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83)
봄이여 오라 (1)
섞이다 만 물감이다. 아켄섬에서 올려다 본 초저녁 하늘은 늘 그랬다.
슬슬 태양이 물러가는 서쪽 하늘을 중심으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지만, 드넓은 창공으로 나아갈수록 제 색을 잃는다.
그렇다고해서 완전히 어두워졌다고 하긴 힘든 푸르스름한 창공. 거기엔 이따금씩 별도 박혀있다.
그 광경은 저녁이라고 부르기는 뭣하고, 그렇다고 대낮이라고 할 수도 없어서… ‘초저녁’이라는 단어가 생겨났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납득시켜준다.
호흡은 일정해지고, 제단에 기댄 몸은 점차 힘이 빠진다.
초저녁 하늘은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짓누르는 힘이 있다.
낮의 끄트머리이자 밤의 초입이다. 그 교차점에 선 세상은 천천히 어둠을 받아들여간다.
[ 그거 알아? 나는 시대와 가치관을 초월한 아름다움이란 게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야. ] [ 그 단적인 증거가 저 하늘이지. 천금 값어치를 지닌 예술품도 해석이 분분하고 취향을 따지지만… 저런 노을을 보고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거야. 불변하는 아름다움이란 그런 거겠지. ]“난해한 소리를 하네.”
[ 난해한 게 아니라 이해하기 귀찮은 거잖아. 하여튼 인간들은 사는 세월도 짧은 주제에 매 순간에 감동할 줄을 몰라. ]꽤나 크기가 작아진 바람 늑대가 제단 위에 엎드려서 꼬리를 훑고 있었다.
몸집이 작아지니 늠름하다기보단 정겹다. 목소리도 사근사근한 것이 태양이 지는 풍경과 맞물리는 느낌이라… 괜히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럴만 했다. 오늘은 충분하리만치 노곤한 하루였다.
– ‘에드는 많이 힘들어 보이니까 일단은 제단 쪽에서 쉬는 걸로 하자. 어차피 남은 뒷정리래봐야 마공학용품 정리하고, 갯수 체크하는 거 밖에 없으니까.’
클레어 조교수가 그리 말하며, 다른 학생들을 데리고 중턱으로 사라진지도 어느덧 30분이 넘어갔다.
내 입장에서야 참으로 감사한 배려였다. 클레어 조교수의 말마따나 나는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 굴곡 없고 건조한 삶이야 말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저주야. 사소한 거에도 감동하고, 일상적인 일에도 의미를 부여할 줄 알아야지. 응? ]“너 의외로 감성적인 편이구나.”
[ 원래 좀 감성적인 편이 좋아. 저번에도 말했잖아. ]예니카가 평하길 수다쟁이.
어쩌다가 이 늑대를 상대로 그런 평가가 내려졌는지 알만하다.
[ 인간의 생애가 사계절과도 같다고 한다면, 정령의 생애는 필시 긴 겨울이야. 굴곡 없이 황량한 삶을 쭉 살다보면 필요에 의해 감상적인 면모를 지니게 되지. 길고 긴 삶은 당사자에겐 축복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경우가 많거든. 사실 인간이라 해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말야. ]“그리 달관한 듯이 이야기해버리니까 내가 딱히 받아칠 말이 없는데.”
[ 그러니까 내 말은 연애 좀 하란 말이야, 이 화상아. ]메릴다는 발등을 핥아내리며 코로 한숨을 뿜었다.
[ 정 막막하면 내가 코치해줄게. 너 같은 스타일은 매사에 철저하고 빈틈 없는 주제에,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경우가 많지. 과로로 쓰러지고, 툭하면 다치고 그러는 게 단적인 증거야. ]“너… 역시 듣던대로…”
[ 오지랖 넓다고? 이미 그런 얘기 질리도록 들었으니까 새삼 지적해봤자 의미 없어. 하여튼 에드 너는 누구보다 헌신적이고, 가감없이 널 위해줄 수 있는 사람이랑 궁합이 잘 맞아. 조강지처 스타일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사람을 찾아봐. ]메릴다는 무언가에 집착이라도 하는 듯, 귓가에 대고 기어이 속삭이는 것이었다.
