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67)
루시 메이릴 (4)
겨울 밤 공기는 봄여름의 그것과는 묘하게 달라서, 숲 특유의 축축한 느낌이 없다. 폐를 타고 들어오는 냉기는 오히려 청량하다.
사박사박 나뭇잎 사이를 걷는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한쪽 어깨에 휘감은 로프를 고쳐쥐었다. 처음엔 조악한 사다리라도 만들어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깊이가 생각보다 더 될 것 같아서 만드는 데만 하루 웬종일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타고 내려갈 로프만 마련해왔다.
“어쩐 일로 이런 데를 다 따라오냐?”
오늘따라 유독 상태가 이상하다는 생각이야 하고는 있었다.
여전히 내 소맷깃을 꼭 움켜쥐고서 따라붙는 루시는, 표정이나 외관만 봐서는 당장 어떠한 변화가 보이는 것 같진 않다.
숲 외곽까지 오고 나니 루시가 뚫어놓은 구멍이 보인다.
마법이라 부를 수도 없는, 마력을 뭉쳐서 두르고 뛰쳐든 육탄 돌격에 가까웠다.
그 덕에 입구 쪽 구멍은 그리 크지 않다. 루시의 체구 자체가 워낙 작기에, 제 아무리 마력을 압축해서 둘러봐야 크기에 한계가 있었다.
나는 근처 나무에 로프 한쪽을 매어두고, 지하로 이어지는 구멍에 로프를 통째로 던져넣었다.
잘 말려있던 로프가 휘리릭 펼쳐지며 새로운 길을 개척해낸다.
나는 밧줄을 몇 번 휙휙 당겨서 튼튼하게 잘 묶였나 체크했다.
“내 마법으로 같이 내려가면 될텐데.”
“됐다. 오기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한 번만 내려갈 것도 아니니까 내가 직접 로프로 오르내릴 수 있는지 확인 해야 돼.”
도서관에 올 때마다 루시를 대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루시한테는 적당히 마법으로 따라 붙으라고 말한 뒤, 나는 로프를 잡고 몸을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한 번씩 스윽 스윽 미끄러지며 벽을 타듯 구멍 속으로 내려 간다.
혹시나 줄을 놓치거나 아예 끊어지면 얼른 내벽을 양팔로 받쳐 들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허나 로프 자체가 워낙 탄탄해서 그리 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냥 공간계 마법으로 먼저 가 있어도 될 걸, 굳이 로프 위로 따라 붙는 루시가 참 묘했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드디어 도서관 메인 홀이 나왔다.
어두운 도서관 홀에는 광원이 거의 없다. 눈이 암순응을 끝마치기 전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이윽고 루시의 마력으로 인한 여파로 여기저기가 붕괴 되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대부분은 내벽을 받치고 있던 대리석에 파묻혀버렸지만… 아직 멀쩡해 보이는 마공학 용품이나 레시피도 꽤 남아있을 듯 했다.
당장 다 챙겨가고 싶은 마음에 하나 하나 주워 담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비밀 연구실 입구는 폐쇄 처분되었다고 했으니, 당장은 이 도서관에 찾아들만한 사람은 없다. 시간은 여유로운 편이다.
나는 그대로 도서관 중앙부 탁자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탁자를 치워버리고 바닥 쪽에 묘한 균열을 발견했다. 틈을 비집어서 여니 열쇠 구멍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옷소매를 꽉 쥐고 쫄래쫄래 따라온 루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런 데에다가 비밀 금고를 설치해두고, 또 열쇠까지 따로 관리하고 있었던 걸까?”
“글쎄다.”
품속에서 꺼내든 열쇠를 구멍에 꽂아 넣었다.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계방향으로 열쇠가 돌아가고, 대리석 바닥이 옆으로 밀려 나가기 시작한다.
–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내부에서부터 바람이 쏟아져 올라온다.
밀폐된 공간에 농축되어있던 마력이 공간이 열리면서 한 번에 풀려난 것이다.
그 충격을 버텨내고, 다시금 시야를 정돈하고 나자… 자그마한 지하 공간 가운데에 황금빛 마공학품이 하나 보였다.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였다.
*
“허억, 허억…”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려갈 때와 올라갈 때 들어가는 체력의 차이가 같을 리가 없었다.
밧줄을 휙휙 당기고, 발을 차면서 지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보니 땀이 뻘뻘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루시가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내 쪽에서 거절했다. 밧줄로 오르내릴 수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주제에, 정작 올라가보질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체력 단련이라고 생각하고 밧줄을 확확 잡아당기며 몸을 위로 끌어올렸다.
