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91)
학생회장 선거전 (4)
– 투두둑, 툭
똑같은 빗줄기라도 계절마다 느낌이 다르다.
봄비는 추적추적 지면을 다지는 느낌이다.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들이붓는 여름비와는 다르다.
여름의 비바람 속을 헤치고 나가면 물방울이 온몸을 두들기는 기분이 들지만, 봄비를 맞으며 걷노라면 몸을 꾹꾹 짓누르는 것 같아 오히려 차분해지는 것이다.
눅진한 습기는 소리에도 스며든다. 평소처럼 사박사박 풀숲은 헤치고 나가는 소리는 없다.
묽은 진흙을 밟아 쩌적하고 발이 떨어지는 소리, 얇은 물웅덩이에 차박대는 소리 따위만 숲에 가득하다.
[ 북쪽 해안까지 나가보는 건 처음이군요. 확실히 절벽지대는 넓기만 하지 황량하고 인적도 드물어서 별 볼일 없었죠! 멀기는 또 무척 멀고요! ]어깨에 앉아 크흠 거리며 목을 가다듬은 머그가 유일한 말상대였다.
[ 이 불초 머그가 과감히 말씀을 드려보건대, 중위 물 정령 레이시아님과의 계약은 탁월한 선택이셨다고 확신해볼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 레이시아님의 ‘수사(水獅)의 가호’는 제 화복의 가호와 달리 상황을 많이 타서 범용성은 떨어지지만, 일단 조건만 갖춰지면.. ]뭐든지 따박따박 설명해대는 머그랑 있다보면 소리가 비는 날이 없다. 뭐가 그렇게 자랑스러운지, 온갖 정령들에 대해서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모습은 이제 정이 들 지경이다.
나는 그렇게 머그와 대담을 주고받으며 북쪽 방향으로 쭉쭉 나아갔다.
북쪽숲의 크기는 결코 작다 할 수 없다. 1년이나 이 숲에 살았건만 아직도 영 익숙치 않은 길이 남아있을 정도다. 항상 다니는 길로만 다니는 탓도 좀 있겠지만.
“여긴 대충 이런 식으로 되어있구나.”
북쪽 끄트머리, 절벽지대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을 걸어야만 했다.
기본적으로 아켄섬은 남쪽으로 갈수록 번화하다.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주요 시설들이 전부 남쪽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대륙의 노파렌 반도로 이어지는 두 다리가 남쪽에 나있으니까.
중간 부분만 넘어가도 인적 드문 야생의 숲이 대부분이고, 북쪽 끝에 도달하고 나면 이제 실베니아 아카데미와는 전혀 상관없는 세상이 펼쳐져 있는 느낌인 것이다.
내가 계약한 레이시아 뿐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물 정령은 주변의 수분 자체에 굉장히 큰 영향을 받는다.
썩어도 준치라고, 일단은 중위 정령이기 때문에 수분이 아예 없는 황량한 지대에서도 하위 정령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하긴 한다. 그래도 진가는 수분이 가득한 환경에서야 드러난다.
비가 쏟아지는 해안가. 물 정령을 다루기에는 이만큼 완벽한 환경이 없다.
이렇게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갖추고 나면 고위 정령에 준하는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는데, 솔직히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마력량이 감당 되지도 않을테고.
나는 챙겨왔던 활을 꺼내들었다.
오랜 시간동안 꽤 공들여서 가다듬어온 곡궁이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만들어온 놈들 중 가장 제대로 된 놈이었다.
파도치는 바다를 향해 활시위를 당겨보았다. 손에 마력을 휘감자, 내 감응력이 이끌어낸 마력 화살이 은은한 빛을 내며 생성되었다.
단순한 마력화살이 아니다. 물의 기운이 서린 마력 화살은, 적을 꿰뚫어서 피해를 주는 일차원적인 공격수단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흐음… 마력 자체는 크게 소모되지 않는데, 일단 발사해서 발동 시키고 나면 또 다를까…”
[ 여기까지 직접적으로 드는 마나량은 마력 화살을 생성해낼 때 드는 극소량 뿐입니다만, 정령식을 발동시킨다면 또 이야기가 다르겠습니다. ]“일단 활용해봐야지 감이 오겠는데.”