[ 주변 사람 찾아보다보면 있을 거 아니야. 마냥 착하고, 발랄하고, 이왕이면 친하고, 적당히 강해서 기댈만 하고… 그런 사람이랑 교류하고 발전해나가는 게 얼마나 감정적으로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르지? ]“그렇게까지 전투적으로 이야기할 일이야?”
[ 이번에 소환 해제 되면 또 네가 나를 언제 소환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잖아. 가능할 때 다 이야기 해둬야지. 그리고 나는 틀린 말 안해. 그렇지, 머그? ] [ 지당하신 말씀입니닷! 메릴다님! ]군기가 바짝 든 머그가 어깨 언저리에서 팍 하고 허리를 폈다.
딱히 메릴다는 예니카와 계약하지 않았다. 그저 친할 뿐이다.
그말인즉슨 머그라고 해서 메릴다와 직접적으로 상하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래도 군기가 바짝 든 것이, 아무래도 예니카와의 친분이 깊은 만큼 타칸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모양이다.
정령들의 세계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 에드 도련님. 메릴다님의 조언은 항상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귀중한 보물이기에 저희 하위 정령 사이에서는 성전처럼 받아들여집니다! 속는 셈치고 메릴다님의 말을 귀담아 들어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 [ 속는 셈? 말 다했니, 머그? ] [ 아니, 그.. 그건… 죄, 죄송합니다! 이 불초 머그가 또 실언을 했습니다! 속는 셈이라니! 죽음으로 사죄하… ]또 머그가 호들갑 떨며 머리를 박기 전에, 나는 지그시 그 날개에 손을 올리고 역소환 시켜버렸다.
슬슬 마력석으로 인한 마력도 다 바닥이 났다. 메릴다와의 담화도 길게 이어질 수는 없다.
메릴다는 그 육중한 몸을 완전히 소형화 해서 마력 효율을 최대한 드높여 봤지만, 고위 정령은 그 존재만으로도 마력을 뭉텅뭉텅 잡아먹는 괴물이다.
현현시키지도 않았고, 그저 정령 형태로 교감하는 것만으로도 꽤나 마력이 빨려나간다.
아직 다루지 못하는 정령이다. 마력을 과부하 시켜서 억지로 계약한 형태이니… 이런저런 패널티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어쨌든 에드 너도 피곤해지겠네. 나를 소환한 걸 목격한 애들이 둘이나 나왔잖아. 학사에 알리면 난리나는 거 아니야? 이러다 예니카처럼 A반으로 올라가면 또 좋을 일이긴 하겠네. ]“일이 그렇게 되겠냐. 학사 교직원들이 바보도 아니고, 소문을 들으면 내게 다시 한 번 너를 소환해보라고 말하겠지. 물론 그럴만한 마력이 남아있진 않을테고.”
[ 그러네… 나랑 계약했다는 걸 입증할만한 수단이 마땅치 않구나. 설령 계약한 사실을 입증해도, 이렇게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정령사로서 큰 의미가 없기도 하고. ]“오히려 어떻게 계약했냐고 추궁이나 해대겠지. 나는 아직 반지에 대해서는 별로 드러내고 싶지 않아. 출처가 썩 깨끗한 곳은 아니잖아.”
“환영 원반을 개량해서 보여준 환영이라고 둘러댈 거야. 실제로 크게 다친 사람도 없고… 네가 일으킨 바람 같은 건 내가 했다고 하면 될 일이고.”
[ 하여튼 준비성 하나는… ]메릴다는 한숨을 푹 흘리고 제 발을 핥았다.
굳이 무기에 빗대기도 뭐하지만, 머그가 소총이라면 메릴다는 바주카포… 아니 전차에 가깝다.
한 발 한 발의 값어치와 위력이 궤를 달리하지만, 그만큼 준비 시간이 길고 잡아먹는 자원의 양이 어마어마하다.
