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73)
겨울 나기 (6)
“으하야하으아하아~~.”
“수고하셨어요.”
학회 안건 서류 제출, 신입생 반배정 시험 기획안 제출 및 기본 준비 상태 점검, 개학 후 학사 일정 조율안 작성, 기말 시험 성적 결산 및 등위 부여, 정교수 심사 준비까지 모두 마친 상태.
클레어 조교수는 영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으로 집무용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다음 주 신입생 반배정 시험만 잘 처리하면 남은 방학 기간은 좀 쉬실 수 있겠어요.”
“아니스는 대단하네. 강철 체력이야 진짜. 피부 하나도 안 뜬 거 봐. 나는 벌써부터 각질 올라오는데… 이게… 젊음인가…?”
클레어 조교수는 머리를 박은 채로 고개만 돌려 탁상용 거울을 보았다. 거울 안에 시체가 있었다.
반면 연구실 중앙의 큰 테이블에 앉아 서류들에 둘러 쌓여 있는 아니스는… 저게 사람인가 싶다.
반짝반짝 우아한 모습으로 서류를 넘겨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방금 막 출근해서 체력이 짱짱한 상태인 것 같지만, 놀랍게도 아니스는 이틀째 철야를 하고 있는 상태다.
안 그래도 연구 인력이 모자란 클레어 조교수의 연구실에서 홀로 조교 생활을 하며 다져진 품격이다.
시키지도 않은 일들까지 혼자 다 처리하고, 연구실 잘 굴러가도록 잡일까지 도맡아 하고 있으니… 클레어 조교수 입장에서는 상전처럼 받들 수밖에 없다. 누가 교수고 누가 조교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역시… 외부 장학생 인력은 믿을 게 못되네.’
그와중에 아니스는 서류들을 넘기며 한숨을 푹 쉬었다.
대놓고 클레어 조교수의 수석 조교로 일하고 있는 아니스와는 다르게, 학사 장학 인력에게는 소속감을 기대하기가 힘들다.
그러니 중요한 업무를 맡기기도 그렇고, 사소한 업무일지라도 잘 처리되었는지 꼼꼼히 확인해야만 한다.
확인 업무 자체도 꽤나 노력이 들어가므로, 그리 효율적인 인력이라고 볼 수는 없는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3학년 오닉스든 1학년 클레비어스든 일처리가 깔끔하진 못하다. 워낙 별 거 아닌 걸로도 꼬투리가 잡히는 서류 업무들이다 보니 학생 선에서 처리하기 힘들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최소한의 수준은 기대한 자신이 바보 같았단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은 아니스가 다시금 일처리를 해야했다. 그나마 손이 가지 않은 사람은 에드 로스테일러 뿐이다.
가장 걱정되는 인력이었으므로, 아니스가 밀착 마크했으나 의외로 전혀 손이 가질 않았다.
예니카 관련해서 에드를 떠볼 생각이 없었다면, 아니스가 다른 쪽에 붙는 게 차라리 더 효율적이었을 것 같다. 혼자서 일처리 잘 하는 사람한테 감독삼아 붙어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서류 처리나, 실무 처리 자체도 딱히 흠 잡을 데가 없다. 보통 학생 인력은 경험이 일천하기에 일처리에 능통성이 없고, 사소한 부분도 나몰라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에드 로스테일러는 대부분의 문제를 단순히 문제로만 치부하지 않고, 해결 지향적으로 유연하게 판단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예를들어, 시험 현장 사전 답사를 나가면서 체크 리스트를 챙겨서 나갔는데, 에드 로스테일러는 굳이 체크 리스트에 국한되어 현장을 판단하지 않았다.
– ‘이쪽 입구는 학생들이 잘못 드나들 수도 있으니 미리 폐쇄해두는 게 좋겠네.’
– ‘눈길이 많이 미끄럽네. 시험 당일에도 이렇게 미끄러우면 좀 곤란하겠다.’
