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82)
신입생 반 배정 시험 (6)
‘일탈’이라는 단어에는 묘한 마력이 있다.
밤바람을 맞으며 혼자 오필리스관의 장미 정원을 거닐고, 호위 한 명 대동하지 않은 채 교수동 인파들 사이를 유영하는 기분이란 얼마나 황홀한가.
클라리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 하나 전부 일탈이었다.
사실 별 대단하지도 않은 일이다. 하지만 클라리스에게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어찌나 각별한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지만 실베니아에 오길 잘했다고 수십 번도 넘게 생각했다.
– ‘성녀님은 언제나 성법의 가호를 두르고 다니시니 그나마 걱정은 덜겠습니다만.’
성도에서 가장 크고 으리으리한 건물 성황도.
그 성황도를 떠나던 날, 대주교 베르디오는 걱정 어린 눈으로 클라리스를 바라보았다.
– ‘그래도 본래 신분을 들키지 않도록 언제나 몸가짐을 주의해주십시오. 전해드렸던 마공학 용품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셔야 합니다.’
성도의 마법사들이 걸어준 위장 마법은 너무 효과가 좋아서 클라리스 본인도 거울을 보고 뒤집어질 뻔 했다.
유리처럼 은은하게 빛나던 은색의 머리칼이 담비 털처럼 포근한 밤색으로 물들어 있으니, ‘환시(幻視)’ 마법이 아니라 실제로 변장을 한 것처럼 보인다.
루비처럼 붉고 영롱한 눈동자는 그 색을 아직 유지하고 있으나, 항상 신체의 일부처럼 달고 다녔던 액세서리들을 벗고 나니 정말 수수한 학생 A로밖에 안 보인다. 어쭙잖게 변장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가 좋고 편리했다.
– ‘이렇게 딴 사람 같은데 누가 의심을 하겠어요, 베르디오.’
– ‘성도의 마법사들 실력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겠습니다마는…’
신변의 위협에 대한 걱정은 덜하다. 클라리스가 두르고 있는 ‘성법의 가호’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파훼할 수가 없다.
– ‘일이라는 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무도 모르는 법입니다, 클라리스 성녀님. 대역 준비도 완벽하고, 환시 마법도 확실하고, 애초에 의심을 살만한 건수가 하나도 없다고 할지라도… 혹시 모릅니다.’
– ‘역시 베르디오는 걱정이 참 많네요.’
–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베르디오는 실베니아로 떠나기 전 흥분 상태인 성녀를 보면서 퍽 걱정스러웠지만, 성황도의 직원들도 무능한 자들은 아니니 일단은 걱정을 거둬들이기로 했다.
– ‘이중 삼중으로 대비책을 해뒀으니… 미리 일러둔 사람이 아닌이상 절대로 눈치채지 못하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클라리스는 은은하게 웃음지으며 베르디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도의 사람들에게도 감사했다. 클라리스가 평범한 학생으로서 학사 생활을 구가하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해주었다. 이런 것도 다 경험이니 만큼 소중한 일이다.
평범한 학사 생활이란 무엇인가.
성녀랍시고 드높여 주고, 눈만 마주쳐도 모두 고개를 박고, 나이 지긋한 주교들이 고해성사를 해오고, 어디든 본인이 행차하기만 하면 정숙해지고 마는 삶과는 분명 거리가 멀 것이다.
아켄섬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가본 곳도 몇 없는데 벌써부터 매일 매일이 새롭고 낭만이 넘친다.
아직은 방학이라 한산한 편이라는데, 클라리스의 눈에는 이런 한가한 학사 풍경조차도 시장통에 가깝다.
홀로 번화한 생활동을 다니며 온갖 휘황찬란한 상품들을 직접 구매해보기도 하고, 학생 도서관 구석에 앉아 성황도 안에서는 꿈도 못 꿨을 온갖 속물적인 연애 소설도 읽어 본다.
비극적인 시련을 극복한 끝에 등장인물들이 입술이라도 겹치면, 훅훅 달아오르는 등줄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콧잔등을 책등에 묻은 채로 괜시리 주변을 슥슥 쳐다본다. 책 좀 읽은 거 가지고 죄라도 지은 기분이 들어 쓸 데 없이 눈치를 보게 된다.
