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85)
봄이여 오라 (3)
두 눈은 애먼 옛날에 암순응이 끝나있다. 애초에 어둠뿐인 삶이었기 때문이다.
게슴츠레한 눈을 지그시 떴을 때, 피칠갑이 된 세상을 맞이해본 경험이 클레비어스의 심장을 좀먹는다.
가장 뇌리에 깊게 남은 장면은 정해져있다.
눈을 뜨자, 형의 심장에 칼을 박아넣고 있던 순간이었다.
가문의 모든 구성원이 클레비어스를 외면할 때도 홀로 그의 편에 서있어 줬던 형이다. 유일한 아군이라 여겼던 형에게조차, 그 저주받을 피에 못 이겨 칼날을 향하고 말았다.
핏줄기를 뱉으며, 충혈된 눈으로 클레비어스를 내려다보던 그의 형이 입을 연다.
이를 바드득 갈며, 실핏줄을 세우고 피끓는 목소리로 클레비어스에게 말한다. 아마도 저주의 뜻을 담아. 핏줄기를 늘어뜨리며 건넸을 말이──
“눈폭풍 기간 끝나기 전까지는 학사 일 전부 스톱이라했는데, 굳이 학사 연구실까지는 왜 왔어? 출근 안 해도 된다니까?”
헛, 하고 클레비어스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이따금씩 밀려올라오는 환각에 다시금 정신을 놓을 뻔 했다.
“당장 날씨가 오늘 내일하고 있는데 되도록 기숙사에서 안 나오는 게 좋지 않아?”
“그, 그런 것 치고는 클레어 조교수님은 출근해 계시는군요…”
“원래 막내교수라는 게 그렇잖니~. 한계 직전까지 일해야할 숙명이야… 으흑…”
클레어 조교수는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푹 쉬었다.
풍성한 구름이 조금씩 하늘을 메우고, 부슬부슬한 싸리눈이 이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지금은 포근한 겨울 풍경처럼 보이지만 눈발과 바람이 거세지는 건 이제 순식간일 것이다.
아켄섬도 한참 폭풍 대비에 여념이 없어, 라플라스 베이커리도 휴업 상태에 돌입했다. 간식을 미리 사두지 못한 것은 통한의 실수였다.
“…저번에 말씀하셨던, 그… 하, 학사 조교일 말인데요.”
클레비어스는 더 잴 거 없이 용무부터 이야기했다.
“아예 연구실 소속이 되는 거 말이지? 나름 나쁘지 않을거야~. 인원 확충이 꽤 됐으니 각각 책임지는 업무량도 감당할만 할테고.”
“그게 아니라, 저, 저는… 그냥 안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엥? 갑자기 왜? 다른 연구실에서 오래?!”
“아뇨, 그런 건 아니고…”
클레비어스는 쭈뼛대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대우는 좋지만, 그렇게 책임감 있는 일까지는 하고 싶지 않아서… 말씀 드리러 왔는데요…”
“왜? 클레비어스 정도면 착실하게 맡은 바 일들을 잘 처리 하는 편이잖아?”
“그거야… 강제성이 있는 거니까요… 그래도, 이 이상으로 책임이나 능력이 요구되는 건…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해서요…”
클레비어스는 마른 침을 삼키고 확실히 이야기했다.
“이런 식으로 의무가 요구 됐을 때… 저는 거의 대부분 실패하고만 살았으니… 이제 좀 삶의 지혜가 쌓였다고 할까… 애초에 시작부터 안하는 게… 차라리 돌고 돌아서 결국 정답이더라고요… 대부분 남한테 폐 끼치는 경우가 더 많았고 하니…”
쭈뼛쭈뼛 말을 잇는 클레비어스는 척 봐도 초췌해보이고 음울한 느낌이 나는 것이, 여느 때와 똑같았다.
“그래? 난 또 대우가 안 좋다거나 다른 데에서 러브콜이라도 받은 줄 알았잖니~.”
“그,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그럴 깜냥도 안되고, 애초에 대우는 정말 좋고… 마음에 들지만…”
“그래? 그럼 하려면 할 순 있다는 소리네?”