– ‘생각보다 시험장 범위가 더 넓다. 범위를 좀 좁게 설정하던가, 그게 여의치 않으면 숨겨놓는 마력석 개수 자체를 늘려서 난이도 조절을 해야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의외로 어화둥둥 떠받들여져 살지만은 않았나 보네…’
실무적인 문제 해결능력은 단순히 고귀한 귀족의 삶만 살아온 자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성이다.
다소 의외의 모습이었다. 당황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리라.
“그나저나, 아니스는 에드랑 같이 다녔지? 어때? 역시 비슷비슷하지?”
“비슷비슷하다뇨?”
“으음… 아니스는 모르는구나. 에드 학생은 파문 당했었잖아?”
“아니.. 그 정도는 알죠.”
“그래? 그럼 이건 나만 아는 건데… 비밀 하나 말해줄까?”
격무로부터 해방되어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클레어 조교수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아니스에게 말했다.
“그 에드 학생 말이야, 어디 사는 줄 알아? 학사 북쪽에 있는 드넓은 숲 말야. 그 숲의 북서쪽 구석에서 혼자 오두막 짓고 살고 있어…!”
“…네? 진짜요?”
“응. 내가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 당시에 조사할 게 좀 있어서 미행을 해봤는데… 으음… 이거 에드 학생한텐 비밀이다…!”
예니카의 짝사랑에 대한 일급 비밀이다. 예니카조차도 타인에게 함부로 말해주지 않았던 사실이다.
아니스는 침을 꼴깍 삼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글쎄 자기 혼자서 이 연구실보다도 훨씬 더 커다란 공간에 그럴싸한 캠프 하나를 만들어놨지 뭐야…! 쓰는 도구들이나, 작업대, 모닥불 터, 진열대, 건조대, 훈연기… 뭐 하나 수제가 아닌 게 없어 보였어. 그렇게 안 생겼는데 생각보다 손재주가 대단하지, 걔?”
“그, 그래요?”
“거기다가 혼자서 정령 계약까지 했더라고. 정령 감응 훈련이라는 게 진입장벽이 있는 법이잖아.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는데, 뭐어… 그만큼 노력했겠지.”
그제서야 아니스는 에드의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한 실마리가 보이는 듯 했다.
야생에서 혼자 자립해 살다보면 온갖 실질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당장에 맞이하게 될 온갖 곤란한 일을 해결하다보면, 그 정도 실무 해결 능력은 자연스럽게 쌓이게 되는 것이다.
온실 속의 화초로 살아온 귀족들은 평생을 가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 실무감각이다. 하찮아 보이는 능력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니스가 가장 잘 안다.
“그래서 아니스가 에드 따라갈 때 고개 끄덕이게 되더라구~. 둘은 은근히 닮은 점이 많지?”
“에드랑 제가요? 뭐어…”
“그래~. 에드 걔 성적표 추이 본 적 있어? 보여줄까?”
“학생 성적표는 멋대로 타인한테 공개할 수 없게 되어있지 않나요?”
“아, 앗차…”
하하 하고 웃으며 클레어 조교수는 머리칼을 휙휙 꼬았다.
“어쨌든 걔가 얼마나 악착 같이 살았는지 확 느낌이 오더라구. 그 글래스트 교수님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니까? 이래저래 불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불만 없이 노력하며 살잖아. 그거 진짜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니까.”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하시네요…”
“그, 그래…? 그래도 나는 그거 참 대단하다 생각해.”
그리 말하고 클레어 조교수는 고개를 들어 아니스를 바라본다.
산처럼 쌓인 서류들의 틈바구니에서 스윽 고개를 든 아니스는 이제 익숙할 지경이다.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다.
별 다를 거 없는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귀족같다는 이야기를 듣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으음… 그렇게까지 평가해주시니 감사하지만…”
아니스는 턱을 짚고 고민에 빠졌다. 자기를 고평가 해주는 클레어 조교수의 말을 생각하기 이전에, 결국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평가가 그녀의 마음 속에 밟힌다.
최근들어 반전되어가는 그의 평가는 단순히 그의 악행이 잊혀져가고 있기 때문이라 결론을 내렸었다.
