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71)
겨울 나기 (4)
완연한 겨울이 찾아든 오른산은 뼈만 남아 앙상해진 나뭇가지가 가득했다.
간헐적으로 박힌 상록수 덕에 완전히 초목의 색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눈부신 눈밭의 새하얀 색조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론산 중턱의 평평한 바위에 쌓인 눈을 훌훌 털어냈다. 어느 정도 습기가 마른 걸 확인하고, 나와 아니스는 그 위에 적당히 걸터앉았다.
“별로 큰 산도 아니지만 어쨌든 산은 산이네. 은근히 위험한 구역도 많고, 시기가 시기다보니 눈 길에 미끄러지면 크게 다치는 학생도 나올 수 있겠어. 감독할 때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그치?”
아니스는 단정하게 올려묶은 회갈색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산에 들어오고 나자, 뒷목이 서늘하고 춥다며 끈을 풀어버린 것이다.
어깨 언저리까지 내려온 머릿결이 적당히 웨이브져 출렁인다. 손으로 훌훌 털며 빗어내리자 향초 냄새가 은은하게 흘러들어왔다.
“에휴… 힘들다… 에드는 하나도 안 힘들어 보이네?”
“슬슬 쉬었다 갈 때도 됐지. 좀 쉬자.”
오른산 중턱에 인파는 없다. 시기도 시기고, 애초에 이런 데까지 솔선수범 올만한 학생이 없다.
푸드덕 대는 새소리와, 사박사박 밟히는 눈소리를 제외하곤 완전히 고요하다. 이따금씩 바람이 불며 눈에 묻힌 잔디를 드러내긴 하지만, 고요를 깰 정도의 소란은 아니었다.
“고마워, 에드. 에드는 체력 좋네. 괜히 나 때문에 일처리 늦어지는데… 배려도 해주고…”
아니스는 자기 손가락 끝을 만지작대며 부끄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에드에 대해서는 내가 많은 오해를 하고 있었나봐.”
아니스는 멋쩍은 듯 휙 시선을 올려다보더니, 뭔가 다시 부끄러운 듯 시선을 회피했다.
“오해?”
“에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 그… 나는 예니카랑은 절친이거든… 그래서, 예니카가 혹시 못된 사람이랑 어울리면 어쩌나 걱정되는 마음도 있어서… 그래서 더 에드한테 차갑게 굴었던 거 같아…”
아니스가 나한테 차갑게 군 일이 뭐가 있었나 하고 생각해보니, 별반 대단한 일도 아니다.
이따금씩 마주칠 때 식은 눈으로 쳐다보거나, 자리를 피하는 게 전부였다.
뭐, 1학기 동안은 내 학사 평판이 개박살이 나있었으니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 한다. 비단 아니스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학사 학생들이 날 피했으니 딱히 아니스만 특별히 더 나쁜 것도 아니다.
애초에 나 살길 찾느라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괜찮아. 별로 신경 안 쓴다. 너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이해한다.”
나는 대충 그리 이야기하고, 클레어 조교수가 작성한 현장 답사 체크리스트를 한 번 스윽 살폈다.
중턱 부근부터 해서 마공학용품을 놓을만한 평지들을 확인하고, 혹시 위험할 수 있는 낭떠러지를 체크해서 안전 장치를 준비해놓아야 한다. 그리고 제단이 있는 정상부분까지 체크해야하니 꽤 번거롭지만… 좀 서두르면 해 떨어지기 전에는 마무리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리고 캠프로 돌아가면 또 할 일이 잔뜩 있으므로, 되도록 빨리 일을 처리 해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체력도 모자란 아니스를 질질 끌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나도 과로하지 않게 조심하는 입장이니 자주자주 휴식을 취해주는 것도 썩 나쁘진 않겠지.
“에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착실하고, 성실하네.”
아니스는 머리 끝을 베베꼬며 부끄러운 듯이 이야기 했다. 그리고 다시금 천천히 내게 시야를 맞췄다.