“네? 아, 네… 그렇긴 하죠…”
우물쭈물 대는 클레비어스를 앞에두고, 클레어 조교수는 천진난만하게 활짝 웃으며 대번에 못을 막아버렸다.
“그럼 해.”
평소와 똑같은 클레어 조교수이지만, 왠지 더 이상 군소리는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았다.
클레비어스는 땀을 삐질 흘리고는… 더 대답하지 못했다.
* [ 마법 능력 상세 ]
등급 : 능숙한 마법학도 전문 분야 : 원소 공통 마법 : 빠른 캐스팅 Lv 10 마나 감지 Lv 10 불 원소 마법 : 발화 Lv 16 바람 원소 마법 : 바람 칼날 Lv 15 중급 마법이 습득 가능해졌습니다!
정령계 마법 : 정령 감응 Lv 13 정령 이해 Lv 13 정령 현현 Lv 4 감각 공유 Lv 3 정령 슬롯 : 하위 불 정령 머그 감응 단계: 3 정령식 효율 : 좋음 고유 부여 스킬 : 화복의 가호 (일시적 화염 면역 폭증) 폭성 (하급 폭발 마법)
불 마법 능력 증대 정령 슬롯 : 고위 바람 정령 메릴다 감응 단계: 1 정령식 효율 : 매우 나쁨 고유 부여 스킬 : 풍랑의 가호 (주기적으로 피해 무력화) 상승 기류 (중급 바람 마법)
바람 마법 능력 증대 정령 슬롯 : 비어 있음 새로운 정령 슬롯! : 비어 있음
“에드도 슬슬 중위 정령이랑 계약해야겠네!”
이튿날 간만에 캠프에 찾아든 예니카는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완전히 풀이 죽어서 음울한 얼굴로 돌아다니던게 바로 엊그제 일인데, 오늘은 또 완벽하게 부활해서 모닥불 옆에 둘러 앉아 있으니 그 온도차가 엄청나다.
“기운이 돌아온 것 같네, 예니카.”
“응? 에, 에드도 참…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꼭 풀 죽어 있었던 것 같잖아!”
“그걸 말이라고 하냐…? 저번에 캠프 왔을 때만 해도…”
“저번?! 저번이 언제더라?! 잊어버렸네…!!!”
예니카는 허겁지겁 자기 얼굴에 부채질을 해대면서 언성을 드높였다.
아무래도 다 죽어가는 얼굴상으로 캠프까지 찾아와서, 담요까지 덮어썼던 기억이 영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 때는 나도 묘할 정도로 감정적으로 대응한 느낌이다. 혼자서 무릎을 감싸안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이, 마치 길 잃은 설치류 동물 같아서 가만 놔두기가 좀 힘들긴 했다.
애당초 예니카를 상대로는 마음의 결이 한 겹 풀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 아무래도 예니카는 시나리오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인물이기에 그렇겠지. 정말 제대로 교감을 주고 받는다고 할만한 동년배 친구도 예니카 밖에 없으니…
내 인간관계… 이대로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고 만다. 좀 더 인간관계의 폭을 넓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결국 이 악물고 이 숲에서 살아나가고 있는 것도 나중에 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함 아닌가.
무력적인 성취야 어느 정도 이루었을지 모르겠으나, 시나리오 핵심 멤버들에 비하면 아직은 좀 미약한 수준이다. 특히 3막부터는 하나 같이 성장세가 무지막지하니, 적극적으로 따라 붙어야 했다.
금전적인 부분이야 항상 허덕이고 있는 편이고, 인간관계마저 협소하니… 아직도 갈 길이 먼 느낌이다.
무엇보다, 이 실베니아 아카데미만큼 온갖 고귀한 사람들을 아무 제한 없이 사귈 수 있는 곳은 흔치 않은 것이다. 버리기에는 영 아까운 기회다. 첫인상이 워낙 개판이라 마음대로 잘 안 풀리긴 했다만…
그래도 예니카라도 있어서 다행이긴 하다.
“그, 그냥 친구랑 사소한 오해가 조금 있었어. 응.”
“그래?”
