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64)
루시 메이릴 (1)
후일담이랄 것도 없구나.
로르텔은 그리 되뇌이며,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현자의 봉서는 예정대로 엘테 상회 쪽으로 매입되었다. 봉서는 중간에 유실될 뻔 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글래스트 교수를 제압한 덕분에 온전한 상태로 확보할 수 있었다.
전체적인 협상이 끝난 뒤에는 그저 해프닝으로 치부되었다.
“…”
로르텔 케헬른은 상회 응접실에 앉아서 한숨을 푹 쉬었다.
드디어 로르텔의 소유가 된 봉서가 책상 위를 부유하고 있다. 감응 절차도 완전히 끝나서, 로르텔 케헬른이 야말로 이 봉서의 정식 감응자가 된 것이다.
“확실히… 마력 감응 자체는 엄청나게 뛰는 느낌이구나.”
성위 마법에 대한 지식이라고는 한 톨도 없다.
로르텔 케헬른이 봉서의 감응자로서 받을 수 있는 수혜라고 해봐야, 아주 약간의 마력 감응 증대 정도다. 그 외에 봉서에 내재된 마나량 만큼 더 큰 마법을 구사할 수도 있겠지만, 글래스트 교수만큼 온갖 마법에 조예가 깊은 인간이 아니라면 큰 의미는 없을 듯 하다.
애초에 되팔기 위해 구매한 상품이니 큰 의미는 없다. 큰 돈이 묶이는 이런 위험성 높은 상품을 선호하는 스타일도 아니긴 하지만…
“뭐든지… 흠… 뭐든지…”
에드 로스테일러는 잊고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 봉서를 손에 넣었으니 로르텔은 에드에게 뭐라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된 것이다.
어차피 되팔 봉서긴 하지만… 여기에 묶인 돈의 기회비용이나 위험성 따위를 생각해보면 로르텔도 투자한 게 없는 건 아니다.
“그나저나, 이걸 정말 크레핀 그 사람에게 되팔아도 되는 걸까?”
에드의 눈치를 보자면, 그는 이 봉서가 절대로 크레핀에게 넘어가지 않길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이대로 거래를 진행해도 되는지에 대한 불확실함이 로르텔의 가슴 한 켠에 남아있었다.
“…”
문득, 로르텔은 마른침을 삼켰다.
요즘들어 이것도 저것도 에드에 대한 생각을 하는 시간이 는다. 이거 별로 좋은 현상이 아니다.
로르텔의 책상 한 켠을 보면 에드가 건네준 제조식과, 부탁한 자재 일람이 정리되어 있다. 계약서 초안도 뽑아놓았지만 상회 입장에서는 이렇다 할 이득을 보기가 힘든 내용이다.
슬슬 로르텔도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할 때가 오지 않았나 싶다.
동반자에 대한 갈망.
로르텔의 삶에 평생토록 따라다닌 것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요즘 좀 선을 못 지키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로르텔 케헬른은 희대의 여상이 될 자질을 타고난 자다. 언제나 냉철하게 이익을 저울질하는 그 차가운 눈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그래… 나도 좀 더 비열해질 필요가 있어…”
로르텔은 스윽 눈을 돌려서 에드와 체결될 계약서 쪽을 쳐다보았다.
“… 이것만 하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선 안 된다는 그녀의 좌우명이 무색하게, 로르텔은 또 다시 결심을 유예하고 말았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선택이었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사업적인 부분의 의사결정은 더 진전될 게 없고, 오늘 검토해야할 서류도 전부 마무리 했으니… 남은 것은 연애 전선에 대한 고민이다.
머리가 꽃밭인 예니카 페일로버는 아무런 위기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상황 파악이 빠르고 매사 냉철한 로르텔은 이미 묘한 경각심을 느끼고 있다.
요즘 들어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들러 붙는 시간이 늘어나는 그 나태한 마법사에 대해 꽤나 깊고 진중한 고민을 해본 와중이지만…. 그래도 그녀가 소녀다운 모습을 보여줄 일은 없을 듯 하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해서 검토하고 결론을 내렸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 켠에 불안감이 사라지질 않는다.
어떤 계기라 할만한 일이 생겨나면, 관계의 변동이 확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감.
하지만… 그 나태한 소녀를 움직이게 만들 계기라 할 게 뭐가 있겠나. 글래스트 교수의 죽음이라는 이 충격적인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그 소녀는 아무런 변화 없이 여전히 졸린 눈으로 비틀비틀 학사 건물 옥상을 거닐고 있을 뿐이다. 이조차도 아무런 계기가 되지 않은 것이다.
