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81)
신입생 반 배정 시험 (5)
클레비어스.
우리는 평생을 시궁창 속에서 살아야할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이리 태어난 것이 잘못이라 말하면 억울하겠지만, 그래도 괜한 발버둥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설령 내 뜻이 아니었다고 한들 손에 묻은 피가 사라지진 않기 때문이다.
네 아비로서 참담한 심정이다.
나는 네가 언젠가 빛나는 미래를 얻게 될 것이라고, 지금의 시련이 단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모든 건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희망적인 말을 해주고 싶다.
허나 그런 입에 발린 말로 너를 위로해봐야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겠지.
그러니 네게는 현실을 들이밀 수밖에 없다.
음울하고 음침한 삶이 될 가능성이 크다. 노력은 보답받지 않을 때가 더 많을 것이다.
볕이 들지 않는 지하에서, 아스라이 내려오는 한줄기 태양 빛만 동경하며 살아야할 때가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클레비어스, 나는 빛 없는 삶에도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끝 없는 동굴 속 같은 인생일지라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널 위로하기 위해 듣기 좋은 소리를 해주는 게 아니다. 분명 그 뜻을 이해할 때가 오리라 믿는다.
살다보면 이런 피를 타고난 제 삶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겠지.
시궁창 같은 제 삶과 비교될 정도로, 빛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잔뜩 만나게 될 것이다.
박탈감이 피어오르는 건 당연하다. 억울하고 슬픈 그 마음과 정면으로 맞서 싸워라.
왜 살아야하는지, 이런 인생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런 감상적인 생각들은 버려라.
일단 그렇게 살다보면, 의미라는 건 나중에 어떻게든 깃드는 법이다.
해줄 말이 이런 것 밖에 없어 미안하구나. 그래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네 삶에도 분명, 가치 있는 무언가가 깃들 것이라고 말이다.
*
“져, 졌습니다…”
“수고했다.”
학생이 챙겨온 마력석을 부수면서, 나는 이름 모를 후배에게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다시 제단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온 몸이 쑤시고 힘이 들어서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이로써 네 명째다. 반 배정 시험 시간도 막바지가 되어가는데, 생각보다 제단까지 도달하는 인원수가 적었다.
가장 까다로웠던 상대가 처음 도착했던 요제프였다. 사실 그럴만 했다. 환영 시련을 쉽고 빠르게 통과했다는 것은 그만큼 역량이 있다는 뜻이니까.
여기까지 올라오는 과정에 애를 먹은 학생들일수록 실질적인 실력은 좀 떨어지는 편인 게 당연하다. 사실 신입생 수준에서는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긴 하지만.
요제프에 이어서 올라온 신입생들도 대부분은 아니스와 클레비어스에 의해 저지당한 듯 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예비 3학년 마법부 우등생과, 예비 2학년 전투부 수석을 상대하라는 건 좀 가혹한 일이다.
이미 그 둘 선에서 거진 다 아웃이고, 그나마 올라온 학생들도 대부분은 도주 계열 마법으로 둘을 따돌리거나, 은신 계열 마법으로 몰래 잠입해 들어온 학생들이다.
정면 돌파보다는 꼼수를 활용한 학생들인 것이다.
사실 유연한 사고 방식이야 오히려 칭찬해줄 일이긴 하지만, 제단 앞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야했기 때문에 내 선에서 전부 저지당했다.
“후우…”
이번 신입생들은 북방 국경지대 군단장의 아들인 ‘웨이드’를 제외하고서는 대부분 고만고만한 수준이다. 그나마도 녀석은 마법부가 아니라 전투부다.
물론 요제프나 에이그처럼 학년 평균 수준에 비해 툭 튀어나온 영재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른바 ‘주인공 세대’… 현 예비 2학년생들에 비하면 인재풀이 많이 좁은 건 사실이기도 하다. 사실 그 세대가 기적의 세대인 것이지, 신입생들의 수준이 낮다 뭐다 할 이야기는 아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단출한 시험이었네.”
시험이 마무리되어가는 시간. 나는 제단에 가만히 앉아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신입생 반 배정 시험은 의 메인 시나리오가 아니다.
주인공 세대 입장에서야,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소식만 들려오는 수준의 사건인 것이다.
그렇기에 내 입장에서도 신입생 반 배정 시험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예상이 안되는 부분도 꽤 있었다. 디테일한 부분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문스러운 부분이 하나 남아있긴 하다.
