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72)
겨울 나기 (5)
로르텔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올해 들어오는 신입생들 중에 거물이 많다는 소문이야 들었고, 그 신원도 대강이나마 파악은 해두고 있었다.
슬쩍 뜬눈으로 타냐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으면, 과연 제 오빠를 많이 닮았다.
날카로운 눈매나 밝은 금발에서 확실히 판박이다. 허나 행동거지는 유독 에드와는 다른 느낌이다.
에드 로스테일러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생활감이나 다부진 느낌 같은 것은 많이 죽어있고, 귀족으로서의 기품어린 행세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자신감은 느껴지되 거만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 교육 받아온 영애의 기품이란 이런 것일까.
밑바닥 출신인 로르텔에게는 썩 반가운 인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바로 그 에드 로스테일러의 동생이다.
밉보여서 좋을 건 없으므로 제법 차려입고 나왔건만, 한다는 소리가 에드를 내쫓겠다는 이야기다.
“그 남자를 만난 적 있으신가요, 로르텔 선배님?”
“응, 있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놓을 수 있는 건 한 학년 위기 때문이다.
학업의 땅 실베니아에서는 귀족들조차도 학년에 따른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한다. 물론 귀족을 상대로 막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엎드려 절 받기에 가깝지만.
이 원칙으로부터 초월할 수 있는 자들은 황족이나 성녀 같은, 아예 대륙의 심장과도 같은 자들 뿐이다.
“그럼 긴 설명이 필요하지도 않겠네요. 그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는 잘 아실테니까.”
“잘 알지.”
“로스테일러 가문의 오점이자, 역린 같은 인간이에요. 저는 유년시절부터 그 남자랑 같이 지내와서 잘 알아요. 허세만 가득하고, 기품 따위는 모르는 천박한 인간이죠. 그런 인간이 나이만 많다는 이유로 가주 후계자의 자리에 있는 동안… 얼마나 세상을 향해 한탄했는지.”
로르텔은 차를 마시면서 순식간에 머리를 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좀 당황스러운 감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상황만 놓고 보면 그리 복잡하진 않다.
문제는 어떤 대처를 하느냐다.
확실한 건, 여기서 문전박대 하는 것은 좋은 선택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도 세상사 다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어있다고, 그 남자가 언젠간 제 허영심에 빠져 몰락할 거라 믿고 있었어요. 눈앞에서는 오라버니 오라버니 거리면서 얌전한 영애 노릇을 했지만, 뒤로는 밤을 지새우며 공부하고, 저 자신을 갈고 닦았죠.”
“고생스러웠겠네.”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로르텔 선배님에 비할 바는 아니죠. 어쨌든 그런 자가 이 실베니아에 발을 붙이고 있어선 안 돼요. 고귀한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명성에 언젠가 흠을 가할 인간이기도 하고, 저희 로스테일러 가문 입장에서도 치욕이에요.”
기본적으로 로스테일러 가문의 영애를 문전박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실베니아 아카데미 안에서야 로르텔이 선배된 입장이지만, 사회적 지위는 절대로 물로 볼 수 없다.
크레핀의 총애를 받고 있으며, 언젠가 권력을 휘어잡을 인물이 될 소산이 크지 않은가.
또한, 타냐는 에드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지만, 에드 또한 타냐를 원수처럼 생각하고 있을지 어떨지는 알 수가 없다. 괜히 동생을 해코지 했다가 에드 쪽에서 크게 감정이 상할 수도 있다.
사실은 그런 감정적인 부분 이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맥이란 자산은 금화보다 훨씬 정직하다.
들인 시간과 노력에 정비례해서 더 넓고 깊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타냐 로스테일러 정도면 굉장히 우량한 자산이다. 세상사 모든 것을 사업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로르텔에겐 이만한 투자처가 또 없다.
그렇다면 정답은, 적당히 협력하는 척하면서 상대의 환심을 사는 것일테다. 뒤로는 어떤 작당 모의를 하든 상대가 모르게만 하면 된다.
