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76)
겨울 나기 (9)
그 사람의 밑바닥을 보려거든 권력을 쥐어주라는 말이 있다. 타냐는 그 말에 몇백번이고 공감하며 살아왔다.
장녀 아르웬 로스테일러가 가문의 후계자로 있었을 때까지만 해도 로스테일러 저택은 언제나 평온했다.
차기 가주로서 저택에 사는 모두가 아르웬의 눈치만을 보았지만, 그녀는 결코 거만해지지도 주눅들지도 않았다.
언제나 고고한 기품을 잃지 않으며 자기를 갈고 닦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던 아르웬을 보면, 손에 쥔 권력 몇 톨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우아함이란 이런 거구나 싶다.
모든 게 완벽한 아르웬의 휘광에 눌려, 저택의 둘째로서만 살던 에드 로스테일러.
그 때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이상한 점은 없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아르웬 로스테일러의 사망 후, 후계자로서 로스테일러 저택에 군림한 에드는 어떤 인간이었는가.
그 알량한 후계자 권력 조금 가지고 천지가 전부 제 것이라는 양 굴었던 폭군의 모습이야말로… 타냐가 보았던 에드 로스테일러의 본 모습이다.
그깟 권력 조금에 타락하는, 겨우 그 정도 그릇밖에 안되는 인간이 가문을 책임질 후계자라는 사실이 얼마나 절망적이던가. 절대로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그렇기에 타냐는 에드를 꺾어야만 했다.
제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무슨 술수를 써서라도 에드가 가주가 되는 일 만큼은 막아야만 했다.
그를 죽일 것인가?
비수 한 방에 모든 게 해결 될 일이었으면 이렇게까지 골머리를 싸매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후계자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얼마나 무겁던가.
에드의 가슴께에 단검을 박아넣으면 타냐 또한 무사하지 못하리란 건 누가 봐도 명백한 사실이고, 그 이전에 당시의 타냐는 막 마력에 눈을 뜬 앳된 소녀였다.
손에 쥐어준 단검을 과감하게 찔러넣는 강단 어린 모습이나,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그를 죽음으로 내몰 권모술수를 바라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다.
결국 타냐에게 정해진 길이란 하나 뿐인 셈이다.
어두컴컴한 그림자 속에서, 이 악물고 스스로를 단련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 뿐이다.
밤을 세워 공부하고, 예법을 익히고, 마법을 단련하며 해가 뜰 그 때까지 참고 또 참는 것 뿐이다.
에드는 같은 핏줄을 타고난 동생에게까지 손찌검을 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런 한심한 인간의 아래에서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타냐의 삶이란 어땠는가.
이를 악물고 착한 동생을 연기하며 살았다.
고통스러워 하는 저택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버텼다. 그들의 호소에 공감을 해줄 수는 있을지언정… 문제를 해결해줄 힘은 없는 무기력한 인간으로서 살았다.
귀족으로서의 혈통을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지만, 단 한 번도 목소리를 제대로 드높여본 적이 없다.
– 푸욱
긴 하루가 끝나고, 오필리스관 개인실의 침대에 몸을 묻은 타냐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단 하루만에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었다. 알 수 없는 일도 너무나도 많다.
그래도 아직은 해야할 일이 더 많다.
폭군과도 같은 오빠에게 반평생을 짓눌려 살았다.
될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를 차기 가주로서의 자신을 갈고 닦는 삶에서 대체 어떤 가치를 찾았느냐.
혹자들이 그렇게 묻는다면, 타냐는 조용히 되뇌일 뿐이다.
살아왔노라, 죽은 척하며.
그렇게 살다보면 반드시 기회의 때가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노라고.
에드가 파문 당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자기 증명 뿐이다.
타냐에겐 다음 학기로 다가온 학생회장 선거야말로 유일무이한 기회처럼 보였다.
“그 이전에… 반 배정 시험부터 잘 치러야겠지… 사흘 뒤 오른산 입구… 집합이었나… 으음 준비물이…”
그 말 끝이 흐려진 것은, 노곤함을 못 이겨 금세 잠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꽤 오랜만에 맞이하는 숙면이었다.
*
“남자 좀 소개 시켜주세요.”
메이드장 벨에게 오필리스관 바깥 쪽 인맥들은 꽤나 소중하다.