“응, 정말 정말 사소하고 별 것도 아니라서 에드가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는 그런 오해였지 뭐야. 지금은 오해 다 풀렸고 다시 사이도 좋아졌어!”
방긋 하고 웃는 것이 확실히 예전의 예니카 같아서 나도 썩 마음이 놓였다.
“어, 어쨌든 지금은 에드 이야기를 해야지. 메릴다랑 계약한 건 알고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긴 했어. 에드는 아직 고위 정령을 다룰만한 실력이 아니잖아.”
“꼼수를 좀 부렸지.”
반지에 대한 것까지는 메릴다가 말해주지 않은 걸까. 그렇게 수다쟁이면서 또 은근히 지켜줄 비밀은 지켜주는게 묘했다.
반지에 대한 사실은 최대한 나 혼자만 알고 있을 심산이었지만, 예니카까지는 공유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예니카는 정령술 수련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애초에 이 정도 마력량으로 메릴다와 계약한 시점에서 이상한 부분이 한 둘이 아닐테니 숨길 수도 없다.
예니카는 이리저리 소문 내고 다닐 사람도 아니고, 믿을만한 동료니까 상관 없긴 하다.
나는 글래스트 교수가 남겨두고간 황금 불사조 반지에 대한 것을 구구절절 이야기 해줬다.
예니카는 정갈하게 앉아서 경청하더니, 마지막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납득했다.
“그럼 에드는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구나. 당장 중위정령이랑 계약하긴 힘들겠네.”
“방학 끝나고 학기 시작할 때 쯤엔 마력이 돌아올 거야.”
중위 정령과의 계약은 필요하다. 굳이 예니카가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머그가 소총이라면 메릴다는 전차다.
소총 아니면 전차라니, 두 힘의 간극이 커도 너무 크다.
메릴다는 내 수준에서 다룰 수 없는 정령을 억지로 계약한 것이니, 한 번 소환 하는 것만으로도 온 마력이 싹 다 빨려버려서 당장 본체가 무력해진다.
그만한 양의 마력석을 싹 다 때려박고도 루시의 도움을 받아야지 겨우 현현시킬 수 있었다. 나 혼자서 메릴다를 다루려면 아직은 힘에 부치겠지.
궁지의 궁지에 몰렸을 때 필살기로 활용할 수는 있어도,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소환해댈 수 있는 수준은 절대 아니다. 정령술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예니카조차도 고위 정령을 다룰 때는 신중하게 마력을 운용하는 걸 보면 당연하다.
“일단 고위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된 건 정말 축하할 일이야, 에드. 정령사들 사이에서는 첫 고위 정령과 계약한 날을 두 번째 생일이라고 부를 정도라구. 애초에 고위 정령과 계약할 수 있는 정령사 자체가 많진 않지만.”
“중위 정령만 다양하게 다루어도 베테랑 취급을 받으니까… 확실히 정령사로서는 한 수 성장한 느낌이긴 하네.”
“에드는 꼼수를 쓰긴 했지만. 헤헤.”
빙긋빙긋 웃는 모습이 정말로 뿌듯해 보여서 나까지 덩달아 어깨가 으쓱대는 느낌이다. 물론 잘난 체 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훨씬 더 멀긴 하다.
“어쨌든 에드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고위 정령은 아무 때나 편히 다룰 수 있는… 그런 상시 전력은 절대 아니야. 그러니까 중위 정령 계약이 필수인거구. 하위 정령은 상시 전력, 중위 정령은 필살 전력, 고위 정령은 최후 전력. 대부분의 고위 정령사들은 이런 식으로 정령을 운용하는 편이야.”
“내 핵심 전력이 되어줄 중위 전력 한 둘은 있어야만 한다는 거구나.”
“응. 에드는 바람과 불 원소에 감응력이 좋은 편이지만… 주력 원소가 아닌 다른 정령도 계약해두면 좋아. 마력이 돌아오면 한 번 시도해보자. 내가 도와줄게.”
예니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내 성장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 모습은 참 고마운 일이다.
