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62)
글래스트 토벌전 (11)
시야각이 좁다. 근시인 글래스트 교수의 오래된 고민이었다.
책을 많이 보는 직업이다 보니 근시에 시달리고, 시야각이 좁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교사로서의 삶이란 결국 정적인 법이다.
세상 대다수의 직업이 그러하듯이, 수십년을 반복하다보면 모든 것이 일상화되고 패턴화된다.
파란만장하고 엉망진창 같던 1년 간의 학사 일정도 십수년을 반복하다보니 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때 그 때 불룩 튀어나오는 이변이나 문제들도, 지나고 보면 그런 일도 있었지… 하는 과거의 경험으로만 남게 된다.
결국 기억 속에 남는 건 같은 틀로 찍어내는 듯한 일상의 풍경이다.
개인 연구실의 커다란 책상에 앉아, 필사한 현자의 봉서를 숙독하고, 성위 마력을 분석하고, 학사 커리큘럼을 관리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 쓸 교재들을 검토하고.
그러다 보면 창밖의 풍경이 바뀐다.
눈이 온다.
비가 온다.
바람이 분다.
동쪽에서 해가 뜨더니 정신을 차려보면 서쪽 하늘로 도망가고 있다.
사고를 친 막내 교수가 쩔쩔대며 용서를 구하러 온다.
원소학 전공 1학년생들이 중급마법을 예습하고 싶어 개인 연구실까지 찾아온다.
일을 보러 가던 최고 학장이 중간에 들러 차를 한 잔 마시러 들어온다.
그렇게 같은 자리에 앉아 일에 매몰되어 있다 보면 아픈 기억도 어느새 잊게 된다.
아물지 못할 기억이라면 천천히 잊어가는 수밖에 없다.
치료할 방법을 찾지 못하면 결국 고통을 잊는 방법을 찾게 될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다크서클이 짙어지고, 눈이 퀭해지고, 머릿결이 푸석해진다. 해골바가지 같다는 소문을 들어도 딱히 감정이 상하진 않는다.
연구실 책상에 앉아 깃펜을 휘두르고 있다보면 어느샌가 시야가 가물가물해질 때가 있다.
또 그놈의 근시가 문제인가, 아니면 체력이 달리는 것일까, 좀 쉬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했으나… 평소에 비하면 업무강도가 그리 가혹한 편도 아니다.
이따금씩 몰려오는 옛 기억의 편린이 다시금 뇌리를 파고든다.
허리를 펴고,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다. 늘 그랬듯이 눈을 지그시 감는다.
더 이상 뮤리의 얼굴을 회상하는 건 부질 없다. 제 살을 깎아 먹는 짓일 뿐이다.
그렇다면 눈꺼풀 너머의 긴 어둠에 무엇을 덧그려야할까.
그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 갓 붓을 든 초보 화가가 바라본 거대한 캔버스다.
망망대해보다도 드넓은 공백을 채우는 걸 포기하고, 다시금 눈을 떴을 땐…검을 든 테일리 일행이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에드는 난간에서 내려왔다. 트릭스관까지 역주행하며 전체적인 상황 검토가 끝났으니, 슬슬 지하수로 쪽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마지막까지 현장 근처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에드가 난간에서 내려오자 루시도 폴짝거리며 뛰어내려오더니, 소매를 움켜쥐고는 뽈뽈 거리며 따라 붙었다.
에드가 무슨 일 있냐고 묻자, 루시는 고개를 두어 번 가로저으며 그냥 같이 가자고 대답한다.
둘은 그렇게 계단을 타고 트릭스관의 옥상에서 내려왔다.
테일리의 검격이 마력탑 옥상의 공기를 갈랐다.
글래스트에게 닿기 전에 발현된 보호마법은 검격의 진행을 막는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일리의 검이 튀어나간다.
그러나 이어서 따라붙은 직스가 너클을 낀 주먹을 글래스트의 동선에 내지른다. 강화된 바람 마법까지 동반한 일격이었다. 허나 그마저도 간파한 글래스트 교수는 고위 성위 마법 ‘시간 감옥’을 구현해낸다.
그대로 제압당한 직스는 움직이지 못한다. 연달아 발현된 시간 감옥에 엘비라와 아델까지도 제압당하고 만다.