넋이 빠져 있는 클레어 조교수가 난이도 조절에 실패해서, A반 학생이 한 명도 나오지 않은 상황.
그러나, 신입생들 중에서는 시험 내용이 뭐 얼마나 어렵든 간에 간단히 통과해버릴 수 있는 무력을 가진 학생이 하나 존재하지 않나.
신입생 수석 자리를 차지하게 될 웨이드조차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일테다.
보랏빛 환영 원반에서 뭐가 튀어나오든 간에 어떻게든 제압해내버릴 역량을 지니고 있을 텐데… 분명 그 인간조차 A반에 들지 못했다는 것은 참 묘한 일이다.
“…입장상 눈에 띄고 싶지 않았을테지.”
사실 그게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제단에 가만히 앉아서 탁 트인 하늘을 보며 숨을 돌렸다. 이것저것 준비도 많이 해놓았지만, 역시나 제대로 쓸 일은 없었다.
이대로 시험이 마무리 되길 기원하며, 나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
성녀로서의 클라리스가 가지고 있는 가장 최초의 기억은, 클로엘 제국의 베티스 변경백에게 세례를 해주던 때다.
키도 땅딸막하고 앳된 소녀가 성수 묻은 손으로 성호를 긋고, 변경백의 어깨에 신의 종복임을 상징하는 붉은 색 비단 천을 올려주자,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보이던 베티스 변경백의 모습이 소녀의 뇌리에 새겨진다.
그 다음은 세일 호숫가의 영지를 지키는 셀라 자작.
그리고 그 다음이 바로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주 크레핀 공작이었다.
소녀라는 호칭조차도 성숙해보일 정도로 앳된 클라리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는 크레핀의 모습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클라리스의 기억에 똑똑히 남아있다.
공작가 중에서 유일하게 텔로스 교단의 세례를 받지 않고 있었던 남자라기에, 클라리스는 사뭇 교단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일까 걱정하기도 했었다. 갑작스럽게 텔로스 교단을 지지하는 그의 행동에 혹자들은 의심도 품었더랜다.
그러나 의외로 세례식에 나와 보게 된 그의 모습은 이상적인 군주 그 자체였다.
자애롭고, 품위 있고, 현명하며, 군중을 이해하는 자.
크레핀 본인 뿐만 아니라 동행한 가족들이나 사용인들까지도 하나 같이 기품이 넘쳐흘리는 것이, 클라리스는 정말 이것이 제대로 된 귀족이구나 하고 대번에 이해했다.
그 중에서도 귀빈석에 다소곳이 앉아 언제나 단아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던 후계자, 아르웬 로스테일러.
영애의 품격이란 이런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제국 최고의 공작가는 과연 모든 것이 다 기품있는 법이구나. 어린 클라리스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낯설어 보였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구성원들은 하나 같이 품격있고 속 깊은 사람들이구나. 확실히 저런 환경에서 자라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 어떤 시련이 와도 슬기롭게 대처해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어느새 클라리스에게는 그런 선입견 비스무리한 것이 씌워져있던 것이다.
“허, 으윽… 허우…”
타냐가 깊은 한숨을 겨우 흘리며 땅 위에 바로섰다.
산 중턱부터 쭉 이어져 있는 ‘환영 원반’ 함정.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마공학용품의 함정에 빠져들어 환상 속의 적과 싸워야만 한다.
당연히 시험일 뿐이기에 직접적으로 몸이 다치진 않는다.
그러나 아직 제대로 된 전투 경험이 없는 신입생이 여러 마물족이나 야생 동물을 상대하는 것은, 비록 환영일 뿐일지라도 정신적으로 무척이나 몰리는 일이다.
타냐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 후욱…”
타냐는 근처 나무에 기대고 서서 온몸의 식은 땀을 닦아내었다.
잘못하면 환영 속에서 고블린의 칼날에 배를 뚫릴 뻔 했다. 재빠르게 ‘바람 칼날’을 사용해서 고블린을 제압해내지 않았다면 배에 바람 구멍이 났을 것이다.
그렇다고 고통이 느껴지진 않을테고, 다치지도 않을테지만…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온갖 환영이 타냐의 머리를 습격해왔다.