역시 정답을 꼽자면 이게 확실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대체 어떻게 주신 텔로스 님께서는 이런 자에게 로스테일러의 피를 허락했는지 알 수가 없으실 거에요. 어렸을 때부터 전투 수업을 받았지만 제대로 된 성과는 낸 적이 없죠. 가신들의 입발린 말에 넘어가서 그저 자기가 재능 있다는 허영에 빠져 자만심만 잔뜩 쌓여있던 인간이고요.”
“그래, 그랬구나.”
“뚝심이 없어 이런 저런 분야에 도전해보지만 결국 겉핥기만 해보고 전부 포기. 그래도 자존심은 드높아서 자기의 무능은 절대 인정하는 법이 없어요.
가까스로 마력 감응에 아주 조금 눈을 뜬 거 가지고 무슨 대마법사라도 될 것처럼 목소리를 드높이고, 겨우 턱걸이로 실베니아에 입학했을 땐 아주 기가 차더라고요. 뭐, 몇 년도 못가서 사고 치고 이리 된 꼴을 보니 속이 다 후련했어요.
”
타냐가 에드에게 가지고 있는 억하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타냐는 일평생을 로스테일러의 이름과 기품을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해 살았지만, 제 한몫도 못하면서 허영심만 가득 찬 에드의 밑에서 눌려 살아야만 했다.
장녀 아르웬이 살아있을 때까지만 해도 참을만 했다.
적어도 아르웬은 로스테일러의 일원으로서 갖춰야할 걸 모두 갖춘 귀감이었다. 영애로서 아르웬의 발끝이라도 미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아르웬이 의문사 하고, 그 한심한 에드가 후계자의 자리를 물려받은 이후로는 세상의 불합리함에 치를 떨며 고통스러워 했다.
아르웬은커녕 일반 귀족의 발끝에도 역량이 못 미치는 그런 남자에게 로스테일러의 미래가 맡겨져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좌절스럽던가.
“그 남자 앞에서는 고분고분 착하고 소박한 동생을 연기하고 살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럴 필요는 없겠죠. 이제 그 남자의 밑천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까. 허영과 자만심만 가득해서는 실속이라고는 한 톨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남자라는 거, 로르텔 선배님 정도 되는 분이라면 순식간에 간파하셨을테고.”
“그러니?”
“네.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음…”
신나게 말을 쏟아내다가 문득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타냐는 이제야 대화의 부자연스러움을 깨달았다.
대화에 주고 받음이 없다. 아까부터 로르텔은 단답으로만 타냐의 말에 대답하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결례를 범했나 해서 다시금 로르텔의 얼굴을 들여다 보지만, 여전히 빙그레 웃고 있을 뿐이다.
깔끔하게 말려내려오는 적갈색 머리칼 위로 푸른색 장미 머리핀. 수수한 듯하지만 이따금씩 화려한 프릴이 흔들리는 드레스 자락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정지화면 같아 보이지만, 머리칼은 중력에 이끌려 착실히 흔들리고 있다.
별다른 감정 표현도 없다. 오로지 웃고 있을 뿐.
“저… 그…”
“왜?”
“아니… 혹시 제가 무슨 결례를 범했나요?”
“아니.”
어쨌든 바로 그 크레핀이 대리로 보낸 인선이라면, 어떤 분야에 가능성이나 재능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정에 이끌려 누군가에게 헛투자하는 인간이 아니다. 어떤 재능이나… 하다 못해 이용가치라도 있지 않는 한 처음부터 기대도 주지 않는 자다.
허나 로르텔의 눈에는 그 가능성이랄 것이 아직 잘 보이지 않았다.
타냐라는 인간이 어떤 재능을 타고 난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그 재능이 개화한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뭔가 계기라고 할 것이 있어야 타나랴는 인간의 제대로 된 그릇을 판단해볼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사실 이건 그 이전의 문제다.
“아니, 그… 화나신 것처럼 보여서… 제 착각이겠죠?”
