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78)
신입생 반 배정 시험 (2)
널널한 학사 분위기에 최고학장 맥도웰도 조금은 풀어진듯한 기분이 들었다.
트릭스관의 개인 집무실 책상에 앉아, 거하게 기지개를 한 번 한 이 초로의 신사는 쌓여있는 서류들을 다시금 훑었다.
방학 내 학사 업무의 보고 서류라 해봐야 평소 때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업무량이 줄어든 것은 좋으나, 방학에도 일해야하는 직급이라는 사실은 참 슬프다.
이 정도 중진 쯤 되면 업무량 자체에 불만을 가지는 경우는 잘 없지만, 적어도 맥도웰은 최소한의 삶의 질 정도는 보장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것이다.
“오늘이 신입생 반 배정 시험 날이로군…”
전투부, 마법부, 연금부의 반 배정 담당 교수들이 모두 보고 서류를 제출해왔다.
시험의 장소나 내용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모두 나름대로 납득할만한 채점 기준과 내용을 마련해왔다.
그 중에서도 유독 관심이 가는 곳은 마법부다.
마법부의 반 배정 시험은 언제나 글래스트 교수의 주관이었다. 학사에서도 그의 식견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으므로, 전적으로 그의 안목에 모든 것을 맡겨 왔던 것이다.
몇 년 동안 신입생 선별을 맡아왔던 글래스트 교수가 없다. 마법부에서는 이제 어떤 방식으로 신입생들의 능력을 판단하고 변별력을 부여할 것인가.
그 사실을 흥미있게 살펴보았다.
반 배정 시험 담당교수는 글래스트의 수제자인 클레어 엘핀이다. 그녀에 대한 소문은 학사 원로들 사이에서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자주 들려온다.
듣기로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인복이 좋을 수는 없댄다.
그녀의 주변엔 스승 제자 할 거 없이 언제나 최고급의 인재들만 모인다. 사람을 끌어 당기는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 정말 주변에 버릴 사람이 아무도 없다.
교직에 몸 담고 있는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부러운 천운이다. 그런 소리를 밥먹듯이 듣는 인간이었다.
“흐음…”
맥도웰 교수는 이 사람이 그렇게까지 복에 겨운 인간인가 싶었다.
그녀의 연구실 명부를 들춰보았지만, 이게 정말 그 버릴 사람 하나 없는 엘리트들의 명단인가 하면 또 애매한 느낌이 들고만다.
다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대충 수긍하고는, 맥도웰 교수는 서류에 결재 사인을 하고 넘겼다.
[ 연구실 명부 보고 ? 조교수 클레어 엘핀 ]연구실 최고 책임자 : 클레어 엘핀 수석 조교 : 아니스 헤일란 학사 장학 인력: 오닉스 펠로미어 에드 로스테일러 클레비어스 노튼데일
*
“이건 좀 안 좋네… 아하하…”
오른산 정상에 앉아 있던 클레어 조교수는 걱정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단 앞 쪽에는 고장난 마공학용품 대여섯개가 늘어져 있었다.
“외부적인 충격으로 회로 자체가 뒤틀렸나봐. 마력 주입 해봐도 먹통이고. 이건 마공학 교수님한테 따로 수리 의뢰를 해야되겠는걸. 하지만 당장 그럴 시간은 없고…”
‘환영 원판’
희귀 등급 마공학용품으로, 온갖 맹수나 마물족들의 환영으로 상대를 끌어들여 혼란에 빠트리는 도구였다.
이것들 수십개를 함정삼아 정상으로 오는 길에 뿌려두는 게 핵심이었다. 사실 다른 원판들이 아직 많이 남았기 때문에 대여섯개 좀 고장났다고 큰 대세에 지장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필 제일 중요한 원판들만 골라서 고장나다니… 골치 아프게 됐네.”
하지만 아니스가 들고 나르던 보랏빛 원판들은 다른 원판들과는 종류가 달랐다.