한 두 번도 아니고 벌써 몇 번째였다. 실제로 손톱이 살에 박히거나 날붙이 공격을 허용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체력이 현저하게 빨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만 해도 영 쉽지가 않다. 정신적으로도 꽤 몰려있었다.
“이, 이것 좀 보세요. 솔방울!”
“이, 이런 조그만 걸 땅에 심으면 저렇게 커다란 나무가 된다니 너무 신기해!”
“와! 보세요. 여기 나뭇잎들, 잎사귀마다 색이 미묘하게 달라요. 받는 태양빛의 양이 달라서 그런 걸까요?”
“이 버섯은 먹어도 되는 버섯일까요? 으음…”
그러나, 동행인은 그런 타냐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소풍 나온 사람 마냥 신나서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
이런 환영 마법들이 지천에 깔려 있는데 저 소녀는 대체 어떻게 저리 신날 수 있는 것인지.
애초에 저렇게 멀쩡해 보이는 걸 보면 마공학용품이 소녀에게 이렇다 할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타냐는 의아한 마음에 카일리를 한 번 살펴보지만, 방어 마법 같은 걸 펼친 흔적도 없다.
“저는 좀 뭐라고 해야할까… 체질이 특이해서요.”
“체질?”
타냐의 의아함을 눈치챘는지, 카일리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자세히 설명하면 복잡하기도 하고… 또, 시험 시간이 얼마 안 남았잖아요? 저기봐요,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일단 시험부터 끝내야죠!”
타냐는 퀭한 눈으로 카일리를 흘겨보았다.
중턱을 거쳐서 정상에 가까이 오는 그 순간까지 카일리는 소풍 나온 꼬마처럼 방방 뛰면서 신나게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시험을 도와준다느니 뭐니 하지만 사실 산을 거닐고 싶었을 뿐인 걸까.
“타냐양도 대단하네요… 사실 이렇게까지 힘들면 중도 포기할 법도 하고… 실제로 포기한 학생들도 많아서 이제 남아있는 사람이 거의 없잖아요.”
“그거야… 나는 꼭 A반에 들어가고 싶은 걸…”
타냐는 치마를 탁탁 털고 일어나서 다시금 가슴께를 펼쳐보였다.
“실력이 부족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포기하는 게 제일 부끄러워!”
“그런가요? 타냐양은 굳이 A반에 들어가지 않아도… 아리땁고, 고귀하잖아요. 마음씨도 좋으시고, 나름대로 마법 실력도 갖추고 계시고요.”
“어머, 너 칭찬 좀 할줄 아는 구나. 그런 칭찬은 고맙긴 하지만, 나는 그런 걸로 만족하지 못 해.”
타냐는 숨을 크게 흠흠 삼키고, 당당히 이야기해보였다.
“발전하려는 마음을 잃는 순간, 사람으로서 완전히 멈춰버리는 거야…!”
“그, 그런가요…!”
“카일리. 너는 변방국 출신이라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드높은 신분과 위상에는 그에 따른 책임과 부담이라는 게 있는 법이야!”
카일리는 눈을 반짝이면서 양손을 쥐고는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타냐는 뭔가 알 수 없는 충족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실… 악역영애에는 언제나 추종자가 따라붙기 마련이다.
별 대단한 일은 하지도 않지만 영애 옆에서 맞장구 치며 파벌 비스무리한 걸 형성하는 소녀들이다.
타냐는 그런 속이 뻔히 보이는 위선을 그리 옳은 일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옳고 그름과 별개로, 기분이 좋은 건 좋은 것이다…!
존경의 눈빛을 보내며 대단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워주는 그 눈빛이… 생각보다 그리 나쁘진 않다…!
“과연…! 정말 옳은 말씀이세요..!”
“읏…”
인정 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강한 타냐이기에 더욱 더 치명적이다. 카일리 에크네는… 유독 리액션이 찰지다…!
강한 리액션은 ‘진심’에서부터 우러나온다. 이 카일리라는 소녀는, 드높은 신분과 책임의 무게에 대해 토로하는 타냐의 장광설을 진심으로 공감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 ‘공감’?
타냐는 잠시간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런 것보다는 당장 눈앞에 닥친 시험이 더 중요했다.
“하긴, 매사에 노력하는 자세가 정말로 중요하죠. 저도 그런 타냐 양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까 더 자극되는 것 같아요!”
