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57)
글래스트 토벌전 (6)
건물이 많다.
트릭스관 옥상에서 교수동 전경을 내려다보면 절로 드는 감상이었다.
오벨 포시어스는 젊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허나 맡은 직책에 비해 비교적 젊다는 의미이지, 절대적인 나이가 어리다는 소리는 아니다.
오벨은 아직 60도 채 되지 않았다. 역대 실베니아 교장직을 수행했던 수많은 자들 중에서도 유독 젊은 편이다.
초임 교수 시절부터 진득하니 교직에 눌러 앉아, 정신을 차려보니 재직 28년 차다. 이제 교직에서는 이보다 더 높이 올라갈만한 곳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세상도 참 많이 변했다.
대여섯개의 수업 건물이 전부였던 교수동도 이제는 어지간한 마을 하나보다 넓어졌다. 동산에 올라서서 넓게 봐야 그 전경이 겨우 눈에 들어올 정도다. 생활동도 거의 두 배는 커진 것을 생각해보면, 재직 중에만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몸집이 배로 불어난 셈이다.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이 실베니아에 오벨보다 더 긴 시간을 있었던 자가 없다.
언젠가 졸업해야 하는 학생들은 물론이요, 난다긴다 하는 교수들 경력도 오벨의 절반도 채 안되는 경우가 퍼다하다.
“나는 지금이 이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황금기라고 믿어 의심치 않네.”
옥상에서 뒷짐을 지고 있던 오벨이 그리 말하자, 뒤에서 그를 보좌하고 서있던 최고 학장 맥도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벨 교장님께서 그리 이야기 하신다면, 그렇겠지요.”
그의 경륜과 힘은 실베니아의 모든 자들에게 존중 받는다.
오벨 포시어스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교수동 외곽을 가만히 보았다. 지하수로 같은 게 위치한 곳이 으레 그렇듯, 유동인구가 거의 없다시피한 곳이고, 사실상 규모만 클 뿐… 중요한 기반 시설이라 하기는 좀 애매한 곳이다.
황금기.
이번 1학년들은 실베니아 역사상 모든 세대를 통틀어보아도 다시 보기 힘든 황금의 세대다.
루시, 직스, 로르텔, 엘비라, 클레비어스, 아델, 엘딘.
성적순으로만 나열해봐도 각각의 학생이 다른 학년의 수석을 노려볼 수도 있을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어디 성적만이 다인가.
방대한 양의 마법적 지식을 순식간에 흡수하고 통찰해서 흥미로운 견해를 내놓는 아일라는 학자의 재능을 타고났다.
클로엘 황실의 세 황녀 중에서도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페니아 황녀는 본인이 아무리 싫다해도 결국엔 군주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검성식을 구사하며 말도 안되는 성장세로 강해져가는 테일리 맥로어는 이미 학생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퍼다하다.
내년이 되면 또 어떤가. 이미 굵직굵직한 신입생들이 잔뜩 입학의사를 밝혔다.
북방 국경지대를 지키는 철혈의 군단장 매그너스의 외동아들인 웨이드.
대륙 최고의 권력가인 로스테일러 가문의 차녀 타냐,
제국 최대 규모의 신자를 보유한 텔로스 교단의 성녀 클라리스, 세상 모든 독극물의 절반을 혼자서 만들어냈다던 재앙의 연금술사 칼의 후손 클로드까지.
한 학년에 하나만 있어도 온갖 기대를 몰아받는 기대주들이 별들처럼 가득하니, 오히려 불길한 생각마저 들고 만다.
이 정도의 인재는 있어야지 발버둥이라도 쳐볼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시련이라도 다가오고 있는 것인가… 하는 쓸 데 없는 생각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기라성 같은 신입생들이 가득해도 끝끝내 그 꼭대기에서 빛나는 자는 단 하나다.
별의 축복을 받은 마력을 흩뿌리며, 제 좋을대로만 행동하는 변덕쟁이 마법사다.
재직 28년의 긴 역사 동안, 오벨은 단 한 번도 학생을 상대로 기량이 밀릴 거라 생각해본 적은 없다.
현존하는 자들 중에는 대마법사 글록트에게 가장 근접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 받는 오벨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손 놓고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최고학장 맥도웰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뒷짐을 지고 가만히 지하수로 쪽을 내려다보던 오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맥도웰의 충언엔 걱정이 서려있다.