테일리는 검성식으로 튕겨내고, 클레비어스는 애초에 사거리 밖으로 나가 있어서 무사했다. 그래도 절반이 넘는 전력이 무력화 당했다.
그러나 테일리의 이글거리는 눈동자에는 전의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겁쟁이 클레비어스마저도 그 눈동자에 감화되어, 떨리는 손을 이끌고 전장에 뛰어든다.
글래스트 교수는 두 전사의 검격을 피하며 끊임없이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마공학 용품들을 하나둘씩 꺼내들기 시작한다.
트릭스관 1층에 도달한 에드는 상황이 거의 정리되었음을 확인했다.
대부분의 혼란도 수습되었고, 우왕좌왕 하는 학생들의 표정도 모두 편안해진 것 같다.
옷 소매를 움켜쥐고 따라붙는 루시와 함께 트릭스관의 1층 복도를 가로지른다.
마성 골렘 파편들이 온갖 곳에 가득하다. 테일리의 전투 흔적이다.
그와 싸웠던 수석 연구가 멜버릭은 의식 불명이다.
혼자 날뛰는 테일리를 막아보려고 했던 학생회장 베로스도 구석에서 휴식 중이다. 테일리는 아일라를 납치당하는 바람에 분노에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베로스조차도 그런 테일리를 막지는 못했던 것이다.
임기도 거의 끝나가는데 고생이 많다고 위로하는 에드에게 베로스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도 학생회장이라는 입장 때문에 테일리를 막아섰을 뿐, 테일리의 독단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한다.
2학기도 곧 끝이다. 방학이 되면 더 바빠질 것이고, 차기 학생회장 선거가 끝난다면 슬슬 졸업 준비를 해야한다. 학생회장 베로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임기 동안 무엇을 했나… 결국 휘둘리며 살았을 뿐이라며 회고하고는, 부서진 천장으로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클레비어스의 검격이 글래스트 교수의 어깨에 유효타로 들어간다. 깊진 않지만 의미 있는 상처였다. 글래스트 교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충격 강화 파동구’를 발동 시킨다.
충격에 밀려나간 클레비어스는 마력탑 바깥으로 추락할 뻔 하지만, 테일리가 겨우 그를 잡아 끌었다. 두려움에 다리를 덜덜 떨던 클레비어스는 못 참고 호들갑을 떨었다.
겨우 거리를 벌린 글래스트 교수가 어깨에 난 상처를 갈무리했다. 피가 스며 나오는 로브를 억지로 동여묶고, 근접 전사들을 견제하기 위해 온갖 기초 원소 마법들을 영창해댔다.
미숙한 학생들에게는 하나 하나가 집중해서 사용해야할 마법이지만, 원숙한 교수인 글래스트에게는 다중 영창을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손쉬운 마법들이었다.
단 둘 뿐인 근접 전사로는 대처하기 힘들다. 그러나 테일리는 용맹하게 원소 마법 사이로 돌진했다.
교사동을 가로질러서 지하수로 입구 방향으로 나아가던 에드와 루시는 생활동 쪽에서 오던 로르텔과 만났다.
황금왕 엘테를 어떻게 수습했냐고 에드가 묻자, 로르텔은 일단 상회 지부의 손님용 방에 감금해두었다고 이야기 한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엘테는 자신의 기득권을 모두 잃게 되어 있다.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만 관리하면 더 이상 문제는 없다. 이미 모든 주도권이 넘어 왔으니, 더 이상 무슨 술수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한 때는 아버지였던 자인데, 잃게 되어 기분이 복잡하진 않느냐고 묻자 로르텔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는 이야기한다. 상실의 아픔이란 것조차 그녀에게는 기만에 불과하다.
잃었다는 것은 한 번이라도 소중한 것을 손에 넣어본 적이 있다는 뜻이다.
로르텔은 단 한번도 진심을 다해 교감할 수 있는 가족이나 친우 비스무리한 관계를 손에 넣어 본 적이 없다.
상실조차도 결국 가져본 적 있는 자의 특권이라 이야기하며, 로르텔과 에드는 나란히 마력탑을 올려다 보았다.
마력탑이 내뿜는 빛이 처연하게 학사를 감싸고 있었다.
기초 마법으로 테일리와 클레비어스를 견제하던 글래스트가 새로운 성위 마력을 뿜어내었다.