“화 났다니. 무슨 말을 하는거니.”
로르텔은 그 어떤 변수와 위기 앞에서도 논리를 잃지 않는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다. 언제나 합리적인 선택만을 해 상인들의 귀감으로 유명하다.
타냐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크레핀이 미리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크레핀도 타냐도 미처 계산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엘테 상회의 실권자, 황금의 딸, 금화에 영혼을 판 악마, 구세의 대여상… 갖가지 미사여구로 가득한 그녀의 행보 때문에 망각하게 되고 마는 점은…. 결국 그녀 또한 그 나잇대의 소녀라는 것이다.
온갖 변수들 앞에서도 절대 합리성을 잃지 않는 그녀지만, 딱 하나 건드려서는 안되는 역린이라는 게 확실히 존재한다.
이마 위로 비죽 튀어나온 십자 핏줄이 그 사실을 방증했다.
“그건 그렇고, 차 다 마셨니?”
차갑게 식은 로르텔의 머리 위로, 순식간에 계획들이 정립되어 간다.
* [ 습득서 : 중위 마법 – ‘일점 폭발’ ] [ 습득서 : 중위 마법 – ‘근원의 바람’ ]
간밤에 글래스트 교수의 도서관에서 챙겨왔던 마법서 몇 개를 겨드랑이에 끼고 캠프를 가로질렀다.
그리 귀한 책은 아니다. 학생 도서관에만 가도 빌릴 수 있는 것들이지만, 반납 기일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점은 참 편했다.
– ‘오늘 고마웠어. 내일은 간단한 서류 처리 업무만 하면 되니까, 내일 모레 시험장 구축 작업 할 때 한 번만 더 와줘. 그거 외에는 시험 당일 감독 업무만 잘 도와주면 돼.’
첫날의 학사 장학생 업무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나보다는 아니스가 더 고생한 느낌이다.
이리저리 돌아다닐 일 많아서 귀찮긴 했는데, 육체 노동에 비하면 그리 고생스러울 것도 없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겨울이란 계절이 그렇다. 잠시 방심하고 있으면 어느새 하늘에는 어둠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일찌감치 오두막에 들어갈까 고민하다가, 그냥 모닥불 가에 앉았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는 밖에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지만, 눈 내린 뒤의 포근함이 남아있는 오늘 같은 날에는 모닥불 정도만 피워도 바깥에 있을만 하다.
습관적으로 마력을 발현해서 모닥불을 향해 발화 마법을 시전한다.
그러나, 불은 피어오르지 않았다.
“아… 맞다…”
지금은 마력을 사용할 수가 없는 상태다. 이왕이면 청량한 공기가 통하는 바깥에서 책을 좀 읽을까 싶었는데, 아예 모닥불이 없으면 또 좀 그렇다.
나는 고개를 들어서 캠프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주로 나무 위나, 오두막 지붕 위, 평평한 바위 등을 살펴보았는데 딱히 눈에 보이는 건 없다.
잠시간 고민을 했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오두막 쪽으로 향했다.
제법 모양새가 그럴싸해진 오두막의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서, 침대 쪽을 바라보니 이불 안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튀어나오던 녀석이었으나, 요즘 들어 좀 패턴화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아니면 내가 익숙해져서 이 녀석의 행동 반경이 다 간파가 되는 걸 수도 있고.
“야, 루시.”
이불을 슥 걷어내자 몸을 말고 잠에 든 루시가 있다. 쌔근쌔근 숨을 내쉬고 있는 것이 완전히 제 집이다.
내가 루시의 마녀 모자를 스윽 올려들자, 조막만한 손이 휙 올라오더니 모자를 움켜쥔다.
“불 좀 피워주라.”
비몽사몽한 눈을 한 채 상반신을 일으킨 루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육포 주머니에서 육포 하나를 스윽 꺼내서 내밀자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받아문다.