파문 당하고, 학사 내에서 투명인간 취급이나 받으며 살아온 에드가 인격적으로 얼마나 성장했을까 하면, 차마 긍정적인 대답은 하기가 힘들다.
반전된 평가만 믿고 예니카에게 예쁜 사랑 하라고 응원을 보내주기도 좀 그렇다.
허나, 직접 부딪혀보니 정말 책잡을 곳이 하-나도 없다.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봐도 그냥 건실한 삶을 살아가는 소년 A일 뿐이다.
본인의 노고를 드러내거나, 인정받으려고 하는 모습조차 없다. 그냥 묵직하게 제 할 일 하며 살아가는, 그런 인간인 것이다.
여기까지 오고나니, 그냥 진짜 괜찮은 남자일 뿐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고 만다.
사뭇 드는 생각. 진짜 객관적으로 그냥 괜찮지 않나? 외모 준수하고, 딱히 건방진 태도도 안보이고, 클레어 조교수의 평가도 좋고… 이 모든게 그냥 바람둥이의 연기라고 생각하진 오히려 더 부자연스럽기도 하고…
직접 본 에드의 행동거지를 되짚어보니 생각보다 젠틀한 부분도 있는 것 같고. 의도치 않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몸도 좀 좋은 듯하고, 안겨본 결과 의외로 체취도 뭔가 푸근하다.
하루 종일 노동에 임하는 학생 특유의 땀 냄새나 퀴퀴한 냄새도 나지 않는 것이, 혹시나 폐가 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듯한 티가 난다.
“…아니스? 멍 때리고 있니?”
허읍, 하고 숨을 집어삼킨 아니스가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아니요. 잠깐 일 생각 좀 하고 있었는데요. 좀 더운 데 창문 열까요?”
“응? 그래, 환기 좀 하자. 바람에 서류 안 날아가게 조심해.”
“네, 엡.”
별 일도 아닌데 아니스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들어 얼른 숨을 집어삼켰다.
딱히 죄지은 것도 없다. 그냥 객관적으로 에드라는 남자를 평가질 했을 뿐이다.
새삼 남에게 등급을 매기는 짓을 죄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건만, 은근한 죄의식이 가슴을 옥죄는 듯한 느낌이 들어 등허리에 소름이 돋는다.
어째서냐? 라고 묻거든, 아니스는 굳이 그 감정을 정확히 규정하려 들진 않는다.
다만, 에드가 아니스를 닮아 있다는 사실에 꽤나 각별함을 느꼈다는 건 부정하지 않는다.
악착 같이 살아온 삶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는지 함부로 누군가에게 공유하긴 힘들다.
자고로 낭만 가득한 소녀의 삶에 취한 실베니아의 절친들은, 무겁고 우중충한 이야기보단 생기발랄하고 아기자기한 화두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아니스의 외모에 혹해 추파를 던지는 남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삶에 대한 진중한 고민 없이, 학생으로서의 앳된 고민 이상의 성찰을 해본 적이 없는 자들이다.
그게 딱히 나쁜 것은 아니다. 학생은 학생 다울 때 가장 매력적인 법이다. 특히, 이런 낭만 가득한 실베니아 아카데미에 그런 진중하고 묵직한 친구를 쉬이 사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 이상하다.
차가운 현실은 한겨울의 혹한보다도 더 드세다는 사실은 오로지 경험해본 자들만 안다.
그 공감대에 취하는 바람에 에드에게 아주 약간 진심을 드러내고 만 것은, 한 때의 실책으로 치부하고 있었건만.
“아니스, 얼굴이 빨갛네. 역시 너무 무리한 걸까.”
클레어 조교수의 그 말에, 아니스는 심장을 나이프에 관통당한 기분이 들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거울 앞에 가서 앞머리를 들어올리고 제 얼굴을 확인했다. 거울에 비친 표정을 보고 아니스는 순식간에 자기객관화를 끝마쳤다.