부담 없이 다룰 수 있는 머그와는 다르게, 메릴다는 정말 사람의 마력을 한계까지 쪽 빨아먹고, 그렇게 되더라도 제 위력의 절반도 채 드러내지 못한다.
확실히 아직 내 수준에서 다룰만한 정령은 아니다.
메릴다를 그나마 좀 활용해보겠다고 한다면, 이번에 학사에서 마련해온 마력석들을 사용한 것처럼 외부적인 마력 공급 수단이 필수불가결 해진다.
그나마도 가성비는 쓰레기다. 체내에 자연 형성된 마력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수혈된 마력이라는 것들이 다 그렇다.
다행스러운 부분은 내가 마공학에 손을 댔다는 점이다. 마력 효율과 감응에 대해서는 가장 심오하게 다루는 학문 분야 중 하나다.
마공학을 잘 활용하면 어떻게든 메릴다를 잘 이용해볼 수 있는 건덕지가 생길 것이다. 마력석 같은 원시적인 형태의 마력 수급이 아닌, 조금 더 체계적인 방법을 고안해낸다면 말이다.
“그러고보니 예니카가 썩 기운이 없어보이던데. 뭐 아는 거 있냐?”
문득 기운 빠진 얼굴로 가만히 모닥불을 쳐다보던 예니카의 모습이 생각났다. 뭐니뭐니해도 메릴다는 예니카의 절친 중의 절친인 것이다.
[ 오호라… 왜, 걱정 돼? ]“당연한 거 아니냐…?”
[ 오호… 흐음… 흐흐흐… ]메릴다는 괜시리 말끝을 베베 꼬다가도 기분 나쁜 미소를 흘렸다.
[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이긴 한데, 걔가 스스로 이야기하길 꺼려한 걸 내가 술술 털어낼 리도 없잖아. 나는 말 안해주지. ]“생각 외로 고지식하게 구네.”
[ 누가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한담. 어쨌든 그렇게 너무 걱정하지 마, 그건 걔가 스스로 해결할 일이거든. 아니… 그래도 좀 걱정 정도는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이왕 관심 가는 김에 신경도 좀 쓰고 발도 좀 둥둥 구르고 하는 거 괜찮을지도? ]“일단 너는 사람이랑 대화하다가 갑자기 혼잣말로 빠지는 습관부터 좀 없애면 좋겠다.”
[ 미안하게 됐네. 나도 예니카한테 영향을 좀 받았나봐. ]메릴다는 꼬리를 몇 번 탈탈 털어내고서는 고개를 빳빳이 펴고 붉은 기운이 퍼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 예니카도 내면적으로 성장해야할 때가 됐지. 원래 세상 만사라는 게 그렇잖아. 마냥 착하고 순박하게 군다고 해서, 세상 또한 너한테 착하고 순박하게 굴어주진 않지. ]“백번 공감한다.”
[ 그래. 그러니까 괜찮아. 누구나 으레 한 번 쯤은 경험하고, 스스로 깨닫는 과정이거든. 세상은 동화책 같지 않다는 거 말이야. 사실 네가 할 일이래봐야 별 거 없어. 그냥 가만히 있어주면 돼. 어디 가지 말고. ]메릴다 특유의 묘하게 장난기 서린 어조는 사라지고, 하늘을 본 채 속삭이듯 이야기 한다.
[ 말했잖아. 정령의 생애는 기나긴 겨울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생애는 나름대로 다채로운 사계절에 가깝다고. 예니카 입장에서야 긴 겨울이 되겠지. ]달관한 어조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하지만, 메릴다의 목소리만으로도 나는 이미 충분히 실감하고 있었다.
그 위태롭지만 착실히 성장해나가는 정령사를 한없이 믿으면서도, 또 한 켠으로는 걱정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말로는 걱정할 거 없다고 이야기 하면서.
그래도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나름의 확신이 깃들어있어서, 불안하기보다는 안심이 된다.
[ 그래도 봄은 오는 법이야. 원래 계절은 돌고 도는 거잖아. ]“희망적인 말도 할 줄 아네.”