그리고 양손을 휙 하고 들어올리는 것이 안아서 올려달라는 모양새를 취한다. 아쉬운 건 내쪽이므로 별 불만을 토하진 않는다. 어차피 루시는 사람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몸무게가 가볍다.
그대로 루시를 들고 모닥불 쪽으로 나가자, 뭐라 말하기도 전에 불이 확 하고 피어올랐다. 대충 고맙다 말하고, 다시금 루시를 오두막 쪽으로 들여보낼 시늉을 취하자 루시는 내 옷깃을 휙 감아잡았다.
“나도 밖에 있을래.”
“그래라.”
어쨌든 마력을 쓸 수 없는 동안에는 루시에게 이런 저런 도움을 많이 받을 예정이다. 적어도 이 겨울을 나는 동안에는 루시의 도움이 좀 필요했다.
내가 별 불만 없이 모닥불 옆 평평한 바위 근처에 가자, 루시는 휙 내려오더니 먼저 앉아선 자기 옆 빈자리를 발랄한 손짓으로 툭툭 두들긴다.
마법서를 챙겨가서 앉자 루시는 내 무릎에 머리를 묻고, 팔을 위로 쭉 뻗은 채로 대충 드러눕는다. 사람을 베개 취급하는 건지, 베개를 사람 취급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 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는 소리는 어찌나 많이 들었던지, 이제는 귀에서 알아서 필터링 되는 기분이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좀 어둡다. 모닥불의 불빛만으로 습득서를 읽기에는 좀 버거운가 싶어 미간을 찌푸리니, 귓가에 허공을 부유하는 불꽃 하나가 파삭 하고 피어오른다.
따뜻하기도 하고, 책을 읽기 좋게 적당한 광원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 불꽃 마법을 쓴 당사자는 내 무릎에 고꾸라져서 멍하니 허공을 보며 쉬고 있을 뿐이다. 이 자식, 이런 부분에선 또 묘하게 섬세하군…
바람이 불지 않는 겨울 숲은 유독 더 고요하다.
사삭, 하고 책장을 몇 번 넘기는 소리. 모닥불이 타는 소리. 들리는 소리는 그 둘이 전부다.
연중 내내 울어 대던 풀벌레 소리도 쏙 들어가니, 가만히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앉아 있으면 세상 전체가 다 멈춘듯한 느낌이 든다.
“흐음…”
가만히 책장을 넘기며 이론들을 복습해 나갔다. 원소학 수업에서 배웠던 이론들은 대개 숙지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어떤 특정한 중위 마법을 습득하려 한다면 그에 더 심화된 내용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학생마다 익히고자 하는 중위 마법도 모두 다르므로, 포괄적인 수업내용만으로 적절히 학습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어느 정도의 독학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마력을 쓰지 못하니 자체적인 실습을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론 만큼은 숙달해 놓으면… 방학이 끝났을 무렵에는 중위 마법까지도 다를 수 있게 도리 것이다.
내가 목표로 하는 중위 마법은 ‘일점 폭발’과 ‘근원의 바람’.
수많은 육성 경험을 토대로 해봤을 때, 불 마법과 바람 마법을 적절히 아울러서 효율적으로 전투 능력을 올리려거든 이 두 마법의 조합이 최고다.
중위 마법까지 익히고 나면 어디가서 어엿하게 전문적으로 마법을 배운 사람이라고 자칭할 수 있게 된다. 몇 개까지나 익힐 수 있을지가 관건이지만, 어쨌든 저 둘만큼은 반드시 익혀두는 게 좋겠지.
“향수 냄새 나.”
문득, 가만히 누워있던 루시가 뜬금 없는 말을 했다.
“그래?”
하루 종일 학사 일 하며 아니스와 어울렸더니, 그 꽃향기 내음이 몸에 묻은 모양이었다. 아마 오른 산에서 아니스가 실수로 미끄러졌을 때가 결정적이었겠지.
루시는 자기 옷소매에 코를 대고 킁킁 거리더니, 이내 내 가슴께에 다시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그리고는 팔로 내 가슴께를 밀고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열 나? 아파?”