“그러려면 일단 마력이 좀 돌아와야겠지. 학기 중에 또 신세를 지겠네. 많이 바쁠텐데 항상 미안하게 됐다.”
“아니 아니 사과하지 마, 에드.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 그리구 내 걱정 할 때도 아니지…? 이제 곧 눈폭풍이 온다잖아. …나름대로 대비는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모닥불 근처에는 숲 여기저기에서 거둬들여온 사냥 덫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대부분은 잘 정리해서 오두막 안에 넣어두었지만, 정비가 필요한 덫들은 따로 빼두었다.
핏자국이 묻어있거나. 이물질이 껴있는 톱니들을 잘 연마해두지 않은 채 보관하면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다.
그래도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아 전부 다 깔끔하게 정리할 수는 없을 것 같긴 하다.
주변 풍경을 보면 캠프 전체가 겨울을 대비하고 있었다.
바닥에 붙어 있는 모든 것들은 전부 밧줄로 단단히 동여매어 고정된 상태였다.
오두막도 전체적으로 밧줄을 감아 바닥에 지지해두었고, 각목을 여러개 덧대서 보조 지지대를 만들어 지탱해두기도 했다. 보조 창고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 숲에 들어와 처음으로 만든 목제 쉼터… 이제는 루시의 낮잠터가 되어버린 이 각별한 쉼터도 바람막이를 설치해두긴 했지만… 잘 버텨줄지는 모르겠다. 날아가버린다면 어쩔 수 없다.
“이번 폭풍만 지나가면 봄이 오고 새학기가 시작될 테니까… 이 숲 환경도 더 괜찮아질거야!”
예니카는 그렇게 이야기 해더니, 다시금 묘하게 풀이 죽어서는 은근하게 이야기했다.
“역시… 덱스관에 들어오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이런 겨울까지 밖에서 보내야 하는 건 너무 가혹하잖아…”
“괜찮아. 나는 폭풍 치는 동안에는 영혼 도서관에 있을 거니까.”
“그.. 지하 연구실에 있던 시설?”
“응. 따로 입구를 만들어 놨거든. 내가 만들었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거지만. 지하라서 좀 답답하긴 한데 적어도 외풍 걱정은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라. 피난처로써는 훌륭해 보이더라.”
“그럼 좀 다행이긴 하네… 그래도 심심하겠다. 일주일이나 갇혀 있으려면.”
“그 동안은 작정하고 마공학 수련만 할 거야. 확보해둔 재료랑 제작식을 전부 소화해 내려면 오히려 좀 촉박할 수도 있어.”
“역시 열심히 사는 구나, 에드.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는 법이 없네.”
애초에 열심히 살 수 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게 더 알맞은 표현이다. 그리고 열심히 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예니카라고 해서 딱히 나에게 꿀리지는 않는다.
학년 수석이라는 자리에 몰려드는 선망과 존경은 가벼이 여길 수 없을 것이다.
“눈폭풍 끝나고 학기 시작하면 또 보자. 합동 전투 실습도 생각해야 하고, 또 학생회장 선거도 있네. 너는 학년 수석이니까 시선이 좀 몰리겠다.”
“안 그래두 누굴 지지할 건지 은근하게 떠보는 사람들이 벌써 생겨나고 있어. 이런 저런 후보가 많이 나온다던데… 솔직히 나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서 중립이나 지키려구.”
정사에서도 선거전 파트 때 예니카가 딱히 학년 수석으로서 조명 받는 일은 없었다. 성격상 누군가를 강력 지지하기보다는, 여러 후보들을 두루 존중하는 탓이었다.
“그러고보니까 에드 동생도… 학생회장 선거에 나온다고 했었지?”
“아, 그렇지. 걔가 은근히 야망 있는 성격이라.”
문득 예니카는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헛숨을 들이삼키고서는 내게 천천히 물었다.
“그… 에드는… 동생이랑 많이 친한 편이야…?”
“친하…다고 해야 되나…?”
엄밀히 말하자면 모른다.
타냐 로스테일러는 3막에서 나와서 그대로 3막에서 퇴장하는, 징검다리 악역이다.