원로급 교수가 독단으로 혼란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학사의 소중한 보물이 도둑맞았다.
심지어는 납치 당한 학생들까지 존재하니, 인명피해라도 발생하면 오벨의 책임소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단순한 사고에서 끝난다면 성명문을 발표해 사과하고, 자존심을 구기면 끝날 일이지만… 목숨을 잃은 학생이 나온다면 어떻게 될지 보장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벨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을 살짝 내리깔고 난간 쪽을 보면, 누가 걸터앉아서 낮잠이라도 자다 갔는지 쓸린 자국이 남아있다. 그 자국을 따라 외곽에는 육포 부스러기 따위가 뿌려져 있다.
그 마력의 흔적엔 대마법사들이나 다룰 수 있는 별의 축복이 서려있다. 그 마력이 사라진 방향을 보자면 지하수로 쪽이다.
이 실베니아 아카데미 안에서 교장 오벨에게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을만한… 규격 외의 힘을 타고난 희대의 천재.
글래스트 교수가 평가하길, 역사에 길이 남을 대마법사의 자질이 있는 인재라고도 했다.
제 아무리 성위 마법을 다루는 베테랑 학술가라 할지라도, 신의 사랑을 독차지해 반칙에 가까운 힘을 휘두르는 그 소녀의 상대가 될 수는 없겠지.
“글래스트 교수인가…”
오벨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나간 세월은 무색하다.
오벨에게도 초임 교수였던 시절은 있었다. 글래스트 교수 역시 마찬가지다.
세월과 시간은 사람을 마모시키고 숙성시킨다.
열정 가득한 초임 교수로서의 모습을 조금씩 깎아내어, 원숙한 교육자로 재탄생하게 만든다.
– ‘오벨 학장님. 이게 말이 됩니까! 뭐라도 말씀해보십시오!’
글래스트 교수가 이제 막 부임한 초임 교수였을 때, 오벨은 이미 마법부 학장이었다.
바싹 말라서 창백해 보이는 글래스트의 몰골은 초임 교수 시절부터 여전했지만. 분명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말수가 많았다.
– ‘열등생 중 덱스관 학생들만 일괄적으로 낙제 처리한 처분은 부당한 거 아닙니까? 재능 없는 학생들은 학생도 아닙니까?’
– ‘성적에 차등을 두고 학생들을 구분하는 것은 더 나은 학업 성취를 위한 것이지, 학생 그 자체의 급을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 ‘타고난 재능에 따라 이를 수 있는 경지는 당연히 다 다릅니다. 다만, 그 경지에 매몰되어서 재능 없는 자를 도태된 놈처럼 취급하는 건 교육자로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언성을 높이며 책상을 두들기던 젊은 시절의 글래스트 교수는 이젠 지나간 초상이다.
성위학 연구고 나발이고 뒷전으로 미뤄두던 시절. 학사 연구실 구석에서 일주일짜리 교육 커리큘럼을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으로 짜기 위해 밤을 새던 모습. 그조차도 이제와선 먼 옛날이다.
십수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느끼게 했고, 또 많은 가치관을 변하게 만들었겠지.
그래서 그 세월의 끝에서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지. 길고 길었던 그 학술가의 삶을 무엇을 증명하며 마무리 할 것인지.
“함께 늙어간다는 것도 마냥 좋은 일은 아니군.”
오벨은 탁 펼쳐진 풍경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속으로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낙엽지는 학사의 가을 풍경이 석양 아래에 기울어져간다.
언제부터인가, 사계절의 변화가 그리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늙어가는 것이다.
*
“있잖아.”
나는 머리를 싸매고 무너진 책장 한 쪽에 앉아있었다.
“있잖아 있잖아 있잖아 있잖아 있잖아.”
혹여나 내가 못 들어서 대답을 안하는 거라 생각하는지, 계속해서 나를 불러대는 모습이 뭔가 얄미웠다.
루시가 나를 ‘있잖아’ 하고 부를 때는 항상 똑같다. 무슨 말이 이어질지 불보듯 뻔 하다.
“육포 남은 거 있어?”
“있겠어?”
“쩝….”
루시는 실망했다는 기색을 숨길 마음도 없는지, 주눅 든 채 애꿎은 발만 허공에 휘저어 댔다.