[ 그렇다고 해서 난사할 수도 없을테지요. 에드 도련님의 절대적인 마나량은 굉장히 많이 성장하셨습니다만, 부족한 정령 감응 때문에 발생하는 비효율적인 마력 상실분을 상쇄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닐테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단 정령식을 해제했다. 정령식 활용은 정령 마법 중에서도 꽤 깊은 응용 분야다. 일단은 정령 현현 자체에 익숙해진 다음에 생각해볼 일인 것이다.
이렇게 비가 내리고, 해안가엔 파도가 치고 있다. 물 정령을 효율적으로 다루기에는 이만한 환경이 또 없다.
그리 생각하며 마력을 한 번 끌어모으려는 순간.
“오랜만에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에드 도련님.”
.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 쳐다보았다.
우중충한 로브를 뒤집어쓴 두 명의 사내가 어느샌가 자리잡고 있었다.
4막 최종장, 크레핀 토벌전의 3페이즈 중간 보스.
로스테일러 가문의 어둠을 담당하는 가신들.
봉토를 약속 받고 크레핀에게 충성을 맹세한 두 기사, 카덱과 녹스였다.
*
카덱과 녹스는 일생동안 로스테일러 가문의 역사를 함께한 노장이다.
빗줄기를 흘려내기 위한 로브 아래로, 호리호리한 체구에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고 펑퍼짐한 넥타이를 맨 카덱의 모습이 보인다. 녹스와는 비슷한 연배지만 훨씬 더 말끔한 모습이다.
반면에 잘 깎인 수염과 더불어 꽤나 듬직한 풍채를 지닌 녹스는 훨씬 털털해보인다.
각진 턱과 더불어 정돈된 복장 위로 드러나는 위압감 넘치는 근육의 테는 절대로 쉬이 여길 상대가 아님을 방증해준다.
산전수전 다 겪은 크레핀의 일등 심복이 둘이나 아켄섬에 들어와 있다. 이 시점에서 이상을 감지해야만 했다.
“반가워야할 얼굴들이지만, 썩 반갑진 않군.”
두 기사가 바라본 곳은 절벽의 끄트머리.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줄기를 맞고 서있던 금발의 소년이다. 한 손에는 각궁을 들고 있다.
상반신을 두 기사쪽으로 돌렸다. 비바다를 뒤로한 모습. 빗줄기에 눌린 머리칼 사이로 두 눈동자의 빛이 기사들을 향한다. 바닥을 겨누고 있는 각궁은 제법 커서 어지간한 사람의 상반신만하다.
“파문당한 신분인데 꼬박꼬박 도련님이라고 불러주니, 이 쪽에서 오히려 감사할 일인가.”
그는 이미 카덱과 녹스에 대해서는 충분하리만치 잘 알고 있는 입장이다.
4막 최종장의 중간보스들. 독수리 기사 카덱, 불곰 기사 녹스. 둘 모두 쉽지는 않은 상대였다.
“에드 도련님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거기서 무릎을 꿇은 것은 카덱이었다.
“파문 당한 뒤로 많은 일이 있으셨고, 그 와중에도 꿋꿋이 제 본분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계시다는 것도 모두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에드 도련님. 저희는…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듬직한 체구의 녹스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가감 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들은… 로스테일러 저택에서 보았던 에드 도련님의 모습에 큰 반감을 느끼고 살았습니다. 지금 이 자리를 빌어 회개하건대, 에드 도련님의 파문은 정당한 것이었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중후한 목소리에는 나름 진정성이 서려있었다.
“그러나, 이 아켄섬까지 와서 에드 도련님의 삶에 대해 반추해보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녹스는 품속에서 단검이 들어가있는 가죽 주머니를 하나 꺼내 풀밭 위에 올려놓았다.
“저희는 크레핀님의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 에드 도련님을 실베니아 아카데미에서 어떻게든 배제할 것이며, 기회가 된다면 암살을 지시하시어 극독의 각인이 걸린 단검까지 받아왔지요.”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에서 무릎을 꿇은 두 기사가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에드 도련님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했습니다. 유년시절의 촉기 어린 모습도 귀신처럼 사라지고,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양 저택에 군림하는 모습은… 필시 에드 도련님의 본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저희는 이제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에드 도련님이야말로, 진정으로 후계자에 어울리시던 바로 그 모습 자체라는 것을.”