금방 시나리오에서 떨어져나갈 인물이니만큼 필요 이상으로 경계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직까지는 주의할 필요가 있긴 하다.
그래도… 이 삭막한 세상에서 처음으로 만난 혈육 아니던가.
“애초에 파문 당한 입장이니 당당히 이야기하긴 그렇지만… 어쨌든 혈육이었잖아. 좋든 싫든 평생 눈 맞추고 살 가능성이 크니 아무래도 걔랑은 잘 지내고 싶긴 해. 걔도 생각보다 나한테 악감정 가지고 있는 것 같진 않고… 애초에 남매 지간이란 게 항상 사이가 좋을 순 없잖아. 그렇지?”
“그… 그런가… 확실히… 남매 지간에 투닥대는 일이야.. 자주 있는 일이긴 하지…”
“그래. 뭐 여러 희로애락을 거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걔하고는 원만하게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커. 끔찍이… 까지는 아니어도 꽤나 아끼는 편이긴 해.”
애초에 뭘 제대로 해준 건 없긴 하지만… 안 그래도 인간관계가 영 협소한 나한테 혈육의 존재는 의미가 크다. 지금부터라도 잘해줘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기분이다.
마른 사막 같은 세상에 홀로 떨어져 살다가… 처음으로 혈육의 연이 맺어진 사람을 만난 거니까.
시나리오 막바지까지 가면 어차피 로스테일러 가문은 몰락하므로 타냐도 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타냐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팔 걷어 붙이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칠 것 같다는 이미지가 있어서… 묘햐게 안심이 되는 소녀다.
“그그그그그렇구나…. 많이 아끼는 구나… 그냥 나나나남매지간의 싸싸싸움이었구나…”
갑자기 내 소맷귀를 움켜쥐더니, 예니카는 안색이 새파랗게 되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기 시작했다.
“근데 에드, 그… 타냐는 뭐 좋아해? 선물로 받으면 좋아할 것 같은 물건이 있을까? 아니면 좋아하는 음식이라든가…?”
“….”
예니카는 그렇게 내 옷깃을 꾹꾹 당기면서 느닷없이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예니카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다가…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타냐한테 뭐 했냐?”
“아무것두!”
예니카는 얼굴이 두껍지 못해서 거짓말을 지독하게 못한다.
양심의 가책을 못 참고 자백의 말을 내뱉는 데까지 3초 정도 걸렸다.
본인 딴에는 땀을 삐질대며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심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
“오늘 새벽부터 눈보라가 몰아친다고 합니다. 외출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허가되지 않으니, 아무쪼록 외부에 용무가 있으면 메이드를 통해주시길 바랍니다.”
깔끔하게 각이 잡혀있는 오필리스관의 메이드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휘몰아치는 겨울 바람 소리가 으스스했다. 간헐적으로 창문이 덜컥 거리고, 눈발이 창가에 날아와 방의 온기에 녹아사라졌다.
카일리… 클라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어지간한 귀족가 영애의 방이 안 부러운 오필리스관 개인실에 앉아 화장거울을 쳐다봤다.
3면 화장거울 크기가 클라리스의 몸집보다 크다. 거울로 카일리의 몸을 통째로 감싸안을 수 있을 지경이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환시 마법을 유지시켜주던 브로치도 내려놓았다.
밤색 머리칼의 색깔이 삽시간에 빠져나가고, 윤기 흐르는 은발 머리칼이 허리춤을 타고 내려온다.
불그스름한 눈동자와 전혀 매칭이 되지 않는 그 단아한 빛이 절로 신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묘하게 날카롭던 이목구비도 순하고 자애로워진 느낌이다.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오자 클라리스는 그제서야 편안히 휴식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몸은 편할지언정, 마음은 편하지가 않다.
프릴 장식이 잔뜩 달린, 으리으리한 크기의 침대에 드러누워서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 본다.
눈을 감으면 수십 번이나 반복해서 떠올렸던 며칠 전의 광경이 다시금 뇌리에 아로새겨진다.
사라진 브로치, 조금씩 풀려가는 환시 마법, 날아드는 불꽃 박쥐, 품속에 브로치를 챙겨넣어 주는 손놀림.
