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79)
신입생 반 배정 시험 (3)
성녀 클라리스는 두 개의 꿈을 꾸었다.
하나는 눈을 뜨고 있을 때, 하나는 눈을 감고 있을 때다.
하나는 대주교 베르디오가 심어준 꿈이고, 하나는 낭만가 아델이 심어준 꿈이다.
– ‘새하얀 백지와도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수평선 너머까지 한 점 흔들림 없는 바다를 상상하십시오. 클라리스님. 하해와도 같이 드넓지만, 물소리 하나 없는 고요를 추구하십시오.’
– ‘주신 텔로스님 아래에서 모든 것이 평등하고, 누구도 가벼이 여겨질 수 없습니다. 저희는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 ‘숭고함이란 일생 동안 흔들림 없이 지켜온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그 숭고함에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귀중한 가치가 부여되리란 사실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낮에는 언제나 베르디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성도 카르페아를 통치하는 성황, 바로 그 다음가는 교단의 권력자 베르디오는.. 평생을 신에게 귀의하며 살아온 자로서 신자들의 귀감이다.
무엇하나 그릇된 행동 없이 살아온 텔로스의 어린양, 성녀 클라리스조차도 그의 독실한 신념을 보고 있으면 자기 스스로의 허물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참으로 존경받아 마땅한 자이며, 누구보다도 신에게 보답받아야할 자였다.
뚝심 어린 마음을 지녔지만 자만은 하지 않는다. 아무리 미약한 자의 목소리도 공평히 귀기울이고자 언제나 노력하는 자다.
그렇기에 클라리스는 꿈을 꾸었다. 언제나 눈부신 베르디오처럼, 아무런 허물 없이 순백의 소녀로 남아 텔로스의 뜻을 위해 사는 삶이다.
때 한 톨 없이 깨끗한 성녀로 남아 신자들을 구원하는 삶에는, 분명 평범한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숭고함이 깃들어 있다.
– ‘새하얀 백지로 사느니 구정물 속에서 죽는 게 낫지요.’
– ‘순백색 벽과 천장만을 보고 살면 시력도 감퇴하기 마련. 총천연색으로 가득한 세상의 낭만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
밤에는 창가에 앉은 아델의 만돌린 연주를 들었다. 별이 가득한 밤엔 언제나 아델이 찾아들어왔다.
예언가 아델. 자칭하기를 낭만가 아델.
교단의 성화(聖火)를 관리하던 죽은 눈의 소녀는, 계기는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교단을 떠났다.
머리를 땋아 내리고 예쁜 꽃을 잔뜩 단 채 악기 하나만 들고 세상을 노니던 소녀는, 어느새 낭만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이 되었다.
사학자들의 땅 올테까지 가서 고고학을 배우질 않나, 악기 하나만 들쳐매고 대륙 횡단을 하질 않나.. 급기야는 실베니아에까지 입학해서 마법을 배우다가도 방학이 되면 다시 세상을 떠돈다고 한다.
정말이지 자유로운 바닷바람과도 같은 소녀다.
–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웅장한 건축물이라는 이 성황도(聖皇度)조차도 라멜른 산맥지대의 기암괴석 앞에서는 한낱 모래성에 불과하니♪ 우물 안에서 본 하늘에 만족하며 살텐가, 아니면 드넓은 별 바다를 보러 벽을 타고 오를텐가♬’
– ‘평범하게 수업을 받고, 평범하게 친구들과 어울리고, 평범하게 사랑을 하는 삶에도 숭고함이 깃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나를 우러러 보는 수백만 신도의 기도보다, 사랑해마지않는 한 사람의 포옹이 더 가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도대체 어떻게 건물들 사이를 노니는지 알 수 없지만, 소녀는 그렇게 세상이 잠에든 밤이 되면 클라리스의 창가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성황도의 꼭대기 층이었다.
텔로스의 뜻을 받든 천사들은 화려한 날개에 휘감겨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닌다고 한다.
실제로 텔로스의 사도를 본 적은 없었지만, 우람하게 펼쳐진 날개는 상상만 해보아도 성스럽고 숭고한 모습이다.
그러나, 자기 전 클라리스가 창가에서 보았던 아델의 등 뒤에도 착실히 달려있었다.
아마도 클라리스에게만 보였을 것이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아리따운 한 쌍이었다.
그 뒤로 클라리스는 눈을 감고 잠에 들면 꿈을 꾸었다.
