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68)
겨울 나기 (1)
인간의 생애가 사계절과도 같다면, 정령의 생애란 필시 기나긴 겨울이다.
사멸해가는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거대한 바람의 늑대는 그렇게 숲을 지키고 있었다.
*
“넌 너무 잘나서 문제야, 예니카.”
생활동 초입에 위치한 라플라스 베이커리는 실베니아 아카데미와 역사를 함께한 유서 깊은 다과점이다.
교수동으로 향하는 동선에 큼직하게 보이는 위치, 전직 황실 파티시에가 책임지고 관리하는 다과의 맛, 꽃내음이 가득한 분위기의 테라스.
소녀의 낭만을 그대로 구현해놓은 듯한 모습은, 하나둘씩 엘테 상회의 권역으로 잠식당해 가는 생활동 상권 안에서도 제 영역을 올곧이 유지하고 있을 수 있는 비결이다.
예니카도 그 나잇대 소녀다보니, 클라라가 라플라스 베이커리에서 한 턱 쏘겠다고 할 때는 쫄래쫄래 따라 붙을 수밖에 없었다.
3층으로 쌓인 디저트 트레이에 온갖 휘황찬란한 색조의 케이크가 가득하다. 눈에서 영롱한 빛을 뿜어내며 홍차를 받아든 참이었다.
“매사 노력하는 건 좋지만, 너무 잘나기만 하면 힘들어. 무슨 소리인줄 알아, 예니카?”
“으, 응?”
“필요하다면 빈틈을 내줄줄도 알아야 한단 말이야.”
예니카의 절친인 클라라와 아니스는 여느 때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오늘따라 묘하게 더 비장해보인다.
겨울 방학을 앞두고 슬슬 널널해져가는 학사 분위기와는 정반대였다.
“무, 무슨 일이야… 클라라? 그렇게 굳은 얼굴로.”
“클라라는 이번 방학 때 본가에 돌아가잖아~. 자리 비우는 동안 걱정 되는 거지~.”
넉살 좋은 표정으로 아니스가 홍차를 머금었다.
“그래? 하긴, 나두 작년에는 방학 때마다 본가로 돌아가서 일을 도왔으니까… 학사에서 자리를 비우면 불안하긴 하지. 무슨 느낌인지 알아.”
“그런 게 아니야, 예니카! 내가 걱정하는 건 내 학사 일정이 아니라, 바로 네 연애사야!”
단도직입적으로 찌르고 들어오는 클라라의 어조엔 망설임이 없다.
그 말에 확하고 숨을 집어삼키는 예니카가 뭐 어쨌냐는 듯이, 클라라는 더 치고 들어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그 에드 로스테일러한테 뿅 갔잖아.”
“클라라. 표현이 너무 직설적이야.”
“난 오늘 단단히 결심하고 왔어, 아니스. 내가 뭘 위해서 라플라스 베이커리의 최고급 다과를 화끈하게 질렀는지 모르겠어? 요즘들어 너무 바빠 보이는 예니카를 꿰어내려면 이 정도 미끼는 뿌려야 해.”
“미, 미끼라니… 꼭 내가 낚여서 온 것 같잖아.”
엄밀히 따지자면 낚였다는 표현이 가장 정확했지만, 아니스는 굳이 적나라하게 표현하진 않았다.
“그, 그리고… 내 연애사라니 그건 대체 무슨…”
“예니카, 여기까지 왔으면 빼지 말자. 나는 슬슬 예니카 네가 위험선에 도달했다고 생각해.”
예니카 딴에는 본인의 연애 심리를 온전하게 잘 감추고 살아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녀의 절친인 클라라와 아니스에게는 개뿔도 의미가 없었다. 예니카의 속내 따위 투명한 유리창이나 다름 없다.
“위, 위험선?”
“그래. 예니카. 툭 까놓고 말해서 너는 좋은 ‘친구’야.”
클라라가 팔짱을 낀 채 적나라하게 이야기하고, 단아한 아니스는 옆에서 음음 거리며 차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칭찬을 해줘두… 곤란한데…”
“좋은 말이긴 하지만… 칭찬은 아니야, 예니카.”
클라라는 진지한 얼굴로 예니카를 쏘아붙였다.
“처음 예니카가 그 에드같은 인간한테 홀딱 넘어갔을 땐 나라를 잃은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 그 인간 평가도 꽤나 반전이 되고 나니 좀 받아들여지긴 하더라. 그래서 일단 상황이 이렇게 됐잖아?”