대부분 선임 메이드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편하게 대해주는 탓도 있고, 오필리스관 바깥으로 잘 나가지 않는 벨에게는 중요한 외부 정보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예니카의 절친인 아니스는 종종 벨을 찾아오는 반가운 사람 중 하나다. 대부분 용무는 예니카의 연애사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묻기 위해 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벨은 예니카가 오필리스관을 쓰던 시절 담당 메이드여서 그녀에 대해 잘 알기도 하고, 애초에 눈썰미가 좋아 인간관계의 본질을 재빠르게 캐치해내기 때문이다.
이번에 아니스가 찾아왔을 때에는 예니카와 에드 사이에 어떤 진전이 있었으리라 하고 내심 기대했었다.
벨도 사람인만큼 예니카의 연애사에 호기심이 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니스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벨을 찾아와 의견을 물을 정도면 굉장히 큰 사건이 있었나보다 하고 경청할 준비를 마쳤건만….
“이왕이면 좀 잘생기고, 키 크고, 잘난 사람이면 좋겠어요.”
아니스는 예니카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당당히 이야기했던 것이다.
“가, 갑자기 말입니까?”
“벨씨는 오필리스관 메이드로 오래 일하셨으니까, 좀 잘나다 싶은데 연인 없는 남학생들 많이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입사생 분들의 사생활을 함부로 누설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만…”
“누설 안해도 돼요. 그냥 괜찮다~ 싶은 남자만 소개시켜달라구요.”
이른 아침의 오필리스관 장미 정원.
행여나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이 가시에 찔릴까봐, 통행로 쪽에 나온 장미의 줄기들을 갈무리하고 있던 벨이었다.
아니스가 밤잠을 설친 것처럼 묘하게 피곤해보이는 모습이야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다.
항상 온갖 격무를 짊어지고 사는 학생이기 때문이다. 갖가지 장학생 업무들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클레어 조교수의 연구실을 수석 조교로서 혼자 책임지고 있는 소녀다.
어지간한 일머리와 시간 관리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업무량이다.
“그런데 아니스 아가씨도 의외시군요. 연애 같은 것엔 그리 뜻을 두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저도 연애 좀 할 수 있잖아요. 좀 재수 없어도 괜찮으니까 이왕이면 키 좀 크고, 딱 봐도 아 잘났다 싶은 남자 좀 소개 시켜주세요.”
“그렇게 헤프게 남자 만나고 다니는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애초에 연애 경험이 있으신지…?”
“…”
“시, 실례했습니다. 그… 나쁜 뜻은 아니었습니다.”
벨답지 않게 말실수를 했다. 거의 한 해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다. 그만큼 벨도 당황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항상 바쁘시고, 스스로 앞가림 하시는 데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이시잖습니까. 그래서 당연히 연애엔 뜻이 없으실 줄 알았습니다. 왜, 그… 예비 3학년의 에드 도련님처럼요. 두 분 묘하게 닮으신 부분이 많고 하니..”
“으흠…”
멋쩍은 듯이 턱을 쥐고는 쭈뼛쭈뼛 옆으로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누군고 하면 바로 그 예니카 페일로버가 짝사랑 하고 있는 상대 아니던가.
그리고 아니스야말로 예니카가 믿어 의심치 않는 최고의 절친이라는 사실… 그 정도 관계도는 벨의 머리에 이미 명확하게 그려져 있다.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벨이 조심스럽게 아니스를 떠보았다.
“호, 혹시…”
은근하게 시선을 회피하면서 쓸 데 없이 정원의 장미를 보는 아니스의 모습.
벨은 순간적으로 헛숨을 삼키고 말았다.
“어, 어차피 눈썰미 하나는 기가 막힌 벨씨니까 굳이 안 숨길게요. 네, 맞아요. 벨씨가 생각한 그대로에요.”
“어, 어쩌다가…?”
“뭐어, 웃기는 일이긴 한데… 그 남자 워낙 소문이 안 좋았었잖아요. 듣기로는 여성 편력도 화려하다고 하질 않나. 대개는 헛소문이었다는 사실이야 듣긴 했지만…. 그래도 직접 한 번 확인을 해봐야겠다 싶었거든요.”
“그, 그렇군요. 그래서…?”
“그래서 뭐… 이렇게 하다보니 여차저차 엮여서.. 그게 뭐 그렇게 됐어요… 생각보다 뭐 공통점도 많고 대화도 잘 통하고… 사람이 묵직한 맛이 있고 뭐 그냥 그렇더라구요…”
중간부터 중언부언 유야무야 하면서 고개를 슥 돌린 채 말꼬리를 흐린다. 그러나 기가 막힌 벨의 눈썰미엔 이미 그 귀 끝이 빨개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건 또 뭐하자는 대형 사건인가. 벨은 어이가 없어서 정신이 혼미해질 뻔 한 것을 겨우 부여잡았다.