라멜른 산맥지대, 덴킨 습지대, 황도 클로에론, 목축의 땅 퓰란, 연금의 땅 크레트, 상업도시 올덱, 학업의 땅 실베니아, 대사막 드레스테아, 코헬톤 무법지대…
책에서만 보았던 세계의 땅을 누비며 끝끝내 그 끝에서 누군가를 만난다.
얼굴은 알 수 없다. 체형도 성격도 모른다. 클라리스에게는 완전한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 끝에서 클라리스는 누군가와 함께 깊은 포옹을 하고, 혼자 였던 여정길을 둘이서 함께 나아간다.
순백색 뿐인 삶과는 명백히 대조되는, 총천연색으로 가득한 여로였다.
괜시리 이불솜에 얼굴을 묻고 몸을 베베 꼬게 되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발칙한 상상이었다.
*
“우흐으… 슬슬 숨이 차네… 속도 조절 해야겠어…”
시험 진행은 일사천리다. 애초에 그렇게 어려운 내용도 아니었다.
오른 산 여기저기에 흩뿌려진 다양한 종류의 마력석을 찾아서 꼭대기의 제단에 바친다.
‘갈음의 제단’에 바쳐진 마력석은 마력의 형태로 바뀌어 소유자의 몸에 스며든다. 그럼 그 스며든 마력이 합격자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체내에서 자연 형성된 마력이 아닌, 자연물로부터 추출된 그런 마력은 특유의 기운이 감돈다. 자기 고유 마력이 아닌만큼 생각처럼 잘 다루기 힘들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다. 그 마력을 흡수한 후, 시험관 앞에서 내보이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타냐는 풀숲 사이를 가로지르며 숨을 가다듬었다. 미간에 정신을 집중하면 순식간에 주변에 스며든 마력의 여파가 느껴진다.
시험이 개시된지 30분이 훌쩍 넘었다.
혹여나 선착순일까봐 훌쩍 뛰쳐나간 학생들은 어느덧 산 중턱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들은 순식간에 마력석을 하나씩 찾아들고, 조금이라도 뒤처질세라 정상을 향해 전력 질주 중이었다.
선두를 달리고 있는 사람은 이번 마법부 신입생 중에서도 유명한 두 녀석, 에이그와 요제프였다. 둘은 서로에게 묘하게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너무 많아.’
나무들 사이를 천천히 가로지르는 타냐의 손에도 어느덧 마력석이 들려있었다.
‘단순히 마력석을 제단에 바치는 게 전부일 리가 없어. 좀 더 학생들 사이에 변별력을 기할 수 있는 무언가가 준비되어 있겠지.’
애써 체력을 빼지 않는다. 타냐는 천천히 자기 페이스에 따라 산을 오르면서 주변을 잘 살폈다.
겨울 산은 미끄럽다. 마음 급해져서 마구 뛰다 넘어져 몸이라도 다치면 자기만 손해다.
분명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 무언가 준비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굳이 첫 타자로 올라가서 시험대에 오를 이유가 없다.
적절히 중위권을 유지하며 올라가서, 무엇이 준비되어 있는지 차근차근 눈치를 보며 나아가면 된다.
‘교복이 좀 끼네… 후윽…’
타냐는 올라가다 말고 무릎에 손을 얹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실베니아에 입학하게 될 것을 고대한지도 어언 몇 달이 넘었다. 공작가의 영애로서 항상 몸가짐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래도 사람 욕심이란 끝이 없다.
언제나 몸매 관리에 여념이 없는 타냐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사이즈 적은 교복을 주문해둔 것은 객기였다. 더 빠질 살이랄 것도 없는 몸인데 괜한 욕심만 더 부린 느낌이다.
결국 타냐는 근처 바위에 앉아 한숨 돌렸다. 체력에는 영 자신이 없었다.
오른산은 고도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온갖 갈래길이 가득해서 길을 잃기 딱 좋은 구조다.
그래도 산이라는 공간 특성상 꼭대기로 가는 방향을 헷갈릴 수는 없다. 경사진 곳 위를 향해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므로.
거미줄처럼 얽힌 길들을 다들 나름의 방식대로 잘 찾아가고 있는 것인지, 산 중턱 방향에서는 이따금씩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역시 중턱 이후로는 무언가가 준비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이왕이면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가볼까… 비명이 들렸다는 건 뭔가에 당했다는 걸테니, 그게 뭔지 미리 확인해볼 수 있겠어…’
타냐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저멀리 고목나무 끄트머리에서 자기만큼이나 왜소한 체구의 소녀가 주저 앉아있었다.