훨씬 더 정교한 회로와, 강대한 마력을 들여 만든… 이번 반 배정 시험의 최종 관문 역할을 해줄 녀석들이었다.
일반 원판에서 발현되는 환각이 늑대나 코볼트 정도라면, 이 보랏빛 원판에서는 정말 제대로된 마물족과 맹수들이 튀어나온다.
내가 알기로는 대부분의 1학년 학생들이 이 보랏빛 원판에서 튀어나온 회색곰, 붉은 피 가고일, 영원 밴시 따위에 제압당한 걸로 안다.
도저히 신입생 수준에서 상대할 수 없는 적들이다. 후일 학사 측에서 클레어 조교수에게 추궁하자, ‘엥? 그 정도는 이겨야 A반 하는 거 아니였어요?’하고 천진난만하게 대답하는 공포스러운 일화도 있다.
썩어도 준치라고, 어찌됐든 그녀 또한 글래스트 교수의 제자인 것이다.
세상 천진해 보여도 중요한 부분에서는 냉혹한 것이, 인상만으로 섣불리 판단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지. 남은 보랏빛 원판은 두 개니까… 그냥 이거 가지고 시험 진행하는 수밖에. 최대한 동선 겹치는 구간에 설치해서 커버해야지 뭐.”
그리 넉살좋게 이야기 하고 말지만, 그게 좋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클레어 조교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보랏빛 원판의 커버 범위가 좁아질수록, 시험 자체가 운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갈 확률이 커진다.
운이 좋아서 보랏빛 원판을 자극하지 않은 학생들은 쉽게 합격하지만, 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랏빛 원판을 자극해버린 학생들은 금방 탈락해버릴 것이다.
“여기까지 어떻게 운반해왔는데, 이걸 다 못쓴다고요?!”
우중충한 외관의 클레비어스가 척 봐도 음울해보이는 태도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와, 진짜! 개고생했네! 어떻게 이걸…!”
거기까지 말하려다가, 제단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 있던 아니스를 보고 얼른 숨을 집어삼켰다.
사태의 원흉은 바로 아니스였다.
중요한 마공학용품들을 허투루 관리할 수 없다며, 혹시나 잃어버리면 큰일 나니 자기가 직접 들고 나르겠다고 들고 다니다 땅에 떨어트려 버린 것이다.
겉보기엔 엄청 튼튼해 보여서 마공학에 조예가 없으면 잘 모를 수 있지만, 내부 회로는 워낙 민감하기에 주의를 기울여서 다루어야만 한다.
애초에 이런 것들을 미리 일러주지 않는 클레어 조교수의 넉살도 문제다. 아니스가 워낙에 일을 잘하니 알아서 다 잘 처리할 것이라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다.
“…미안해. 내가 좀 더 정신 똑바로 차렸어야 했는데.”
“아니, 그…”
클레비어스는 식은 땀을 뻘뻘 흘리더니 고개를 얼른 수그렸다. 쭈뼛거리면서 손가락 끝을 슥슥 쓸고서는 ‘아니 저렇게 미안한 얼굴로 있으면 어떻게 화를 내라고!’ 하는 둥 혼자 중얼거리다 말았다.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숙연해지고 말았다.
클레어 조교수도, 오닉스 선배도, 클레비어스도 모두 입을 다물고 있기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이러고 있는다고 고장난 마공학용품이 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확실한 건, 상황 자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도 본작에서 1학년생들을 좌절시킨 건 바로 클레어 조교수가 준비한 이 보랏빛 원판들이었다.
이번 신입생 반 배정 시험은 정사에서는 그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식에 불과한 비중의 사건이었기에, 구체적인 시험 내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까지는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의 헤프닝이 정사에서도 있었을 거라 생각하기는 좀 어렵다.