“에드 같은 사람이 연구실 인력으로 와주니까 정말 안심이 돼. 혼자서 수석 조교 생활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에드도 알지만 클레어 조교수님이 좀 칠칠치 못한 부분도 있으시잖아. 학술가로서는 워낙에 유망한 분이시지만 말이야…”
“그렇긴 하지. 너도 고생 많았겠다.”
“으응, 그렇긴 한데… 괜찮아.”
아니스는 활짝 웃고 내 팔뚝을 가볍게 잡았다.
“에드가 왔잖아.”
“아직 제대로 처리한 일도 없긴 한데…”
“지금부터 도와주겠지. 이것 봐, 답사 일도 거의 끝났잖아.”
아니스는 자리에서 휙 일어나더니, 힐끗힐끗 대는 시선을 유지하며 내 앞으로 와서 마주보았다.
“물론 다른 두사람도 충분히 도움이 되지만, 나는 에드가 와준게 너무 큰 힘이 돼.”
“…?”
“에드는… 상처를 헤집는 말이라면 미안하지만… 가문에서 파문 당한 입장이잖아?”
표정이 다양하다고 해야할까. 같은 미소라도 천차만별이다.
지그시 날 바라보며 지은 미소는, 이번에는 발랄하다는 느낌보다는 어딘가 아픔을 참고 있는 것 같다.
씁쓸한 미소와 함께 능청스러운 모습으로 뒷짐을 지고 허리를 슬쩍 숙인다. 내 표정을 보고 싶다는 듯이.
“이런 휘황찬란한 학교에서 홀로서기를 해야한다는 건… 정말 쉽지 않다는 걸 잘 알아.”
요염함과는 묘하게 다르다. 어른스러운 매력과 동년배로서의 동질감을 동시에 자극한다.
사뿐사뿐 다가와 팔을 훑고서는, 씁쓸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나도 그랬거든. 입학하자마자 집안이 휘청거려서, 그래도 이 학교는 쭉 다니고 싶어서… 그래서 홀로 버텨왔어.”
“그건… 고생스러웠겠네.”
“응. 힘들었지.”
아니스는 아련한 눈가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시간을 쪼개가며 홀로 버텨왔던 지난한 시간들을 회상하는 듯 했다.
“길고 긴 겨울을 혼자서 나는 기분이었어.”
확실히 생활력이 강하단 인상은 있었다. 그것은 경제적인 부분이든, 아니면 그 외의 부분이든 간에 전부 스스로 해결해왔다는 방증이었다.
“그래서 에드를 보고 동질감을 느꼈나봐. 에드도 분명… 학사 생활이 쉽지는 않았을테니까. 뿐만 아니라 안 좋은 소문까지 잔뜩 돌았잖아.”
“그럭저럭 적응하고 나니까 괜찮아지긴 하더라. 너도 너무 상심하진 마. 너도 충분히 잘 버티고 있는 편이잖아.”
“아하하. 고마워. 우리는… 공통점이 많네.”
괜히 감상적인 말을 내뱉기에, 적당히 위로와 공감의 말을 건네 주었다.
뭔가… 얘가 이런 이미지였나 싶긴 하다. 이렇게 감성적이라기보단 좀 더 냉철하고 현실주의적인 성격 아니었나?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어서 거기까진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간 느꼈던 이미지와는 묘하게 달랐다. 사람 속은 까봐야 아는 거라더니.
“역시 에드는 마음이 정말 강하구나. 에드랑 오해를 풀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야. 으음.. 으… 너.. 너무 감상적인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 괜시리 열이 오르네…”
아니스는 다시금 손가락을 주물거리다가, 이내 호들갑을 떨며 몸을 휙 돌렸다.
“아.. 아무튼 좀 부끄럽네! 어쨌든 충분히 쉬었으니까, 얼른 정상쪽으로 출발하자! 빨리 빨리 끝내야지! 혹시 안 넘어지게 조심해! 여기 주변에 돌부리가 많으아아아악!”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아니스가 휙 넘어졌다. 우연찮게도 내 쪽으로 미끄러져서 품속으로 휙 빨려 들어왔다.
“우화아악!”
아니스는 다시 호들갑을 떨며, 내 가슴께에 팔을 밀어내고 얼른 빠져나왔다.