“그, 그래! 항상 모든 일에 노력하고, 허투루 살지 않아야 비로소 권위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세워지는 거야…!”
“역시, 로스테일러 가문 사람들은 다들 건실하고, 생각이 깊으신 분들이군요!”
양 주먹을 꽉 움켜쥐고 타냐를 향해 음흠흠 고개를 끄덕이는 카일리. 그 말에 타냐는 드높은 로스테일러 가문의 위상을 한 번 더 바로 세웠다고 자랑스럽게 여기려는 순간…
– ‘너는 애초에 날 인간으로 보고 있지도 않지?’
– ‘그래서 어쩔 거냐? 네가 뭘 할 수 있지? 나를 죽일테냐? 아르웬 누님도 세상을 떴으니, 나까지 죽으면 후계자 자리는 네 차지구나.’
– ‘그래, 어디 그럼 한 번 찔러 보든가. 자, 여기 예장용 단검이 있다. 내 가슴팍에 박아 넣어봐라. 자, 이렇게… 손에 쥐어주마.’
“…다 그런 건 아니야.”
“네?”
타냐는 아직도 혼란스러운 와중이었다.
캠프에서 보았던 에드의 모습은 과연, 꽤나 개과천선한 듯한 느낌이었지만… 도저히 그게 진정어린 모습일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각인된 공포는 아직도 타냐의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망나니 중의 망나니다. 그런 인간이 그리 쉽게 마음을 고쳐먹을 리가 없다는… 그 확신만큼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다 그런 건 아니야. 아무리 위세가 드높은 가문이라 할지라도, 오랜 세월 명맥을 잇다보면 쓰레기 같은 사람도… 말도 안되는 망나니도 나오는 법이야…”
“…그게… 누구…”
부쩍 낮아진 타냐의 어조에 카일리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분위기가 우중충해진 게 자기 탓이라고 여겼는지, 카일리는 우물쭈물 다시 한 번 대화 주제를 틀었다.
“어쨌든, 타냐 양의 생각이 그렇다면 저도 물심양면으로 타냐양을 도울게요! A반으로 당당하게 입학하자구요!”
불끈 쥔 양주먹을 붕붕 휘저으며, 처음 생긴 동년배 친구의 심기가 상하는 것이 걱정되는지 카일리는 얼른 기운을 복돋았다.
“그.. 응원은 고마운데, 도와준다니 네가 뭘?”
“아.. 제가 이래봬도… 특기가 있거든요. 보면 놀라실 걸요? 제가 맘대로… 조절할 수 없을 때가 많긴 한데…”
활짝 웃어보이는 카일리는 뭐가 그렇게 신난 것일까. 타냐는 덧없는 한숨을 흘릴 뿐이었다.
*
“그런데 직스는… 왜 굳이 마법부를 왔어? 아무리 내가 마법부여도 그렇지 다른 재능이 너무 아깝잖아.”
왕국 북방 초원지대 옆에 붙어있는 이슬란 남작령은 수많은 사학자들을 배출해낸 고고학의 땅이다.
때문에 비교적 조그마한 영지일지언정, 귀족들 사이에서 그 나름대로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직스의 오랜 인연이자, 이제 사실상 인생의 동반자나 다름 없는 사서 엘카 이슬란은, 흔들리는 마차의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륙 남서부 아켄섬으로부터 꽤나 멀리까지 왔다. 오랜만에 찾은 본가에서 가족들과 가신들의 얼굴을 볼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반가웠다.
소녀의 맞은 편엔 ‘초목의 창’ 직스가 앉아 있다. 조용히 주전부리를 씹어먹고 있던 직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엘카 쪽을 쳐다보았다.
긴 여행길에 지루해져 이런저런 잡담을 주고받고는 있었지만, 이건 또 뜬금없는 내용이다.
직스는 모든 분야에 능통한 팔방미인이다.
한손 검, 대검, 장창, 단창, 너클, 활, 둔기류까지 두루 쓸 줄 알고, 마법은 이미 중위 마법 분야를 거의 통달해가고 있다. 연금 지식도 정말 출중해서, 어지간한 연금부 학생들보다도 지식이 깊은 분야가 있을 지경이다.
거기다가 대부분이 ‘실전형 지식’으로 완성되어 있다. 그의 사고방식에 오로지 학술적인 수준에서 끝나는 지식은 큰 의미를 가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뭘 해도 최상위권의 성적을 내는 ‘완성된 인간’ 그 자체다.