어둡게 내려앉은 밤색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가 영 조화롭지가 못하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은 두 색조는 어색하다.
양말을 말아내리고 매끈한 다리를 훑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다친 것 같았다.
부상자인가 싶어서 타냐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 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혹시 다치셨어요?”
실베니아의 교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모습은 신입생들 다 마찬가지다. 그녀만의 특색이라 한다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허리 언저리에서 안쪽으로 말려들어오는 밤색 머리칼이다.
흐르는 윤기만 봐도 잘 관리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실베니아에 부유한 집 자식이야 발에 채일만큼 널렸으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갑작스럽게 타냐가 말을 걸자 상대는 멀뚱멀뚱 타냐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모처럼 걱정해서 말까지 걸어줬더니 시큰둥한 반응이다. 애초에 뭔가 영혼이 빠져있다고 해야할까, 묘하게 둔한 느낌이었다.
“다쳤으면 교직원을 불러드릴게요.”
“아, 앗. 저요?”
“네. 다리 걷어붙이고 있는 거 보면… 혹시 삐었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맨발로 눈을 좀 밟아보려고요.”
“네?”
타냐는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이 소녀, 뭔가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다.
분위기 자체가 붕 떠있다고 해야할까, 후 불면 솜사탕처럼 날아가버릴 것 같은 소녀다.
“눈이 이렇게 많잖아요. 맨 발로 밟으면 뿌드득 거리는 게 기분이 좋을 것 같아서.”
“가, 갑자기요? 여기서?”
“아, 안되나요? 혹시 상식적이지 않은 건가요?”
그거야 상식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뭐해서 타냐는 가만히 있었다.
소녀는 신경도 안쓰는 듯, 그대로 단화를 벗고 새하얀 맨발을 눈에 푹 박아넣어 본다.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떨고서는 기분 좋다는 듯 신음성을 내는 것이었다. 마치 눈이라는 것에 처음 닿아보는 사람인 듯 했다.
“차, 차가워…”
“그야 눈이니까요…”
“이, 이것 봐요. 발이 젖었어요…!”
“그야 눈에 발을 파묻었으니까요…”
어이가 없어서 사실을 그대로 전해주자, 소녀는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 수밖에 없었다.
허나 실베니아의 교복을 입고 있다는 것은 최소한의 능력을 입증한 신입생이라는 뜻.
타냐가 어이를 상실한 채 잠시 가만히 있자, 소녀는 그제서야 제 꼴을 생각하고는 팔을 저었다.
“아, 아 이건.. 제 소원 리스트 중 하나였거든요. 맨발로 눈밭 다녀보는 거요.”
“소원 리스트요…?”
“네, 네에… 제가 이런 짓을 할만한 입장은 아니었던 터라… 항상 창 밖으로 눈을 보면서 상상만 해봤거든요. 생각보다 푹신하네요.”
눈웃음이 성스럽다. 그 나잇대에 어울리지 않는, 자애로움이 한껏 묻어나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리 말하고는 눈이 묻은 발을 탁탁 털어내고 있었다. 눈발만큼이나 새하얀 발바닥이 어느샌가 새빨개져 있었다.
타냐는 커흠 거리며 목을 가다듬고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고는 정갈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시험 중에 이리 넉살 좋게 통성명 하고 있을 때인가 싶긴 하지만… 저는 로스테일러 가문의 차녀 타냐라고 해요. 보아하니 저희는 동급생이네요.”
보통 이 정도만 소개해도 대부분은 고개를 푹 수그리는 법이다.
배움의 땅 실베니아다. 깍듯한 예우까지는 바랄 수 없겠지만, 최소한 상대가 실수를 범하진 않을 것이다.
타냐는 그리 이야기 하고 고풍스럽게 웃어보였다. 척 봐도 수수해보이는 소녀다. 로스테일러의 이름을 알아보고 자세를 공손하게 하는 것을 은근히 기대했다.
그러나 뭐라고 해야할까, 소녀는 오히려 반가운 듯 박수를 짝 치는 것이었다.
“로스테일러 가문!”
그렇게 목청을 높여 반가워하다가, 문득 제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손을 가다듬는다.
“그, 그래요… 로스테일러 가문이면… 저는 변방 출신이니까… 예를 취해야겠죠…? 그러니까…”
“됐어요. 온갖 내로라 하는 사람이 다 모이는 이 실베니아에서 저만 그런 예를 챙기고 있으면 유독 까탈스러워 보이겠죠.”