검붉은 기조의 불길한 마력이 마력탑의 옥상을 가득 채워간다.
고위 성위 마법 ‘시간 가속’.
순식간에 글래스트 교수의 몸을 타고 흐르는 마력이 폭증하더니, 몸놀림이 말도 안되는 수준으로 빨라진다.
행동 자체는 느리고 굼뜬데, 속도는 이상할 정도로 재빠르다. 그야말로 글래스트 교수의 시간만 빨리 감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초 마법의 구사조차도 말도 안되는 속력으로 늘어, 돌파는 커녕 아예 버티는 것조차 힘들다.
그러나 검성식을 발동한 테일리의 머리칼이 새하얗게 물들고, 눈동자는 새빨간 빛이 올라온다.
각성한 테일리가 기초 마법 사이를 뚫고 거리를 좁혀간다.
가속된 속도조차도 따라잡기 시작하는 테일리의 움직임에 글래스트 교수는 당황한다. 재빨리 충격 강화 파동구를 다시 꺼내들어 발동시키지만, 검성 테일리는 그 파동조차도 베어버린다.
결국 거리를 내어준 글래스트 교수는 옆구리를 베이고 만다. 피가 흐르고 격통이 치솟았다.
글래스트 교수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고, 마력 반응이 눈에 띄게 불안정 해진다.
그러나 글래스트 교수의 바람 칼날 또한 테일리에게 유효타로 들어갔다.
복부에 자상을 입으며 나가떨어진 테일리지만, 다시금 피를 흘리며 일어선다. 격통을 이겨내고, 아일라를 구해내겠다는 숭고한 일념만으로 다시금 글래스트 교수와 대치한다.
불안정해진 성위 마력에는 결국 빈틈이 생겨나고 만다. 일순간 약해진 시간 감옥을 깨부숴버리고, 엘비라가 봉인에서 풀려난다.
재빠르게 상황 파악을 끝낸 엘비라가 폭발 시약들을 집어던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원거리 지원이 생겨난 테일리 파티에 희망이 감돈다.
글래스트 교수는 재빠르게 새로운 성위 마법 ‘소형 시간 역행’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에드와 루시, 로르텔은 나란히 걸어 어느새 지하수로 입구까지 도달했다.
이대로 들어가서 지하수로 내부도 확인해볼까 고민하던 차, 입구에서부터 3학년 연금부 수석 도로시가 올라왔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것이다.
에드가 예의상 괜찮냐고 묻자, 도로시는 머리가 너무 아프고 어지럽다고 토로한다. 그리고는 공포스러웠던 예니카와의 대치를 실감나게 이야기 한다.
에드는 뭐라 말하기도 좀 그래서 그냥 듣고만 있는다. 도로시는 덜덜 떨며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문득 하늘에 가득한 마력탑들을 올려다 본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이야기 한다. 글래스트 교수가 어떤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도로시에게는 자신을 인정해준 소중한 은사님이라고.
항상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거리감이 좁혀지질 않았지만, 그래도 이 실베니아에 와서 만난 교사 중 으뜸을 뽑아보라면 자기는 항상 글래스트를 꼽을 거라고 이야기 한다.
에드는 그 말을 듣고서, 도로시가 어째서 이런 계획에 가담했는지 납득한다. 만인이 모두 심술궂다 욕하는 글래스트지만, 누군가에게는 착실히 은사로서 제 역할을 해온 것이다.
글래스트 교수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고, 하늘을 뒤덮는 검붉은 마력이 더 장대해졌다.
‘소형 시간 역행’은 자기 몸의 시간을 되감아 모든 상처를 없던 것으로 되돌리는 마법이다.
혼신을 다한 마력 발현에 테일리와 엘비라, 클레비어스는 눈을 부릅떴다. 인과의 법칙을 무시하는 성위 마법의 힘에 테일리는 순간적으로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서 좌절할 순 없었다. 평생의 동반자 아일라의 목숨이 담보로 잡혀 있는 한, 테일리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고되고 힘든 시련만이 가득한 삶에서, 아일라의 존재가 얼마나 거대했는지는 오로지 테일리 자신만이 안다.
발현된 검성식이 2단계로 돌입한다. 순간적으로 개방된 기술들이 테일리의 뇌리에 새겨진다.