결정적인 계기라는 것은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목석 같은 소녀를 움직일만한 계기가 쉬이 생겨날 리도 없지 않은가.
그리 납득할까 싶다가도…. 그게 사실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한 합리화에 불과한 것인지 영 결론이 나질 않았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다. 깔끔하게 결론이 떨어지는 일은 잘 없는 것이다.
* [ Name : 에드 로스테일러 ]
성별 : 남 나이 : 17 학년 : 2 종족 : 인간 업적 : 없음 체 력 12 지 력 11 재 주 13 의 지 력 12 행 운 9 전투 능력 상세>> 마법 능력 상세>> 생활 능력 상세>> 연금 능력 상세>>
“이번에도 현장에 자네가 있더군, 에드 로스테일러.”
최고 학장 맥도웰.
유약한 내면과는 달리 외견은 강인해보인다. 턱에는 곰털처럼 덥수룩한 수염이 가득하고, 대충 걸치고 있는 외알 안경은 낡아빠졌다.
이 실베니아 아카데미에서 오벨과 레이첼 다음 가는 실권자인 그는… 학사 내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일에 대한 최종 책임자이자 학적 관련한 모든 업무의 최종 결정권자다.
“글라스칸 사건 때에도,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 때에도, 이번 현자의 봉서 도난 사건 때에도 휘말리다니. 운이 굉장히 나쁘군.”
지난 1년간 학사에서 일어난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관계자로 모두 내 이름이 올라가 있다.
누가 봐도 썩 수상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당장에 내가 뭘 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이번 사건에서는 글래스트 교수에게 납치당해서 위험에 처할 뻔한 피해자의 입장이다.
쫄아 있을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기세등등해질 이유 또한 없다.
나는 담담한 얼굴로 조용히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그렇습니다.”
“대강 상황은 보고 받았지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볼 수 있겠나?”
“사실 보고 받으신 것 말고는 딱히 더 말씀 드릴 게 없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글래스트 교수님에 의해 납치 당했고, 틈을 봐 탈출해서 구조를 요청하려 했으며, 그 과정에서 테일리 일행과 마주쳤습니다.”
혼란을 틈타 밤바다를 헤치고 절벽을 올라 아켄섬 내부까지 침투한 엘테의 별동대나, 북쪽숲 끄트머리에서 최후를 맞이한 글래스트 교수의 사정 같은 것까지 전부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게 전부입니다. 예니카나 로르텔은 급하게 저를 도와주러 왔을 뿐입니다.”
“… 함께 납치 당했던 아일라는 놔두고 혼자 탈출했나?”
“아일라 학생은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였고, 저를 전혀 신뢰하지도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저 홀로 나가서 구조를 요청했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만난 게 아까 말한 테일리입니다.”
“…”
맥도웰 학장은 지그시 눈을 감고 내 이야기를 들었다.
무언가 찜찜한 부분이 있지만, 말 자체는 앞뒤가 맞는다. 보고 받은 사항들과 비교해봐도 모순되는 점들은 없다.
나를 의심하는 눈초리는 아니다. 오히려 구구절절 사연을 듣고 있는 관찰자의 시선에 더 가깝다.
그래도 끝끝내 후련해지지 않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은, 중요한 사건 때마다 한 다리 걸치고 있는 나의 존재가 단지 우연의 산물은 아닐 것 같기 때문이겠지.
상담실 맞은 편 소파에 앉아서 허심탄회하게 내 사정을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는 그 의심을 다 풀어낼 수는 없다.
허나 증거가 없다면 의심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이번 사건에서 내 포지션은 명백히 피해자 그 자체이며, 누가 뭐라해도 글래스트 교수의 일탈은 학사의 관리 소홀로 인해 벌어진 일이다.
결국 맥도웰 학장이 할 말이야 뻔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생이 많았군. 학사 차원에서 피해 학생에 대해 뭐라도 해줘야 할텐데, 정신적인 피해도 많을 거고. 그래서 내심 고민을 좀 많이 해보았네.”
맥도웰 학장은 책상에 펼쳐진 서류들을 다시 검토했다. 내 학적부와 담당 교수들이 작성한 학업 평가지, 그 외 잡다한 활동 이력들이 요약된 서류들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자네를 의심하고 있네.”