아니스가 중요한 마공학 용품들을 떨어트려 버린 건, 가까이 따라붙은 나를 보고 놀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뒤의 흐름은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만약 정말로, 난이도가 대폭 낮아진 시험 때문에 A반 합격자들이 출몰하기 시작하면…
이어지는 ‘합동 전투 실습’ 이벤트에까지 영향이 간다.
최초의 A반 학생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테일리에게 덤벼드는 신입생들. 그런 신입생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압해버리는 검성 테일리. 그리고 그런 테일리를 보고 흥미를 느끼는 성녀 클라리스.
이 이야기 구조가 전부다 어그러져버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입생 등장인물들의 반 배정 자체가 어그러지고 나면, 그들 사이에 일어날 온갖 해프닝과 인간 관계들도 전부 미지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만다.
당연히 모든 것이 완벽할 순 없다. 자잘한 부분이야 어떻게든 된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이건 너무 큰 비틀림이다.
가만히 놔두기엔 너무 골치가 아파진다는 얘기다.
*
배움의 땅 실베니아에 왔다는 것을 언제 가장 실감하는가.
타냐에게 그리 묻는다면, 바로 고귀한 학생을 동기로서 직접 영접했을 때라고 대답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녀 클라리스다.
배움의 미덕이 신분의 귀천보다 앞서는 곳이라는 그 방침은, 세상 모두가 우러러보고, 주신 텔로스의 목소리에 가장 근접해있는 성스러운 자조차 같은 인간으로서 교수동을 거닐게 만든다.
성녀 클라리스는 그 실물을 본 사람조차 많지 않으며, 보더라도 인파들 너머 저 멀리에 자그맣게 보이는 정도가 다였을테다.
수백만 텔로스 교도의 정신적 지주인 소녀다.
대중 앞에 서던 클라리스는 언제나 새하얀 성복을 두르고 화사하게 빛나던 인간이며, 그 어떤 곳을 가든 주변 모든 인파들이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던 인간이다.
그런 클라리스가 성당 기사들의 호위조차 무르고, 모두와 같은 실베니아 교복을 입은 채 무리에 합류하는 모습은 신기함을 넘어서 아예 초현실적인 느낌이다.
저런 사람이 같은 인간으로서 무리에 합류해도 괜찮은 것일까 하는 기우조차 든다.
같은 복식이라고 해서 인간의 기품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은발보다는 백발에 가까운 머리칼이 어깨를 타고 허리까지 흐르고, 소름 끼치도록 붉은 눈동자는 미동조차 없다.
붉은 나비 모양 머리핀이 오른쪽 머리칼에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제하면, 다른 장신구라 할 것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그녀의 모습은 휘황찬란해 보인다.
오른산 입구.
시험 시작을 기다리며 모여있던 마법부 신입생들은 하나 같이 굳어버렸다.
텔로스 교단의 신자인 학생들은 벌써 무릎부터 꿇었다. 대대적으로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주들은 텔로스 교단의 세례를 받으므로, 타냐도 얼른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감사합니다만, 예법을 거두셔도 괜찮습니다.”
작지만 선명한 목소리가 신입생들 사이에 스며들었다.
“모든 예법을 일일이 챙기려 들다간, 학사 생활 자체가 힘들어집니다. 저를 위해서라도 다소간의 예법은 간소화 해주시길.”
클라리스가 그리 말했음에도, 학생들은 고개를 들기 꺼려했다.
가장 먼저 고개를 들어올린 것은 바로 타냐 로스테일러였다.
신분의 고귀함으로서는 클라리스와 그나마 비벼볼 여지라도 있는 사람이었다.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클라리스 성녀님. 저는 로스테일러 가문의 차기 가주, 타냐 로스테일러라고 합니다.”
“어머, 로스테일러 가문이라. 그곳의 가주 크레핀이 제게 세례를 받았었죠. 그 때는 제가 너무 어려서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요.”