아켄섬 내부에 도는 에드에 대한 여러 소문, 평가들. 그런 것들이 두 기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담담히 고개를 숙이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모습에는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부디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리시어, 다시금 로스테일러의 명예를 세상에 드높이게끔 길을 개척해주십시오.”
“저희 가신들은… 어디까지고 따라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모든 자초지종은 크레핀님께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그대로 두 기사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에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몇 걸음 앞으로 걸어나온 에드는, 고개 숙인 두 기사를 내려다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는 이야기했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성장하셨군요, 에드 도련님.”
날아온 바람의 검격은 독수리 기사 카덱의 것이다. 재빨리 몸을 휘어꺾어 피하고는 진흙바닥을 크게 한 번 굴렀다.
금방 자세를 고쳐잡은 카덱이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거리의 개념을 무색하게 만드는 저 바람의 검격은 기사가 아니라 마법사를 상대한다는 마인드로 대처해야만 한다.
허나 불합리한 점이 있다. 카덱은 마법사와 달리 근접전에도 능하다는 것이다.
“크하압!”
불곰 기사 녹스의 외침에 빗줄기 사이로 파동이 퍼져나간다. 순식간에 그의 주변으로 피어오른 불꽃은 비에 묻혀 사그라 들었지만, 마법이 서린 그의 메이스는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 에드는 얼른 활 시위를 잡아 당겼다. 방금 전까지 서있던 자리에 육중한 메이스가 꽂혔다.
궁지에 몰린 자는 한줄기 희망에도 온 신경이 분산되기 마련이다.
이런 야생 생활을 1년씩이나 영위해온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귀족으로서 복권할 수 있다는 미끼는 얼마나 강력하고도 유혹적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기사의 말이 끝나기 전까지 에드는 전투 태세를 풀지 않았다. 두 기사에게는 그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게 확실히 느껴졌다.
지난 1년간 결코 쉽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제 딸 멜리아나를 기억하십니까? 에드 도련님의 한낱 유희에 한 쪽 시력을 잃은 불쌍한 아이 말입니다.”
거리를 벌린 에드는 빗줄기 사이에서 옷깃을 털며 잠시간 녹스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하…”
굳게 쥔 주먹을 허공에 내지르자, 순식간에 한줄기 화염이 방사된다. 재빠르게 반응한 에드는 기초 방어 마법을 이용해 화염을 전부 무력화시켰다.
“확실히 안일했군요. 제 딸의 눈을 앗아간 원수를 상대로 다시금 충성심을 불태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다는 건… 에드 도련님도 잘 알고 있을테니 말입니다. 이런 거짓부렁에 속아 넘어갈 리가 없을테지요.”
녹스는 다시금 메이스를 집어들고 이를 간 채 자세를 잡았다.
“복수는 허무한 법이다. 녹스.”
“알고 있습니다. 복수는 끝나고 난 뒤 끝없는 공허함만을 남기지요. 허나, 딸을 해코지한 에드 도련님한테 들을 이야기는 아닙니다.”
“…타당한 말이군.”
녹스가 땅을 박차고 도약하자, 에드는 자세를 숙이며 허벅지춤에서 단검을 꺼내들어 땅에 박았다. 그와중에 카덱의 마력이 담긴 검격이 에드를 습격했다.
카덱과 녹스. 두 기사의 공격패턴은 정해져 있었다. 전위를 맡는 녹스는 불마법이 서린 메이스를 휘두른다. 휘두를 때마다 화염이 뿜어져 나오므로 사거리는 좀 더 넉넉히 잡고 회피해야만 했다.
카덱은 근거리와 중거리를 오가며 끊임없이 견제를 넣는다. 단 한 대라도 맞으면 후속타까지 전부 허용하게 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화르륵!
휘두른 메이스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이 에드의 머리칼 몇 가닥을 그을렸다.
뒤로 몇 번 구르며 회피해 보았지만, 이제 에드의 뒤편에는 끝없는 낭떠러지 뿐이었다.
녹스에게는 일격이라도 허용하면 그대로 즉사다. 메이스의 질량도 그렇고, 화염의 세기도 그렇다. 허나 전투 구도 자체로 보았을 때는 카덱의 검격이 훨씬 더 까다롭다.
생사의 경계에서 외줄을 타는 감각. 절로 등줄기를 싸늘하게 만든다.