“미, 미안해!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네!”
“조심해라.”
위험한 돌부리가 있나 싶어서 치우려고 슬쩍 바닥 언저리를 봤는데, 딱히 이렇다 할 돌부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냥 눈길에 미끄러진건가?
아니스는 재빠르게 손 부채질을 하면서 얼굴의 열을 식혀대기 시작했다. 확실히 부끄러울만한 상황이므로, 나는 천천히 마음을 추스르는 걸 기다려줬다.
“자, 잠깐… 나… 왜 이렇게 열이 올라오지… 그.. 금방 진정할게…! 잠깐 여기 앉아서 기다려줘…! 금방 올게…!!”
그리고는 손 부채를 퍼덕퍼덕 대며 멀찍이 떨어진 고목나무 뒤로 얼른 들어가 몸을 숨긴다.
나는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 다시금 숨을 훅 내쉬었다. 입김이 퍼져나가는 걸 멍하니 쳐다보다가 시선을 들어보면, 새하얗게 옷을 갈아입은 오른산이 시야에 탁 들어와 있었다.
제법 절경이었다.
“애매한데.”
지면을 뚫고 올라온 고목나무 뿌리에 걸터 앉아서, 아니스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겉보기에는 진짜로 건실하고 착실하잖아… 내숭인가…? 내가 예니카의 절친이란 걸 알고 있어서…?”
아니스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턱을 훑으며 깊이 고뇌했다. 확실히 반응 자체가 시원찮다.
방침 자체는 완벽하게 지켰다.
유능해 보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은근히 약해서 보호해줘야 할 것 같은 인상.
힘겨운 학사 생활을 잘 버텨온 동지. 그런 공감대 형성.
어른스러운 걸 좋아하는 건지, 앳되고 귀여운 걸 좋아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둘을 어느 정도 아우르는 느낌으로 갔고, 은근한 스킨십 몇 번 던져보다가 마지막에는 사고로 위장해서 화끈하게 몸을 겹쳐보았다.
저쪽도 나름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이긴 하는데, 이성적으로 의식해온다는 느낌은 좀 애매하다.
좀 더 지켜봐야 하나 싶다가도, 이 정도 해도 안 넘어 왔으면 일단 헤픈 건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으음… 너무 과몰입했나…”
확실하게 체크해보겠답시고 아예 메소드 연기를 해버렸다. 가혹한 겨울과도 같았던 학사 생활을 한탄하고 말았으니, 은연중에 진심이 조금 섞이고 말았던 것인가.
어쩌겠는가. 역설적이게도 완벽한 거짓말이란, 아주 약간의 진심을 섞어넣었을 때 탄생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유효타로 들어간 것 같으니, 반응이 온다면 조만간이겠지.
“그, 그나저나…. 그렇게 안봤는데 생각보다 몸이 좋네.”
아니스는 방금 에드의 가슴께에 맞닿았던 손바닥을 펼쳐보고선, 다시 접었다 펴본다. 생각보다 딱딱했던 감촉이 남아 있는 기분이다.
샌님처럼 굴면서 생각보다 체력이 좋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란 귀족가 도련님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일머리도 제법 있다. 외모야 뭐 굳이 따져들 레벨은 아니다.
과연, 예니카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천상 소녀가 보면 홀라당 넘어가버릴지도 모르겠으나… 아니스에게는 배경 지식이 있다.
어쨌든 그 고압적인 로스테일러 가문의 후예이고, 조금 잠잠해졌다고 예전의 그 악명이 한순간에 사라지진 않는다.
관상은 과학이라고 해서, 에드의 품행에 대한 의심도 사라지질 않는다. 이런 식으로 여자들을 후렸다고 생각하면 또 나름 설득력이 있다.
가면을 바꿔쓰며 여자들을 갈아치우는 바람둥이들에게야 이 정도 처세는 식은 죽 먹기일 터. 아니스의 눈에마저 애매하고 묘한 상대라면, 예니카 같이 순진무구한 소녀가 홀라당 넘어가버리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그래, 다 그런 법이지.”