“굳이 안 숨겨요. 저는 자기객관화 잘해요. 어줍잖게 자기 마음 부정하면서 되도 않는 삽질은 안 하는 스타일이고요.”
“그럼 결국 에드 도련님한테…?”
“네. 뭐 시원하게 인정할게요. 이성으로서 매력 좀 느꼈어요. 그럴 수 있죠, 저도 여잔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인정할 건 인정하고, 대책을 강구해야죠. 안 그래요?”
수석 조교다운 문제 파악 능력과 해결 능력, 그리고 추진력은 가히 박수를 쳐줄만 하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애 문제가 그렇게 일처리 하듯 딱 잘라 처리할 수 있는 것일 리가 없다.
허나 아니스에게 그런 것 따윈 알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무적으로 착 잘라내는 것이 속 편했다.
“벨씨. 예니카는 정말 진심을 다해 소중히 여기는 몇 없는 친구에요. 오히려 이건 희소식인 셈이죠. 제가 매력을 느낄 정도로 진국인 남자라면, 예니카가 정말로 제 짝을 제대로 찾았다는 거잖아요.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어요.”
“저어… 아니스 아가씨.”
“결국 제 마음부터 얼른 갈무리 지어버리면 더 이상 문제의 소지는 없다는 거죠. 일단 일찍 발견해서 다행이에요. 연심이라는 것도 결국 사람 머리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 작용의 일부잖아요? 악성 종양이라고 생각하면 얼추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이렇게 빨리 발견했잖아요.”
최대한 주관적인 관점을 배제하고, 자기 자신을 객관화 해서 바라보는 습관이 들어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렇게 이야기한 아니스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장미 정원의 정자에 가만히 앉았다. 딱히 한 것도 없는데 지쳐 보이는 것이 벨의 눈에는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문제를 인식 했고, 해결 방안도 가닥이 잡혔으니 이제 치료 행위만 잘 이루어지면 되는 거죠. 너무 늦게 발견해서 수습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끔찍해요. 이렇게 조기에 발견했다는 건 정말 경사스러운 일이에요.”
“그걸 치료라고 표현하는 것도 좀…”
“결국 비슷한 거라 생각해요. 어쨌든 세상사 인연의 연속이고, 남자라고 해도 그 남자 하나밖에 없는 거 아닌데… 새 인연 잘 만나서 새 사랑 잘 하면 되는 거잖아요?”
“말을 참 쉽게 하시는군요…”
“복잡해보이는 일도 이렇게 체계화 시켜놓고 보면 생각보다 간단한 법이잖아요.”
아니스는 품에 안고 있던 서류철을 정자의 테이블 위에 툭 올려놓더니 깃펜으로 슥슥 뭔가를 써내려간다.
벨은 슬쩍 고개를 들어서 서류철을 보았다.
비죽 비틀어진 틈으로 보이는 아랫 장에는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온갖 감상과 앞으로의 대처방안에 대해 갖가지 마인드 맵을 그려놓은 흔적이 역력하다. 북북 그어진 부분도 많고, 괜시리 자세한 부분도 많은 것이 꽤나 공들인 모양새다.
여유 넘치는 척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혼자서 전쟁을 치르고 온 셈이다.
“어쨌든 호감은 더 큰 호감으로 덮어 씌울 수 있는 거거든요. 더 좋고 건실한 남자 만나서 제 나름대로 알콩달콩 좋은 사랑 나누면 만사 다 잘 해결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대신할 남자만 구해서 우리가 연인이다 동네방네 소문만 내고 다니면….”
“드리고 싶은 의견이 두가지 있습니다.”
벨 답지 않게 아니스의 말을 끊었다. 아니스는 움찔 거리며 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일단, ‘대신할 남자’니 하면서 타인을 소개 시켜 달라고 하는 건… 당사자에게 크나큰 실례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런 식으로 누군가와의 만남을 주선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단호하게 정론을 전달하는 모습은 과연 베테랑 메이드라 불릴만 하다.