반대쪽 책장의 꼭대기 언저리에서 발을 휘적대며 마녀 모자를 고쳐쥐는 루시는, 늘 보던 모습 그대로다.
홀몸으로 지표면을 박살내고 이 깊은 비밀 연구실까지 돌파해놓고, 이 정도는 뭐 일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이다. 이 정도면 생명의 은인이 아니냐고 생색댈만도 하건만, 루시는 그냥 물 한잔 떠다 준 고생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마냥 구해줘서 고맙다고 좋아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일단… 그래, 고맙다 루시.”
어쨌든 이 깊은 비밀 연구실까지 구하러 와준 것이니 감사 인사는 해두고.
“그런데… 어쩌다가 여기까지 나를 구하러…?”
구해놓고 날 왜 구해줬냐??라고 반문 당하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당연스럽게도 루시가 그런 걸 신경쓸 리가 없었다.
“그… 정령사가 도와달라고 했어. 처음엔 귀찮아서 가만히 놔두려 했는데, 생각해보니 구해야될 거 같았어. 심심하기도 했고.”
루시는 조막만한 몸을 휙 하고 날리더니, 가볍게 책장 더미 아래 대리석 바닥으로 착지했다.
남아도는 소매를 휘날리며 가볍게 안착하는 몸놀림이 정말 사람 같지가 않다.
따지고 보면 실제 묵직한 고양이의 몸무게에 몇 배 정도만 하면 루시의 몸무게가 될테니, 애초에 몸놀림이 사람 같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할 수는 있겠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놀림이 이해가 된다.
여러 경량화 마법이나 중력 마법 등을 덕지덕지 두르고 있는 것도 한 몫 하겠지만.
“구해야 될 거 같았다고?”
“응. 왜 인지 모르겠는데, 그냥 캠프에 혼자 누워 있으니까 심심하고 구해야될 거 같고 그랬어.”
“…”
가만히 루시를 노려보고 있자, 신경도 안쓴다는 투로 거하게 하품을 한 번 갈겨주신다.
“있잖아.”
“왜.”
“혹시 육포 남은 거 없어? 진짜로?”
“그래.”
“…쩝..”
루시는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하진 않았지만, 정말 아쉽다는 얼굴로 툴툴댔다.
“어쨌든 구했으니까 갈래. 주변에 낮잠 잘만한 곳이라도 찾아봐야겠어.”
“… 안돼.”
“…?”
일단 척 봐도 상황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이제 와서 탄식만 하고 있지는 않는다. 세상사 다 계획대로 펑펑 잘 흘러가리란 법은 당연히 없다.
생각보다 더 개판난 거 같긴 한데, 어쨌든 테일리의 스펙 자체는 충분하리만치 잘 성장해있지 않나.
으레 대부분의 게임이 그렇듯, 어차피 테일리의 스펙 성장세는 후반부로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초중반부의 성장효율과 극후반부의 성장효율이 비슷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지금까지 스펙 성장세를 잘 유지해왔다면, 보스 몇 개 스킵한다고 해서 엄청난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1막 최종장에서 그랬듯, 꼭 필요한 핵심기술을 익히지 못해서 스토리 진행 자체가 막히는 일만 없애면 어떻게든 나중엔 다 수습이 된다.
검성식 수련치를 주는 보스는 정해져 있다. 2막 최종장 같은 경우에는 보스 글래스트와, 지하수로의 악마, 연구가 쿰, 사이클롭스 정도다. 수련치 효율이 좋은 만큼 당연히 시나리오 후반부에 몰려서 나오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괜찮다… 아직까지는…!
검성식만 꾸준히 수련해나가서, 결국 검성의 도를 끝까지 깨우치기만 하면 악신 메뷸러가 됐든, 세상의 섭리를 깨부수는 고대의 화신이 됐든… 결국 테일리가 개고생 해가며 알아서 다 쳐부순다. 애초에 테일리가 아니면 죽일 수도 없다.
나머지 스펙은 어쨌든 간에 기본 성장치만 따라주면 되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차질이 없다.
“너 어디 가지 말고 나랑 딱 붙어 다녀줘야겠다.”
“…”
나는 루시의 양 어깨에 손을 얹고 확실하게 이야기했다.