“티 나냐?”
“아프지 마. 아프면 죽을 수도 있어.”
지금은 미열을 몸에 달고 살고 있다. 글래스트 교수의 반지를 사용한 부작용이었다.
과로로 쓰러졌을 때도 느낀 거지만, 루시는 주변의 누군가가 병으로 쓰러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병으로 누군가를 잃어본 적이 있는 경험 탓이겠지.
“죽을 병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
“마력 꼬였으면 풀어줄게.”
그리 말하고 내 가슴께를 꾹하고 누르지만, 이변을 금방 눈치채고 만다.
마력이 꼬인 것이 아니다. 마력 자체가 없어 텅 비어버린 것이다.
순간적으로 루시는 이게 뭔가 싶은 얼굴을 했다가, 금방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무모한 일을 했네.”
“그럭저럭 감당할만 해.”
“겨울이 끝나면… 많이 강해지려나…”
그런 말을 중얼거리던 루시는 다시금 몸에 힘을 풀고 배를 깐 채 드러눕는다.
어쨌든 겨울을 나는 동안 해야할 일은 차고도 넘쳤다. 지금은 눈이 온 뒤의 포근함이 숲을 감싸고 있지만, 혹한과 폭설, 그리고 칼바람이 캠프를 덮치는 날도 분명 많을 것이다.
오두막을 좀 더 보강해야할 필요가 있다. 식량이야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겠지만, 캠프 자체의 내구성은 내가 발로 뛸 수 밖에 없었다.
“있잖아. 이상한 부탁 하나만 해도 돼?”
“이상한 부탁?”
루시는 마녀 모자를 휙 하고 벗더니, 새하얀 머리칼을 스윽 내밀었다.
“머리 좀 한 번 쓰다듬어볼래?”
내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손목을 휙 잡아서 자기 머리 위에 얹어 놓는다.
내가 그대로 북북 쓰다듬자, 루시는 그대로 고롱대며 천천히 잠에 들었다.
무언가를 추억하듯 천천히 잠에 스며드는 모습은… 몇 번이고 봐왔던 것 같다.
평온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면, 필시 겨울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오겠지.
어찌보면 이 겨울이… 루시 메이릴의 다시 없을 휴식기였다.
1. 공방 정리 계획 수립 v 2. 자재 보관용 창고 짓기 3. 오두막 확장하기 4. 시나리오 체크 v 5. 학사 장학생 업무 체크 v 6. 마공학 숙련도 세단계 이상 올리기 7. 활 계열 특수스킬 습득하기 8. 중위 마법 이론 습득하기 v 9. 고위 정령 계약하기 v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풀숲을 헤치고 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처럼 휘황찬란한 복장을 하진 않고, 수수한 세미로브에 머리를 한쪽으로 내려묶은 로르텔이었다.
안 그래도 방학 시즌 들어오면서 엘테 상회 일이 말도 안되게 바빠졌단 소식은 자주 들려왔다. 부탁했던 마공학용품 관련된 업무들이 좀 뒤로 밀려서 지지부진해져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오, 로르텔.”
“오랜만이네요, 에드 선배님. 이런저런 말씀을 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는데요. 여쭤보고 싶은 것도 좀 있고.”
“저번에 부탁했던 일들 말이지? 그냥 엘테 상회 쪽으로 오라고 말하면 내가 찾아갈텐데, 뭐하러 캠프까지 왔냐 번거롭게.”
“아, 아뇨… 괜찮아요….”
로르텔은 말을 하다 말고 잠시간 사색에 잠겼다.
자기 턱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한참을 멍하니 루시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
“이상이에요.”
이슬란 가문에서 거둬들여 키워낸 북방 초목지대의 수호자.
초목의 창 직스 에펠슈타인.
황금의 딸 로르텔이 타냐에게 추천해주었던 인선 중 하나다. 곧 2학년이 될 선배들 중에서는 희대의 천재 마법사 루시를 제외하고선 마법부 최상위권의 무력을 가진 사내라고 들었다.