“크, 클라라…”
“이제와서 얼굴 붉히면서 고개 파닥여봤자 의미 없어 예니카. 나, 이쯤 왔으면 막나가도 된다고 생각해. 난 참을만큼 참았어.”
예니카는 그제서야 이 모든게 클라라와 아니스의 함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플라스 베이커리에서도 가장 비싸다는 프라이빗 테라스를 예약한 이유 또한, 주변에 엿들을 사람이 있을까봐 폐쇄된 공간으로 예니카를 유도한 것이다.
“예니카, 너는 지금 좋은 ‘친구’로서 관계가 마무리 되어가는… 연애에 있어서 패배자의 황금 패턴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어.”
쿠궁, 하고 벼락이라도 내리치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그, 그건 무슨 소리야. 클라라?”
“너, 최근 그 애랑 같이 있으면서 심장이 쿵쿵 뛰어서 말이 안나온다든가, 두근거려서 얼굴 못 마주치겠다든가 한 적 있어?”
“갑자기 그런 소리는 왜 하는데?!”
“있냐고! 대답해!”
면역력 없는 예니카에게 너무 직접적인 처방을 하는 것이 아닌가.
옆에 가만히 앉아 이야기를 듣고있던 아니스는 퍽 걱정이 들었지만, 당장에 개입하지는 않았다.
“그, 그건…!”
예니카는 그대로 헛숨을 삼키고 말았다.
그렇다. 확실히, 처음 에드 로스테일러를 만났을 때에 비해 많은 시간을 공유했기 때문인지… 이제 그의 옆에 앉아 있다보면 두근거리고 긴장되기보다는 편안하고 푸근해, 오히려 힐링 받는 듯한 안정감이 든다. 처음 그와 엮였을 때를 생각해보면 격변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딱히 부정적인 감정은 아니므로, 그리 위험한 상태라 생각하진 않고 있었다. 오히려 발전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편안하고 믿음직스러운 인간관계를 뭐라고 부르는줄 아니? 가족, 혹은 절친이라 부르는 거야. 그냥 예니카 네가 좋을대로 도와주는 관계일 뿐이잖아!”
“그, 그럼… 안되는 건가…?”
“어휴, 화상아! 감정 교류라는 게 단방향으로만 통하면 무슨 의미니? 그 애도 널 애타게 생각하게 만들어야지! 너만 좋다 좋다 하면서 쫄쫄 따라다니면 그게 연애 관계니? 추종 관계지!”
비수와도 같은 일침이 예니카의 가슴팍에 날아와 꽂힌다.
갑자기 아련하게 짝짝대는 박수 소리나 동물들의 환호성이 울려퍼진다. 클라라는 전혀 듣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정령 감응을 감추고 있는 아니스의 귀에는 어렴풋이 들렸다.
아무래도 예니카와 주종계약을 맺은 하급 정령들은 차마 입에서 내뱉지 못한 일침들이었나보다. 속 시원할만 했다.
“그동안 좀 접근 방법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예니카. 항상 순둥순둥하고 밝고 착한 게 네 매력이니만큼, 어쭙잖게 밀당하려 들고 나빠지려드는 것도 네 매력을 헤치는 일이겠지. 확실히… 이런 부분에서는 벨씨의 의견이 더 합당했던 거 같네.”
“나 없는 데에서 대체 무슨 의견 교류가 있었던 거야…?”
“그런 건 됐어, 예니카. 어쨌든 어느덧 겨울방학이야. 이러다가 눈 뜨고 코 베인다고. 하여튼 그 남자는 얼굴은 반반해서 묘하게 여복이 많으니까, 더 시간 질질 끌면 안 돼. 슬슬 진도 빼야 돼. 그런데 하필 이런 때에 나는 본가로 돌아가야 하다니, 내가 안 불안하겠어? 응?”
울분을 토하는 클라라 앞에서 예니카는 그저 정좌하고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왜 자기가 혼나는듯한 분위기가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으나, 분위기상 죄인이 맞는 것 같으니 가만히 있었다.
무엇보다 예니카는 클라라를 신뢰한다.
“크, 클라라는 박학다식하니까. 그리고 이런 인간관계는 능통하니까… 맞는 말이겠지…?”
“그래, 예니카! 내 말 좀 들어!”