맥도웰 학장의 스타일이 이렇다. 어느 정도 기본적인 사안들의 정리가 끝난 상태, 더 이상 논의가 진전이 될 만한 포인트가 없다는 확신이 들면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돌변한다.
1학기 초에 그가 불러서 진행했던 학장 면담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끝끝내 나를 퇴학시킬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삼자인 척 생활하고 있지만, 자네는 무언가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그런 평가를 해주시다니, 과찬입니다.”
“그 능청스러운 행동 또한 마찬가지일세.”
맥도웰 학장은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는 학사 행정의 최종 결정권자다. 허나 아무리 그런 그라도 결국엔 중간 관리자의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결국에는 교장과 부교장의 아래에서 학사 실무를 대리하는 입장이다.
끝끝내 그 입장의 한계에 부딪힌다면, 그는 언제나 원리와 원칙을 따라 행동한다.
“하지만… 그런 건 내 개인적인 의구심일 뿐일테지. 누가 뭐라해도 자네는 학사의 불찰로 인해 피해를 입은 학생이네. 오필리스관 사건 때도 그렇고, 이번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지.”
“…”
“학사 생활 자체도 꼬투리를 잡을 게 없더군. 조용히 수업에 열중하고, 조교수나 실무진들한테는 우등생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는데다가, 욕밖에 없던 예전 학적부와는 달리 꽤나 긍정적인 평가들도 많아졌군 그래.”
맥도웰은 서류들을 휘리릭 넘기며 훑고는 다시 테이블 위에 툭 올려 놓았다.
“이 정도면 성적 상승세도 꽤 대단한 수준이고, 입학 시험 때 쳤던 사고도 이미 시간이 꽤 지난 데다가 더 이상 책임 소재를 물을만한 이유도 없지. 뿐만 아니라 학사 차원에서도 자네에게 뭔가 대우를 해줘야할 필요성까지 생겼으니…”
그리 말하고, 맥도웰 학장은 인자한 목소리로 끝끝내 인정했다.
“정말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군, 에드 로스테일러. 그거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
“학사는 그런 자네를 더 방치할 생각이 없네. 자네는 반드시 보답 받아야하는 학생일테지.”
의외로 나를 바라보는 맥도웰 학장의 눈에는 의구심이나 적개심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학장 대 학생으로서, 당연히 전해 주어야할 정답에 가까운 말들을 내뱉었다.
“학사 기숙사 중 로레일 관의 입사 허가를 받을 수 있을걸세. 기숙사비도 받지 않을테지. 다만, 지금 당장은 로레일관에 남은 자리가 없는 고로 다음 학기까지는 덱스관에서 지내야할 걸세.”
내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맥도웰 학장에게도 가늠이 가는 부분은 어느 정도 있었나 보다.
“더 이상 처량한 방랑 생활은 끝내고, 평범한 학생의 삶으로 돌아가게. 자네는 그럴 자격이 있네.”
*
최고 학장실을 나와서 복도를 가로질러 나갔다. 로비 한 구석 벤치에서 발을 쭉 뻗고 천장을 쳐다보던 예니카가 반응했다.
“앗, 에드! 나왔네! 어땠어? 괜찮았어? 혼 안냈어? 막 해코지 하진 않았어?”
“난 피해자 입장인데 나한테 무슨 해코지를 하겠어.”
“우음. 그렇긴 하지.”
드높은 마력탑들도 모두 무너져 내리고, 청량한 가을 하늘이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난리가 일어난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기에 아직 학사 인력들은 모두 바쁜 상태다. 상황 조사를 하고 피해 복구를 하는 데에 여념이 없어서 오전 수업은 모두 취소가 된 상태다.
밤을 새서 진행되던 상황 수습도 어느덧 마무리 되어가고, 지긋지긋한 사정 청취도 이번이 마지막인듯 하다.
아직 제대로 몸을 씻지도 못했고, 옷을 세탁하지도 못해서 몰골이 말이 아니다.
예니카는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못내 마음이 불편한지, 한숨을 푹푹 쉬고 말았다.
“고생 많았어, 에드. 이게 다 무슨 일이람. 내가 다 속상해 정말.”
그렇게 말하는 예니카를 보니, 지금 남 걱정 할 때냐 라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올 몰골이다.
옷 여기저기에 때가 타있고 머리칼도 이리저리 삐쳐나온 모습이다. 남 걱정이나 하고 있는 예니카의 모습이 퍽 넉살 좋아 보인다.