그러나, 낭떠러지 근처까지 밀린 전선은 에드의 노림수다.
– 화악!
아무리 둔탁한 움직임의 메이스라도 영원히 피할 순 없다. 지금까지 회피한 게 요행에 가까운 일이다. 이 구도가 유지되면 반드시 적의 공격을 허용하게 된다.
더 이상 회피할 동선이 없다는 걸 깨달은 녹스가 마지막 일격을 휘두르지만, 에드가 손을 내밀자 녹스의 등에서 한줄기 선혈이 튀었다.
“뭣…?”
정보 우위는 에드의 전투 방식에 있어서 핵심 요소다.
에드는 녹스와 카덱의 스펙과, 전투 구도를 잡는 형식, 공격 수단 따위를 전부 읊을 수 있지만, 카덱과 녹스는 에드가 어떤 성장을 해왔는지 전혀 모른다.
그런 정보의 비대칭성이야말로 부족한 스펙을 매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녹스의 등에는 방금 땅에 꽂은 단검이 날아와 박혀있었다.
“여… 염동 마법…? 그럴 리가…”
염동 마법이 아니라 정령식이었다. 조용한 곳에서 천천히 고민해보면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겠지만, 급박한 전투 상황에서 거기까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 콰아앙!!
폭발 마법이 한차례 낭떠러지의 끝을 감쌌다. 화복의 가호로 몸을 감싼 에드는 그 피해로부터 자유로웠다.
“녹스!”
-화아아악!!
쉴 틈은 없다.
연기 사이를 비집고 마력화살이 날아와 카덱의 다리 근처에 박혔다.
“크읏!”
초인에 가까운 반사신경으로 화살을 회피하고서는, 카덱은 잠시 고민하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로 사정없이 바람의 검격을 날렸다.
녹스가 피격당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에드를 완전히 제압하는 것이다.
그간 얼마나 궁지에 몰린 삶을 살았는지 모르겠으나, 확실히 로스테일러 저택에서 망나니 같은 삶을 살 때에 비하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이 분명해 보인다.
방심은 기사의 숙적이다. 설령 녹스가 공격에 휘말리는 일이 있더라도, 녹스 본인 또한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이해할 것이다. 오랜 시간 함께 검을 맞대온 둘 사이에 그 정도의 교감은 직접적인 의논 없이도 가능했다.
회피할 동선은 없다. 반드시 맞는다. 문제는 얼마나 적을 무력화시키냐에 있다.
불어치는 바람이 자욱한 연기를 날려보내고, 몸 여기저기에 자상이 나있는 에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자세에는 변함이 없다. 신체 부위가 절단될 정도의 검격이 아니라면 그냥 악으로 버텨내겠다는 마인드다.
칼에 베이는 고통은 상처의 깊이와는 상관없이 인간의 평정심을 무너뜨리는 힘이 있다. 급소를 맞지 않는 한 일격에 제압당하진 않는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정신에 큰 부하가 오는 게 보통이다.
애초에 상처 자체도 얕다고 할 수준은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에드의 자세는 어떻게든 무너지지 않았다.
그대로 에드는 여지없이 화살을 쏘아댔다. 허나 반사신경을 타고난 카덱은 열심히 칼을 놀려서 화살을 전부 튕겨내버렸다.
그래도 녹스가 무력화된 시점에서 결정타를 넣기가 애매하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에드 로스테일러를 상대로는 근접전이 최고다. 원거리 견제에 능한 카덱일지라도, 일단은 가까이 붙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전투 구도를 다시금 재정립하게 만드는 변수가 카덱의 눈에 드러났다.
– 후우우욱
드러난 연기 사이로 쓰러진 녹스의 모습이 보인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듯 보이지만…
‘녹스… 네 녀석…!’
녹스는 나름대로 백전노장이다.
제압당한 것이 아니라, 제압당한 ‘척’을 하고 있다…!
이제 남은 상대가 카덱밖에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
에드에게는 녹스를 확인 사살할 여유가 남아있지 않다. 당장 카덱의 움직임이 너무 압박이기 때문이다.
카덱은 재빨리 녹스의 의도를 눈치챘다. 카덱이 할 일은 어렵지 않다. 녹스가 일격을 날릴 틈을 만들어주기만 하면 될 뿐이다.