어쨌든 스펙 성장 자체는 아직 수습 가능하다고 하면, 내 선에서 해결이 안될 배드엔딩 루트를 다 없애는 게 최우선이다.
2막 최종장에서 가장 많은 플레이어를 배드엔딩으로 몰고 간 루시의 변수.
글래스트 교수에게 설득 당해 테일리를 적대하는 상황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그 위험성에 비해, 방지하는 건 쉽다.
그냥 루시와 글래스트를 못 만나게 하면 그만이다. 철저하게 루시를 감시 하에 두고 딴짓 못하게 지켜보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뭔가 정말 루시를 돌보는 사람이라도 된 듯한 어감이 되어버리는데…. 뭐, 상황이 그렇다.
“왜?”
루시가 기운 없이 멍한 눈으로 뭘 그런 말을 다 하냐고 물어 본다.
왜? 라고 하면… 뭐라 이유를 대기가 무척 곤란하다.
나를 쳐다보는 그 멍한 눈에서… 문득 과거의 기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을 수도 없이 플레이 해본 자에게 루시 메이릴이란 인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것은, 플레이어로서 맞이하는 첫 번째 벽이다. 넘을 수 없는 고비다.
3막 최종장. 루시 토벌전.
오론산 꼭대기에서 4대 최고위 정령을 전부 소환하고, 최고위 마법을 기초마법 마냥 수없이 휘둘러 대며… 온갖 교직원들과 황실, 상단, 학사 내부 세력까지 전부 힘을 모아 뛰어들어도 토벌할 수가 없던 살아있는 자연재해.
단 하나만 사용할 줄 알아도 엔드 스펙 취급 받는 마법을 비처럼 뿌려대는 모습과, 접근조차 할 수 없어 공격을 버텨내기만 하는 데에 모든 소모품을 소비해야 했던 최초 트라이의 기억.
결국 플레이어의 혼자 힘으로는 토벌할 수 없기에, 세계관 내에서도 엔드급 스펙을 가진 NPC들이 한 데 모여서야 겨우 돌파 할 수있도록 설계되어 있던 존재다.
실베니아의 낙제 검성 최종 엔딩을 보는 바로 그 날까지, 루시를 이길 수 있는 스펙을 만들어낼 방법은 없다.
온갖 상성 분석과 소모품 활용, 전략 수립을 통해 엔드 스펙의 테일리가 루시와 비벼보거나 일시적으로 제압해볼 수는 있겠지만… 꼼수를 이중 삼중으로 활용했을 때의 이야기다.
근원적인 강함은 적어도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대에는 루시를 따라잡을 수 있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사랑을 독차지해 비겁할 정도로 강한 힘과 마나 감응을 부여 받은 소녀다.
지금 이 상태의 루시만으로도 말도 안되는 힘이 엿보이지만, 이조차 재능의 절반도 개화하지 않은 상태다.
각 인물 별로 그 힘의 세기를 막대 그래프로 표현한다면, 루시 혼자 그래프를 뚫어버려서 나머지 인물들이 다 고만고만해 보이게 되어버린다.
설정집에서도 루시의 그래프는 따로 빼놓았을 정도로 규격화 되지 않은 존재다.
그러니만큼.. 루시는 통제불가능한 변수다.
제 멋대로 도시를 노니는 길고양이들처럼… 그 누구도 이 소녀를 다룰 수 없다.
제 스스로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자고 싶을 때 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도 없고, 하는 행동들도 종잡을 수가 없다.
– 킁, 킁.
당장 내가 아무 말도 안하고 있자, 내 손등에 코를 대고는 육포 냄새가 나지 않나 킁킁 대고 있다.
이 녀석이 어떤 인간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인지라,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가 너랑 붙어 다녀야 할 필요가 없잖아. 이미 너 안전해졌어.”
멍하지만 나름대로 청아한 목소리가 스며나왔다. 루시는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이야기했다.
안 그래도 말이 영 안통하는 이 소녀를 상대로 구구절절 설명을 한들 먹힐 리가 없다.
“루시. 너는 강하잖아. 그런 너랑 있으면 안심이 된다.”
“…”
“뭐 별 거 하지도 않고, 별 얘기 안해도 그냥 옆에만 있다보면 든든한 느낌이 들 때도 있잖아. 그런 느낌 모르냐?”
“….”
루시는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느릿느릿 대답한다.