“갑자기 왜?”
“전투부나 연금부에 갔으면 수석이었을 거잖아. 나 때문에 여러 혜택을 포기한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해.”
다만, 마법부에는 아예 천외천 취급을 받는 희대의 괴물이 수석 자리에 버티고 앉아있다.
루시 메이릴이라는 거대한 벽은 실력이 출중하다느니, 지식이 능통하다느니 하는 수준으로 어떻게 비벼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나태한 기질 탓에 별달리 하는 일도 없이 시체처럼 학사를 노니는 모습 밖에 보이질 않지만, 그녀가 작정하고 마음 먹으면 학년 수석을 넘어 역대 최고의 성적을 내는 학생이 될 수도 있을 터다.
직스는 우물쭈물한 모습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엘카를 느긋이 마주보았다. 자기를 걱정해주는 엘카의 모습에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그런 거에 가치 안 둬. 괜찮아, 엘카. 너무 마음 쓰지 마.”
그리고 직스는 덧붙여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금부라면 모를까… 애초에 전투부였어도 수석은 못했을 거야.”
호흡을 몰아쉰다. 검을 잡은 손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클레비어스는 이미 스스로 알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검을 잡아봐야 예전처럼 ‘날뛰는’ 일은 할 수가 없다.
스스로 거세해버린 야수성은 이제 무슨 수를 써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단지 사람을 베어낼 때의 그 공포감만이 가슴에 아로새겨져, 구역질을 일으킬 뿐이다.
클레비어스가 지키고 있는 제단 남쪽 입구.
단 한 명의 신입생도, 제단의 남쪽 입구는 돌파하지 못했다.
“이… X팔… 하…. 후우… 후우….”
스무명째 신입생이 클레비어스의 검격에 마력석을 잃고, 검풍만으로 나가 떨어졌다.
근처 나무에 매다 꽂힌 신입생은 공포에 질려 몸을 덜덜 떨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 질색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몸을 떨고 있는 것은 클레비어스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그럴 거면… 덤비질 말라고… 제발… 좀….”
미친 듯이 흘러넘치는 식은 땀을 닦아내고, 클레비어스는 검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싸움질을 해댄 건 정말 간만이었다.
검을 휘두르고 있으면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다. 그 땐 이성을 잃었지만 그 기억만큼은 착실히 남아있다. 사람의 살점을 베어내던 감각도 여전히 손 끝에 남아있다.
검이 바닥을 굴렀다. 손잡이가 클레비어스의 발가락을 찍어버린다.
“그아아아악-!!”
클레비어스는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아 버렸다.
“후우… 하아… 하아…. 진짜… 내가.. 어쩌다 이런 일에… 그래, 에드… 에드 로스테일러…! 빌어먹을 자식…!!!!”
이런 아이디어를 낸 게 애초에 에드였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싫다는 소리 못하고 막아선 건 본인이지만, 어쨌든 클레비어스는 탓할 사람이 필요했다.
문득 클레비어스는 비참한 자기 모습에 악이 받히기 시작했다.
음울하고 음침한 인간.
태생적으로 타고난 피조차도 못 이겨내고, 그로 인해 생겨난 트라우마조차도 극복 못하는 주제에, 온갖 불만과 싫은 소리만 내뱉어 호감이라고는 줄 수가 없는 그런 인간.
덥수룩하고 퀭한 인상은 보고만 있어도 우울해진다.
미숙아. 살인마. 검귀. 가문의 수치. 불량품. 돌연변이.
내내 달고다니는 온갖 멸칭들에 무감각해질 때 쯤 되어서야 겨우 실베니아로 도망쳐 왔다. 허나 여기서도 이런 꼴이다.
죽는 그 날까지 이리 비참하게 살 거라면, 대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머, 아직도 시련이 남아있었네요.”
얼추 전부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손님이 남아있었다.
환영 마공학용품의 배치도 끝나는 지점이다. 제단의 초입, 클레비어스를 마주 보고 저 멀리에 두 명의 소녀가 서있었다.
한 명은 불타는 듯한 금발을 말끔하게 내린 소녀. 한 명은 밤색 머리칼을 허리 부근까지 늘어뜨리고, 어딘지 모르게 포근해 보이는 듯한 소녀였다.