교수동 대로변의 나무 벤치에 앉아 있으면 아무도 클라리스를 신경쓰지 않는다.
고개를 박는 사람도, 우러러 보는 사람도 없다. 다들 제 갈길이 멀어 발걸음을 바삐할 따름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호흡이 가빠져, 클라리스는 한껏 충족감을 느꼈다.
누구도 본인의 신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같은 학생으로서 인파들 사이에 섞여드는 이 감각이 너무나도 좋다.
이목구비가 좀 비슷할지언정, 멀쩡히 진짜 성녀로 학사 생활을 하고 있는 대역이 있는데… 구태여 카일리를 성녀라고 생각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적어도 이 실베니아에 있는 학생들 중엔 카일리의 진짜 신분을 짐작해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만큼은 명확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지금.
몰아치는 격풍. 옷깃이 퍼덕대는 소리와 바람이 귀를 찌르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제단을 덮는 바람 사이에 앉아 있는 소년, 에드 로스테일러는… 그렇게 심드렁한 얼굴로 카일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
쫙 벌어진 늑대의 입에서 포효 소리가 울려 퍼진다. 늑대 특유의 높은 울음소리가 아니라, 사자나 호랑이에 가까운 으르렁 소리다.
소리의 파동이 가슴을 짓누른다. 부들부들 떨리는 심장이 뇌리에 신호를 보내 인간의 본능을 자극한다. 도망치라는 소리다.
‘제정신이야 저거…? 누가 봐도… 고위 정령이잖아…!’
평생을 정령술 단련에만 힘써온 학생들일지라도 저 정도 수준의 고위 정령은 다룰 수 없다.
졸업생 수준… 도 한창 넘어섰다. 현역으로 연구활동, 전투활동을 하고 있는 정령사들도 중위 정령 대여섯마리 정도 다룰 수 있으면 베테랑 소리를 듣는 마당에, 고위 정령을 다루는 학생이라는 건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예니카 페일로버가 천재 정령사 소리를 듣는 것이다. 마법학에서 고위 정령이 가지는 위상이란 그 정도다.
“이,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해요. 타냐양! 아무리 그래도 이건…!”
오들오들 떨리는 목소리로 카일리가 타냐에게 외쳤다.
사실 카일리의 말이 정답이다.
대체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싶지만, 정말로 에드가 고위 정령을 소환해 냈다면 이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는 게 맞다.
타냐는 예니카가 소환한 고위 불 정령 타칸을 한 번 마주해 본 전적이 있다. 그건 정령이라기보다는, 괴물 한 마리를 산 채로 풀어놓은 느낌이었다. 그 때의 트라우마가 다시금 뇌리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타냐는 덜덜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은 채 눈을 똑바로 떴다.
날아가려는 이성을 억지로 부여잡고, 사고의 끈을 결코 느슨하게 하지 않았다.
고위 정령이란 마력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어지간한 마력량으로는 ‘현현’시키는 것만으로도 바닥이 드러나고 만다.
그런 정령을 다루고, 정령식까지 활용하려거든… 결국 ‘정령 감응’을 통해 마력 효율을 극대화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말이 쉽지, 어지간한 감응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2년 전 오라버니가 어떤 수준이었는지는 내가 잘 알아… 2년 만에 그 정도 마력량을 키워냈다는 건 너무 비현실적이야…!’
타냐의 통찰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당장 눈앞의 현실이 어떻든 간에,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에드가 고위 정령을 다룰 수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 화아아아악!
비석에 꼬리를 감고 앉아 있던 거대한 늑대가 도약한다. 불어대는 바람이 다시금 일대를 쓸어버리려 들었다.
고위 바람 정령 메릴다는 몸을 겨우 가누고 있던 타냐와 카일리 앞에 착지했다. 굉음이 동반되었다.
착지만으로 바닥의 대리석이 깎여나가고, 파편이 카일리의 얼굴에 튀었다. 카일리는 현기증을 일으키며 아연실색했다.
꼬리를 튕기고 몸을 털어대는 행동 하나만으로 격풍이 불어, 타냐와 카일리는 나가 떨어질 뻔했다.