“그런가요…? 하긴 그렇네요…! 여기는 실베니아니까!”
양손을 맞대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이 천진난만하다. 타냐는 잠시간 소녀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충 파악이 끝난 듯 하다. 어쨌든 소녀는 변방 출신이라고 하니, 관계적 주도권은 타냐에게 있는 것이다.
“저는 카일리 에크네라고해요. 동부 테레네 공국이라는 작은 도시 국가에서 왔어요. 제가 애지중지 키워져서 세상 물정을 좀 몰라요. 혹시 엉뚱한 짓이라도 하게 되면 미리 사과드릴게요. 이런 곳은 별로 안 익숙해서…”
그 말에 타냐는 가슴을 쭉 펴고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저도 비록 실베니아에 온지 얼마되진 않았지만, 먼저 도착해서 분위기 파악이 끝난 와중이거든요.”
“그래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입장이라… 알아본다고 알아봤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더라구요..”
“그럼 안되죠…!”
타냐는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 했다.
보란 듯이 팔짱을 떡하니 끼고, 훈계하듯 말하는 모습이었다.
“카일리씨라고 하셨죠? 음… 동급생인데 말 놓을게…?”
“그럼요!”
“…”
말을 놓겠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화사한 얼굴로 한 번 놓아보라는 듯 이야기한다.
타냐는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말을 이어갔다.
“이 곳 실베니아는 온갖 재능어린 사람들이 넘쳐날 뿐만 아니라, 함부로 대해선 안될 아득한 신분의 재학생 분들까지도 계신 곳이잖아. 미리 미리 알아보고 주의하지 않으면 큰 봉변을 입게 될 거야.”
“여, 역시 그렇겠죠?”
“역시 그렇겠죠가 아니지!”
카일리의 태도는 영 긴장감이 없어 보이는 게 썩 타냐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황녀님이나 성녀님 같은 분께 넉살 좋게 친한 척 했다가 큰 봉변이라도 입어봐야 정신을 차릴래?!”
“그.. 그런가요…?”
“엄밀히 말하자면 나도 역시… 아니야, 말을 말자…”
당장 눈앞에 있는 타냐만 해도 이렇게 넉살 좋은 대응을 받을 입장은 아니다만, 그걸 굳이 이야기 해서 신분으로 찍어 누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든 자주 자주 볼 사이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어느새 허리를 꼿꼿이 펴고 타냐의 설교를 경청하고 있는 모습만 보면 사람 자체가 나쁘진 않다.
허나, 자기보다 신분이 드높은 분들을 만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 자체가 없다. 이렇게 넋놓고 학사 생활을 하면 언젠가 큰 결례를 범하게 될지도 모른다.
“명심해. 배움의 미덕이 항상 먼저라는 실베니아라고 할지라도, 그 불문율조차도 깨부술 정도로 고귀한 신분을 지닌 사람이 있으니까… 긴장 풀지 마! 괜히 해코지 당하는 건 너야, 너.”
“그렇군요… 명심하겠습니다. 저를 걱정해주신 거네요.”
“걱..정이긴 한데…”
타냐는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이야기해도 묘하게 흐물흐물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카일리를 보고 있으니 썩 답답했다.
“타냐양은 좋은 분이군요. 초면인 저를 이렇게까지 걱정해주시고… 진심어린 조언도 해주시고…”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 또 괜히 낯부끄러워지네… 아무튼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올라가야지! 시험 중이잖아!”
“그렇죠… 지금은 시험 진행 중이죠…”
맞장구, 맞장구, 그놈의 맞장구!
온갖 넉살 좋은 사람들이야 다 만나봤지만, 이렇게까지 긴장감이 풀어져 있는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타냐는 머리를 잠시간 싸매고 있다가, 거하게 한숨을 흘렸다.
“그런데 저는 성적에 큰 욕심은 없어서요… A반 같은 데에 들어가봐야 괜히 눈에만 띌테고..”
“눈에 띄면 뭐 어때… 그리고 배움에 욕심이 없으면 실베니아엔 왜 온 거야…”
“확실히.. 배움 자체에 욕심은 있긴 하지만…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올라가는 게 더 착실할 것 같잖아요?”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할 말이 없긴 하네…”
더 이상 한숨을 푹푹 쉬어대다간 땅이 꺼져버릴 것만 같다.