그러나 글래스트 교수는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극한까지 연구된 글래스트 교수의 성위 마법이 테일리 일행을 뒤덮는다. 고위 성위 마법 ‘악몽 각인’. 테일리의 검성식으로조차 베어낼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악몽의 늪에 빠진 테일리 일행은 수십수백번의 죽음을 환각 속에서 맞이 한다.
칼에 찔리고, 베이고, 상처 입으면서 정신이 부서질 때까지 계속해서 그런 환영을 반복한다.
시간으로 치면 한 순간이지만, 마음이 수백 번은 부서졌어도 이상하지 않은 시련이었다.
그러나 테일리도, 클레비어스도, 엘비라도 순식간에 환각을 깨부수고 나왔다.
구토를 해대는 클레비어스와 눈물 콧물을 질질 짜는 엘비라와는 달리, 테일리는 이를 악물고 다시금 글래스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유약해진 몸으로 글래스트 교수의 수비를 뚫어낼 수는 없었다. 글래스트 교수가 불러낸 하위 정령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더니, 테일리의 몸에 원소계 마법들을 쏟아내었다.
수십 번의 검격이 오가며 최대한 돌파해보려고 했던 테일리지만, 끝끝내 테일리는 글래스트 교수가 있는 곳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만신창이 상태로 무너지고 만다.
글래스트 교수가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그의 복부를 뚫고 얼음 창이 북 솟아오른다.
테일리와의 전투 때문에 성위 마력이 흐트러진 틈을 타, 직스가 시간 감옥을 깨부수고 나왔다.
곧바로 상황 판단을 끝내고, 지체 없이 중위 빙결계 마법 ‘얼음창’을 시전한 것이다.
빙결 마법에 조예가 깊은 로르텔에 비하면 다소 조잡했지만, 당장에 재빠르게 발현해서 글래스트 교수를 제압하기엔 충분했다.
글래스트 교수의 입에서부터 푸슉하고 선혈이 튀었다. 치명상이었다.
그러나 수명까지 가불해서 다시 한 번 발현한 시간 마법이 글래스트 교수의 상처를 되돌린다.
도로시를 마중보내고 나니 어느덧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에드와 로르텔은 의논을 한 끝에 지하수로에는 진입하지 않았다. 딱 봐도 연속되는 지진에 지반이 불안정해 보여서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에드는 아직 영혼도서관에 남겨두고온 마공학용품들과 제조식들이 아까워서 안타까운 감정에 빠지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담보로 진입하기도 좀 그랬다.
그냥 여기서 모든 일이 마무리 되는 것을 지켜보자고 생각하고 있으니, 숲 한 켠에서 예니카가 나왔다.
엘테의 용병대가 별 이변없이 퇴각하는 것을 확인하고 온 예니카였다. 중간에 어딘가 들르고 왔는지 생각보다 늦었다.
어디 다녀왔냐고 에드가 묻자, 꼭 확인하고 싶은게 있다고 한다.
그리고는 예니카가 설명 한다. 이전에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가 끝나고 나서 타칸이 예니카에게 일러준 말이었다.
– ‘그러고보면, 북쪽숲 외곽에서 이상한 마력 흐름이 좀 감지됐다. 시간 나면 확인해 봐야겠더군. ‘
– ‘유독 밤에 활발해지는 걸 보면 성위 마법에 관련된 법진인 것 같던데. 정확한 위치는 메릴다가 특정해줄 거다.’
성위 마법이라고 하니 생각이 나서 꼭 직접 확인하고픈 모양이다. 마력탑을 세우기 위해 퍼뜨린 법진 중 하나인가 싶었으나, 북쪽 숲 안쪽에는 단 하나의 마력탑도 구현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 새겨놓은 법진인가. 예니카는 그게 너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고. 같이 가줄 수 있냐고 예니카가 묻기에, 에드도 신경이 쓰여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길을 나서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느티나무 뒤에서 숲풀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난다.
히익! 하는 소리도 함께 들려온다.
누가 숨어있나 봤더니, 조교수 클레어 엘핀이 혼자서 무릎을 껴안고 앉아 있었다.
상처는 되돌아왔을지언정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여러 번 칼에 찔렸던 고통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 글래스트 교수의 정신을 뒤흔든다.
한계까지 끌어올린 금지된 마력 탓에 눈에는 실핏줄이 피어오르고, 안 그래도 창백한 안색은 더 하얗게 물든다.