그러나 타냐는 기적적으로 공포감을 이겨내고 발을 내딛었다. 카일리의 손목을 꽉 움켜쥐고 측면으로 빠르게 달려나간 것이다.
“카일리! 잘 들어!”
오들오들 몸을 떠느라 정신이 없었던 카일리는 얼떨결에 타냐를 따라 걸음을 내딛었다.
“승산이 있어!”
타냐 역시 공포감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려고 했지만, 행동이 먼저였다.
제 아무리 상대가 강대하고 드세보여도,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지는 않는다. 더 이상 패배에 길들여지는 삶은 싫었다.
타냐에게 있어 에드는 일평생 앞길을 가로막는, 드높은 벽과도 같은 존재였다.
에드가 그런 드높은 벽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후계자라는 확고부동한 지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런 지위는 이제 역전되었다. 더 이상 예전처럼 겁만 먹고 있을 순 없는 것이다.
“승산이… 있다고요…?”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알아! 저 사람은 절대로 고위 정령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못돼!”
처음 본 사람이라면 타고난 재능과 피를 깎는 노력으로 엄청난 성취를 이루어낸 인물이라 생각하겠지만, 에드라는 인물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는 타냐의 입장은 다르다.
성취에도 현실성이라는 게 있다.
2년 전의 모습이 똑똑히 기억난다. 바닥난 마력 감응과 쥐꼬리만한 마력량으로 이 정도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분명… 꼼수나 요령이 있어!”
나름 정확한 통찰이었다.
글래스트의 반지를 이용해 마력을 당겨 사용한 에드지만, 타냐가 그런 전후 사정까지 전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정황만큼은 유추해낼 수 있다.
“본인 마력을 전혀 쓰고 있질 않아! 익숙하지도 않은, 마력석에 내재된 마력만을 활용해서 싸우려고 하잖아! 굳이 다루기 힘든 마력을 억지로 쓰는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야!”
메릴다의 시선이 외곽으로 도망치는 타냐를 향한다. 다시 한 번 가볍게 도약해 발 한번 휘저으면 재빨리 타냐를 제압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에드의 눈치를 보는 듯, 고개를 털며 가볍게 울음소리를 한 번 내었다.
“타냐양! 아무리 그래도 고위 정령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아니야! 오히려, 저쪽에서 고위정령을 소환해줘서 승산이 생긴 거야!”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을 틈도 없었다.
타냐는 발걸음에 박차를 가하며, 제단에 앉아 있는 에드 쪽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가만히 걸터 앉아서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모습.
전의를 상실하지 않는 타냐의 모습에 당황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건 필시 예상 밖의 상황일 터다.
타냐가 승산을 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에드가 지쳐있다는 점이다.
팔을 걷어붙인 옷은 군데군데 그을려 있고, 몸 여기 전체에 흙먼지가 가득하다. 자잘한 생채기도 남아있는 데다가, 반복적으로 마력을 사용한 흔적까지 역력하다.
반복된 전투로 인해 한계까지 힘을 끌어냈을 에드다. 처음부터 전의라는 게 느껴지질 않았다.
얼른 타냐와 카일리를 쫓아내고 시험을 마무리를 짓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바로 그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다.
“애초부터…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줘서 전의를 잃게 만드는 게 목적이야! 진짜로 싸우려고 했으면, 저렇게 마력을 비효율적으로 뭉텅뭉텅 잡아먹는 괴물을 풀어놓을 게 아니라… 직접 제압하려 했겠지!”
“그, 그렇다면…!”
“상대는 이미 한계까지 와 있어!”
신입생 반 배정 시험.
어떤 학생에게 그 드높은 A반의 영예를 손에 쥘 자격이 주어지는가.
채점 기준이야 담당 교수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보니, 타냐는 그 기준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제 아무리 드높고 막막한 벽이 가로막고 있어, 도저히 돌파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도… 일단 질러보고 내딛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건 분명 타냐의 삶과도 연관이 있을 터.
평생을 짓눌려서 기회만을 엿보며 살아온 타냐는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패배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이리저리 재보고, 견적을 내보고, 안될 것 같으면 포기하는 게 습관이다.