귀향을 앞둔 클라라의 걱정도 슬슬 한계에 달했다.
“어쨌든… 근래 예니카를 떠보면서 느낀 생각인데… 예니카 너는 밀당에 대해서는 절망적일 정도로 재능이 없어. 아무리 봐도 전략 수정이 필요해.”
“으읏…”
짚이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기에 예니카는 말문이 막혔다.
연심을 미끼 삼아 남을 아슬아슬하게 자극하고, 간질이고, 애타게 만드는 스킬은… 이미지상 예니카 보다는 로르텔이 훨씬 더 능통할 것 같다. 애초에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을 업으로 삼아온 소녀다.
어쭙잖게 따라해봐야 본전도 못 찾는다는 사실은 잘 알았다.
“그런 의미에서 방향성을 틀어야만 하는데… 처음에 말했듯이 너는 너무 잘나서 문제야, 예니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잘 들어, 예니카. 너는 좀 못나질 필요가 있어.”
처음 예니카를 보면 발랄하고 활기어린 모습에 내면 또한 앳되고 칠칠맞을 거라 생각하곤 한다. 실제로 그런 부분도 있다. 지독한 길치라거나, 묘한 부분에서 소심하다든가.
허나, 중요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의외로 건실하고 빈틈 없다.
이래봬도 자기 관리가 확실하고, 매사 노력하고, 이타적이며, 제법 포용력 있다. 인기 있는 귀염상 외모에, 학년 수석에다가, 무력도 강하다.
절친이라는 게 자랑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게 마냥 장점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잘 듣고 따라해, 예니카.”
클라라는 진중한 분위기를 잡고 예니카와 똑바로 눈을 맞춘 채 한 글자 한 글자 발음했다.
“보호 본능.”
“보.. 보호…?”
“보호 본능.”
침을 꼴깍 삼킨 예니카가 어렵사리 그 말을 따라했다.
“원래 남자들 심리 다 똑같아. 예니카처럼 듬직하고, 편 들어주고, 마냥 긍정해주면 좋아할 거 같아? 아니야. 오히려 힘들고 약한 모습도 보여줘서 끊임없이 확인시켜줘야 해. 아, 나는 이 여자한테 도움이 되고 있구나. 나에게 의존하고 있구나. 감정적으로 내게 기대고 있구나. 이걸 끊임 없이 확인시켜줘서 자존감을 세워주고, 보호 본능을 자극하라 이 말이야.”
아니스는 속으로 감탄했다.
클라라는 연애 경험이라고는 쥐뿔도 없지만 의외로 이야기는 핵심을 찌르고 있다…!
이것이 음습한 뒷연애담과 온갖 연애 소설을 탐독한…. 연애를 ‘학습’한 자의 직감인가…!
“어쭙잖은 밀당보다는 이게 더 예니카한테 맞아.”
“그… 그건 좀 애매해…”
예니카 치고는 어울리지 않게 반대 의견을 낸다. 클라라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예니카는 시선을 쭈뼛대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어렵사리 이야기 한다.
“그… 시… 실제로… 이미 감정적으로 많이 기대고 있긴 하고…?”
살얼음판을 걷는 학사 생활이나 덱스관 생활을 하다가도 한시름 덜어놓고 치유 받는 듯한 기분이 들 수 있는 건… 캠프에 가면 언제나 에드가 모닥불 옆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인사를 건네주기 때문이다.
에드가 덱스관에 온다는 사실을 철회했을 때도, 한 켠으로는 아쉬웠지만 또 다른 한 켠으로는 그래도 나름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졌던 이유 또한 그렇다.
“근데 에드 로스테일러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거 아니야…?”
“그, 그럴까… 확실히 에드는 캠프 생활하고 학사 생활을 동시에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부치는 모양이구…”
이 또한 근원적인 문제 중 하나였다.
철인과도 같은 생활을 유지하느라, 연애에 관심을 돌릴 틈이 없다. 벨 마이아가 지적했던 바가 정확히 들어맞은 셈이다.
이 부분을 뚫어내려면, 정말 에드라는 남자를 쥐고 흔드는 수 밖에 없다.
“그럼 그냥 자극이 부족한 것 뿐이야. 좀 더 내면을 드러내고 위로를 받아! 막 스펙터클한 고민 없어, 예니카? 와 이거 정말 내가 안 도와주면 너무 힘들겠다… 싶은 고민!”