“제 아무리 아니스 아가씨라 해도 이 정도까지 타인에 대한 배려가 결여되었던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을 찾으신다고 한들 서로 알아가면 되는 것이지 그리 급하게 연인 관계라고 도장부터 찍을 필요도 없지요. 제 눈에는… 아니스 아가씨가 굉장히 쫓기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
“혹시… 예니카 아가씨가 아니스 아가씨의 연심을 눈치챘습니까?”
허윽, 하는 소리와 함께 아니스가 깊은 숨을 삼켰다.
“그렇다면 이렇게 급하게 아니스 아가씨가 연인을 만들려고 하는 이유도 설명이 됩니다.”
벨의 눈썰미가 얼마나 좋은지는 아니스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클라라와 함께 예니카의 연애사를 상담하러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던 것이다.
그 눈썰미의 화살이 자기 자신을 향할 거란 상상은 못해봤겠지만.
“어쨌든 내 마음은 다른 곳에 가있다… 그 결백을 증명할 가장 깔끔한 방법이 새 연인을 사귀는 것이겠지요… 아니스 아가씨는… 정말로 예니카 아가씨가 소중하신가보군요.”
아니스는 자기 마음의 행방 이전에, 예니카가 상처 받을까봐 무서워서 얼른 그 대책을 강구하려 나선 것이다.
그 말에 아니스는 잠시간 머뭇거리다가, 오히려 입꼬리를 올리고 보란듯이 웃어보였다.
“그렇게 포장해주시면 더 좋구요. 뭔가 되게 그럴싸해보이네요.”
그러고는 커흠커흠 몇 번 목을 가다듬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무척이나 거창하게 말씀해주셨지만, 결국 저는 사람의 감정이란 것도 전부 다 조율 가능한 유기적인 반응 작용의 집합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뭐 그리 대단한 배려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구요. 아직 초기일 뿐이니 천천히 조율해나가면…”
“예니카 아가씨는 만나보셨습니까?”
아니스의 말은 싹 다 무시하고, 핵심부터 찌르고 들어온 벨의 질문에 아니스는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이윽고 고해성사 하듯이 천천히 내뱉었다.
“네.. 어저께 교사동을 지나가다가 마주쳤는데…. 인사도 못하고 헤어졌어요… 서로 뭔가… 서먹해서…. 표정이 어두워 보이더라고요…”
“그렇군요.”
“그리고… 당장 다음 주 반 배정 시험 때 에드랑 같이 시험 감독 해야하는데… 무슨 얼굴로 나가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리 이야기하고, 아니스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벨은 한숨을 푹 쉬고 턱을 괸 채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아침 햇살과 함께 참새들이 짹짹거리는 장미 정원의 한 켠에서, 그렇게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흘러갔다.
“생각하신 것 만큼 그리 큰 일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할 지도..?”
이윽고 벨이 내놓은 결론은 의외의 것이었다.
“네?”
“예니카 아가씨를 생각해보면… 언제까지고 그렇게 새하얀 캔버스 같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심사숙고한 끝에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고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방법이 떠올랐다.
단 한 명 골치아파질 수도 있는 사람이 있긴 한데, 당장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벨은 마음속으로 에드에게 깊은 사과의 기도를 보냈다.
“아니스 아가씨도 잘 아시겠지만, 예니카 아가씨는 타인에게 언제나 호의적이고 진심을 다하시는 분 아닙니까. 그건 필시 좋은 일이지만… 사람은 때때로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내지 않으면 생각보다 쉽게 고장납니다.”
벨은 아니스의 옆에 나란히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쩌면 예니카 아가씨에겐 좋은 기회가 될지 모릅니다. 화내고, 싫은 소리하고, 툴툴대고 하는 일이요. 당장은 힘들지 몰라도 의외로 그런 식으로 감정을 털어내는 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데요.”
“그, 그럴까요…?”
“무엇보다 그런 부분을 가장 잘 자극하는 감정 중 하나가 바로 질투심입니다. 예니카 아가씨는 정말 이타적인 분이시니까, 타인에게 깊디 깊은 질투의 감정을 품어본 경험이 적겠지요. 또 그런 감정에 혼란해하다 보면 필시 마음도 약해질테고요. 무척이나 힘들어하실테죠.”
바로 그런 모습들을 아니스가 걱정한 것이 아닌가.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다고 아니스가 지적하려던 차, 벨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애초에 예니카 아가씨는 너무 완벽한 게 문제 아니었습니까?”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벨의 말에 아니스는 또 다시 말문이 막혔다.
“자, 따라해 보십시오. 보호 본능.”