100프로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승부를 걸지를 않는다. 시야에 낭떠러지가 들어오면, 벌써부터 추락하는 자기 모습을 먼저 상상하게 된다.
드높은 신분으로 살다보면 언제나 추락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 수 밖에 없다. 허나 그게 절대로 옳은 일이 될 수는 없다.
입장과 신분을 초월한 문제다. 살다보면 위험천만하고 위태위태한 문제에 눈 딱감고 발을 들이밀어야만 하는 때가 반드시 온다.
‘그게 바로 지금이야…!’
타냐는 이를 악물고 용기를 내서 발을 내딛었다.
그런 타냐의 얼굴을 보며, 카일리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겁먹은 자기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자기 몸으로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억지로라도 정령을 소환한 거야! 그럼 고위 정령을 제압할 필요 없어! 안 그래도 지쳤는데, 저런 괴물을 풀어놓느라 정말 기진맥진해있을 본체를 한 번만이라도 공격할 수 있으면…!”
– 화아아악!
– 파아아아악!
죽음의 공포가 타냐의 등 뒤를 훑고 지나갔다.
늑대의 발이 방금까지 타냐와 카일리가 있었을 곳을 정확히 내려찍었기 때문이다.
부서진 바위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바람도 덩달아 일어나 둘을 밀어내었다.
“꺄아아아아악!”
옷자락을 휘날리며 잠시간 부유한 타냐와 카일리는 어느새 외곽 벽까지 날아와 있었다.
타냐는 재빠르게 기초 바람 마법을 구현해서 충격을 최소화 했지만, 오른손이 공포감으로 인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럼… 본체에 한 번만 접근할 수 있으면 되는 거네요?! 저 바람 늑대를 뚫고!”
“마, 맞아! 딱 한 번만 빈틈을 만들어낼 수 있으면…”
“그럼 제가 미끼 역할을 할게요!”
타냐는 귀를 의심했다. 저런 늑대를 상대로 시선을 끄는 미끼라니. 자살하겠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말씀 드렸었지만, 제가 체질이 조금 특이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어지간하면 절대로 안 죽어요!”
“그, 그래도 크게 다치는 거 아니야?!”
카일리는 고개를 휘저었다.
“전혀요! 다치지도 않아요! 믿어도 돼요!”
보통 같았으면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말라고 일축했을 것이다.
그러나, 타냐는 제단까지 올라오는 길에 그 모습을 보았다.
예비 2학년 전투부 수석, 클레비어스 노튼데일이 진심으로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지만… 알 수 없는 휘광에 의해 나가 떨어져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던 모습이다.
‘성법의 가호’.
주신 텔로스의 힘을 빌리는 성법술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호신기다.
성당기사단의 단장조차도 일평생을 들여 성법술을 갈고 닦아야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볼 수 있는 축복이지만, 카일리는 어렸을 때부터 몸에 두르고 태어났다.
주신 텔로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소녀다. 애초에 호위기사 같은 것을 두지 않아도 큰 위험이 없을 정도로, 세상의 법칙 자체가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성법의 가호는 카일리에게 위해를 가하려 하는 모든 적대적 존재에게, 중위급 이상의 성법술을 때려박는다.
반응하기도 힘들 정도로 재빠른 속도다. 카일리는 아무것도 못하는 유약한 소녀로만 보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반격을 전혀 예상조차 못하고 나가떨어지게 되어있다.
카일리 본인조차도 어떻게 조절할 수 없는 부분이므로, 애초에 카일리는 누군가를 잘 적대하려 하질 않는다.
물론 타냐가 그런 세세한 사실까지 알 수는 없다. 꼬치꼬치 캐물을 시간도 없다. 다만, 카일리의 그 확신어린 얼굴에 걸어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진짜로 확실해?!”
“걱정하지 마시고, 제가 늑대의 틈을 만들어내면… 반격해주세요…! 엄청 나쁜 사람이라면서요.. 저 사람..!”
나쁜 사람이라.
타냐는 그제서야 확신어린 감정이 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겁먹어 벌벌 떨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내뱉는 거대 늑대의 다리 사이로, 저 멀리 제단에 앉아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완전히 지쳐서 더 이상 움직이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이다.