저 멀리 한참 위쪽에서는 루시가 한 손으로 밧줄에 매달려 있다. 온갖 경량화 마법을 두르고 있어서 그런지, 매달려 있다기보다는 걸쳐져 있는 느낌이다.
“이만하면…. 올라갈만 하네…”
생각보다 도서관이 위치한 지하의 심도가 그리 깊지 않다. 지난 1년간 꾸준히 이어온 체력 단련이 그래도 헛것은 아니었는지, 힘이 좀 들지언정 무리하고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올라가다가 힘이 좀 부친다 싶으면 밧줄을 잡은 채 외벽의 튀어나온 부분에 몸을 눕히고 휴식을 취하니 살만했다.
아무리 그래도 매번 밧줄을 통해 다니는 건 좀 무리수인 것 같다. 당분간은 밧줄을 활용해야겠지만, 역시 제대로 된 사다리를 하나 만들거나 구입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슬슬 로르텔에게 부탁한 마공학용품 재료들을 받을 때도 된 것 같은데… 서비스 삼아 적당히 긴 사다리 하나만 받아올 수 없을까.
그런 생각도 해보지만… 공짜로 내주진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상인이니까.
“거의 다 왔어. 곧 바깥이야.”
“그래… 안다… 후우…”
땀을 한 번 스윽 쓸어내고, 품속에서 봉황 모양 반지를 꺼내들었다.
성위 마법으로 벼려낸 황금 불사조 반지.
아마도 글래스트 교수가 몇 년을 세워 만들어냈을, 인생의 역작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건 뭐야?”
저 멀리 위쪽에서 루시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입구 언저리까지 도달한 루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 글래스트의 황금 불사조 반지 ]
등급 : 전설 사용횟수 : 제한 없음 제작 난이도 : ●●●●◐ 감응자: 에드 로스테일러 시간선을 비틀어, 미래의 자신에게 부여된 마력을 현재로 끌어오도록 만들어주는 마도구.
전설급 마공학 용품 ‘황금 불사조 반지’에 성위 마력과 고위 시간계 마법의 힘이 깃들어 있다.
일시적으로 착용자의 마력을 폭증시킨다. 한 번에 한하여 체내의 마력량 이상의 마력을 소모하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최대 마력량 이상의 마력을 요구하는 마법을 사용했을 시, 초과한 마력의 크기에 비례하여 장기간 마력 사용이 억제된다.
한 번 마력 억제가 시작되면, 그 억제가 해소되기 전까지는 반지의 힘을 이용할 수 없다.
——————————————–
“왜 도서관에 이런 마공학용품을 몰래 보관해놓고, 열쇠도 따로 들고 다녔는지 알 것 같다.”
루시를 가만히 올려다 봤다. 호기심이라도 동한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일까.
언제나처럼 멍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루시의 등뒤로 비치는 달빛과 별하늘은 루시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어 낸다.
미래의 자신에게서 마력을 가불해 사용할 수 있다면, 이론상 지금 당장이라도 고위 마법들을 사용할 수 있다.
다만, 그렇게 되면 빌려온 마력의 크기만큼 긴 시간동안 전투불능 상태가 된다. 섣불리 사용하면 대가가 엄청나겠지.
결국 전투에 사용하려거든 궁지의 궁지에 몰렸을 때 마지막 한 수로 튀어나가야 할 필살기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굳이 전투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한 번 한계가 넘는 마나를 이용해 나 자신의 스펙을 강화시키고, 거기에 사용된 마력을 천천히 갚아나가는 구조라면…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정령계약이다.
정령 감응력이 비교적 부족한 글래스트 교수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수의 정령을 다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령 감응력/정령 이해력의 핵심은 결국 ‘마력 효율’이다.
정령계 마법에 들어가는 마력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되는지를 가르는 척도인 것이다.
결국 절대적으로 타고난 마력량이 적으면 높은 감응력은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예니카는 마력량도 높고, 감응력도 높기 때문에 둘이 시너지를 이루어 그렇게 말도 안되는 수의 정령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축복받은 체질이다.
초보 정령사들이 등급 높은 정령과 계약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체내에 절대적인 마력량 부족이 주요 원인이다. 제 아무리 정령 감응력을 높여 마력 효율을 증대시켜도, 그 절대적인 마나량이 못 미치는 것이다.
즉, 반지의 힘을 잘만 활용하면 그 진입장벽을 최소화 시킬 수 있다.