강화 출력 갈퀴손, 충격 강화 파동구, 심연의 부름, 발화, 바람 칼날, 겁화, 마성전염, 시간 가속, 기초 정령술, 단거리 공간 이동, 역중력, 정화의 바람, 마성 골렘 소환술, 폭성, 마물족 개방, 공간 빙결, 재액의 시약, 밤나비꽃 시약, 연막 구름 시약, 강철 바위 시약.
온갖 마공학 용품과 원소계 마법, 소환계 마법, 공간계 마법, 간섭계 마법, 저주계 마법, 연금 시약까지 동원해가며 전장을 지배해댄다. 마력탑의 꼭대기는 꽤 공간이 넓지만, 어느 한 곳도 안심하고 서있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테일리 일행은 궁지에 몰리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일리의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이쯤되면 좌절할 법도 하건만, 이글이글 불타는 두 눈동자는 언제나 제 편이 되어주고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아일라를 향해있다. 아일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에 담긴 그 의지력은 누가와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테일리를 필두로한 토벌대가 글래스트 교수의 방해 마법들을 뚫어내기 시작한다.
우회하고, 무력화하고, 때로는 받아내며 거리를 좁힌 근접 전사들이 조금씩 글래스트 교수의 몸에 상처를 낸다.
피하고, 다시 거리를 벌리고, 막아내지만 한계가 있다. 애초에 글래스트 교수는 근접전에 약하다.
어깨에서 다시 선혈이 피어오르고, 쇄골 근처에 단검이 스치고 지나가고, 허벅지를 마법이 꿰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금지된 마력을 한계까지 과부하시켜 자기 몸의 시간을 되감는다. 제 아무리 치명상을 반복해서 입혀도 글래스트 교수는 쓰러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드높고 튼튼한 벽을 맨주먹으로 치고 있는 느낌이지만, 테일리 일행은 좌절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패배란 용납할 수 없다. 고통에 굴복하지 않는다. 시련에 좌절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영웅의 행보다.
마지막으로 남은 시간 감옥을 깨부수고, ‘낭만가 아델’이 전장에 합류했다.
예니카의 얼굴을 보고 히익 거리며 놀란 클레어 조교수는, 뭔가 공포라도 각인 됐는지 잘못했다고 연신 사과해대기 시작했다.
그 반응에 오히려 곤란해진 예니카가 뽈뽈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했지만, 그럼에도 후련한 기분이 들진 않았는지 머쓱한 얼굴로 식은 땀을 흘려대고 있었다.
에드가 여기에서 뭐하고 있었냐고 묻자, 지하수로가 위험해보여서 일단 도망나왔다고 대답한다.
에드는 클레어의 얼굴을 관찰해보았다. 이런저런 곳의 피부가 떠 있고, 부스스하고,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설마 예니카가 너무 무서워서 울기까지 한 거냐고 물을까 했는데… 눈물자욱은 이미 꽤 말라있는 상태였다.
울고 있었냐고 묻자, 클레어 조교수는 우왕좌왕 당황하더니… 하하하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전장에서 빠져나와, 치솟은 마력탑들을 덧없이 올려다보며 클레어는 눈물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뭐가 그리 슬프냐고 묻기도 전에, 클레어 조교수는 먼저 대답했다.
지난한 세월, 실베니아에 입학해서 긴 세월동안 글래스트 교수의 수제자로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글래스트 교수님은 그냥 누가 봐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잖아. 꽉 막힌 꼰대에, 심술 궂고, 생긴 것도 해골 바가지에, 일은 다 떠넘기고, 자기만 잘났고, 독선적이고, 그런 주제에 설교는 심하고, 뭐 좀 잘못하면 질책밖에 모르고… 하여튼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는 사람이야.”
그녀는 아무래도 이 일의 전말이나 글래스트 교수의 말로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직감이 뛰어나고, 쓸 데 없는 곳에서 눈썰미가 좋은 인간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이 실베니아에 와서 만난 사람 중에서는… 가장 학자다운 학자였어.”
코를 훌쩍대며, 클레어 조교수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밤하늘의 마력탑을 올려다보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녀는 학위 과정부터 초임 교수 시절까지 글래스트 교수와 함께해 온… 그의 수제자였던 것이다.