그리 생각하며 카덱은 다시금 거리를 조절하기 위해 뒷걸음질 쳤지만── ‘물 웅덩이’에 발목이 잡아먹히고 만다.
“….뭣…”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에서 자신의 왼 발목을 내려다 본다.
방금 빗나가서 바닥에 박힌 화살. 물의 기운이 서린 그 마력화살은… 적을 꿰뚫기 위한 용도가 아니다.
정령식 ‘수원 발현’이 각인된 마력화살은 비어있는 땅에 커다란 물 웅덩이를 만들어 낸다.
마력으로 발현된 수원은… 물 정령이 노니는 또 하나의 전장이 되는 것이다.
기습 전략은 상대의 시야 밖에서 예상치 못하게 사용되어야 의미 있다.
빗나간 화살은 완전히 상대의 의식 밖으로 밀려나가기 마련이다. 사실은 그 화살이 기습을 위한 발판이었단 사실은 쉽게 눈치채기 힘들다.
물에 잠긴 왼발을 기준으로 조금씩 시야를 위로 올려보면, 꽤 커다란 물 웅덩이가 카덱의 뒤편으로 널찍하게 펼쳐져있다. 그리고, ‘물 속에서’ 중위 물 정령, 암사자 레이시아가 튀어나와 카덱의 목덜미를 물어버린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카덱은 그대로 물 웅덩이 위를 굴렀다. 당연하지만 호흡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기도와 식도에 물이 들어오고, 자기 몸을 짓누르는 사자의 무게에 저항할 힘이 조금씩 빠져나간다.
‘수…. 숨이…!’
한창을 물웅덩이 속에서 발버둥 치다… 이윽고, 카덱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전투의 끝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줄 알았던 녹스가 에드의 등 뒤에서 순식간에 몸을 일으킨다.
그만한 규모의 폭발 사이에서, 마법의 보호조차 받지 못했던 신체다. 온 몸에 화상이 가득하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챙겨든 단검을 에드에게로 향한다.
속도는 빠르다 못해 눈으로 쫓기도 힘들 수준이다. 에드의 등에 나이프가 꽂히기 직전, 녹스는 승리를 확신했다.
– 화아아아악!
그러나, 불어닥친 바람이 순식간에 녹스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다시 절벽 너머로 날려버린다.
– 카강!
단검이 바닥을 굴렀다.
고위 바람 정령의 상시 발동 스킬, ‘풍랑의 가호’. 일정 시간에 한 번씩, 의식 밖의 물리적 공격을 차단해주는 방어 마법이었다.
마지막 일격조차 방어 당한 녹스에게는 더 이상 전투 수단이 남아있질 않았다.
물로 이루어진 암사자 한 마리가 웅덩이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에드의 뒤에 바로 섰다. 어깨 언저리의 박쥐는 여전히 활활 불타고 있고, 가로로 쥔 활은 흠집 하나 생겨있지 않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에드의 눈빛에 녹스는 그만 마른침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에드는 그렇게 녹스에게 차분히 다가갔다.
죽음이 온다. 모든 죽음이 으레 그러하듯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만신창이가 된 녹스 앞에 도달한 에드는, 별 말 없이 한동안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생각을 정리하는 듯 차분한 표정이었다.
녹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격에 끝내달라는 말은 사치입니까?”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예?”
에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는 비오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허무해졌다. 이런 삶도, 비루하게 버텨가는 인생도.”
정령들이 역소환되어 사라지고, 손에 들고 있던 활도 주변에 대충 던져 놓았다.
“아버님께서는 날 죽이기로 결심하신 모양이지. 그렇다면, 나는 언젠가 반드시 죽게되어 있다. 아버님은 인과의 규칙조차도 자기 편으로 만드는 사람이니까.”
“그건…”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너희들을 끝장 내더라도 이 굴레는 끝이 나질 않는다는 이야기다. 언젠가는 더 장대하고,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어떻게든 나를 죽이려 드시겠지. 한 번 그렇게 마음을 먹으셨다면… 어지간해선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시니까.”
그렇게 말하고선, 에드는 녹스가 떨어트렸던 단검을 집어들었다. 단검의 표면엔 극독의 저주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섬뜩한 문양이 서린 이 검은 단 한 번에 한해서, 스치기만 해도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필살의 저주가 된다.