[ 어머, 난 원래 희망적이야. 쓸 데 없는 비관은 도움이 안되거든. …슬슬 이만할까. 더 이상 네 마력을 잡아먹는 것도 미안할 일이고. ]확실히, 메릴다는 그 거대한 몸집이 아니라 자그마한 늑대 형상을 취하고 있을 뿐인데도 꽤나 감당하기 힘든 마력을 잡아먹는다.
“형태가 작아진다고 해서 감당하기 쉬운 건 아니네.”
[ 내가 원래 좀 비싼 편이야. 이나마도 이런 조그마한 형상을 취하느라 영 불편해. 그나마 취할 수 있는 형상 중에서는 네 마력 효율을 가장 배려할 수 있는 형태지만 말이야. ]“그래? 이것 말고도 취할 수 있는 형상이 많아?”
[ 그래도 제 모습 따라가는 게 제일 편해. 그 중에서도 이런 늑대 형상이 최고야. ]그리고 나서 메릴다의 목소리엔 다시금 장난기가 어린다.
[ 왜? 좀 더 아리따운 소녀 모습이었으면 좋겠어? 가능이야 한데 권장은 안하거든. 눈요기야 좋겠지만 그런 섬세한 형태는 네 마력이 감당을 못하겠지. ]“됐다. 쓸모 없는 소리 그만해. 단지 거대 늑대 형상이랑 지금 형상이랑 마력 효율 차이가 그렇게 큰 것 같지는 않아서 해 본 소리야.”
[ 어머, 그건 뭘 모르는 이야기인걸. 하긴 넌 마력석의 힘을 보태서 사용했으니, 제대로 감지 못했나 보구나. 그런 마력은 체내에서 자연 형성된 마력과는 다르게 영 둔탁한 법이지. ]조금씩 늑대의 몸이 바람 사이로 흩어져간다. 체내에 억지로 쌓아뒀던 마력이 흘러나가고, 그에 따라 정령 감응력조차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방학이 끝나야 다시금 감응력이 돌아오든가 하겠지.
[ 나 정도 되는 정령이면 한 사람이랑만 계약하지는 않잖아. 혹시 정말로 너 혼자서 모든 마력을 다 감당했다고 생각했어? ]잠시간의 작별을 고하며 사라져가는 메릴다는, 끝끝내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화아아아악, 쉬이익.
드디어 홀로 남은 제단. 석양이 넘어가면서 길게 기울어져가는 그림자들.
이따금씩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를 제외하고서는 완전한 침묵.
“으읏, 큭.”
최대한 쉬라고 했건만,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서는 제단 비석 쪽을 보았다.
메릴다의 말을 곱씹던 나는… 그제서야 깊은 한숨을 흘렸다.
창공을 향해 쭉 뻗어올라간 비석 꼭대기.
나는 그곳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비석 옆으로 비죽 튀어나온 돌출부에 발을 얹고 오르기 시작했다.
*
– ‘뭐에요, 오닉스 선배님?’
– ‘아, 아니… 방금 제단 꼭대기에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아서… 흠… 잘못봤나…’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비석의 옆 돌출부를 밟은 채 정상을 향해 쭉쭉 올라갔다.
외로이 서있는 제단과 탁 트인 공터 뿐인 이 오른산 꼭대기. 사람이 숨어있을만한 공간이래봐야 마땅치 않다.
숨어있다기 보다는 그냥 안보인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한참을 오른 뒤에 비석의 꼭대기에 도달했다.
오른산 정상에서도 가장 드높은 위치다. 장애물 하나 없이 아켄섬 전경이 눈에 탁 들어온다.
퍼덕대는 바람을 헤치고 똑바로 서있으면, 다른 잡다한 것들은 보이지 않아 마치 공중을 부유하고 있는듯한 착각이 든다.
“…”
저물어가는 해를 보는 루시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네가 왜 여기에 있냐, 언제부터 있었냐, 뭐하고 있냐는 둥… 구구절절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진 않았다.
루시는 언제 어디에 있든 이상하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위화감이라면 느끼고 있었다.