“그런 고민이 하루 아침에 생겨날 리가 없잖아…! 대부분은 어느 정도 해결 됐단 말야!”
“그럼 고민을 만들어 내…! 없던 고민도 만들면 생기기 마련이야!”
“거짓말로 걱정을 사면 너무 미안하잖아!”
엄살을 부리다 에드가 진심으로 사과하자 이내 못이기고 머리를 수그린 전적이 있다.
되도 않는 거짓말은 예니카의 양심이 버티질 못한다. 그렇다고 진정성 있는 고민이 있느냐 하면, 유능한 탓에 대부분은 자기 나름대로 해결해버린다.
“그, 그래도 고민이랄게 있다고 하면…”
“있다고 하면?”
예니카는 으음… 하고 생각하다가 이내 털어놓는다.
“요즘 에드는 뭔가 편법을 써서 고위 정령이랑 계약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데…”
“…”
“나도 타칸이랑 계약하고 나서는 며칠을 끙끙 앓아 누웠는데, 아직 감응력이 모자란 에드가 편법을 써서 계약을 하면 오히려 몸을 망치는 거 아닐까…? 하지만 에드는 자기 성장에 욕심이 많은 스타일이구… 또 잘 풀릴 수도 있는 거니까… 이왕 결정했으면 과감하게 밀어 붙이는 게 맞을 때도 있으니… 이런 의견은 괜히 방해만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어쨌든 그런 걱정이 좀 돼서…”
나름 진지하게 얘기한 것이었으나, 클라라는 양손으로 이마를 탁 두들기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니스도 한숨을 푹 흘리고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결국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흘러와도 이 소녀는 이렇다. 천성이 이런데 어떻게 할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클라라와 아니스를 쳐다보는 저 천진난만한 소녀. 오히려 저런 면모가 좋아서 예니카와 절친이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니, 사실 또 싫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내 생각엔 조만간이야.”
라플라스 베이커리의 고급 간식들을 잔뜩 먹은 후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예니카를 떠나 보낸 뒤… 클라라와 아니스는 생활동을 나란히 걸었다.
아니스의 그 말에 클라라는 뜬금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클라라도 어느 정도 직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니카와의 대담에서 아니스가 제대로 된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퍽 부자연스럽다.
셋이서 모이면 언제나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떠들곤 했는데… 오늘따라 아니스는 얌전히 홍차만 들이키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스는 클라라와는 달리 남녀 관계에 대한 조예도 있지만, 예니카의 연심이 향하는 상대가 에드라는 사실 자체는 가장 늦게 알아차렸다.
조교 일도 바쁘고, 성적도 간당간당해서 정신이 없던 탓이다.
주근깨에 삐침머리를 한 클라라는 생활력이 넘쳐보이지만, 의외로 집안이 유복한 편이다.
반대로 아니스는 고풍스럽고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환경적으로 많이 빈곤하다. 그렇기에 조교 일에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클라라도 잘 알고 있겠지만…”
“응. 예니카는 역시 심정적으로 많이 몰려 있는 거 같아.”
덱스관에서의 생활이 문제일까. 아니면 어떤 다른 계기가 있는 것일까.
한 번씩 예니카는 무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못 참고 폭발해버린 게 글라스칸 사건이라고 생각하면, 예니카의 고민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굉장히 미묘한 차이라서 보통 사람은 못 느끼지만, 아니스와 클라라는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계기가 있으면 또 심적인 한계에 달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 어떤 근원적인 고민에 대해서는 해결되지 않은 느낌…
그래도 주기적으로 치유 받거나 심적인 무게감을 해소받고 있는 듯한 느낌은 든다.
그 상대는 필시 에드 로스테일러일테지.
둘도 없는 절친들에게 그런 고민을 털어놓고, 심적으로 기대주지 않은 것이 야속하다. 이렇게 날까지 잡아서 은근슬쩍 떠보았음에도 끝끝내 고민을 털어 놓지 않았다면… 그건 예니카의 선택이다. 거기다 대고 뭐라 할 수는 없다.
다만, 아니스의 의견은 클라라와 좀 다른 부분이 있었다.
“클라라는 예니카의 연심을 먼저 눈치 채고, 벨 씨나 학사 직원들이랑 접촉하면서 그 남자에 대한 의견을 좀 바꾼 듯 하지만… 내 의견은 또 별개야.”