“알아.”
“그래, 바로 그거야.”
남아도는 소매가 휘적거리며, 루시는 투덜거렸다.
“근데 그건 완전 네 사정이잖아.”
“맞아.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잖아. 일단 내가 이 지하수로에서 나갈 때 까지 만이라도 나랑 꼭 붙어 있어줘라.”
“이 지하수로 안에서 나가고 싶은 거면 내가 내보내줄게.”
“나가기 전에 꼭 처리해야할 일이 좀 있어.”
“우우-”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잔뜩 뿔이 나있다.
“그럼 알았어. 대신 나도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
멍한 눈으로 팔을 쭉 뻗어서 허공에 휙 벌린 모습이 뭘 말하려는지 알 거 같다, 어쨌든 이 소녀는 낮잠 잘만한 장소를 찾고 있던 것이다.
이 조막만한 소녀 하나 업어주는 거 뭐 그리 힘든 일도 아니다.
휙 하고 들어보면, 정말 이게 사람 무게가 맞나 싶을 정도로 휙휙 들린다.
그대로 루시를 들쳐 업으니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목에 팔을 감고, 다리를 몇 번 들썩이며 자세를 고쳐잡고는 숙면을 취할 준비를 한다.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장소라도 찾은 것처럼, 내 어깨에 턱을 얹고 흠흠대며 흡족해한다.
이내 고로롱 거리는 소리가 들리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 일단 이렇게 루시가 어디가지 못하게 꽉 잡고 있으면 된다.
이대로 처리해야 할 일만 얼른 마무리 하자.
일단 반파된 도서관일지언정 챙길 게 많이 남아있다.
레이나도 제압 당했으니, 눈치 볼 거 없이 최대한 챙길 거 챙겨서 지하수로 쪽으로 나가자.
가는 길에 나를 구하러 온 예니카나 다른 인물들이 있으면 얼른 괜찮다고 사정 설명을 하자, 그리고 내 멀쩡한 모습을 보여준 뒤 데리고 나가면 된다.
혹시 테일리와 만나면 아일라의 상태를 설명해준다. 그럼 더 적극적으로 글래스트를 토벌하러 가겠지.
글래스트를 토벌하려는 일행들은 지금쯤 모두 지하수로를 돌파하고 있을 것이다.
나 혼자만 역주행으로 탈출극을 찍고 있는 상황이 퍽 어이 없었다.
*
테일리 일행은 지하수로의 깊은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다들 잔뜩 긴장된 상태였다.
처음 막 지하수로의 초입에 도착해, 정신을 잃은 도로시와 온갖 골렘 파편들을 보았을 때 이미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 지하수로 내부에는… 보이는 것을 닥치는대로 다 부수고 다니는 무언가가 있다.
“다들 긴장을 절대 풀지마…!”
테일리 맥로어는 아직 검성이라 불릴 수준은 못되지만, 적어도 동년배 학생들이 함부로 여기지 못할 정도의 성장은 해냈다.
1학년 에이스 멤버들에 비하면 아직 좀 못 미치지만, 상황이 잘 받쳐주면 충분히 상대해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전투 스킬 숙련도를 쌓아온 것이다.
중간 시험 때는 직스도 테일리의 발전에 박수를 쳐줄 수밖에 없었다.
많은 시련을 오로지 근성과 노력만으로 꺾어내며 성장해왔던 테일리의 삶이 엿보였다.
그렇기에 직스는 언제나 테일리를 존중했다.
살아남기 위해 피를 흘리고 뼈를 깎으며 노력해온 자들에게는, 그 특유의 독기가 감돈다.
직스는 그 독기를 언제나 존중할 줄 아는 자였다.
“굳이 여기서 더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척 봐도 이 지하수로 안에는 우리 말고 사람이 더 있는 것 같은데…. 방금 그 진동 소리 못 들었어…? 지진도 엄청났잖아…! 역시 그… 그냥…. 이런 위험한 짓 하지 말고…. 그냥 나가는 게 어때….?”
덜덜 떠는 클레비어스가 그런 말을 하자, 엘비라가 클레비어스의 발등을 꽉 밟았다.
“또 멍청한 소리 하네, 클레비어스! 너 아일라 안 구할 거야?”