한 명은 모르겠지만, 한 명은 알고 있다. 이번에 입학했다던 로스테일러 가문의 영애였다.
“그래… 후우… 내가 좀 지쳐있긴 하지만…”
클레비어스 노튼데일은 음지의 삶을 사는 인간이다.
아마 평생을 시궁창을 전전하며 살 것이다.
타냐 로스테일러라면 어떤가. 그 명문가에서 온갖 총애를 받고 자라 빛나는 삶을 영위할테다.
죽는 그 날까지 어떤 삶을 살지 시뮬레이션 해보면, 거기서 오는 온도차는 또 다시 사람을 악에 받치게 만든다.
클레비어스는 다시금 검을 집어들었다.
저주 받은 피도 그렇고, 가문의 홀대도 그렇고, 어쨌든 죽는 그 날까지 빛 볼일 없는 삶이다.
이런 삶이라도 가치가 있을 거라고 무책임하게 확신하던 아버지의 말엔,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동하지 않는다.
“미안한 일이지만… 내가 썩… 기분이 좋지가 않다…”
호흡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빠드득 이를 갈며 꺼내든 칼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감돈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입가에 김을 만들어내고, 부릅뜬 두 눈의 안광이 타냐와 카일리를 향한다.
“빠르게 끝내자.”
– 타앙!
“헉… 성법이 너무 강했나….?! 괘, 괜찮으신가요…?! 어, 어디 부러진 건 아니겠죠?! 여… 역시 익숙하지도 않은 성마술 같은 건 쓰지 말걸…!”
배후에서 닥쳐오는 알 수 없는 충격에 클레비어스는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
근처 나무에 매다꽂힌 클레비어스는 자기가 뭐에 당한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밤색 머리칼을 한 소녀가 화들짝 놀라는 목소리만이 귀에 들어왔다.
눈꺼풀을 닫고 나면 세상은 암전된다.
의식을 잃기 직전에 클레비어스는 속으로 한탄했다.
정말 어두컴컴해서, 빛 볼일 없는 인생이다.
가치 없는 삶이란, 이다지도 비참한 것이다.
*
갈음의 제단에 빛이 사그라들어간다.
중천에 떠있던 태양 또한 뉘엿뉘엿 자취를 감춰가고 있었다.
시험 종료 20분 전.
아슬아슬한 시각. 대부분의 학생들은 제압 당했거나 포기한 상황이었다.
사실상 시험의 전체적인 그림은 이미 결론이 난 와중이었다.
에드는 제단에 가만히 걸터앉아, 아마도 오늘의 마지막 손님이 될 두사람을 쳐다보았다.
타냐는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익숙한 얼굴이다.
한 때는 공포의 대상, 또 한 때는 증오의 대상, 지금은 어떻게 한 마디로 축약할 수가 없는 인물.
에드 로스테일러는 만신창이 상태로 제단에 앉아있었다. 격렬한 전투를 몇 번씩이나 치른 흔적이다.
빛무리를 뿜는 기둥 앞, 제단에 걸터 앉아서 천천히 숨을 내쉬자 한웅큼 입김이 뿜어져 나와 허공으로 사라졌다.
저쪽도 꽤나 지쳐있는 듯한 모습이다. 타냐는 지금 꽤나 유리한 상황이라는 점을 자각했다.
“오라버니가… 마지막 시험이었군요.”
“긴 말 안 할게. 마력석 내놔라.”
붙여뒀던 엉덩이를 제단에서 떼고, 가볍게 몸을 일으킨 에드가 단검을 뽑아들었다.
한 손에는 마력석에서부터 뽑아온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마법사들은 대부분 불 마법과 바람 마법에 두각을 나타낸다. 집안 내력이었고, 그건 타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타냐가 구사할 줄 아는 마법은 그래봐야 기초마법 수준, 숙련도 또한 미숙하다. 아직 마법사로서는 신입생들 평균일 뿐이다.
애초에 타냐는 전투 능력만으로는 A반에 들어갈 수준이 절대로 못된다. 다만,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볼 뿐이다.
“오라버니라니…. 저 분이…? 로스테일러 가문의…?”
옆에 서있던 카일리는 에드와 타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가만히 있다가, 문득 겁에 질린 듯한 타냐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지는 태양. 붉은 하늘. 높은 제단에서 한 손에는 단검, 한 손에는 마력을 두른 채 내려다 보는 모습.