태생적으로 타고난 마력량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고, 마법의 위력 자체만으로는 다른 A반 학생에게 밀릴 수 있을지도 모르나… 일대일 전투에서만큼은 궤를 달리하는 전투 센스를 지녔다고 들었다.
뿐만 아니라 인망도 깊어, 대부분의 예비 2학년생들에게 신임을 사고 있다고 들었으니… 예비 2학년생을 포섭하려면 일단 직스부터 반드시 포섭해야한다는 로르텔의 조언이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 일단 안면이라도 터둘 것. 과연, 그녀다운 조언이었다.
장소는 생활동 외곽, 우등생 기숙사 로레일관으로 들어가는 길 초입이었다.
직스의 첫인상은 과연 압권이었는데, 혼자서 사람 상반신만한 짐가방 예닐곱개를 겹쳐들어 옮기고 있었다.
그런 직스 뒤로는 도서관 사서 엘카 이슬란이 조그마한 짐가방 하나를 낑낑대며 들고 따라붙고 있었다. 누가보면 어디 대규모 이주라도 가는 것 같은 모양새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는데,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핵심은 간단해요.”
빙긋 하고 웃으며 예의 있게 인사하는 타냐.
“저를 따라서 그 남자를 응징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면 최대한의 사례를 할게요. 이건 로스테일러 가문의 이름을 걸고, 엘테 상회의 공증을 받아 약속할 수 있어요. 사례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겠죠. 예를들어… 이슬란 가문은 명망있는 고고학 연구학자가 많잖아요? 로스테일러 가문 창고에 있는 여러 고미술품을 공유해드릴 수도 있어요.”
“정말?! …아차..”
그 말에 반응한 건 직스의 연인 엘카 이슬란이었다.
직스와 엘카는 방학 중에 본가에 내려갈 예정인지라, 짐을 정리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잠시 짐을 전부 내려놓고, 대충 커다란 목제 가방 하나에 걸터 앉아 듣고 있던 직스가 미간을 좁혔다.
“그래…”
가방을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난 직스는, 타냐에게 성큼 성큼 다가가 가까이 붙었다.
직스는 단단한 몸에 비해 체구가 압도적으로 거대하진 않다. 그래도 비교적 왜소한 타냐에 비하면 꽤 몸집이 되는 편이었으므로, 타냐는 자연스럽게 마른 침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몸에 흐르는 마력의 기운이 여실히 느껴진다. 싸늘한 시선으로 타냐를 내려다보는 직스의 눈이 퍽 소름이 돋는다.
“네가… 에드 선배님의 동생이라고?”
“네…헷.”
순간적으로 말꼬리가 휙 올라가고 말았다. 타냐는 얼른 숨을 집어 삼켰으나, 직스는 경직된 분위기 사이에서 싸늘한 헛웃음을 한 번 흘렸다.
“하하, 들었어 엘카? 얘가 바로 그 에드 선배님의 동생이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타냐가 눈치챘을 때는 이미 상황은 완전히 넘어간 상태였다.
직스는 그대로 무미건조한 손놀림을 통해 품속에 손을 집어 넣더니, 이내 동그란 구슬 형태의 마공학용품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타냐가 긴장을 한 순간, 직스는 타냐의 손에 마공학용품을 쥐어주었다.
“이거 신입생 필수 수업 때 쓰는 마공학 용품인데, 새거 받아서 쓰지 말고 이걸로 써라. 마력 감응 훈련할 때 쓰는 건데 기본적인 적응 설정을 새로 적용할 필요가 없어서 편할 거다.”
“…네?”
“아, 맞다. 엘카. 델로프 교수님의 원소학 수업 족보 챙겨놨었나?”
“응, 챙겨 놨지. 마침 버릴 뻔 했지 뭐야.”