“영광스러운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이 자신만만하던 타냐가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 모습은 다른 동급생들에게도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타냐는 영애로서의 기품을 칼 같이 지키는 소녀지만,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양보하는 태도를 보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허나 아무리 강단있는 그녀의 성격이라 할지라도, 그 상대가 교단의 성녀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몇년 전 장녀 아르넨에 대한 소식은 들었어요. 다소 늦었지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아르넨이 아니라 아르웬이다. 허나 타냐는 굳이 그 말을 정정하려 들진 않았다. 굳이 정정해봐야 분위기만 묘해질 따름이다.
온 나라의 온갖 귀족가와 다양하게 얼굴을 터두고 살아야하는 성녀의 신분상, 귀족가 자제들의 이름을 전부 외고 있기를 기대하는 건 좀 가혹하다. 비슷하게나마 기억해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애초에 이 실베니아 아카데미에 저 클라리스와 동등한 눈높이에서 마주볼 수 있는 자라 해봐야, 페니아 황녀 정도를 제하면 아무도 없다.
“기억해주시고, 위로의 말을 해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스럽네요. 제가 성인이 되면 세례를 받으러 가겠습니다.”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타냐 양.”
그렇게 이야기하고 나서 웃음을 주고 받자, 그나마 경직된 분위기가 풀어지는 듯 하다. 쭈뼛거리던 주변 학생들도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성녀와의 조우는 정말 인상 깊은 대사건이긴 하지만, 일단 중요한 건 지금 당장 치러질 반 배정 시험이다.
전투부는 학생 광장, 마법부는 오른산 입구, 연금부는 오벨관 지하.
각자 소속에 따라 모이는 장소도, 시험 내용도 다르지만 목표는 같았다.
그건 바로 A반에 배정되는 것이다.
수년동안 글래스트 교수가 반 배정 시험을 맡으면서, A반 멤버의 위상은 말도 안되게 드높아졌다.
당장 예비 2학년의 A반 멤버들 면면만 보아도 그렇다. 루시, 로르텔, 직스, 아일라, 아델에 이르기까지… 과반수 넘는 학생이 이미 내로라 하는 에이스 취급이었다.
그런 위상과 더불어서, A반 학생들에겐 추가적인 혜택들까지 있다.
학비는 전액 면제이며, 학사 모두가 우러러보는 기숙사 오필리스관에 입주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고, 학생 복지 시설 대부분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그 드높은 명예를 원하든, 실질적인 혜택을 원하든 간에 A반 자리는 신입생으로선 탐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른산 초입에 모여든 신입생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각자 나름의 이유로 A반에 들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른산 꼭대기에서 섬광 마법이 발현되는 게 신호라고 했었지…”
타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인파 사이에서 오른산 꼭대기를 올려다 보았다.
섬광 마법을 신호탄으로, 오른산 여기저기에 숨겨진 마력석에 온갖 종류의 마력이 부여되기 시작한다.
각자의 감응능력을 활옹해 마력석을 찾아낸 뒤, 꼭대기의 제단에 바칠 수만 있으면 시험 통과.
찾아낸 마력석의 종류나, 걸린 시간, 돌파 방식 따위를 채점 기준으로 삼는다고 했으니,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실베니아의 신입생들이다.
단순히 신분이 고귀한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갖갖 분야에서 말도 안되는 실력을 가진 유망주들도 가득하다. 물론 그만큼 배움에 대한 욕심도 가득하다.
마법부로만 국한하더라도 내로라 하는 신입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텔로스 교단의 성녀 클라리스, 로스테일러 가문의 영애 타냐, 로킨 용병대의 후계자 에이그, 토그 마력학회의 최연소 연구자 요제프… 그 외에도 일일이 말할 수가 없다.
모두가 눈을 모아 오른산 꼭대기를 쳐다보았다.
어렴풋이 보이는 제단의 끄트머리가 생각보다 드높았다.
*
노튼데일 가문에는 검귀(劍鬼)가 산다. 오랜 소문이다.