지금에서라야 그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는 때가 아닌가. 타냐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일리는 대답조차 없이 먼저 늑대를 향해 뛰쳐나갔다.
의외로 제법 용기가 있는 성격인가 싶어서 타냐는 감탄했지만… 이내 그 평가를 잠시 집어넣었다.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머리를 꽉 감싸안고 반쯤 울 듯이 뛰쳐 나간 모습은 영락없이 겁을 집어먹은 모습이다.
아무리 본인이 다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을지라도, 저런 거대한 늑대의 품으로 뛰어드는 건 자살행위다.
무엇보다,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다치지 않는다고 했을 뿐이지… 아예 다치지 않는다는 건 또 아니다.
자그마한 가능성이 있다면 그 공포감은 여전히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끝끝내 이를 악물고 뛰쳐나간 점은, 타냐도 다시 볼 수 밖에 없었다.
타냐는 재빨리 반대쪽으로 뛰어나갔다.
카일리가 얼마나 큰 빈틈을 이끌어 내줄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지금 당장은 거기에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바람의 늑대는 일순간 당황한 낌새다.
애초에 신입생 반 배정 시험일 뿐이다. 진심으로 상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이려는 뜻은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저렇게 자살하듯이 뛰쳐들어오는 소녀를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정말로 그 거대한 앞발로 짓눌러서 터뜨려 버리기에는 뒷감당이 곤란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으니, 다소간의 상처가 생길 것을 감안하고… 메릴다는 가볍게 앞발을 휘둘렀다.
그러나 상처가 생긴 것은 메릴다였다.
– 콰아아앙!
한 차례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메릴다의 앞발은 카일리에게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카일리의 귀여울뿐인 육탄 돌격은… 오히려 메릴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배와 옆구리 쪽, 발톱에 배인 듯한 상처. 울긋불긋한 핏줄기가 땅바닥에 흔적을 남겼다.
-화아아아악!
메릴다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공격에 깨갱대며 소리를 내질렀다.
포효소리가 일순 공기를 떨게 한다.
의외의 충격에 당황하며 지른 소리다. 허나 유약한 카일리는 그 정도 충격만으로도 나가 떨어졌다.
“꺄아아아흑…!”
희고 얇은 팔다리는 전투에 최적화되어 있지 않다. 바닥을 몇 번 구른 것만으로도 힘이 쏙 빠져서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질 않는다.
– 카가강 캉!
그 와중에 카일리의 몸에서 떨어져온 물건 하나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쨌든, 몸에 두른 가호만으로 어떻게든 메릴다의 움직임을 한 순간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그 잠깐의 틈이 타냐가 마지막으로 발버둥 칠 시간이다.
이미 타냐는 에드를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타냐가 사용할 줄 아는 기초 마법의 사정거리는 극도로 짧다.
그러나, 안 그래도 반복된 전투를 치르느라 만신창이인데다가, 고위 정령을 불러내는 통에 마력까지 다 바닥나 있을 에드라면… 단 한 대만 닿아도 치명타다.
제단에서 힘을 쭉 빼고 앉아 있는 소년의 모습이 조금씩 커진다.
카일리가 공포감을 이겨내고 어떻게든 비집어 만들어낸 이 잠깐의 기회를 허투루 날릴 순 없다.
기초 바람 마법 ‘발산’.
타냐가 제대로 숙달했다고 할만한 몇 없는 마법 중 하나다. 술자를 중심으로 강한 바람을 반산해, 주변 적의 움직임을 무너뜨리고, 위력이 강하면 아예 나가 떨어지게 만드는 마법.
그걸로 에드를 제단에서 밀어내고, 재빠르게 마력석을 바친다. 여기가 마지막 승부처였다.
타냐가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제단에 도달하자, 드디어 제대로 에드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타냐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내가 포기할 줄 알았어요…?!”
억하심정은 원래 있었다. 이를 악문 채 외치는 악다구니에는 오한이 서려있는 것만 같다.
피어오르는 마력의 바람이 마지막 죽창이 된다.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무너뜨릴, 타냐의 마지막 한 수다.