“썩 좋은 인생은 아니었어. 내가 얼마나 치졸하고 추잡하게 살아남아 왔는지…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너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겠지, 녹스. 귀족의 기품? 혈통의 품위? 그런 건… 나무 껍질을 삶아먹고 멧돼지 시체를 뜯을 때 모두 버렸다.”
“…”
올려다 본 먹구름은 짙다. 그것은 마치 에드 로스테일러가 거쳐온 인생이다.
“죽음으로 죗값을 치른다는 둥 그런 비겁한 도피는 안한다. 나는 그 정도로 착한 인간도 못되고, 무엇보다 별 의미도 없는 짓이지. 다만, 로스테일러 가에 몸담으며 일생을 바쳐 준 너 같은 충신에게… 마지막으로 줄 선물 정도는 되겠지.”
그 뒤 에드가 한 행동을 보고 녹스는 두 눈을 의심했다. 그대로 단검을 던져서 녹스에게 건네준 것이다.
녹스의 발 언저리까지 굴러 온 저주의 단검. 윤기 흐르는 손잡이가 날 쥐라고 외치는 듯 하다.
“말했듯, 복수는 허무함만 남기지만… 아예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 이렇게 복수를 마무리 지으면 네 삶의 큰 숙원 중 하나를 매듭지은 기분은 들테니까.”
그리고 에드 로스테일러는 무방비하게 양팔을 들어보이는 것이었다.
“찔러라. 가문마저 나의 삶을 부정한다면, 난 이제 이렇게 비참하게 더 살고 싶은 맘이 없다.”
비 내리는 절벽.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선 녹스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에드를 마주선다.
이것조차 함정인가 싶어서 녹스는 끊임없이 의심했지만, 완전히 전투불능이 된 녹스를 상대로 여기서 더 함정을 파놓을 이유가 없다.
순간적으로 이를 악문 녹스가 앞으로 달려든다.
파묻힌 칼의 서슬퍼런 날을 타고 한줄기 선혈이 흐른다.
선혈이 피어오른 것은 에드의 입가 또한 마찬 가지다.
“쿠윽… 컥…!”
피가래가 끓었다. 알싸한 쇠맛이었다.
“커.. 어..흑… 크큭…”
“이… 이게… 무슨…”
녹스는 에드의 신음성 뒤로 아련한 웃음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죽음의 순간에도 끝끝내 이성을 잃지 않는 모습에, 그만 아득한 공포를 느끼고 말았다.
단검의 저주가 에드 로스테일러의 몸에 각인된다. 피부를 타고 저주식이 피어오르고, 극독의 고통이 그를 엄습하는 가운데… 천천히 고개를 들어 녹스를 바라본 에드는 말했다.
“그래.. 축하한다.”
피범벅이 된 상태로 웃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드디어… 복수했구나.”
그 모습에…. 녹스는 식은땀이 돋아 얼른 칼을 뽑고 에드를 발로 밀어내버렸다.
비틀거리던 에드는 절벽 끄트머리까지 밀려나더니…. 이윽고 아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꺄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대기를 갈랐다.
북쪽 절벽지대는 아켄섬에서도 가장 외진 곳이다. 그렇기에 에드를 미행하던 두 기사가 망설임 없이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곳까지 학생이 와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기에, 녹스는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벼락이 한차례 하늘을 갈랐다.
비명을 지른 소녀가 공터를 가로질러 절벽까지 왔다. 녹스는 더 이상 그 소녀를 제지할 힘이 남아있질 않았다.
“에드, 에드…! 에드!”
소녀가 챙겨온 바구니가 바닥을 굴렀다. 여러 간식거리들이 안에서 쏟아져나와 비에 젖었다.
절박하게 뛰어와, 바닥에 주저 앉은 채 절벽을 내려다보지만… 절벽 너머 어둠의 끝이 보이질 않는다.
“이… 이건…!”
녹스는 뭐라 말을 더 이어보려했지만,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후들거리던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고 말았다.
몇 분이나 되는 시간이 흘렀을까.
그렇게 한참을 주저앉아 있던 소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절벽 끄트머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에 젖은 꼴로, 녹스를 향해 고개를 돌린 소녀의 모습에는… 알 수 없는 귀기가 서려있다.
“너… 너는…”
피어오르는 마력이 대기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소녀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녹스는 직감할 수 있었다. 마력의 양만 대충 가늠해 보아도… 녹스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