼 실베니아 학사 내부에 피해가 생길 것 같진 않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 깽판에 휘말려서 봉서가 유실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어차피 아직 대금을 치르지도 않았으니, 봉서가 유실된다 하더라도 직접적인 장부상 손해가 생기는 건 아니다. 상실 수익액이 있을 순 있어도 적자가 나진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봉서는… 너무 가지고 싶다…..!
“아, 진짜…!”
로르텔은 결국 한숨을 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여튼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다.
“이렇게 된 거….. 나도 지하수로로 간다…!”
“예?”
“대리인님. 감응식은요?”
상회 측 직원들이 놀라서 로르텔을 쳐다봤지만, 로르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로르텔은 오벨 교장을 쏘아보았다. 꽤나 무례한 모습이지만, 오벨은 신경을 쓰는 기색조차 없다.
“교장님이 저렇게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하시니, 제가 직접 가서라도 봉서를 가져와야겠어요. 최소한의 협상 인력만 남기고 다 따라와요! 에휴!”
대환장 파티 5분 전이었다. 에드의 복장이 터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최대 피해자는 글래스트 교수일까.
아일라보다도 더 한 시한폭탄을 납치하고 말았다는 것을 섣부른 판단이라고 비난하기엔… 그에게 주어진 정보가 지나치게 제한적이었던 탓이 크다.
묵념을 빌어줄만한 사람도 없었다.
*
역주행.
트릭스관 – 교수동 추격로 – 지하수로 입구 – 지하수로 최심부 – 비밀 연구실 입구 – 영혼 도서관 – 마물 연구동 – 연구실 최심부 일련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최종장 시나리오의 루트는 익숙하지만, 그 루트를 역으로 밟고 나가야 하는 건 또 신기한 경험이다.
아마 테일리는 정주행하고 있을테니, 중간 부분 어딘가에서 맞닥트릴 수 있을 것이다.
연구실 최심부에서 뛰쳐나와 조심 조심 마물 연구동을 지나쳐왔다.
마물 연구동을 돌파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부분의 마물들은 연구 시설에 갇혀 있고, 상주 인력도 별로 없는 파트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어려운 것은 쿰이 연구 시설에 갇힌 마물들을 전부 다 풀어버리기 때문이다. 지금은 별 다른 장애물은 없다.
문제는 영혼 도서관이다.
영혼 도서관을 지키고 있는 사서 레이나는 눈썰미가 엄청나고 탐지 마법에도 능하다. 기운이 미약한 하위 정령 머그조차도 숨어들어오는데 한참이나 걸렸을 정도다.
도서관 후문 쪽에 등을 맞대고 안쪽을 슥 쳐다보았다.
허공을 부유하는 책장들과 마법서들.
그리고 온갖 귀중한 마공학 용품들과 제조식들이 가득하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저거 다 쓸어 담아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어차피 동선이 겹치는 김에 챙길 건 다 챙기는 게 맞다.
지금 당장은 얼른 이 연구실을 탈출해서 예니카와 만나는 게 우선이니, 제일 효율이 좋은 놈들로만 골라서 쏙쏙 빼먹어보자. 레이나의 눈에 들지 않는 선에서.
[ 에드 도련님! 혹시… 군침 흘리고 계십니까…? ]“…”
나는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가져가야할 물건들을 체크했다.
레이나의 순찰 패턴이나 행동 패턴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전부 챙기는데 그리 긴 시간이 들진 않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마공학 숙련도를 뻥튀기 시킬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니 조금 들뜬다.
안그래도 요즘 스펙 상승이 지지부진한 와중이다. 재료만 잘 조달하면 2 ~ 3막 수준에서는 존재해선 안될 수준의 스펙을 가진 마공학 용품을 만들 수 있을 기회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어쨌든 제조식과 마공학용품 챙기는 데에 너무 과몰입해도 곤란하다.
일단 당장 몸에 우겨넣을 수 있을 만큼만 우겨넣고, 테일리가 지나간 다음 다시 찾아와서 천천히 챙기면 된다. 지금은 예니카를 만나는 게 우선이다.
그래도 횡재한 듯한 느낌에 들뜬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바겐세일이다…!!
“에드 어딨어?”
글래스트 토벌전 2막 2페이즈 중간보스, 도로시 화이트펠츠.
그녀는 제 능력에 충분하리만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3학년 도로시는 연금부 학회에서도 꽤나 인정을 받은 전투직 연금술사였다.
학년 전체 수석까지는 아니지만, 연금부 수석 자리에까지는 올랐다.
온갖 전투 시약들과 즉석 화학반응, 양산한 마공학용품들을 활용해대는 도로시의 전투력은 전투부 학생들조차도 까다로워할 수준이었다.
1학년 연금부 수석 엘비라나, 2학년 연금부 수석 노든도 자주 가르침을 청하러 찾아왔다.
그런 도로시에게 있어서, 한 때 개화하지 못했던 재능을 알아봐준 글래스트 교수는 그야말로 은인이었다.
모두가 도로시의 능력을 과소평가할 때 홀로 도로시를 긍정해준 글래스트 교수라면… 다소 과격해보이는 행동에도 뭔가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도로시는 글래스트 교수의 계획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했다.
그 정확한 의도까지는 알 수 없지만, 지하수로 입구를 지키고 있어 달라는 그의 부탁만큼은 철저히 이행하기로 마음 먹었다.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아니 잖아요 교수님.
그리 독백하는 도로시는 수로 입구의 얕은 물줄기에 주저 앉은 채로, 세상을 다 불태울 듯이 포효 해대는 타칸의 입가를 마주해야했다.
“에드 어딨어?”
저 연분홍 빛 머리칼의 소녀가 누군지는 안다. 학사 모두의 사랑을 받는 동화 속 공주님이다.
그녀가 걷는 곳은 그 길을 따라 꽃이 피어난다고 한다. 발랄하게 활짝 피어나는 웃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푸근하게 만든다고도 한다.
그 푸근한 미소는 여전하다.
빙그레 웃는 얼굴은 어찌나 앙증맞고 귀여운지, 방심하면 손이 뻗어나가 머리를 쓰다듬어 버릴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올려다 본 그녀의 뒷배경에는 불에 타오르고 있는 거대 도마뱀이 침을 뚝뚝 흘리고 있다.
예니카 딴에는 최대한 정중하고 친절하게 묻고 있는 것이지만, 그 뒷배경과의 괴리감은 결국 공포감을 증대시키고 만다.
“예, 예니카! 그러니까! 나는 그냥 여길 지키고 있을 뿐이고! 그냥 지시 받았을 뿐이야! 응!”
화들짝 놀라서 도로시는 말을 더듬었다.
“응, 그렇구나… 앗, 그, 그러고보니. 3학년 선배님이네. 바, 반말해서 죄송해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도로시의 말에 동감해주는 반응. 그리고 우물쭈물 정중한 사과.
그제서야 도로시는 상대가 바로 그 세상 착한 예니카가 맞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마음을 놓을 뻔 하였으나…
“그건 그렇고… 에드는 어디 있어요?”
세상 착한 예니카와는 별개로… 타오르는 도마뱀의 열기는 도로시를 상대로 아무런 자비도 없을 게 확실했다.
도로시는 팔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