클라라는 그제야 아니스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예니카와 클라라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홍차나 마시면서 별 말을 내뱉지 않았던 이유.
“나는 아직 그 남자 완전히 신뢰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어.”
“그래…? 하긴 평판이 좀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불안하지.”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
아니스는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들어서 맞물려 사각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안에 행인들의 얼굴을 담는다.
“관상.”
“…”
“딱 봐도 바람둥이 관상이야. 여자에 헤픈 남자한테 심정적으로 기대봐야, 결국 예니카만 상처 받을 거야.”
관상만 보고 그리 단정 짓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하고 말해볼까 하다가도, 에드 로스테일러의 생김새를 떠올려보면 반박하기도 힘들다. 사실은 사실이다.
“그래도, 관상만 보고 단정 짓는 건 좀 너무하니까…”
클라라의 마음이라도 읽었는지, 아니스는 곧바로 그리 이야기한다.
“나름대로 검증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적어도 헤픈 남자는 아니라는 사실은 확인해둬야지.”
“어떻게?”
“방법이 뭐 별 거 있겠어?”
아니스는 뒷머리를 묶고 있던 리본을 풀어헤치고, 회갈색 생머리를 어깨 옆으로 쓸어넘긴다. 적당히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내숭 가득한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한 번 웃어 본다.
“우와-. 진짜로? 무리하는 거 아니야? 너 그렇게 얼굴 두꺼운 편 아니잖아.”
“뭐 얼마나 대단한 기술이 필요하겠어. 정말로 헤픈 사람이라면, 적당히만 추파를 던져도 넘어오겠지?”
“만약 정말로 넘어가서, 헤픈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면 어쩔 건데?”
아니스는 특유의 귀족적인 웃음과 함께 당연스럽게 이야기했다.
“만약 그러면 책임지고 예니카랑 찢어놔야지.”
…무섭다.
클라라와 아니스의 의견이 항상 맞는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강경하게 나올 줄은 또 몰랐다. 예니카를 생각하는 마음이야 늘 같았으나, 방식의 차이는 또 다른 법이다.
“아니스는 그 남자랑 별로 접점도 없잖아. 듣기로는 기숙사 생활도 안해서 신출귀몰 하다던데…”
“뭐어, 자주 못 만난다고 해서 꼬실 수 없다는 법도 없지만… 그래도 시간을 많이 공유하면 추파를 던지기 편한 것도 맞지. 걱정 마, 클라라. 다 생각이 있으니까.”
아니스가 이런 확신을 가질 때가 제일 불안하다.
외모만 보고 항상 얌전하고 단아한 인간이라 착각하면 안된다.
“내 지도 교수님 알지?”
“클레어 조교수님?”
“응. 이번에 업무 과중 때문에 학사 장학생 인력 지원을 많이 받기로 했거든. 확실히 그 전부터 연구실 인력 자체가 모자라서 많이 바쁘긴 했고.”
아니스는 클레어의 수석 조교다. 1학년 1학기 때부터 쭉 함께 해온 인연이기에, 클레어 조교수는 아니스를 많이 신뢰하는 편이었다.
“듣기로는 그 남자도 학사 장학생에 지원했다더라. 내가 교수님께 추천하면 우리 연구실 쪽으로 땡길 수 있겠지. 요즘엔 우리 쪽에 인력을 후하게 주는 편이니까.”
“…”
“안 그래도 학회 서류 처리도 해야하고, 방학 중에 있을 신입생 반 배정 시험 때 실무 맡을 인력도 모자랐는데… 잘 됐네. 일석이조야.”
그리 말하고, 아니스는 다부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클라라는 불안한 얼굴로 아니스를 쳐다봤다.
정말 이번 방학 때 본가에 내려가기로 결정한 게 잘한 일일까. 방학 끝나고 돌아왔더니 인간 관계에 격변이 일어나 있는 건 아니겠지.
이런 시답잖은 이유로 클레어 조교수의 연구실에 에드 로스테일러를 끌어들인 것이 잘한 일일까.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 [ 새로운 완성품 ]
목재 담벼락 나무 합판에 홈을 내고 맞물려 고정 시킨 뒤, 밧줄로 한 번 더 묶어서 똑바로 세웠다.
캠프에 접근하는 야생동물들을 막아주고, 외풍을 어느 정도 차단해준다.
제작 난이도 : ●●◐○○ [ 제작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
겨울이 왔다.