등진 태양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어렴풋이 머리칼 사이로 비치는 차가운 눈빛이, 그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알려준다.
– ‘다 그런 건, 아니야. 아무리 위세가 드높은 가문이라 할지라도, 오랜 세월 명맥을 잇다보면 쓰레기 같은 사람도… 말도 안되는 망나니도 나오는 법이야…’
그제서야 카일리는 눈치챘다. 저 사람이야말로 타냐가 말했던 쓰레기 망나니다.
타냐가 저 남자에게 대체 무슨 짓을 당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기품이 흐르던 타냐가 저렇게까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선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카일리는 자세를 가다듬고 에드를 바라보았다.
말끔한 반올림 금발이었을 머리칼은 잇따른 전투에 의해 이리저리 그을리고 산발이 되어 있다.
팔을 걷어붙인 셔츠자락은 군데군데 탄 자국이 가득하고, 바지도 바닥에서 뒹구느라 먼지로 범벅이다.
한 손에 꺼내든 단검은 예장용 단검인 듯 하지만, 너무 오래 사용해 생활 흔적이 가득하다. 날만은 말끔하게 갈려 있는 것이 인상 깊다.
카일리는 귀족가 남성이라는 족속들에게 묘한 환상이 있었다.
로스테일러 가문 같은 명문가라면 더더욱이다.
말끔한 모습에 이리저리 두른 액세서리와 금테, 온화하고 포용어린 미소, 손짓 한 번 발짓 한 번에 묻어나는 우아함.
그 언젠가 세상을 노닐고 여행을 다니다 어디선가 만나게 될 백마탄 왕자 같은 그를 상상한다면… 필시 그런 귀족적이고 우아한 남성일테다.
사실 그 나잇대 소녀라면 한 번쯤 가져볼만한 낭만이다. 남성을 대해본 경험이 극도로 적은 카일리기에 더더욱 그렇다.
허나, 그 정반대를 구현해놓은 듯한 인간상의 출현에… 카일리는 그만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엄밀히 말하면 카일리의 이상형과는 정반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타냐.”
드디어 소년이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타냐와 카일리는 각자 다른 이유로 뻣뻣이 굳어서, 그 다음 이어져 나올 소년의 선전포고를 하릴없이 기다렸다.
“미안한데 그냥 좀 돌아가주면 안 되겠냐…?”
“…?”
예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소년은 이미 만신창이여서 더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도 올 거면… 와라…”
다시금 제단에 걸터앉으며, 마력을 그 위로 끌어모았다.
어차피 시험도 막바지다. 더 이상 마력석을 아껴둘 필요가 없다. 제단 위에 남아 있던 마력석을 전부 다 털어넣어서, 에드는 모든 마력을 전부 정령술 ‘현현(顯顯)’에 때려 박았다.
어지간한 건물의 대들보보다도 더 거대한 비석.
그 꼭대기에 걸터앉아서, 꼬리로 비석을 감싸 안고 앉아있던 바람의 늑대가 아가리를 벌린다.
– 화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감당할 수 없는 격풍이 분다. 고위 바람 정령은 현현 시에 불어닥치는 격풍만으로도 사람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바람을 쏟아낸다.
타냐와 카일리는 근처의 석재 구조물을 움켜 잡으며 어렵사리 격풍을 견뎌내었다. 조금씩 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비석의 위를 쳐다볼 수 있게 된다.
몸집은 집채만 하다. 그 위용은 가히 폭풍 그 자체와 다름 없다.
제단에 주저앉은 에드 뒤, 거대한 비석을 감싸 안은 늑대가 폭풍의 틈바구니에서 소녀들을 내려다본다. 쩍 찢어진 아가리 사이로 침이 줄줄 흘러내리고, 푸른 영기가 감도는 눈에는 한계가 넘는 마력이 서려있었다.
그건… 도무지 현실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광경이다. 기초 마법 하나조차 숙달 못해서 끙끙대던 무능의 극치가 지금 뭘 소환해냈는가.
타냐는 이를 꽉 악문 채로, 카일리를 바라보았다.
괜찮냐고 물어보려고 카일리를 본 순간… 카일리는 돌기둥을 잡은 그대로 오들오들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이야기했다.
“저 그냥 나갈게요.”
아니 끝까지 도와준다며.
차마 타냐도 그렇게 추궁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