타냐는 슬슬 제 할 일을 하러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니까… 정상까지 올라가야겠어.”
“그렇군요…”
카일리는 고개를 붕붕 끄덕거리고는, 느닷없이 타냐의 한손을 맞잡았다.
“그럼 저도 같이가요.”
“…어? 너는 시험에 별로 관심 없다며.”
“그, 그렇긴 한데요…”
쭈뼛거리면서 말을 이어가던 카일리는 침을 꼴깍 삼키고 토하듯 고백해냈다.
“도, 동년배 친구가 생긴 건 처음이라서요.”
“…”
확실히 하는 짓을 보고 있으면 친구가 없을만 하다!
타냐는 그런 심한 말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꾹 참아냈다.
“저는 별로 시험에 관심 없지만… 타냐양의 시험은 도와드릴게요!”
“…”
“그럼 저희의 사이가 좀 더 각별하고 돈독해지겠죠…?”
대체 얼마나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친구 하나에 이렇게까지 구는 것인가.
생각만해도 귀찮아서 몸서리가 쳐진다. 타냐는 그렇게 도끼눈을 뜬 채, 한참을 카일리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눈 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 로스테일러가의 영애라는 사실을 알고도 이리 허물없이 대하는 것인가.
격의 차이라는 것을 일깨워줘야할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묘하게 흐물흐물한 분위기 때문에 굳은 마음이 도저히 생기질 않았다.
여러모로 불쌍한 인간인 것 같은데 선심이라도 써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지경이다.
하여튼 묘한 인간이었다.
*
이번 반 배정 시험은 그 내용이 명확한 만큼 제한 시간도 확실하다.
애초에 클레어 조교수가 빨리 빨리 끝내버리고 싶다고 한 게 더 큰 원인이긴 하지만, 어쨌든 학생 입장에서는 알 도리가 없다.
시험 시작한지 한 시간이 다 되어가는 데에도 정상 제단 근처에는 학생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클레비어스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러다가 그냥 가만히 보초만 서다가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닐까 하는… 그런 작은 희망을 품어보았지만…
“크 아허억! 주, 죽는 줄 알았네!”
“으아아아악! 왔다!”
마공학용품이 잔뜩 설치되어 있는 산 중턱을 뚫고, 가장 먼저 제단 입구까지 도달한 1학년생.
불그스름하고 짧은 머리, 사내 치고는 작은 체구에 자그마한 안경을 코 끝에 걸치고 있는 소년.
로킨 용병대의 후계자 에이그. 명실상부 1학년 마법부 중에 상위권을 노릴만한 실력자라고 할만한 소년이었으나…
“그, 그럼 그냥 죽어…!!!!”
“쿠에에에엑!”
겁에 질린 클레비어스가 검집을 휘어잡고 냅다 날린 선타에, 돼지 멱따는 소리 비스무리한 걸 내며 그대로 픽 쓰러졌다.
이제 막 환영들 틈바구니를 빠져나와서 정신이 없었던 차였다.
“으윽… 후욱… 후욱….”
물론 급소를 치거나 치명타를 날리진 않았지만, 환영들을 상대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신입생에겐 버거운 일격이었을 터.
정신을 잃고 쓰러진 에이그를 앞에 두고… 클레비어스는 숨을 몰아쉬며 덜덜 떨었다.
“아이..씻X…. 무섭게… 왜 갑자기… 튀어나오고 지X이야… 진짜… 후우… 후욱… 후욱…”
슬픈 일이지만, 다짜고짜 일격을 맞고 쓰러진 에이그는 이렇다 할 죄가 없었다.
그냥 거기에 있었던 게 죄였다.
“의, 의외로 할만한데…?
이런 식으로 올라오는 학생들을 족족 기습해서 제압해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학생 입장에서는 이보다 불합리할 수가 없지만… 급박한 상황에서 임기응변을 테스트하기 위함이라고 대충 갖다 붙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실베니아의 A반이라는 명함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당장 예비 2학년의 A반 멤버만 생각해도, 누가 되었든 이 정도 대처쯤은 무난하게 해낼 수 있을 법하다.
그렇게 정신승리를 하고, 클레비어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게 좀 야비하긴 하지만…! 비겁하고 선배답지 않고 찌질하긴 하지만…! 그래서 어쩔거냐…! 이대로만 가자…!
– 콰아아앙!!
그러나, 클레비어스의 기대에 반박하듯이, 제단 북쪽 입구에서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아니스가 지키고 있던 북쪽 입구가 뚫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