차갑게 내려다보는 에드의 시선에는 일말의 당황도 없다. 무엇보다 무서운 건 그 눈빛이다.
전혀 잘못된 것이 없다는 듯이 미동도 없는 그 눈빛. 그러나 이제와서 그 눈빛에 주눅 들기에는 늦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피어오른 바람 마법이 에드를 덮치고, 미동조차 하지 않은 에드는 그렇게 나가떨어져서 제단에서 사라졌다.
“허억.. 허억…”
완전히 나가떨어져서 사라져버린 에드. 마법이 먹혔다는 사실에 잠시간의 희열감이 가슴에 피어오르려 했지만…
‘사라졌다’ 라는 그 현상에… 타냐는 위화감을 느끼고 말았다.
– 화악!
화살. 그러나 그 형체는 흐릿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화살 두세발이 바닥에 박히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으, 흐꺄앗!”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하다가 그대로 바닥에 넘어져 버린 타냐의 눈에… 그제서야 제단 바닥에 흩뿌려져 있던 마공학용품, ‘환영 원반’이 눈에 들어온다.
기초 마공학 지식으로 저런 고급 용품들을 만들어 내는 건 힘들지만, 최소한 열화판으로 개량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보랏빛 원판에 깃든 강력한 환영 만큼은 아니더라도, ‘미약한 환영’ 정도는 발현할 수 있게 개조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만신창이 상태가 되어있는 에드 본인은 정말로 미약한 상태 그 자체였으니… 이 정도 환영 구현은 그리 어렵지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마공학 지식적인 부분은 타냐에게는 별세계다. 에드가 마공학 지식이 있는지 어떤지조차도 타냐는 모른다.
그나마 유추해볼 수 있는 건, 이 수법에 꽤 많은 학생이 당했을 거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에드 본인은 어디에 있는가.
타냐의 눈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향했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고개를 숙인 채, 제단 방향으로 드리워진 나무들이다.
그 중 한 군데에서 소년이 뛰어내렸다.
에드는 어렵사리 착지한 뒤 몸을 털고 일어섰다. 환영으로 보았던 모습보다 더 심각한 만신창이였다.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의문스러울 지경이었다.
한 손에는 급조한 활이 들려있다.
그럭저럭 화살대가 되어줄 만한 나무 줄기 양 끝을,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마력의 실이 꽉 잡아당기고 있었다.
‘저런 게 된다고…? 마력 감응 수련을 얼마나 해댄 거야…?’
‘아니, 애초에… 활을 다룰 줄 안다고…? 칼 손잡이 하나 제대로 못 쥐던 사람이…?’
타냐는 주저앉은 채로 얼른 손에 힘을 줘서 바닥을 밀어보았지만, 완전히 힘이 풀려버린 다리는 제 역할을 할 생각이 없다.
낑낑대며 몸을 일으켜보려 해도 이미 몸이 느끼는 공포감이 한계에 달했다.
터벅 터벅 걸어오는 에드와 거리가 좁혀지지만, 두 다리는 완전히 파업해버린 상태다.
– 화아아악
어느샌가 거대한 바람의 늑대까지… 카일리를 제압해내고 활을 든 에드의 뒤로 돌아와 있다.
주저 앉아 올려다 본 모습의 배경엔 거대한 늑대의 그림자까지 드리워져 있어, 이제 더 이상 타냐에게 승산이 없음을 확정하는 듯 했다.
“히, 이이익…. 히익…!”
코앞까지 다가와서 타냐를 내려다 보는 에드.
만신창이가 된 몸 여기 저기엔 부르트고 쓸린 상처가 가득하다. 문득문득 혈흔조차도 보인다.
흙먼지 범벅에, 지칠대로 지쳐서 한계에 달해 있지만, 여전히 힘든 기색은 전혀 내질 않는다.
주저 앉은 타냐를 내려다 보는 싸늘한 시선이… 다시금 타냐의 트라우마를 불러 일으킨다.
로스테일러 가문에서 보았던 그 쓰레기 같던 행보의 주인공이, 손에 쥐어 주었던 단검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던 사용인들과, 그 공포에 질린 눈동자가.