탁 까놓고 이야기 하자면, 예니카의 난입은 불안요소면 불안요소였지 특별히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엘테와의 전투는 루시가 혼자서 다 박살을 내버렸지 않았나. 자칫 잘못하면 테일리의 앞길을 막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퍽 복잡한 입장이다.
그러나, 예니카는 멋대로 잡혀간 나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그 음습한 지하수로까지 한달음에 뛰쳐온 것이다.
헤헤하고 웃으면서 크게 안 다쳐서 다행이라고 헤실대는 모습. 그걸 보고 세상 그 누가 쓸 데 없는 일이었다고 규탄할 수가 있겠는가. 오히려 걱정을 끼친 건 내 쪽이다.
“매번 너한테 걱정만 끼치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예니카. 너는 어디 안 다쳤고? 듣자하니 전투 좀 치렀다던데 걱정되네.”
“걱정?! 무슨 걱정! 나 괜찮으니까 걱정 하지 마! 응? 으음?”
그렇게 휙 일어서서 팔을 붕붕 젓더니, 또 뭔가에 귀를 기울인다.
그놈의 정령들은 항상 예니카에게만 뭐라 뭐라 속삭이는 듯 한데, 내 입장에서는 바로 앞에서 뒷담화를 하는 것 같아서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
뭐, 걔네들한테는 걔네들만의 사정이 있을테니 내가 뭐라 이야기할 건 아니다만.
“음, 그렇네! 사실 아예 다치지 않은 건 아닐지도 몰라. 찌뿌둥 하다고 해야 할까? 에드를 구하다가 좀 다치긴 한 것 같네. 이건… 에드가 나한테 빚졌네, 응! 에구구, 아프다. 아파.”
“다쳤다고?”
미간에 휙 힘이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예니카는 이 실베니아 학사에서 내가 친구라고 부를 만한 유일한 사람이고, 이런 저런 개인적인 빚도 많이 있는 사람이다.
예의상 다쳤냐고 물어봤지만, 내심 쉬이 다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예니카는 정말 강하기 때문이다.
“어, 어디 다쳤냐? 구체적으로?”
“으, 음? 허, 허리? 삐끗한? 그런 느낌?”
“…”
표정이 확 썩어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어느샌가 나는 세상 착한 예니카의 호의를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사람이고, 최소한의 동료애는 있다.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 부대끼고 버텨준 예니카에게 아무런 부채의식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목적이 있어서 일부러 잡혀간 나를 위해, 예니카가 쓸데 없이 노력하다 몸까지 다쳤다고 하면 확실히 심경이 복잡해진다.
“예니카. 이번 일로 인해서 내가 느꼈던 바가 있어.”
“으, 응?”
갑작스럽게 진중해진 목소리에 당황한 예니카가 동공을 휙휙 돌려댄다.
뭔가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다는 눈치를 받은 듯 하지만,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어찌보면 이게 당연한 것이다.
“글래스트 교수님의 마지막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들었어? 잃고 나서 후회해봐야 전부 늦은 거래. 생각해보면 항상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힘써주고 고생해준 게 너인데, 나는 그걸 너무 당연시 여겼던 것 같다. 심지어 그러다가 몸까지 다쳤다니…”
“…으응? 으, 응.”
나는 예니카 옆자리에 앉은 채로… 한숨을 푹 내쉬며 얼굴을 쓸었다.
“확실히 자괴감이 좀 드네. 너한테는 내가 짐만 되는 것 같다. 매번 잘해주는 건 고마운데, 마지막에 피해 보는 건 항상 너구나. 예니카.”
“으… 어…응?”
“어쨌든 다친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게. 나중에 학사 의료진한테라도 다녀와. 안 그래도 너도 장학금 짤린 입장이라 생활비 때문에 고생 하는 중일 텐데, 그런 쓸 데 없는 지출까지 생기게 만들어서 미안하게 됐다. 치료비 나오면 꼭 말하고. 내가 낼 테니까. 그 정도 돈은 있다.”
“으음? 어? 응?”
굳이 죄의식을 숨기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게 예의니까.
나는 예니카에게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미안해 예니카. 나 때문에 매번 피해를 보게 만들어서.”
“미안해! 거짓말이야! 사실 하나두 안 다쳤어! 죄송해요! 거짓말해서 죄송합니다!”