이성을 잃으면 피아의 구분조차 없다. 단검으로 눈동자를 꿰뚫고, 맨손으로 턱을 뽑아버리며, 인육을 뜯고, 뼈를 부숴버린다.
무엇이든 날붙이 하나만 손에 쥘 수 있다면, 보이는 살점을 모두 찢어발기고 피 분수를 뒤집어 쓰며 희열을 만끽한다.
대륙 최고의 검술가인 노튼데일 가문에서조차, 내면의 악마를 타고난 그 소년을 인간으로 되돌리기는 힘들었다.
아무리 사람인양 굴어도, 이성을 잃으면 주변은 피바다다. 붉은 안광을 흩뿌리며 주변을 도륙내는 그 괴물에게 도덕이라는 고루한 개념은 통용되지 않는다.
검을 쓰는 법을 가르친 적이 없는데 검을 다룰 줄 안다. 마력에 눈을 뜬지 단 이틀만에 검에 마나를 두르기 시작한다.
검사로서의 재능은 과연 발군이지만, 인간으로서의 기본은 그 반대다.
노튼데일 가문의 가주 에비안 노튼데일조차도, 결국엔 그를 포기하고 말았다.
노튼데일 가문의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클레비어스 노튼데일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고난 그 악마적인 기질을 스스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그 내면에 서린 악마적인 무언가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 자신을 태생적인 힘으로부터 떨어트려 놓을 필요가 있다.
피에 미친 검귀라는 소문, 가문의 수치라는 비난, 너 같은 괴물이 모두를 힘들게 한다는 중압감이 클레비어스의 유년시절을 함께했다. 일평생 괴물이라는 딱지가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바닥 친 자존감은 그를 음침한 인간으로 만들었지만, 적어도 피에 미친 괴물로서의 삶은 끝나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검을 쥐어도 즐겁지 않다. 제 힘이 무언가를 죽인다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 싸우기보단 도망가고 싶다.
학습된 공포는 그의 내면을 좀먹는다. 바닥난 자존감은 이미 당연스러운 것이 되어있었다.
“네가 검을 잡아야겠다.”
에드 로스테일러의 말이었다.
오른산 꼭대기, ‘갈음의 제단’.
모여 앉은 클레어 연구실 멤버들은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혼자서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던 에드 로스테일러가 내놓은 대안은 ‘시험 내용을 바꾼다’ 였다.
“마지막 제단은 우리들끼리 막는 거야. 선배들이 지키고 있는 제단을 돌파할 수 있다면, A반 자격이 충분하다는 거니까 뭐 명목으로도 나쁘지 않지. 대대적으로 A반 멤버들은 한 학년 위 선배들보다 다 강하거나 능력 있었잖아.”
“우리가 직접 올라오는 신입생들을 상대하자고..? 그럼 감독은 누가하고?”
“없어도 돼. 부정 행위를 방지하자는 측면이 큰 감독 제도인데, 우리가 바로 그 시험 문제 자체가 되어버리면 감독할 이유도 없잖아. 안전 상의 감독은 대충 오닉스 선배님 혼자서도 전부 감당하실 수 있을 거야.”
오른산은 혼자서 커버하기엔 넓다. 그러나 비행 마법에 꽤 일가견이 있는 오닉스라면, 자세한 부정행위 감독까진 아니어도 안전상의 사고 정도는 커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학사 쪽에는 시험 내용 관련한 보고가 이미 다 올라갔단 말이야. 이제와서 시험 내용을 바꾸겠다는 건…!”
“그런 건 다시 보고하면 돼, 아니스. 보고 서류 자체를 조금만 수정해서 제출하면 되잖아.”
“일단 시험부터 치르고 나서 사후 보고를 하겠다는 거야? 그거 학칙 위반 아니야?”
“지금부터 보고하러 뛰어가면 돼. 보고 권한자…. 클레어 조교수님이 말이야.”
그리 말하고, 일동은 클레어 조교수 쪽을 쳐다봤다.