제단의 앞을 지키고 앉아 고고히 신입생들을 내려다보던 3학년 선배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으나, 일단 시험이 끝나고 나니 그 날카로운 분위기 또한 일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뒤따르는 것은 위화감이다.
타냐는 반쯤 공황상태였기 때문에 눈치 채지 못한 듯 하지만, 제 아무리 그래도 에드 로스테일러라면 위화감을 느꼈어야만 했다.
브로치가 있고 없고에 따라서 인상이 변하는 클라리스의 모습에 아무런 의문도 표하지 않는다.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설마 못 본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정도 거리에서 못볼 수가 있는가…는 차치해두고서라도. 그 뒤의 말실수도 너무 신경쓰인다.
누가 뭐라해도 가짜 신분인 카일리의 정체를 간파한 듯한 낌새에… 클라리스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이런 평범한 학사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
태생적으로 타고난 성법의 가호가 아니었으면 호위 인력을 최소화 시키자는 요구가 통과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굳이 마법 공부를 해야겠냐며 클라리스를 설득하려 드는 성도의 사제들과 몇날 며칠을 논쟁했던가.
대역을 구하기 위해서 들인 시간과 노력은 또 얼마나 컸는가.
그 모든 노력과 더불어서 내걸린 조건, 단 한명이라도 외부인에게 정체를 들키면 평범한 학사 생활을 관둬야 한다.
대주교의 말에 클라리스는 툴툴거리고 싶었지만, 신분과 직위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 나잇대 소녀라면 떼를 써볼만도 하건만, 클라리스는 이미 제 신분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었다.
‘…귀족이라기보다는… 마치 야만인 같았어…’
제 아무리 에드가 생활내음이 넘치는 스타일이라고 할지언정, 야만인이라는 표현은 너무 과한 것이다.
그러나 평생을 정돈된 환경에서 정갈한 몸가짐으로 살아온 소녀에게 에드라는 인간의 면모는 그야말로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 그 자체다.
정말로 클라리스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는 것인가.
애매모호한 상황을 버티기가 도저히 힘들어서 여러모로 수소문 해보았지만 별 소득이 없다.
성당 기사단의 비호를 제 스스로 무른 클라리스다. 클라리스가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의 수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 저녁 만찬이 되어서야 제대로된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 ‘반 배정 시험 때 제단까지 간 사람 있어? 거기에 있었던 금발 선배 말이야.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선배. 내가 누님한테 물어보니까, 글쎄 기숙사에 안 살고 쌩뚱맞게 북쪽 숲의 강 쪽에 산다지 뭐냐.’
– ‘뭐? 북쪽숲? 이 추운 겨울에?’
신입생 만찬회.
학기 시작을 앞두고, 1학년생들끼리 학생회관에 모여 앉아서 얼굴 도장을 찍는 자리.
클라리스는 가만히 앉아서 마법부 수석 요제프와 그 동료 에이그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 ‘아, 에이그 너는 중간에 탈락했다고 했냐? 크카칵. 잘난 체는 잔뜩 하더니만 제단 근처에도 못왔나 보구나.’
– ‘시, 시끄럽다. 나는 불의의 기습을 당했을 뿐이야. 입장 바꿔보면 너도 분명 탈락했을걸?’
– ‘핑계까지 추하다 에이그. 하여튼, 그 에드라는 선배, 3학년 선배님들 중에서도 아는 사람들끼리는 다 아는 모양인데, 괴짜 중의 괴짜라고 유명하댄다. 할 때는 하는 사람이라곤 하는데… 내가 봤을 땐 여간 평범한 인간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그 뒤로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담화가 몇 번씩 오가는 것을, 클라리스는 겨우 캐치해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성당기사단은 가짜 성녀를 호위하는 척 하고 있다. 클라리스를 따라다니는 성당기사단은 눈에 띄지 않게 숨은 최정예 2명 뿐이다.
그나마도 둘은 호위 인력이고, 무력이 강할 뿐이지 정보 수집에 능하지는 않다.