아니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두꺼운 가면이 피부의 표면을 드리운다.
*
개축된 오필리스관은 예전보다 훨씬 더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제 막 실베니아에 발을 들인 타냐가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저 로스테일러 저택과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을듯한 그 모습에 감탄하고 말 뿐이었다. 사전에 입학 신청하러 왔을 때에는 아직 공사중이어서 이 정도로 아름다울 거라곤 생각 못했다.
“보내주신 짐은 메이드들이 정리해두었습니다. 3층의 안쪽 두 번째 방입니다.”
대륙 최고의 권력가 로스테일러 가문의 영애가 행차했다. 당연스럽게 오필리스관 최고 책임자인 벨 마이아가 튀어나왔다.
정중히 인사하고 타냐를 안내하자, 타냐는 품위있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종들 통해서 입사 절차만 마무리 해주세요. 전 그 전에 들릴 곳이 있거든요.”
“네, 알겠습니다.”
으리으리한 타냐의 마차에서 고풍스러운 옷을 입은 시종들이 하나 둘씩 내린다. 하나 같이 잘 교육되어 맵시 있는 모습이다.
최소한의 사용인들만을 대동한 채로, 타냐는 생활동 쪽을 향해 동선을 틀었다.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걷는 것은 좋아한다. 겨울날의 시원한 공기를 들이키며 천천히 교정을 구경했다.
실베니아의 교수동은 역시나 낭만이 가득하다. 고귀하고 재능 넘치는 자들이 제각기 스스로를 갈고 닦아, 빛나는 인재로 거듭나는 학업의 땅이다.
그 사이를 노니는 것만으로도 구성원이 된 것만 같아 기분이 고양되었다.
– ‘네 뜻을 들으니 아비로서는 참으로 기쁘다. 그 야망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구나.’
자애롭고 품위 있는 클로엘 제국의 공작, 크레핀 로스테일러.
로스테일러 저택을 떠나기 전, 가장 존경해 마지 않는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담은 타냐의 어깨에 더 힘이 들어가게 해주었다.
학업의 땅 실베니아로 떠나기 전에 아버지께 두 가지 결심을 전달했다.
재능 어린 자들이 모이는 학업의 땅 실베니아에서, 반드시 최연소 학생회장이 되어 가문의 영예를 드높이겠노라.
그리고 아직 완전히 갈무리 되지 않은 로스테일러 가문의 치욕. 에드 로스테일러의 존재를 이 영광스러운 실베니아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겠노라.
오로지 드높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 결심한 타냐의 포부다. 크레핀은 크게 감명을 받은 눈치였다.
타냐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장녀 아르웬이 의문사하는 비극과, 장남 에드가 파문당한 사건에 의해, 어쩌다보니 로스테일러 가문의 차기 가주 자리에 앉게 된 입장.
사실은 주제에 맞지 않은 영광을 얻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자격지심을 떼어내기가 힘들었다.
실베니아에 합격해 이렇게 인정 받은 느낌이 들자… 타냐는 다시금 의욕이 샘솟았다. 신입생 반 배정 시험도 얼른 치러서 제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아마 신입생 중에서도 가장 먼저 기숙사에 들어왔을 것이다.
학생회장 선거를 생각해보면 시간이 별로 많지 않다. 최대한 학사 내 주요 인사들을 만나고, 얼굴 도장을 찍어두고, 제 편으로 포섭해놓고 싶었다.
실베니아 역사 이래로 단 한 번도 없었던, 1학년 학생회장. 그 자리야말로 타냐의 일차적인 목표였다.
– ‘학사 내에는 여러 ‘거물’들이 포진해있지. 학생 하나 하나를 설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학생 회장이 되려거든 여론을 주도하는 주요 인사들을 네 아군으로 포섭하는 게 중요하단다.’
아버지 크레핀의 황금 같은 조언. 그리고 도움.
– ‘학사 내에는 내가 안면을 터둔 ‘거물’들이 꽤 많단다. 마침 처리해야할 일도 있고하니, 나를 대리해서 그들한테 얼굴도장도 찍고, 여러 제안도 해보면서 네 입지를 펼쳐나가 보거라.’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타냐는 숨이 가빠져왔다.