“자, 이거 다 받아놔. 수업 족보 있고 없고 차이가 크니까. 아마 수업 흡수 효율 자체가 달라질 거야. 여기, 필기 정리한 것도 여기 모여있네. 자 이것도 받아.”
“네? 엥? 네?”
타냐는 잔뜩 쌓인 노트와 서류들을 어리둥절해 하며 받아들었다.
“자 이거는 펠드 교수님 수업 때 쓰는 마력 효율 훈련 교본이야. 중요 부분 다 체크되어 있어서 새 책 사는 거보다 이거 쓰는 게 편해. 그리고 이건 마물 생태학 수업 때 쓰는 지팡이인데, 내가 오른산 지형에 맞춰서 수색 마법 개조해놨어. 이거 쓰면 편할 거야. 자, 이것도 받아.”
“아, 네? 네에…”
“자 이거랑 이것도 받고. 이건… 필요 없으려나. 에라 모르겠다, 이것도 받아둬라. 필요 없으면 네가 알아서 버려. 그 할렌 교수님 수업 때 쓰는 화관도 남아있었나? 엘카?”
“응, 여깄어. 그리고 여기, 생활동 라플라스 베이커리 연간 회원권이야. 거기 정말 인기 많아서 귀족들도 얄짤없이 줄서야 되는 곳이거든. 아직 겨울방학 동안 기간 남았으니까 이거 네가 써. 어차피 나는 본가로 돌아갈 거야. 자 여기 화관도 있어.”
“그래, 이것도 받아라. 아, 손이 없구나. 사용인 분. 이거 받아주세요. 이거랑 이것도 쓸모 있을 거에요. 이 목걸이랑 화관도… 자, 여기 머리에 씌워줄게.”
그렇게 한참 동안 학사 생활에 유용한 물건들과 여러 팁들을 집어 던지고 나서, 직스와 엘카는 보람찬 얼굴로 땀을 슥 닦았다.
타냐는 사용인들과 함께 온갖 짐들을 다 받아들고선 벙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짐짝들이 무너질 것 같아 온힘을 다해 균형을 잡았다.
“저어… 제가 했던 제안은 다 똑바로 들으신 거 맞으시죠?”
“어? 뭐… 에드 선배님을 같이 뭐 어떻게 해달라… 그래, 그렇지. 원래 남매지간이란 게 다 견원지간인 법이지. 하여간 사이가 좋은 법이 없어요. 뭐… 에드 선배님 성격이 그런 오해 살만하기도 하지.”
“직스! 곧 있으면 배편 떠난대…! 미리 짐 다 붙여놓으려면 지금 가야 돼…!”
“응, 알았어. 엘카. 어쨌든 그… 에드 선배님의 동생이라 이거지…? 거 얼굴 보게 돼서 참 반갑다. 나는 이제 2학년 되는 직스고, 에드 선배님이랑은 선후배 사이거든.”
직스는 가방을 하나씩 챙겨들었다.
“이래저래 서로 간에 신세진 부분도 많고, 알고 지낸지도 좀 되서 하여튼 각별한 사이다. 이렇게 일찍 일찍 학사에 와서 얼굴 도장 찍으러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네. 너도 오라버니 닮아서 강단 있어 보이는 게 참 뭐라도 될 애구나. 좋은 집에서 좋은 가족들 두고 태어난 게 참 큰 복이지. 응.”
직스는 뿌듯한 얼굴로 귀여운 후배님의 어깨를 두어번 툭툭 두들기고, 주먹을 꽉 움켜쥔 채 활기차게 외쳐주었다.
“어쨌든 파이팅이다…!! 자, 같이… 하나 둘 셋… 파이팅…!!”
그리 말하고, 직스는 다시 짐을 다 챙겨든 채 얼른 선착장 쪽으로 떠났다.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고요.
시간차를 두고 당혹스러움이 올라온다.
“…”
“….??”
“…..?????”
타냐는 온갖 짐을 잔뜩 안아든 채로, 당황스러운 듯 눈동자를 빙글빙글 돌리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