그렇다보니 클라리스는 눈과 귀가 가려진 듯 답답한 느낌에 빠져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다시금 만신창이 상태로 제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에드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등허리를 타고 소름이 한줄기 내달린다.
무서운 사람이다. 어지간하면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정말로 그 남자가 클라리스의 정체에 대해 눈치를 채고 있다면… 가만히 놔둬도 곤란하다.
당장에라도 그 남자를 만나서 떠보고, 만약 정말로 정체를 꿰고 있다면 대체 무슨 수로 알아챈 건지 캐내는 것이 좋다. 물론 입막음도 해둬야 했다.
그러나, 지금부터 최소 일주일 간은 이 오필리스관에서 나갈 수 없다.
그 남자는 북쪽 숲에 산다고 했는데, 눈폭풍이 몰아치는 이 시기에 대체 어떻게 버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외부를 자유롭게 노닐 수 있는 입장이다.
오필리스관에 꼼짝없이 갇혀있는 동안, 밖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그 남자가 입이 무거운지 아니면 헤픈지, 그조차도 클라리스는 알지 못한다.
물론 눈폭풍이 치는 이 시기에 나돌아다녀봤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겠냐만은… 클라리스는 그럼에도 불안감에 몸을 덜덜 떨었다.
눈폭풍이 끝나면 봄이 오고, 새학기가 시작한다. 그 때가 되어서야 입막음이든 뭐든 하려 했다간 너무 늦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금 뛰쳐나갈 수도 없다. 창문을 통해 나가 성마술로 예쁘게 착지하면 탈출할 수야 있겠지만… 학칙도 학칙이고, 자칫 잘못 했다가 눈폭풍에 휘말릴 수도 있다.
호위 기사들에게 대신 가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다. 호위기사의 귀에 클라리스의 정체가 들켰다는 소식이 들어가면, 성도에 보고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아무 의미가 없다.
“으읏…”
클라리스는 침대에 파묻힌 몸을 휙 하고 일으켰다.
어둑어둑한 창문을 내다보면 아직 눈발이 거세지는 않다.
성법의 가호와, 성마술. 그 둘의 힘을 다루는 클라리스는 무력에 의한 위협으로부터는 자유롭다. 그러나 혹한과 조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정체를 들킬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조난에 대한 공포보다 앞서고 만다. 조난이래봐야 아켄섬 내부에서 길을 잃는 수준일 가능성이 크다. 당장 추위를 피할 건물이나 시설들은 널리고 널렸다.
“그래…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클라리스는 창문을 휙하고 열었다.
-휘이이이이이잉!
매서운 칼바람이 뽀얀 볼을 베고 지나간다. 은발 머리칼이 바람을 타고 부챗살처럼 퍼져나갔다.
-철컥.
클라리스는 창문을 다시 닫았다.
무섭다.
너무 무섭다!
에드도 무섭고, 어둠도 무섭고, 혹한도 무섭고, 조난도 무섭다…!
– ‘순백색 벽과 천장만을 보고 살면 시력도 감퇴하기 마련. 총천연색으로 가득한 세상의 낭만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
그러나 이윽고 떠오르는 것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딛고 일어서 언제고 자유를 추구하던 낭만가 아델의 말이다.
성황도의 창가에 앉아 악기를 뜯던 그 음유시인의 노랫소리에 클라리스는 얼마나 감동했던가.
이 실베니아에 다니고 있을 아델을 아직 만나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 언젠가 클라리스의 눈을 초롱초롱하게 만들었던 그 낭만가의 목소리가… 겁먹은 클라리스의 등을 다시금 떠밀었다.
다시 창문을 열자, 칼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클라리스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주기적으로 메이드들이 외부 순찰을 돈다곤 하지만, 이 날씨에 빈틈없이 모든 구역을 다 마크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마침 정원으로 향하는 길이 비어있었다. 클라리스는 옷을 꽉꽉 껴입고, 브로치를 다시 착용한 채 이를 악물고 뛰어내렸다.
그 남자를 만나서, 사실 확인을 하러 간다.
눈폭풍이 끝나기를 마냥 기다렸다간… 너무 늦어버릴지도 모른다.
데미에서 살아남기-8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