이 마도구의 힘으로 미래의 마력을 일시적으로 끌어와 어떻게든 계약만 끝마친다면… 나머지 가불해온 마력은 천천히 회복해나가면 그만인 것이다.
단순하고 난폭한 계산이지만, 한두달 정도만 마력 사용을 포기하면 당장 고위 정령과 계약할 수 있다. 물론 마법사 타이틀 달고 한두달 동안 기초 마법 하나 사용 못한다는 건 너무 큰 리스크다. 당장 모든 실기 수업 성적을 바닥에 처박게 되겠지.
허나, 운좋게도 곧 있으면 겨울 방학이다. 상대적으로 리스크가 적은 시기가 오는 것이다.
까놓고 말해서 이건 마나 돌려막기. 즉 미래의 자신에게 대출 받아 마법을 쓰는 행위다.
허나, 다들 최대 마력량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등급 높은 정령과의 계약을 하지 못할 때… 나혼자 그 벽을 뚫을 수 있다는 건 압도적인 비교우위다.
남들 다 현금 박치기로 집을 살 때, 나 혼자 무이자 대출 받아 집을 사는 느낌이라고 하면… 너무 빈곤한 비유일까.
결국 시간의 흐름을 비틀어 꺾는 성위 마법의 힘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짓이라는 건 자명하다.
비상시에는 마지막 필살의 수단으로, 평상시에는 스펙 증강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보물 중의 보물.
아마 저 도서관을 다 뒤져봐도 이거보다 귀한 물건은 튀어나오지 않겠지.
“이 반지는 자기가 타고난 마력량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마도구야. 물론 리스크가 있어서 함부로 남발할 수는 없겠지만.”
처음부터 그 꽉막힌 교수의 행보는 명확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애매한 재능을 밀어주는 건 죄악이라느니, 타고난 재능의 원석을 발굴해서 잘 갈고 닦는 것이 제 사명이라느니… 그런 이야기를 해댔지만 뒷구멍으로는 이런 걸 만들고 있었던 거지.”
왜 하필 이 도서관에 그토록 많은 마공학용품 제작식이 있었나 했더니… 그것도 전부 연구 자료였던 것이다.
아마도 죽어가는 글래스트의 품에 있던 그 열쇠는… 내가 아니라 뮤리에게로 향할 예정이었을 테지.
재능의 벽에 부딪혀 끝끝내 죽음을 맞이한 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 그리 생각하면 얼추 퍼즐이 맞는다.
하지만 끝끝내 반지는 그 주인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누구보다 글래스트 본인이 그리 될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 걸 만들 시간이 있었다면 차라리…”
“의미 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 루시.”
나는 루시의 말을 끊었다.
“다 지나간 일이야.”
*
“나 있잖아. 옛날에 옷 소매 단추가 떨어진 적이 있어.”
더럽게 힘들다.
밧줄을 쥐고 벽을 타고 오르는 것이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다.
사실 머리 속으로 혼자 상상해봤을 때는 얼추 할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빨리 사다리를 구해야될 것 같다.
“여기 소매 끝자락에 있는 이 단추 말이야. 이게 있었을 땐 몰랐어. 없으니까 소맷자락이 너무 널널해져서 불편했어. 그래서 한참을 고생했었어.”
그래도 이 오르막에도 거의 끝이 도래했다.
사실 중간부터 그냥 루시한테 올려달라 말할까 고민도 좀 했는데, 거의 다 도착하고 나니 오기가 생겨서 결국 끝까지 오고 말았다.
.
꼭대기 언저리에서 주절주절 이야기 하는 루시가 퍽 낯설다. 원래 얘가 이렇게 말이 많았나.
“그러냐.”
“오필리스관 메이드가 수선해줘서 괜찮아졌는데. 그 뒤로는 부유 마법을 쓸 때도 옷 소매가 쓸리지 않도록 조심하게 됐어.”
루시는 멍하니 꼭대기에 앉아 괜스레 하늘을 올려다 본다. 구름 사이로 언뜻 얼굴을 비추는 별이 루시의 눈동자에 날아와 박힌다.
“없어지고 나니까 그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게 되는 거 자주 경험해.. 별 거 아닌줄 알았던 게 사실 아주 아주 대단했던 거야.”
“의외로 흔한 이야기잖아. 동화책 같은 데서 교훈으로 자주 나오지 않나?”
“응.”
별 거 아닌게 사실은 별 거다.