아델의 합류에 조금씩 전황이 뒤집어진다. 정화 마법과 아군 강화에 특출난 재능을 가진 아델의 지원까지 더 해지자, 글래스트 교수가 거리를 내주는 빈도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
배를 찔리고, 어깨를 찔리고, 반복해서 치명상을 입지만, 글래스트 교수는 눈 하나 꿈쩍 안하고 다시 일어선다.
어느새 피범벅이 된 교직원 로브도 아랑곳 하지 않고 동여맨다.
상처는 테일리도 만만치 않다. 심지어 테일리는 시간을 되감을 수도 없다.
이미 피칠갑이 되어있는 몸 상태지만, 다시금 검을 들어올린다. 반복되는 정신계 마법 공격에 머리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다.
그럼에도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두다리를 꿋꿋이 붙들고 있다. 의지력도 이쯤 되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거의 좀비나 다름없다. 타고난 의지력은 운명이 테일리에게 부여해준 유일한 축복이었다.
글래스트 교수는 클레비어스의 검격을 막아내고 파동계 마법으로 그를 튕겨낸다. 그 틈을 탄 엘비라의 기초 마법이 글래스트 교수의 복부를 강타하지만, 기합으로 이겨내고 성위 마력을 끌어낸다.
그러나 이미 직스의 바람 마법이 등 뒤를 덮치고 있었다. 일부는 막아냈지만, 상처를 피할 순 없었다. 어깨 부근이 다시 한 번 꿰뚫렸다.
연막 시약을 깨트려서 순식간에 시야를 가린다. 그러나 테일리의 검격이 광풍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시야를 걷어낸다.
재빠르게 접근한 테일리의 몸을 마공학품을 이용해 날려버리려 하지만, 갑자기 충격 강화 파동구가 작동하질 않는다. 아델의 방해 마법이 일시적으로 마공학 용품의 마력 회로를 고장낸 것이다.
그대로 기초 마법이라도 발현해 테일리의 움직임을 제지해보려 했지만, 이미 복부가 테일리의 검에 꿰뚫려 있었다.
“커억.”
다시 입에서 선혈을 내뿜고, 비틀거리며… 글래스트 교수는 성위 마력을 발현해냈다.
그러나, 몸의 시간은 더 이상 되돌아가지 않는다.
한계까지 과부하한 마력의 흐름은 그에게 더 이상의 기적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 크허.”
검을 뽑아낸 테일리가 다시 한 번 더 검격을 가했다.
글래스트 교수는 막아내지 못했다.
당연히 상처를 치료해내고 전투가 이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이번 치명상이 다시 되돌아 오는 일은 없었다.
피를 가득 흘리며, 글래스트 교수는 비틀거리는 몸놀림으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으, 헉.”
테일리 일행은 일제히 전투 자세를 풀지 않았다. 혹시나 연기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추가적인 일격을 가할 준비도 끝나있었다.
그러나, 글래스트 교수가 발현한 모든 마법은 해제 되고, 끊임 없이 후열을 견제하던 정령들도 이내 역소환 되어 사라졌다.
“크, 후으으…”
들끓는 피가래 사이로 바람이 새는듯한 소리가 났다. 글래스트 교수는 그렇게 끊임없이 뒷걸음질 치며, 마력탑 옥상의 외곽까지 밀려 나왔다.
창공의 바람이 피로 범벅된 볼을 간질인다.
모든 마력 흐름이 소실된 마력탑의 꼭대기가 이내 조금씩 진동하기 시작한다. 붕괴의 조짐이었다.
끝끝내 글래스트 교수는…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래, 너희가 이겼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다.
펼쳐진 별하늘이 그에게 안기려는 듯해 그는 팔을 벌리고 받아들였다. 품에 안기는 것은 차가운 밤공기 뿐이지만, 썩 나쁘지 않은 기분에 미소가 멈추지 않았다.
이 기분은 무엇인고 하니… 역시 자조일 뿐이다.
결국 마지막에 드는 생각은 하나 뿐이다. 예상했던 그대로다.
“보고 싶구나… 뮤리…”
이것은 유언일까. 혹은 미련일까.
마지막 남은 마력을 끌어내며, 그는 천천히 몸의 힘을 풀었다.
등 뒤는 끝없는 낭떠러지다.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글래스트의 몸이 잠시간 부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