로스테일러 저택에 살며, 영애로서 금지옥엽처럼 키워졌지만… 확실히 자기가 주도해서 뭔가를 해낸 적은 거의 없다.
가문의 위광에 영광스럽게 업혀있었을 뿐이지, 실질적으로 가문에 뭔가를 해준 것은 없는 것이다.
이번이야말로 기회다. 아버지를 대리하는 입장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타냐 로스테일러로서 자신만의 입지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이상이에요.”
빙그레 웃으며, 타냐가 이야기를 마쳤다.
학생회장이 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포부. 쓰레기 같은 에드 로스테일러를 지워버리고 다시금 가문의 영광을 완전히 바로 세울 의지.
그리고, 자신을 지지해주었을 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어떤 걸 약속할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을 털어내고, 다시금 품위 있게 웃었다.
이제 막 피어오른 장미 같은 소녀다. 그런 신입생의 포부 넘치는 모습에,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타냐와 마주보고 있던 ‘거물’은 가만히 앉아있었다.
“어쨌든 학생회장 선거는 한참 남았고, 그 전에 신입생으로서 해야할 일도 많으니 이건 단순히 가벼운 약조일 뿐이에요. 아무튼 저를 지지해주신다면, 생활동 내부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학사 규정 건의안에 의견을 적극 반영해드릴 수 있어요. 선배님. 그 외에도 학생회장을 아군으로 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선배님 같은 분이 훨씬 더 잘 알고 계시겠죠.”
그리고 자연스럽게 덧댄다.
“선배님이 하셔야 할 일은 많지 않아요. 그저 학생회장 선거 때 저를 지지해주시고, 그 외에… 에드 로스테일러를 끝장 낼 수 있도록 조금만 도움을 주세요. 학사 쪽 일처리는 아직 영 못 미덥거든요. 일처리는 확실할수록 좋으니까, 되도록 많은 도움을 받고 싶어요.”
타냐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말을 이어가며, 크레핀이 해주었던 말을 다시금 곱씹었다.
– ‘실베니아는 신분에 맞는 예우를 최대한 해주겠지만, 어쨌든 본질은 학업의 땅이다. 그 황녀님마저도 학업에 있어서는 교수들에게 스승으로서의 예우를 해주는 곳이니, 고귀한 신분에 기대 무례를 범하지 말거라. 너보다 학년이 높은 자는 모두 선배란다.’
신분 이전에 학년. 물론 상대도 타냐를 신분에 걸맞은 예우를 해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건방지게 나갈 마음은 없었다.
타냐는 이미 빛나는 재주를 지닌 실베니아의 선배들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다.
그 소문의 주인 중 하나인 ‘거물’을 눈앞에 영접했다. 신분 이전의 문제. ‘업적’과 ‘역량’의 문제다.
제 아무리 천한 신분을 지닌 자라 할지라도, 그 입증된 능력만큼은 누구도 천대할 수 없다. 그리고 산전수전 다 경험한 베테랑들조차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는 자 아닌가. 상대는 수많은 ‘거물’들을 잡아먹고 큰 사자다.
흘러나오는 기품 역시 귀족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로스테일러의 위광이 없었다면, 이런 거물들을 직접 만나게 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힘들었겠지.
– ‘내가 소개해줄 사람을 만날 때도 명심하거라. 상대를 꼭 존중해야 한다. 특히 협상과 거래에 대해서만큼은, 절대로 쉬이 여길 수 없는 상대란다.’
– ‘그녀와 나는… 현자의 봉서 사업안 관련해서 얼굴을 텄던 사이란다. 협상 안건이 아직 좀 남아있으니, 네가 내 대리인으로서 일을 처리해보거라. 분명 좋은 경험이 될 테지만…. 흐음… 아니다. 힘내거라, 타냐.’
로르텔 케헬른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자기를 쳐다보는 신입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은 뒤, 로르텔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고는… 덩달아 품위있게 웃어보였던 것이다.
“…재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