같이 밥 몇끼 먹고, 멍하니 옆에 앉아 있고, 가끔 영양가 없는 대화 몇 마디 주고 받고, 안부 한 번 주고 받고, 지나가다 얼굴 몇 번 마주치고, 심심하면 놀러 가고.
누군가와 공유하는 일상이란 그런 별 거 아닌 것들의 집합체다.
멋들어진 계기로 쭉쭉 뻗어나가는 관계란 드라마 속에서나 성립하는 것이다.
위기와 역경이 있고, 의지로 극복해내, 누군가를 구렁텅이에서 구해내거나, 혹은 구해지거나.
아름답고 화려한 관계의 성립은 필시 낭만적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현실적이라 할 수는 없겠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문제는 아니다. 다만, 나보다는 테일리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정도의 생각은 해본다.
영웅적 행보. 주인공의 삶. 세계의 시련. 우정과 노력, 그리고 승리. 그 속에서 아리땁게 피어나는 인간 관계들.
허나 평범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있어 누군가와 관계를 쌓아나간다는 행위는, 그런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일은 아닐 터.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무채색이다. 허나 그것에 우열을 둘 수가 없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장미도, 수수하게 맺히는 백합도 모두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는 그 가치에 굳이 우열을 두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달은 루시가 글록트를 잃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함부로 유추하진 않았다.
“사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따라왔어.”
이제 몇 번만 더 벽을 박차고 오르면 지상이다. 이미 바깥의 상쾌한 공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덱스관 갈 거야?”
치고 들어오는 질문.
번뜩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입구에 루시가 걸터앉아 있었다.
덱스관을 들어가느냐, 캠프 생활을 이어 나가느냐.
저울은 중립을 지키고 있다.
덱스관을 들어가면 아무래도 생활이 편해진다. 이미 적응한 야생 생활의 원칙들도 전부 버려도 된다. 철저히 학사 일정에 따라 움직이며, 제한된 자유 안에서 학업에 집중하며 살게 된다.
캠프 생활을 유지하면, 비교적 활동 반경이 넓어지고, 시간의 제약도 없어진다. 체력과 제작계 스킬을 훈련하기도 좋은 환경이고, 시간적 제약도 거의 없다. 다만, 지금은 어느 정도 적응하긴 했어도… 야생의 생활 환경은 역시나 열악하다.
장기간 시간을 투자해 캠프 환경을 더 개선해나갈 수야 있겠지만, 그것들도 모두 노력의 산물이겠지. 안 그래도 더 바빠질텐데 그게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든다.
어느 것을 선택해도 일장일단이 있고, 끝끝내 저울이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선택을 결정짓는 것은 마지막 아주 자그마한 무게추 하나다.
아무리 미미하고 작을지라도, 미약하게나마 그 쪽으로 무게가 쏠린다면… 사람은 그 방향을 선택한다.
“안 가면 안 돼?”
루시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사다.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겠지.
그러나, 납득이 가지 않는 건 또 아닌지라… 올려다본 루시의 표정이 충분히 이해는 됐다.
“덱스관에 들어가는 게… 아무래도 생활하기에는 더 편하긴 하다. 이 추운 겨울에 야생 생활 하는 것도 제정신은 아니고.”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다가, 숨이 너무 벅차서 일단 지상으로 올라가야할 것 같았다.
밧줄을 당기는 손에 힘을 꽉 쥐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시는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따금씩 별하늘이 보이지만, 하늘의 면적은 대부분이 추적추적한 먹구름으로 가득차 있다.
“그렇겠지.”
이내 무언가 단념한 듯, 혹은 내면에 품고 있던 어떤 선이라도 끊어진 듯.
늘 그래왔듯이 미동 하나 없는 표정이지만, 주눅이 든 것 같은 느낌이 의외였다.
몇 번이고 봐왔던, 먹구름 가득한 하늘이다.
루시는 모자를 고쳐잡고서 속삭이듯 되뇌었다.
“비가 오려나.”
그 말에 어이없어서 대답했다.
“아니.”
“…?”
“그럴 시기가 아니지.”
이내 지상까지 올라온 나는 그대로 흙바닥에 드러누웠다.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 한송이가 내려와 콧잔등에 맺힌다. 시기를 생각해보면 첫눈이었다.
이쯤 되면 비가 올 시기는 지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나 춥다.
루시는 하늘의 먹구름과 콧잔등에 느껴지는 습기를 가늠해서 비가 올 시기를 귀신 같이 눈치 채곤 하지만… 그게 항상 맞아떨어지리란 법은 없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추적추적한 빗물 뿐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허나 긴 장마철을 지내고 나면 무심코 비가 오리라 생각하고 만다. 비가 올 시기는 지났음에도 학습된 감각 때문에 그리 착각하고 마는 것이다.