의견을 낸 것은 에드 로스테일러지만, 어쨌든 결정권자는 클레어 조교수였다.
“으… 으음…? 지금부터 보고서류를 작성해서 다시금 제출하라고…? 뭐야 난 또 격무에 시달려야 하는 거야?!”
“가능하지 않아요?”
“연구실까지 미친 듯이 뛰어가서, 사본 검토 얼른 하면… 시험 결과 나오기 전까지는 아슬아슬하게 가능할지도…?”
클레어는 으흠~ 거리며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에드에게 역으로 이야기했다.
“확실히 이대로 가면 시험 난이도가 너무 쉬워져서 A반 합격자들이 너무 많이 배출되겠지… 이럼 뒷이야기 나올 것도 많아지고… 근데, 역으로 말해서 너희들이 제단을 방어한다고 해서 신입생 애들을 전부 상대할 수 있을까?”
“엄밀히 말하면 전부 상대하는 건 아니죠. 마력석을 찾고, 환영 마공학용품 밭을 뚫고 올라온 애들만 상대하면 되잖아요.”
“그걸 다 뚫고 올라온 애들이면 나름 한 가닥 하는 애들일텐데?”
“어차피 대부분 기진맥진한 상태일거에요. 생각보다 할만할 거라 생각해요.”
보랏빛 원판은 없지만, 평범한 환영 원판 밭을 돌파하는 것만으로도 꽤나 힘이 들 것이다.
인파의 중심에서 에드는 다시 한 번 마른 세수를 했다. 그대로 앞머리를 쓸어넘기고, 심호흡을 한 다음 똑바로 이야기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클레어 조교수님이 얼른 수정 서류를 보고하러 가는 사이에, 오닉스 선배님은 학생 안전 감독을 하러 뛰어가시고, 클레비어스는 이 제단의 남쪽 입구, 아니스는 북쪽 입구를 막는 겁니다.”
“그럼 에드 너는?”
아니스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에드는 제단을 툭툭 건드렸다.
“나는 제단을 지킬게. 생각해놓은 게 좀 있어서 나는 여기에 있는 게 나을 거 같아. 자세히 설명할 시간은… 없는 것 같다.”
그렇게까지 말한 후, 다시 일동 사이엔 정적이 감돌았다.
에드의 대안은 나름대로 그럴싸했다.
아니스는 원소학부의 모범생이고, 클레비어스는 나름 전투부 수석이다.
물론 둘이서 마공학용품 밭을 뚫고 올라온 신입생을 모두 저지하기는 힘들 수 있다. 그러나 지칠대로 지친 신입생들일테니, 9할 이상은 둘이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게 완벽하게 흘러가리란 보장은 없을뿐더러, 당장 에드 본인이 제단에만 있을 거란 사실이 퍽 마음에 걸린다.
“일이 이렇게 된 건 내 책임이니까… 나는 불만 같은 건 말 안해.”
그러나 아니스는 시원스럽게 그런 대답을 내놓았다.
클레어 조교수도 골똘히 생각하더니 조금씩 에드의 의견으로 생각이 넘어가고 있는 것 같고, 오닉스도 별다른 불만은 없는 듯 했다.
남은 건 클레비어스 뿐이었다.
일동의 시선이 한 몸에 쏠린다.
“아… 오…. 아오…!!! 진짜…!”
클레비어스는 에드 로스테일러를 신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동의 의견이 모두 한 곳으로 수렴하고 있다면, 제 아무리 클레비어스라도 고집을 부리기가 힘들다.
“알았어…! 알았다고…!”
재빠르게 산중턱을 타고 내려가는 클레어 조교수.
어렵사리 마력을 모아 조금씩 몸을 부유시키는 오닉스 펠로미어.
원소 마법의 힘을 모으며 몸을 점검하고는 북쪽 입구를 막으러 가는 아니스 헤일란.