마치 주마등이라도 되는 듯이 타냐의 뇌리를 쓸고 지나간다.
그 시선만큼이나 싸늘한 소름이 타냐의 등줄기를 타고 온몸을 훑었다. 몸의 떨림은 주체할 수 없다.
이윽고 에드가 손을 뻗자, 타냐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너도 나름대로 노력했을텐데, 미안하게 됐다. 이쪽도 사정이 있어서.”
-화아아아아아아악!
다시 한 번 격풍이 불어닥치더니… 정신을 차려보면 거대한 늑대의 형상은 사라지고 없었다.
에드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타냐가 챙겨온 마력석이었다.
파르르 몸을 떨며 조금씩 눈을 뜬 타냐가 본 광경은, 에드가 마력석을 부수는 모습이었다.
시험 탈락의 순간이었다.
“그래도 혈육이라고 봐주고 그럴 순 없잖아. 만약 그랬으면 성격상 네가 더 불같이 화를 냈겠지. 안 그러냐?”
“네….에…?”
“그래도 다시 봤다, 타냐. 너 그런 면도 있었구나.”
에드는 급조한 활에 들어가있던 마력도 풀어헤쳤다. 마력의 실이 끊어지고, 활 역할을 하던 화살대가 평범한 나뭇가지로 돌아가자 근처에 대충 휙 집어 던져버렸다.
에드는 한숨을 흘리고 괜시리 드높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고생스러웠던 신입생 반 배정 시험도 슬슬 마무리다.
에드가 알고 있는 타냐 로스테일러는, 그저 가문의 위광을 안고 학생회장 선거전에 나와 오만함을 뽐내다 퇴장했을 뿐인… 소모적인 악역에 지나지 않는다.
적당히 고위 정령으로 겁을 주면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칠 줄 알았으나… 의외로 강단있는 모습도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입장이 반대였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갔을텐데. 거기서 어떻게든 지친 나를 제압하려는 술수로 튼 건 정말 대단하다. 그런 건 아무나 못하겠지… 자부심 가져도 된다. 너 좀 대단하구나.”
“어.. 으…”
안 그래도 완전히 몸에 힘이 풀려있는데, 상황이 끝났다는 안도의 감정이 머리를 급습하자, 이내 타냐는 알 수 없이 감정이 복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아.. 흐… 흑…”
에드는 영 멋쩍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반응이 돌아올 거란 생각은 못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시험 시간은 종료되었다. 타냐의 마력석도 부쉈다.
더 싸울 맘은 없으니, 어떻게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볼까 고민하던 차였다.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타냐와 에드 사이에 휙 몸을 밀고 들어온 소녀 하나가… 흙먼지가 가득 묻은 얼굴로 얼른 에드를 가로 막았다.
양팔을 벌리고 벌벌 떨고 있는 얼굴은, 혹시라도 타냐가 해코지 당할까봐 두려움을 무릅쓰고 달려온 모습이다.
귀족이라기보다는 전사에 가까워 보이는 소년의 모습에 카일리는 큰 공포감을 느꼈다. 하지만 어떻게든 타냐의 안전을 더 기하고 싶었다.
“마, 말해두지만… 저, 저를… 함부로 적대하고 공격하면… 어.. 어떻게든 나쁜 일이 일어나요! 정말이에요! 우, 움직이지 마세요…!”
제발 좀 믿어달라는 듯이 덜덜 떨며 이야기 하는 것이 대체 누가 누구를 협박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에드는 딱히 해코지할 마음도 없으므로 한숨을 푹 흘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 시선이 약간 아래로 향하는 순간… 에드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 하고 넓어졌다.
시험이 시작된 이래로 단 한번도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 없던 에드가 처음으로 눈을 떨었다. 그리고 얼른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카일리는 그 모습에 큰 위화감을 느꼈지만, 벌벌 떨리는 손을 내려놓지는 않았다. 에드를 응시하는 눈에도 힘을 풀지 않았다.
“시험 끝났어! 에드! 여기 와서 좀 도와줘! 클레비어스가 완전히 나가떨어졌어…!”
“클레어 조교수님…! 여기 채점표부터 갱신 좀 해주세요…! 안 그래도 처리해야할 일이 산 더미에요…! 당장 다음 학기 초부터 학생회장 선거라구요..!”