포근해 보이던 눈발도 쌓이고 보니 재앙이다.
아침부터 일어나서 캠프 동선에 있던 눈들을 싹 다 치우고, 외풍을 막아줄 담벼락을 올리고 나니 벌써 해가 중천이었다.
할 일 많다고 해서 너무 무리하면 안된다는 방침을 세운지도 좀 됐다.
오후 늦을 때까지는 좀 드러누워서 쉬자는 마음으로, 난방을 좀 떼운 뒤 오두막에 드러누워 있었다.
밤이 되면 너무 추울테니… 해질 무렵 쯤에 일어나서 땔감 작업과 식량 작업을 마무리 하자. 그래도 추운 날씨 덕에 식량 자체의 보존성이 좋아진 건 희소식이다.
거기다 내일은 학사 장학생 일로 불려나가서 업무를 봐야한다. 그리 체력적으로 힘든 일은 없고, 지나치게 시간을 뺏지는 않는 선에서 업무를 맡긴다고 했나.
서류 업무 같은 건 기숙사로 가지고 돌아가서 처리해도 된다고 했고… 뭐, 어쨌든 적당히 생존 생활이랑 병행할 수 있으면 된다.
할 일은 많았다.
생활동 쪽의 엘테 상회 지점에 찾아가서 마공학용품 일처리 어떻게 됐는지 알아봐야 하고, 학기말 시험 성적 체크도 하러 가봐야 한다.
캠프 쪽은 당장 생활에는 문제가 없지만… 주기적으로 눈을 치우는 것만으로도 중노동이다.
오두막 옥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바깥쪽에 쳐둔 쉼터 천막이나 간이 시설물들은 자칫 잘못하면 눈 무게에 짓눌려서 무너질 수도 있다. 꾸준히 상태를 확인해줄 필요가 있다.
그래도… 학사 장학금으로 일정 부분 학비 면제를 받았고, 면제 되지 않은 나머지 액수는 기숙사 입사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에 학비 혜택을 받는 걸로 협상을 했다. 그럭저럭 다음 학기까지는 학비 문제가 일단락된 셈이다.
그것만으로도 심적으로 많은 부분이 해방된 듯한 느낌이 들어서, 요즘엔 굉장히 어깨가 가벼워졌다.
어느 정도는 돈도 좀 써서 물자들을 보충했다. 당장에 여유롭게 캠프 생활을 영위할 여유마저 생겼다. 정말 초창기처럼 하루를 쪼개서 미친 놈처럼 살아야 할 정도는 아니게 됐다.
하루를 시간 단위로 쪼개는 일도 그만 뒀다. 오전, 점심, 오후, 저녁, 밤 정도로 5등분해서 널널하게 일과 계획을 짰다. 그래도 여전히 바쁜 편이긴 했지만… 사람이 적응하기 나름이라고, 예전과 비교하니 선녀 같다.
늦은 오후 쯤 되어 눈을 뜨니, 이불 위에 루시가 드러누워 있었다.
나랑 사선을 그리고 누워 십자 형태로 퍼질러 자고 있는 와중이었다. 쌔근쌔근 내쉬는 숨소리를 듣자 하니 깨어날 생각이 없다.
“…”
그대로 루시를 스윽 집어 들어서, 지정석인 목재 쉼터로 다시 던져 넣을까 하다가…. 이렇게 추운 겨울에 밖에 집어 던지는 건 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온갖 방호마법을 둘둘 두른 루시에게 추위 따위는 별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기분의 문제다.
그냥 오두막 침대에 루시를 던져두고, 문을 열고 나와 차가운 공기에 정신을 각성했다.
깊은 심호흡을 한 번 하자 입가에서 김이 뿜어져 나온다. 청량한 겨울 숲의 공기는 그렇게 대번에 의식을 깨워주었다.
“…슬슬 할까.”
언제 하든 리스크는 짊어져야만 한다.
괜히 망설이다가 시기를 놓치면 더 애매해진다.
지금만큼 적절한 타이밍은 또 없겠지.
나는 속으로 그리 되뇌이고, 품속에서 황금색 봉황이 조각된 반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주먹을 꽉 움켜쥔 채 가슴 언저리에 들어보였다.
“혹시 듣고 있냐?”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과감히 그 이름을 불러본다.
“…메릴다.”
바람이 불었다.
차디찬 겨울바람임에도, 묘하게 포근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