제 아무리 마력석의 양이 막대하다 할지라도, 이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레 고위 정령을 다룰 수 있을 리가 없다. 정렁 현현이나 교감 자체에 드는 마력은 온전히 나의 힘으로 해냈지만, 전투 당시에 메릴다의 온전한 힘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다른 마력이 기여한 것이다.
메릴다의 힘을 발현하는 데 개입할 수 있는 마력이라면, 메릴다와 계약한 자일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용의선상에 올릴 사람이래봐야 하나 뿐이다.
“도와줄줄 몰랐다. 고맙게 됐네.”
“무시하기도 좀 그랬어.”
만약 시험 시작 때부터 쭉 루시가 여기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면, 사실 이 오른산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대부분 보고 있었단 이야기가 된다.
만약의 이야기다.
만약 내가 끝끝내 혼자서 신입생들을 막지 못하고 제압당해버린 상황이 왔다고 한들, 루시가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만사 귀찮다는 듯한 모습으로 세상에 관심 없는 듯 굴지만… 본인이 나서야겠다 싶은 시점이 오면 여지없이 팔을 걷어붙일 줄도 아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요제프가 됐든, 에이그가 됐든, 혹은 타냐나 카일리가 됐든 간에… 끝끝내 나를 쓰러뜨리고 완전히 제압했더라도, 그 뒤로는 비석에서 뛰어내린 루시와 마주해야만 했겠지.
그 모습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흙먼지를 피어올리며 낙하해, 모자를 눌러 쓴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는 제단 위의 루시는… 아마 절대로 뚫을 수 없는 벽일테다.
처음부터 이 시험은… 불합리함의 극치였던 것이다.
“낮잠 자기 좋은 곳은 아닌 것 같은데.”
“낮잠 자러 온 거 아니야.”
“그럼?”
“사실 낮잠 자러 오두막을 가긴 했는데…”
난 오늘 거의 하루 종일 오두막에 가지 못했다. 학사 일에 치여서 캠프 유지보수에 힘을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텅 빈 오두막은 별로 안 좋아해.”
그 말에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란히 앉아 조금씩 묵빛이 더해져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루시는 여전히 표정에 변화가 없다.
펄럭대는 백발이나 백옥 같은 피부는 저물어가는 태양 빛을 물씬 흡수해, 평소보다 그 색조가 가라앉아 있다.
남아도는 소맷깃을 펄럭거리고, 통통 부유하듯 걸어와 캠프에 도달했지만, 모닥불은 꺼져있고 오두막 안도 텅 비어있다. 곧 누가 오겠지 싶어서 자다 일어났지만, 잠결에 본 캠프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여전하다.
대마법사 글록트는 라멜른 산맥지대의 오두막에서 삶을 마감했다고 했나.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의 풍경이 어떠했을지 문득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되어, 루시에게 이렇다 할 반응을 건네주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산책을 좀 했어.”
그렇게까지만 이야기하고, 루시는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애석하게도 산책 끝에 도달한 이 ‘갈음의 제단’은… 3막의 끝에서 루시가 텔로스의 사도들을 상대하기 위해 바로 서는 곳이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예언가 아델의 죽음.
주신의 뜻과 성도의 어둠을 깨닫고 불신의 성녀로 화하는 클라리스.
그런 클라리스를 단죄하기 위해 내려오는 텔로스의 사도들.
글록트의 유언에 따라 사도들로부터 아켄섬을 지키려 드는 루시.
그런 내막을 모른 채 대주교의 전언에 따라 루시를 막아서는 주인공 세대.
얽히고설킨 실타래 안에서 성도에 의해 불신자라는 프레임마저 붙어버렸지만, 한 마디 불평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토벌대와 사도 사이에서 고고히 만물을 내려다보는 루시의 모습이야말로… 이 3막의 하이라이트다.