“애, 애초에…! 아일라 그 여자는 나한테는 화만 냈단 말이야! 그런 여자 굳이 구하고 싶지도 않아! 거기다가 그…. 에드 로스테일러… 그 놈까지 우리가 구해야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클레비어스.”
작고 나지막한 어조의 목소리가 지하수로 사이를 갈랐다.
테일리 맥로어였다.
“정말 미안해. 그래도, 나는 아일라를 꼭 구하고 싶어. 이렇게 부탁할게.”
이미 테일리는 클레비어스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부탁한 와중이었다.
이제와서 말을 바꾼 클레비어스가 한심한 것이지만, 테일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고개 숙인 테일리를 앞에 두고, 클레비어스는 말을 더듬었다.
“윽. 크윽…! 악…! 진짜 왜 그러는데 나한테!”
클레비어스도 아일라가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매사 도망만 치려는 클레비어스를 한심하게 여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질책하고 바로잡아 주려 했던 소녀다.
“여기까지 와서 뒤로 빼지 마라, 클레비어스.”
직스는 클레비어스의 어깨를 두어대 툭툭 치고, 다시 한 번 토벌대의 면면들을 살폈다.
낙제검성 테일리, 초목의 창 직스, 음침한 클레비어스, 참견쟁이 엘비라… 그리고 낭만가 아델.
“어머.”
일행들 사이에 만돌린을 들고 그 현을 조율하고 있던 금발의 소녀가 빙그레 웃었다.
포근한 이목구비와 나긋한 목소리가 어찌나 편안한지 듣고 있자면 마음의 피로가 덜어져 나가는 기분이다.
귓가에 꽂혀있는 수선화 두어송이는 아델의 뽀얀 피부에 밀려 그 색을 온전히 발하지 못한다.
폭포처럼 흘러 내려가는 머릿결 중간 중간에는 수선화 뿐만이 아니라 코스모스, 장미, 튤립 따위의 모양을 한 머리핀이 어림잡아 열댓개는 붙어 있었다.
예언가 아델. 아니, 자칭하기를 낭만가 아델이었다.
“아일라라는 아이에 대해 자세히 듣진 못했지만, 다들 이렇게 진심으로 구하고 싶어하는 걸 보니 정말 좋은 사람인가봐.”
“응. 아일라는 정말 내 인생의 동반자 같은 사람이야.”
“그래, 테일리. 그래도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거야.”
아델은 마법사이기 이전에 점성술사다.
백발백중까지는 아니지만, 별의 기운을 받아 슬쩍 엿보는 미래의 장면 장면은 정곡을 찌를 때가 더 많다.
“앞으로 마주할 상대는… 절대 쉽지 않을 거란 느낌이 들어.”
글래스트 교수의 행적을 보아하면, 이번 현자의 봉서 탈취는 철저히 계획된 범죄다.
이런 추격극을 치르게 될 것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을 터였다.
어쨌든 침입자들의 추격을 뿌리칠 함정이나 수단을 잔뜩 준비해놓았을 가능성이 컸다.
초입에서 보았던 마성 골렘 파편들 또한 그 흔적 중 하나겠지.
3학년 연금부 수석인 도로시 또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하수로를 돌파하지 못해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던 게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지하수로 앞을 가로막고 있을 것인가.
3학년 연금부 수석조차도 돌파하지 못한 상대가 있다면…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일행은 한참동안 정신을 집중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 쾅! 쾅!
이윽고 모퉁이 건너 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 꺄아아아아아악!
날카로운 여성의 비명소리까지 들려오자, 일행은 서로 눈을 맞추고 재빠르게 달려나갔다. 이 앞에 누군가가 있다.
모퉁이를 꺾고 나오자마자 보이는 것은, 거대한 화염의 정령이었다.
넓직한 수로의 연결부, 둥그렇게 펼쳐져 있는 물길이 마치 광장처럼 보인다. 수로 안 수많은 갈래길이 일단 여기서 한 번 만나는 형태인 것이다.
그 중심에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제, 제발…! 몰라! 나도 모른다구! 나는 그냥 여기서 상황 잘 돌아가나 통솔하고만 있으라구…! 그런 지시만 받았다구…! 제발! 한 번만 봐줘! 한 번만!”
소녀가 있다. 뒤돌아 있는 모습이라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소녀의 정령에 둘러싸인 채로… 공포의 비명을 지르고 있는 자는 익히 보아 알고 있다.