검을 빼어들곤 내키지 않는다는 듯 남쪽 입구를 지키러 가는 클레비어스 노튼데일.
각자의 역할을 하러 떠난 뒤, 갈음의 제단에는 조용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이따금씩 부는 바람 소리를 제외하고는 잡음이 없다.
나는 홀로 남아서 제단을 잠시 올려다 봤다. 커다란 비석이 어찌나 높은지 그 꼭대기에 있는 글자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주변을 돌아보면, 산꼭대기답게 아켄섬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남동쪽 교수동, 남서쪽 생활동, 북쪽숲, 북동쪽 절벽지대, 동쪽 끝의 해안지대까지.
나는 고지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마공학 용품들을 다시 검토했다.
————————————————– [ 마공학 용품 ? 환영 원반(보랏빛) ]
‘매우 희귀’ 등급.
제작자의 마력을 통해 강력한 적의 환영을 드러내주는 원반 장치.
일반적인 환영 원반보다 더 높은 등급으로 제작되었다. 더 강한 적을 드러낼 수 있다.
제작 난이도 : ●●●◐○
※ 파손된 마공학용품입니다.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
이런 것들이 여섯개.
물론 아직 마공학 스킬이 낮아 온전히 수리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내부 부품들을 잘 그러 모아 얼추 모양이라도 내보면 원래 출력만큼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출력 정도는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라면 아니스와 클레비어스가 끌어줄 것이다.
나는 그대로 원반들을 내려놓고, 다시금 제단 쪽으로 갔다.
‘갈음의 제단’.
마력이 들어있는 물질을 바치면, 그 마력을 뽑아내어 대기와 몸에 스며들게 만드는 힘이 있는 신비한 제단이다.
제단 아래쪽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들었다.
클레어 조교수가 챙겨온 것으로, 오른산 여기 저기에 숨겨져 뿌려진 마력석과 같은 물질이었다. 여기저기 뿌리고 남은 여분인 듯 했다.
내부에 이만큼이나 마력이 들어차 있는 마력석은 꽤나 고가품이지만, 어차피 대부분은 회수 마법으로 다 되찾을 수 있어서 많이 공급받아온 모양이다.
나는 마력석 하나를 꺼내서 제단에 바쳐보았다. 아른거리는 마력의 느낌이 손 끝에 남는다. 꽤 오랜만에 느끼는 것이다.
그대로 시험삼아 정신을 집중해보았다.
몸을 타고 마력이 흐르는 감각. 이게 얼마만인가 싶다.
정신을 집중한 그대로 눈에 힘을 주니, 불타오르는 박쥐 형상 비스무리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부족한 마력량은 여전한지, 그 박쥐 정령이 뭐라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잘 들리진 않는다.
가격에 비해 내재된 마력량 자체가 썩 만족스럽진 않다.
나는 가죽 주머니 안에 들어차있는 마력석의 양을 확인한 뒤, 그대로 제단에 걸터앉았다.
빛나는 제단 아래에서 내려다보는 아켄섬이 사뭇 드넓다.
허리를 약간 굽힌 채 무릎 언저리에 대충 팔꿈치를 얹어 놓았다. 그렇게 편한 자세로 가만히 앉아, 다시금 생각을 정리하였다.
신입생 반 배정 시험이니,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이라느니, 변별력 유지니, A반 합격생의 적절한 수를 유지해야 하느니… 온갖 그럴싸한 변명은 다 했지만… 애석하게도 내 관심사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애초에 나는, 단 한 명의 신입생도 이 시험을 통과하게 해 줄 마음이 없다.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클레어 조교수에게 전달 받은 마공학 용품 ‘빛무리 발생기’를 이용해 섬광 마법을 펼쳐서 하늘로 쏘아올렸다. 시험 개시 신호였다.
오른산 꼭대기, 갈음의 제단 앞.
거기에 걸터앉은 채…나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제단 꼭대기에서부터 불어내리는 바람은… 아무래도 자연풍은 아닌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