문득, 제단 입구 쪽에서 클레어 조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스나 오닉스의 목소리도 들려오는 걸 보아하니, 슬슬 시험 뒷정리 작업을 진행하러 오는 듯 했다.
에드는 마지막 남은 마력석을 갈음의 제단에 집어 던졌다. 휙 하고 피어오른 마력이 에드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현현’된 자그마한 불 박쥐 하나가 에드의 머리 위로 떠오른다.
“무, 무슨 짓이에요…! 시험도 끝났잖아요…! 아직도 뭘 할 셈이에요…?!”
카일리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지만, 에드는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불 박쥐를 제단 공터 쪽으로 날려보냈다.
더 이상 싸울 명분이 없지 않나. 슬슬 교직원들도 올라오는 것 같으니, 그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만 타냐에게 해코지 못하도록 지키고 서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카일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입을 앙다문 채 가슴께에 힘을 꽉 줬다. 그리고… 뒤늦게 이변을 눈치 챈다.
잠시 시선을 자기 몸으로 향하자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는다. 밤색 머리칼의 끄트머리가 조금씩 탈색되어, 은색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성도의 마법사들이 걸어준 ‘환시 마법’은 실베니아에 오면서 챙겨온 반영구 마공학용품 ‘초승달 브로치’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만 그 효과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지속되는 것이다.
– ‘카가강, 캉!’
메릴다에 의해서 나가떨어지는 순간 났던 그 소리, 그제서야 카일리는 그 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항상 품속에 넣고 다니는 초승달 브로치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였던 것이다.
“이, 이건…!”
교직원이 들이닥치기 일보 직전이다.
카일리는 온몸에 돋는 소름을 체감했다. 순식간에 심장 박동 소리가 커지며 호흡이 가빠져왔다. 카일리는 재빨리 제단 공터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나, 이미 에드가 날려보낸 불 박쥐가 브로치를 챙겨온 와중이었다.
브로치를 받아든 에드는 재빠르게 카일리의 품속에 밀어넣었다.
“물건 안 잃어버리게 조심하… 조심해.”
커다란 손아귀가 품속에 들어온 경험을 해본 적은 처음이다. 안 그래도 당황스러웠던 상황과 겹쳐져, 카일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을 했다.
들숨과 날숨이 제 멋대로 엉켜, 에드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에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품속에 들어온 브로치에서 다시금 은은한 빛이 피어오르고, 은색으로 물들어가던 카일리의 머리도 제 색을 되찾았다.
“어… 읏…”
너무나 갑작스러웠던 상황인지라 카일리는 뭐라 받아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말끝이 계속 목 끝에 걸려서, 아무런 반응을 할 수가 없다.
“지금 갑니다!”
“맙소사, 에드! 왜, 왜 이렇게 다친 거야..!”
에드가 정령을 갈무리하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어렵사리 이끌고 교직원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갈 때까지… 카일리는 그렇게 가만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타냐 또한 제정신을 차리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일어난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는 점이다.
카일리는… 그렇게 한참 동안 벙찐 채 가만히 서있었다.
단순한 우연. 그런 가능성이 있다.
그냥 타이밍 좋게 분실물을 챙겨주는, 친절한 행동이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빈틈 없던 에드 로스테일러도 결국엔 사람이다.
지나치게 갑작스러운 상황이었고, 빠르게 대처해야만 했기 때문에 순간적인 빈틈을 내주고 만 것.
그것은 보통 사람들에겐 특별할 것 없는… 아주 사소한 빈틈이었을지도 모른다. 눈치 채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아주 사소하고 의미 없는 틈이다.
허나 평생을 경의 속에서 살아온 카일리에게는 그 틈의 크기가 다르다.
– ‘물건 안 잃어버리게 조심하… 조심해.’
‘방금… 존댓말을 하려다가 말았어…’
저물어가는 태양은 반 배정 시험의 종료를 방증하고 있었다.
붉게 물들어가는 세상 아래에서 카일리의 루비 같은 두 눈동자는… 멀어져가는 에드의 뒷모습에 콱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