페니아 황녀의 황실 호위군, 로르텔의 조합 용병단, 성도의 성당기사단, 주인공 세대의 루시 토벌대, 학사의 고위직원들, 급기야 교장 오벨 포시어스까지 전부 박살내고, 만신창이 상태에서 홀로 텔로스의 사도를 절반 넘게 없애버리기까지 하지만…
끝끝내 체력이 다해, 마지막 검성식을 익힌 테일리에 의해 제압당하게 되는 역할.
모든 내막이 드러나고 나서야 루시가 왜 신의 사도들을 죽이려 들었는지 이해 받게 되는… 어쩌면 비극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오해보다 아픈 것이 뒤늦은 이해다.
‘사실 그 녀석도 나쁜 녀석은 아니었어.’, ‘대체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는지 몰랐지만 이제야 수긍이 되는군’, ‘그 녀석에게 그런 속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뭐 이런 감상으로 대표되는, 알고보니 진실은 달랐다… 라는 식의 연출이야 시나리오의 몰입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그런 운명에 휘말리는 당사자가 되어 본다면 아무런 불만도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글쎄, 타고난 천성 탓인지, 아니면 말해봤자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루시는 끝끝내 자기 혼자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나는 그런 루시의 행보를 막을 마음이 없다.
정사를 위해 냉혈하게 루시를 희생시키는.. 그런 대범한 행동은 아니다.
그냥 이대로 흘러가는 것이, 루시 입장에서도 마냥 배드 엔딩은 아니기 때문이다.
루시는 이 3막이 끝나고 나서야… 죽는 그 날까지 안고 가도 이상하지 않았을 마음의 짐을 털어놓고, 제 삶을 살 수 있게 되니까.
그 짐을 털어내지 않으면 어쨌든 루시는 영원히 글록트의 죽음이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 ‘실베니아 아카데미는 내 스승이신 실베니아 로베스테르님께서 학문의 진보를 위해 일생을 바쳐 일구어낸 보물이란다.’
– ‘이 귀중한 보물에는 이미 관측 되어 있는 시련이 너무나도 많단다. 물론 성위학 연구가이신 실베니아님의 눈에만 제대로 보였겠지만 말이다.’
– ‘비온 뒤 땅이 굳어지는 법이니, 대부분의 시련은 이 실베니아 아카데미가 스스로 이겨낼 것이지만… 네 힘이 아니면 이겨낼 수 없는 시련 한 번이 반드시 온다.’
– ‘그 때가 되면 이 늙은이를 봐서라도… 부디 네 힘을 빌려주겠느냐…? 루시.’
죽어가는 대마법사.
거진 뼈만 남은 손을 어렵사리 들어, 루시의 손을 맞잡은 채 했던 그 이야기가 얼마나 큰 무게로 남아있을지는… 아마도 루시 본인만 알테다.
질척한 감정은 훌훌 털어내고, 다시금 속 시원하게 탁 트여있는 아켄섬의 전경을 본다.
펼쳐져있는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크기는 꽤나 으리으리 하다.
새학기부터는… 이제 저 거대한 부지를 쓰는 사람들도 절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페니아와 로르텔이 저 학교의 세력들을 절반으로 갈라먹고 나면, 결국 명분 싸움과 정치전의 반복.
실베니아의 낙제검성 3막, 세력 대립 파트의 시작은… 학기 초 학생회장 선거전에서 이미 발동이 걸릴테다. 본격적으로 시나리오의 향방을 결정하는 메인 분기점도 속속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긴 싸움이지만 얻어가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아켄섬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 탁. 휘익.
루시는 어느샌가 몸을 일으켜서 내 무릎 언저리까지 다가오더니, 정좌해있는 내 무릎 한 쪽을 꾸욱꾸욱 눌러서는 평탄화 작업을 한다.
작업이 흡족스럽게 잘 마무리 되자, 배를 깔고 드러눕고서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한다.
“이거 나도 최근에 안 사실인데…”
멍하니 팔을 휘적거리고선 한다는 소리.
“사실 나 좀 외로움 타나 봐.”
산책이랍시고 오른산 꼭대기까지 올라오는 것도 썩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다음부터 오두막을 오래 비울 땐 미리 말이라도 해둘까.