차분히 내려앉는 눈송이의 수가 조금씩 늘어난다.
추적추적한 빗물은 기분이 나쁘고 괜시리 으스스한 느낌이 들지만, 시기에 맞게 내리는 눈은 되레 포근한 느낌이 든다.
대기 중의 수분이 굳으면서 일어나는 응고열이 어쨌니 하는 낭만 없는 이야기를 늘어 놓을 수 있겠지만… 사실 그 이전의 문제다.
추적추적 몸을 때리는 빗물과, 세상을 감싸듯 차분히 내려앉는 눈송이는 누가 봐도 명백히 다른 것이다.
“그건 그렇고.”
멍하니 눈발을 올려다보는 루시에게 가만히 이야기했다.
“요즘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겨울을 날 장작을 충분하게 확보를 못해놨다.”
그 말에 루시는 확 고개를 돌리고서는, 나를 응시하는 것이었다.
“혼자서 감당 못할 거 같은데, 시간 나면 나 좀 도와줘라. 안 그래도 네가 얘기했잖아. 땔감 모자라다고.”
“진짜로?”
-화악!
-콱!
흙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있던 내 배 위에 올라타더니, 모자를 고쳐 잡은 채로 얼굴을 쑤욱 내민다.
“진짜로? 진짜로? 진짜로?”
“이미 캠프 생활에 완전히 적응해 버렸으니… 조금만 더 환경을 개선하면 캠프 생활 하는게 훨씬 이점이 많지.”
“…”
그 말에 루시는 다시 상반신을 쑥 들어올리고서는…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 어떤 장면에서도, 어떤 루트에서도 볼 수 없었던… 루시의 입꼬리가 보란 듯이 올라가 있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막의 뒤처리도 끝이 나고,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련의 스케일이 커지는 3막이다.
눈을 감으면 생각나는 것들이 한 트럭이다.
부패한 학사 감찰부에 환멸을 느끼고, 학생 회장으로서 학사 권력을 새로 잡으려는 자애의 황녀 페니아도, 본격적으로 학사의 이권을 침탈해 주머니를 불리려 드는 로르텔도 모두 만만치 않다.
텔로스 교단의 멸망을 바라는 불신의 성녀 클라리스나, 악신의 피를 마시고 타락하는 재앙의 연금술사 클로드까지… 하나 하나가 만만치 않은 상대지만, 결국 이 무대의 마지막에 서 있는 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저 소녀다.
3막의 최종 보스, ‘깨어난 자’ 루시 메이릴이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다시금 인사하자.
분명, 우리 둘 다 몸 건강히 잘 살아있을 것이다.
*
– 타악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서류가 두껍다. 이번 주 내로 처리 해야할 안건이 한 둘이 아니다.
“에휴…”
클레어 조교수는 개인 연구실에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꽉 막힌 스승님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크다. 대체 이만한 격무를 처리하면서 어떻게 봉서 연구까지 진행한 건지 미스테리할 따름이다.
그래도 대부분의 일은 마무리 됐다. 학회 안건 정도만 잘 처리 되면 이제 남은 건 방학 중에 있을 신입생 반 배정 시험 뿐이다.
이미 공고문까지 다 작성되어 있다. 신입생들의 주소로 모두 발부되었으니, 겨울 방학 기간 중 시험을 치르기 위해 아켄섬으로 모여들 것이다.
시험 내용에 대해선 고민이 많았다. 작년처럼 그냥 구슬이라도 찾으라고 시킬까 했지만, 너무 시험 내용이 똑같으면 2학년 학생들이 내용을 유출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좀 더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역시 일손이 부족해.”
클레어 조교수는 머리를 북북 긁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학사 장학생 중에 추가 인력을 더 달라 해야겠어. 이 정도는 학사 쪽에서도 봐주겠지? 뭔가 요즘… 일이 몰린 막내 교수라는 이미지가 생겨서… 다들 오냐 오냐 부탁을 잘 들어주는 느낌이니까…”
그게 썩 좋은 현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울며 겨자먹기였다.
어쨌든 당장 일을 전담해서 처리해주는 아니스 조교도 일처리가 깔끔한 편이니… 나머지는 단순한 감독 작업을 맡아 줄 학생 정도만 있으면 된다.
부디 똑부러진 학생이 와주길 바라면서, 클레어 조교수는 다시 격무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