*
북쪽숲을 따라 걸어들어가는 건 상당히 오랜만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캠프로 가는 길은 정말 매일 같이 드나들었는데, 이제와서 위화감 같은 게 생길 줄이야.
하긴 그간 겪은 일이 파란만장하긴 했지.
나는 마른 숨을 내쉬며 길을 걸었다. 슬슬 입김이 새어나오기 시작하는 시기다.
– ‘나 어쩌면 이번 방학이나 다음 학기부터 덱스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할지도 몰라.’
내가 그리 이야기하자, 눈에 띄게 화색을 비춘 예니카의 얼굴이 떠올랐다.
– ‘그래? 덱스관?! 나두 덱스관인데! 정말 덱스관이야?! 으, 음! 잘 됐네! 잘 됐다! 너무 잘 됐어! 그러니까… 음… 나두 덱스관이라 그런 게 아니라… 에드 엄청 고생 많았잖아! 이제 좀 그런 부실한 환경에서 벗어날 때두 됐지, 음!’
– ‘정말 너무 너무 너무 잘 됐다! 음! 이제 얼굴 자주 볼 수 있겠네! 덱스관 출입 가능해지면… 학사 쪽 과제 있으면 학습실에서 같이 공부할 수도 있겠구..! 응! 정령 감응 관련한 내용도 알려주기 편하구…! 그러니까… 에드의 공부 환경이 좋아지는 거네! 응! 에드의 공부 환경! 다른 사람 아니고 에드의 공부 환경!’
방방 뛰면서 화사한 미소를 쏴대는 모습에 내가 다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데 어찌나 감격의 눈물이 흐르던지… 역시 학사의 아이돌다운 공감능력이다.
나는 풀숲을 헤치고 걸어나가며 마음을 정리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순식간에 마무리 되었다.
내일쯤 되면 정황 파악도 끝나고, 마지막으로 증언 대질 정도만 마무리 되면 다시 학업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테일리와 아일라가 문제 없이 마력탑에서 탈출한 것을 확인하면, 2막도 그럭저럭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
나는 품속에서 마른 피가 묻은 열쇠를 하나 꺼내서 쳐다보았다.
글래스트 교수의 시신은 텔로스 교단 쪽의 성직자들이 수습해갔다. 그의 아내가 텔로스 교단의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이다.
장례 절차를 잘 마무리 하고 나면 고향 땅에 묻히겠지.
죽은 자에게 죄를 물을 순 없으니,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 될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교단 성녀의 축복을 받으며 세상을 뜰 위대한 학술가였을지도 모르겠으나… 이제 와서는 이 정도만으로도 만족해야할 처지다.
그래도 썩 외로운 삶은 아니었던 것 같으니… 그런 부분은 다행스럽다 이야기 할 수 있겠다.
글래스트 교수의 비밀 연구실은 폐쇄하기로 잠정적으로 결론이 난 모양이었다. 안쪽을 학사 직원들끼리 탐사해보았지만 별 다른 특이점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파편에 묻혀있는 영혼 도서관도 겉보기에는 그냥 폐허처럼 보일테니… 따로 손을 쓸 생각은 못한 듯 하다. 아예 박살을 내준 루시에게 감사하게 될 줄이야.
애초에 이번 사건 자체가 학사 입장에서는 치욕이나 다름 없으니, 얼른 마무리 짓고 싶겠지.
그 결과, 학사의 관심사가 꺼지기만 하면 도서관의 내용물은 내가 독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기쁘긴 하지만… 마냥 기뻐만 할 수도 없다. 씁쓸한 기분도 덩달아 드는 건 당연하다.
그런 생각을 정리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캠프에 도달했다.
– 화아악.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장소가 되어버렸다.
처음 표류했을 때 급조해서 만들었던 목제 쉼터도 그렇고, 여름 방학을 다 때려 박아서 만든 오두막과, 이런 저런 생존 도구들, 모닥불 터, 그 근처에 의자 삼아 눕혀든 통나무 더미와 나무 등걸.
천장을 덮고 남은 그물은 해먹으로 변해 옆에 묶여 있고, 겨울을 나기 위해 쌓아둔 땔감도 개방형 목재 창고 한 쪽에 잘 쌓여있다.
“후우…”
보아하니 불청객이 또 찾아와 있다. 커다란 마녀 모자를 쓴 조막 만한 마법사 하나가 나무 등걸 하나를 잡고 누워 몸을 만채 퓌이 퓌이 숨을 내쉬고 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소녀긴 하다만… 이제 이 캠프가 완전히 자기만의 낮잠 명당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듯 해서 썩 기분이 묘하다.