깜짝 놀라서 확 늘어난 동공 아래로 홍조가 가득하다. 열기는 말할 것도 없다.
이거 좀 큰일났다.
진짜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이건 진짜 큰일이다.
아니스는 그대로 손에 잡히는 의자를 당겨서 풀썩 주저앉고, 양손으로 마른 세수를 몇 번이고 반복해 평정심을 되찾으려 했다. 그래도 식은 땀은 계속해서 솟구치고 있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감정이니 마음이니 하는 애매한 것을 객관화 시키는 건 아니스의 주특기다. 이제와서 모른 척 할 수도 없다.
그래도 이 감정은 아직은 감당 가능한 것이 아닌가. 조기에 발견한 것이 그나마 희소식이다.
감정이란 것에도 단계가 있기에, 발전하기 전에 쳐내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갈무리 할 수 있다.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으려던 차, 클레어 조교수가 했던 말 하나가 아니스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 ‘거기다가 혼자서 정령 계약까지 했더라고. 정령 감응 훈련이라는 게 진입장벽이 있는 법이잖아.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는데, 뭐어… 그만큼 노력했겠지.’
클레어의 말마따나 정령 감응 수련에는 진입 장벽이 있어, 꽤나 높은 수준의 정령사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 정도 수준의 성장세는 설명하기 힘들다.
에드 로스테일러 주변에 꽤나 높은 수준의 정령사라고 하면, 그게 누구일지는 뻔할 뻔자다.
거기다가 에드 로스테일러가 북쪽 숲에 캠프를 치고 산다고 했었다. 북쪽 숲은 완전히 예니카의 권역이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계약했을 정령이라고 해봐야 결국 복쪽 숲 안쪽의 정령일 게 뻔하다.
만약, 에드 로스테일러가 계약한 정령이 상시 그를 따라다니거나, 적어도 아니스와 같이 있는 동안의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면….
아니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일도 다 끝났겠다, 간식 먹을래…?? 내가 사올까? 뭐 먹을까…?”
눈치 없는 클레어 조교수는 홍차를 끓여달라 닦달하고 있을 뿐이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
페일로버가의 목장은 규모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마을 안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건실한 곳이었다.
적은 규모에 그렇게 양질의 가축을 키워낼 수 있었던 것은, 내실을 중시하고 화합과 공존을 강조하는 가풍의 영향이 크다.
그런 페일로버가의 외동딸 예니카였던 만큼, 타고난 능력이 대단함에도 절대로 거만해지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타인을 배려하고, 만인을 사랑하는 그녀의 아리따운 마음이야말로 능력보다 훨씬 더 그녀를 빛나게 만들어 주었다.
– ‘예니카는 착하네.’
– ‘예니카만큼 마음씨 좋은 사람은 없을 거야.’
고향을 나와 아켄섬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만인의 사랑을 받는 동화 속 주인공 같은 삶이다. 고독이란 단어와는 먼 삶이었고, 그 덕에 진심어린 친구들을 잔뜩 얻을 수 있었지만… 고민 없는 삶이라는 게 존재할 리가 없다.
달 밝은 밤, 메릴다의 수호목 아래.
정령 감응을 수련하며 올려다본 수호목은, 계절이 뭐 어쨌냐는 듯 여전히 넓고도 푸르다.
예니카는 코를 한 번 훌쩍였다.
– ‘예니카 페일로버는 예비 3학년생 중에서도 최고의 인지도, 인기, 실력을 구가하는 명실상부 에이스 중의 에이스야. 나 같은 상인은 금전적인 능력이야 갖춰져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을 끌어다니는 천부적인 매력은 잘 없는 법이거든.’
– ‘정치란 결국 편가르기잖니? 학생들의 지지를 받고, 사랑 받는 사람을 아군으로 포섭하는 건 중요한 일이야. 너무 걱정하지 마. 예니카 선배님은 천성이 선하고, 배려가 깊어 누구의 말이든 경청하고 믿어주는 분이거든.’