그렇게 하기엔 루시가 너무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니… 나로서도 할 말은 없는 것이다.
저물어가는 태양의 기운도 슬슬 미약해져, 차분한 별 하늘이 그 세력을 더 해간다.
밤낮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는 시기.
밤이 온다. 그리고 봄이 온다.
*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그런 집구석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뛰쳐나가고 싶었어요. 에휴.”
벨 마이아가 짐을 받아들려고 하자, 클라라는 애써 고개를 가로젓고는 활짝 웃었다.
이제 메이드 장이신데, 이런 것까지 시킬 수는 없죠. 애초에 제 담당하시는 분도 아니고요.
그런 말을 하며 으쌰으쌰 가방을 들고 나아가자, 벨은 썩 불편한 얼굴로 다시금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애초에 클라라는 꽤나 이름을 날리는 자작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오필리스관을 쓰질 않는다.
겉모습만 봐서는 도저히 귀족이라 부를 수가 없다. 수수한 플레어 스커트에 단색 블라우스만 입고, 새침데기 같이 쭉 빗어넘긴 바람머리 단발은 누가 봐도 생활력 넘치는 마을 아낙네다.
아니스와 나란히 앉혀놓고 둘 중 누가 귀족가 자제인 것 같냐고 묻는다면 백이면 백 아니스를 고를 것이다.
“이번 방학도 어떻게든 잘 넘겼네요, 후!”
지나치게 권위의식 넘치는 집안을 너무 싫어해서 최대한 학교에 들러붙어 있고 싶어하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집안에 인사를 드리러 가야하니 방학 때가 되면 한 번씩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는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재빠르게 할 일만 얼른 끝내버리고 냅다 학교로 돌아와버리는 모습이, 이래가지고 사교계 생활을 할 수나 있을까 하는 걱정부터 들게 만든다.
아직 방학 기간은 좀 남았음에도 부랴부랴 학교로 뛰어 돌아온 모습만 봐도 뻔하다.
“하여튼 가신들 잔소리 때문에 귀에 딱지가 앉을 뻔 했어요. 어휴, 진짜… 알지도 못하면서…”
클라라는 그렇게 툴툴대면서, 고향에서 챙겨온 선물을 벨에게 건넸다. 아무래도 이걸 주려고 장미정원에 들른 모양이었다.
벨이 포장을 펼쳐보니, 그 안엔 고급스러운 머그잔이 들어있었다. 벨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클라라는 방긋방긋 웃으며 별 거 아니라고 한 뒤, 다시금 학사 풍경 쪽을 바라 보았다.
“스읍, 하아~! 역시 여기가 내 마음의 고향이라니까요. 정겨운 고향의 공기! 알지도 못하고 답답한 소리나 하는 바보들만 넘쳐나는 본가보다는… 마음을 주고 받은 친구들이 잔뜩 있는 실베니아가 최고지!”
활짝 웃으며 선물이 잔뜩 든 가방을 집어들고는 벨에게 인사했다.
“어쨌든 벨씨도 건강해보이니 다행이네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답답한 집안에서 뛰쳐나오니까 너무 흥이 올라서 부담드렸을까봐 걱정스럽네요.”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어쨌든 저는 학사 친구들 봐야겠어요.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 맛있는 간식도 잔뜩 사왔으니, 아니스랑 예니카 불러다가 다과회 할 준비도 이미 다 끝나 있어요.
미리 편지로 언질을 줬는데, 둘 다 온다고 하더라고요. 오랜만에 만날 생각 하니까 너무 신나요. 화기애애하게 주고 받을 이야기가 너무 많이 쌓여있어서… 가슴이 쿵쿵 대는 기분이네요! 하하… 역시 저도 아직 덜 컸나봐요. 그럼 수고하세요, 벨씨!
”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팔을 휘적대고 멀어져가는 클라라.
완전히 신난 모습으로 멀어져가는 클라라에게, 벨은 이렇다 할 작별인사를 건네주지 못했다.
그저 가만히 서서 머그잔을 꽉 움켜쥔 채로…. 식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벨 치고는 진귀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