내 캠프 맞지??
털레 털레 걸어서 오두막 문을 열었다. 직접 만들 거나, 로르텔이 보내준 가구들이 안에 들어차 있었다.
벽난로와 더불어 나름 포근하게 잘 인테리어 된 내부를 보니 충족감이 차오른다.
그대로 목제 의자 하나를 꺼내와서 모닥불 터 옆에 가져다 놨다. 그리고 그 위에 쓰러지듯 몸을 기댔다.
아직 대낮이지만 조금 쌀쌀한 느낌도 들어서 발화 마법으로 모닥불을 피웠다. 장작은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 짹짹
– 쪼르르
– Zzz Zzz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휴식을 취했다. 힘들었고, 고생스러웠지만 어쨌든 내 손으로 일군 캠프로 돌아온 것이다.
참새가 짹짹대는 소리, 강가의 물이 흘러가는 소리, 간헐적으로 들리는 루시의 숨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할 일이 잔뜩이다. 일단 옷 세탁 해야하고, 식량 점검 해야하고, 다다음주부터 시작될 기말고사도 체크해둬야 한다. 다음 학기 학비도 슬슬 고민할 시기지.
어디 그 뿐인가. 아직 달려나갈 시나리오는 한참 남았다. 방학 중에 내년 신입생들의 반배정 시험이 치러질 것이고, 차기 학생회장 선거도 있고, 테일리의 추가적인 검성식 개방 이벤트도 남아있다.
그럼에도… 지금은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렇게 자연의 소리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상상해보았다. 덱스관으로 들어갔을 때의 삶이다.
대부분의 악명은 다 사그라들었지만, 아직도 나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을 가진 학생 몇은 존재하겠지. 그네들과 오해도 좀 풀고.
매일 바쁘게 사냥할 필요도 없이, 식사가 준비된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고, 굳이 구보할 필요도 없이 천천히 걸어 교수동으로 간다.
학업에만 집중하며 가끔 마주치는 시나리오 인물들과는 인사만 나눈다. 그럭저럭 상황 잘 흘러가는 거 체크만 하면서 평온한 삶을 챙기는 것이다.
캠프에서의 삶은 어땠나.
그야말로 개고생이었지만… 생각해보면 근래들어 좀 안정화 된 기분은 든다.
이렇게 그럴싸한 오두막 하나가 손에 들어왔고, 식량 수급 또한 어느 정도 안정화 되었다.
적게나마 돈도 생겨서 급한 물건은 구매해서 쓸 수 있다. 생각보다 고생한다는 기분은 잘 들지 않는다.
애초에 고생이란 고생은 학기 초에 처음 자리 잡으면서 싹 다 몰아서 한 기분이다. 어지간한 건 다 적응이 되어버렸다고 해야할까.
뿐만 아니라 이 캠프에 발붙이고 있으면 통금 시간이랄 것도 없고, 비교적 학사 일정에서 자유로이 생활 할 수 있으며, 필요하면 늦은 시간에 단독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제작, 요리, 체력 등을 단련하기에도 이쪽이 환경이 더 알맞다.
개인적으로는 담장도 좀 둘러치고, 한해살이 식용식물도 좀 키워보고, 오두막도 좀 보강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장기적으로 이 숲에서 살아남기 위한 계획들도 모두 수립되어 있었다.
좀 허무한가.
그런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안정적인 환경에서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 충분히 깨달은 와중이다. 주거지든 식량이든 모두 없어져 봐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된다.
벽과 천장이 튼튼히 덧대진 덱스관에서 동기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에도 나름의 낭만이 있겠지.
당연히… 고민 되지 않을 리가 없다.
“역시, 덱스관에 입사하는 게 맞을까…?”
그렇게 천천히 입에 담은 말이다.
“그럼 이 캠핑 생활도 이제 끝인가…”
-화악
-쿵!
그런 말을 내뱉자마자 들린 소리는, 루시가 바닥을 확 밀어내고 상반신을 일으키며 낸 것이다.
“?”
고개를 돌려서 루시 쪽을 바라보자, 세상 좋게 숙면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루시가… 두 눈을 부릅 뜬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뭐라도 잘 못 들은 게 아닌가 의심하는 듯한 얼굴이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뭐냐고 받아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