– ‘뭐어, 그래도 선배님이니까 절대 결례를 범하지는 말고. 그럴 일 절대 없겠지만, 혹시라도 예니카 선배님 기분이 다운되어 있을 수도 있잖아? 으음… 적어도 나는 예니카 선배님이 그렇게까지 음울해져 있는 상태를 본 적 없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그러니까 괜히 심기 거스르는 말은 하지 마렴.’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는 로르텔 덕에 타냐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되었다.
바로 그 엘테 상회의 실권자와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직스를 만났을 때는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어리둥절 했지만, 그런 헤프닝에 일일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당장 다음 주가 신입생 반배정 시험이고, 그러다 보면 방학 끝나고, 새 학기 되자마자 학생회장 선거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얼굴 도장을 찍고 다녀야했다.
그 결과, 물어 물어 도착한 곳은 북쪽 숲 호수에 있는 커다란 나무. ‘메릴다의 수호목’ 이었다.
숲을 지키는 거대한 바람 정령이 깃들어있는 나무라고 하는데, 막 학교에 도착한 타냐 입장에서는 그냥 거대한 느티나무로 보일 뿐이었다.
사용인 너덧명과 함께 북쪽숲의 험한 길을 헤치고 헤쳐서 겨우 도달한 장소다. 이 정도 고생이야, 예니카를 포섭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느티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뒷모습이 보인다. 왜소한 체구는 타냐와 비슷하고, 예쁘게 땋아내린 연분홍빛 머리칼이 숄을 타고 흘러내려와 있다.
소녀는 손을 들어올려 불꽃으로 이루어진 박쥐를 날려보냈다. 방금까지 뭐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듯 하다.
물론 정령 감응력이 없는 타냐에게는 그저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편 것처럼 보일 뿐이다.
타냐는 호흡을 가다듬고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예니카 선배님!”
혹시나 건방져 보이지 않게, 나름대로 경의를 담아 이야기했다.
슬그머니 몸을 돌려서 타냐 쪽을 바라본 예니카는, 과연 로르텔이 말해준 그대로다.
천성이 착하고 아리따워, 학사의 모두가 사랑하는 아이돌. 어쩌면 타냐가 상상했던 가장 이상적인 선배였다.
평생을 귀족적 위계 속에서만 살아온 타냐에게, 그런 권력 구도로부터 탈피해 진심을 다해 교감할 수 있는 선배의 존재란 낭만 그 자체다.
보기만 해도 푸근하고 편안해, 나란히 앉아 있기만 해도 체증이 날아가는 기분이라 했나. 앞으로의 학사 생활을 상상하며 타냐는 빙그레 웃었다.
“제 소개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은데… 혹시 괜찮을까요?”
최대한 기품있게 이야기하고 나서 예니카를 바라보았다.
생각한 이미지 그대로이긴 한데, 뭔가 표정이 좀 어두워보이는 낌새도 보인다.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래도, 기본적으로 천성이 착해 누군가의 말을 경청해주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저는 타냐 로스테일러라고 해요.”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한 타냐가 이름을 밝히자, 그제서야 예니카는 그 쪽을 바라보았다.
달 밝은 밤.
바람에 흔들리는 수호목 아래에서 떡갈나무 지팡이를 들고 가만히 뒤로 몸을 돌린 소녀.
알 수 없는 위압감에… 타냐는 잠시간 마른 침을 삼켰다.
*
고요한 겨울밤의 캠프.
로르텔이 모닥불 맞은 편에 지그시 앉기에, 나는 머그컵에 허브티를 내주었다.
이런 저런 살림살이가 많아진 캠프 모습에 괜히 흐뭇한 건지, 로르텔은 캠프 전경을 보고서는 빙그레 웃었다.
“당장 필요한 건 다 해결되신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네요.”
“그래… 이 정도면 거의 집처럼 됐지. 네 도움도 많이 받았으니 고맙게 생각한다.”
“뭘요. 그리 큰 고생도 아니었어요.”
빙긋빙긋 웃으면서 로르텔은 허브티를 한입 머금었다.
“이런저런 할 얘기가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