그 언젠가 클라라와 나누었던 대담이 떠올라서… 아니스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애초에 벨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혼란해지고 힘들어질 때, 예니카가 찾아갈만한 곳이야 뻔하다.
벨은 가만히 앉아서, 가만히 아니스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 죄의식 느낄 필요는 없다고 격려해주는 듯한 모습에, 아니스는 문득 마음을 놓고 말았다.
*
“뭐냐, 언제 왔어?”
“…”
마공학 용품을 도서관 입구 근처에 가져다 놓고, 위에 눈이 쌓이지 않도록 천막으로 잘 덮어두고 온 와중이었다.
슬슬 창고 건설용 자재들을 다듬어야할 시기였다.
제작계 스킬 단련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해서, 수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오두막 내부 공간 자체를 좀 확장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대부분의 마공학 훈련은 도서관에서 이루어지겠지만, 단순 생필품을 만들어내거나 간단한 공정 정도는 오두막에서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외벽 한 쪽을 잘 뚫어서 창고 공간을 만들고, 반대쪽 공간도 좀 뚫어서 거실 공간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든다. 거기까지 하면 좀 작업량이 너무 많아지나 싶어서 고민이 되긴 하는데… 방학 일정 봐가면서 유도리 있게 해야겠지.
어쨌든 제작 일정 생각해보며 캠프에 돌아오니 꽤 추웠다. 모포를 대충 어깨에 덮어쓴 채로 나오자, 타닥대는 모닥불 앞에 예니카가 무릎을 안고 앉아 있었다.
뭔가 평소처럼 발랄한 느낌이 없어 표정을 보니, 역시나 어둡다.
“춥다. 차 한 잔 줄까?”
그리 말하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릎 위에 제 턱을 얹었다.
평소 같으면 벌써부터 조잘대며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았을 예니카건만, 척 봐도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허브를 잔 속에 털어넣고, 찻잎을 잘 떠서 갈무리 한 뒤 잔 두 개를 들고 갔다.
예니카 옆에 떡하니 앉아서 잔 하나를 내미니, 조막만한 양손으로 꽤나 큰 머그잔을 잘도 받아든다.
그리고는 가만히 차만 호로록 대며, 모닥불 앞에 나란히 앉아 쉬었다.
“또 눈 온다. 안 그래도 꽤 쌓여있었는데 이틀에 한 번 꼴로 오는 것 같네.”
사뿐사뿐 내려오는 눈발이 차분히 내려앉는 곳엔 이미 선객이 가득하다.
겨울이 되도 상록수들은 제 색을 잃지 않는다지만, 새하얗게 쌓인 눈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다.
온 세상이 다 하얗게 물들었으니, 타닥대는 불꽃의 선명한 빛만 더 눈에 띄는 느낌이다.
곁눈질로 예니카를 스윽 쳐다보면 여전히 무릎을 안은 채, 머그컵에 떠다니는 찻잎 몇 개를 눈길로 쫓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주눅이 들어있는 예니카는 흔치 않다.
항상 밝고 천진난만하던 자기가 주눅이 들면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곤혹스러워 하는지 본인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민 있으면 말해도 된다.”
그리 말하자, 예니카는 튕기듯 고개를 휙 들더니 나를 바라보고는… 뭐라 입을 열다가 말았다.
그러고는 유독 슬퍼보이는 눈으로 이야기했다.
“미안해. 말 못하겠어.”
“그럼 굳이 말 안 해도 된다.”
때때로 망각하고 마는 것은 예니카도 분명 한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고개를 내리깔고 무릎을 안은 채 침울해져 있는 모습은 궁지에 몰린 작은 동물 같아서… 알 수 없는 보호 본능을 일으키곤 한다.
나는 대충 손을 들어 예니카의 반대쪽 어깨를 감싸안고… 툭툭 두들겨주었다. 두꺼운 모포의 온기도 나눠주는 것은 덤이다.
혹시나 화들짝 놀라서 거리를 벌릴까 걱정스러웠지만, 두더지처럼 고개를 쑥 들어올린 예니카는 잠깐 뭐라 말하려다 다시 입을 오므렸다. 침울한 탓에 기운이 빠진 느낌이다.
이윽고 예니카는 그대로 내 어깨에 옆머리를 묻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겨울은 계속된다.
모포 한 장과 모닥불 하나 가지고는 영 버티기 버거운 추위다.
그래도 봄은 사뿐사뿐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