1학년 담당 교수들 중에서도 친숙한 이미지 덕에 학생들이 많이 좋아하는 클레어 조교수였다.
젊고, 학생다운 사고에, 스스럼 없어 대부분의 학생들이 좋아했다.
교수진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기초 전투 마법에 대해서만큼은 어지간한 학생들은 비벼볼 수도 없는 수준이지만… 상대가 너무 안 좋았다.
소녀는 떡갈나비 지팡이를 짚고서는 클레어 조교수의 귓가에 뭐라 속삭였다. 대략 대여섯 글자 정도 밖에 안 되는 말이었다.
“모, 몰라! 정말 몰라! 애초에 계획된 게 아니었어 그건! 단순한… 단순한 변덕이었어…! 하, 한 번만 봐줘! 제발…!”
이내 눈물을 흘리다가 지쳐서 클레어 조교수는 수로의 바닥에 철퍼덕 하고 쓰러졌다.
바닥에 앉은 채로 뒷걸음질을 치다가, 이내 벽에 도달했다. 소녀의 몸을 두르고 있는 정령들이 포효하자, 결국 클레어 조교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여전히 소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일행들은 이미 그 소녀의 정체를 깨닫고 있었다.
특히 테일리와 엘비라는 이미 저 소녀를 두 번씩이나 적으로 상대해 보았다.
오필리스관 1층에서 에드를 지키기 위해 온갖 중위 정령을 휘두르던 그 공포의 화신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때엔 타칸의 힘도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으나, 그 상태마저 이길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테일리나 엘비라나 꽤나 스펙 상승이 있었다. 훨씬 더 할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 쪽도 당시에는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
심지어 여기에는, 저 소녀를 막아내줄 에드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점을 생각해보면 오필리스관에서 언뜻 보았던 소녀의 힘은 맛보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학습된 공포가 테일리의 몸에 피어오른다. 재빠르게 검을 뽑아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으음… 오왼왼오왼오왼이 아니었나? 애초에 오른쪽으로 너무 많이 갔나…? 으음…”
그런 말을 하던 소녀가 어둠속에서 뒤를 돈다. 테일리 일행의 인기척을 눈치챈 것이다.
정령들의 틈바구니에서 돌아본 소녀는, 평소처럼 발랄해보이지만… 그 누구도 쉬이 입을 뗄 수가 없다.
“어라. 안녕, 얘들아.”
직스를 제외한 전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는다. 직스는 오히려 반가워하는 듯 하다.
그러고보면 이 지하수로의 초입, 쓰러져 있던 도로시의 근처에 떨어져있던 숄.
예쁜 코스모스 자수가 붙어있던 그 숄의 주인은… 분명 저 소녀다.
지하수로에 들어온 도로시를 제압한 것은 분명 저 소녀인 것이다.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허나, 기절해 있던 도로시의 모습이나, 그 선량한 클레어 조교수까지 공포에 떨며 기절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니… 절대로 방심할 수가 없다.
일동 마른 침을 삼키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직스만 혼자 분위기 파악 못하고 얘네들 왜 이러나 쳐다보고 있었다.
널찍하니 펼쳐진 지하수로의 둥그런 분기점. 그 중심부에서 침입자를 기다리고 있던 소녀 예니카 페일로버.
처음으로 테일리 일행을 막아선 적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강한 상대였다.
그러나, 이길 수 없는 상대라 할지라도 용기를 가지고 돌파해야만 할 때가 있다. 다들 아일라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으니까.
‘얘…얘네들 표정 왜 이래…?! 내, 내가 뭐 잘못한 걸까…? 크… 클레어 조교수님한테 너무 심하게 굴었나…? 근데, 난 물어보기만 했는데 조교수님이 혼자서 호들갑 떨었을 뿐인걸…!’
그러나 소심한 예니카는 뭐라 말도 못하고, 제 속으로만 정령들에게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어쨌든 한시가 바쁜 상황이다.
붙잡힌 에드가 아무도 구하러 와주지 않아서 곤경에 처해 있을까봐 너무 걱정스럽다. 은근히 적이 많은 에드라서… 역시 자기가 구하러 가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에드를 구할만한 사람은 자기밖에 없지 않는가.
아무튼 바쁘다.
바빠 죽겠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