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95)
학생회장 선거전 (8)
– 타닥, 타닥.
라멜른 산맥지대의 오두막에선 언제나 장작 타는 소리가 났다.
부슬부슬한 이불을 콧잔등 아래까지 밀어올린다.
항상 주변 어딘가에 널브러져서 잠들던 루시다. 침구류 같은 것을 몸에 두르는 일도 잘 없다.
허나 이례적으로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있는 이런 상황은, 몸살 감기에 걸렸기 때문이다.
훗날 뛰어난 마법의 귀재가 될 숙명을 타고 났지만, 지금에서야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일 뿐이다.
그 나잇대의 소녀가 다 그렇다.
비가 내리거든 오두막 구석에 박혀 있으면 될 일이건만, 공연히 산맥을 쏘다니다 감기에 걸리는 일도 부지기수다.
말도 안되는 속도로 불어나는 마법 실력도 아직은 과도기인지라, 주변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제 몸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타닥대는 모닥불을 부지깽이로 이리저리 들쑤시고 있는 늙은이가 있었다.
시야에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허나 구부러진 등허리와 말려들어간 어깨만 보아도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왜소한 노인 그 자체다.
전성기가 분명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루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대륙을 쏘다니며 온갖 고위 마법을 연구하고, 수많은 제자들을 들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족을 꾸렸고, 학술계에서 이름을 날리기도 하다가, 고위 마물족 토벌의 일등공신이 되기도 하고, 황실의 치하도 몇 번인가 받았다고 한다.
탁 펼쳐진 대로를 전력으로 질주해온 인생이라고 한다.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온만큼 누구보다도 많은 성취를 일궈낸 삶이라 스스로를 평한다.
그러나, 그 대마법사의 말년은 이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산맥지대의 끄트머리에서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일을 겪었던 건지.
수 많은 제자도, 사랑하는 가족들조차도 옆에 없고… 홀로 오두막에서 모닥불이나 쑤시고 있는 모습.
그에게 남은 인연이라곤… 제자라고 부르기도 뭣한 소녀 하나 뿐이었다.
– ‘원래 비맞고 나뒹굴다보면 아프기도 하고 그런 거란다.’
– ‘너는 필시 얼마가지 않아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한 마법사가 되겠지.’
– ‘아프다는 느낌 또한 머나먼 옛날에나 느껴보았던 아득한 기억이 될 때가 분명 올 것이고.’
– ‘이렇게 몸살이 나서 드러누워 보거나, 몸에 직접적으로 상처를 입어보거나 하는 일도 점점 더 드물어질 거란다.’
어리숙한 루시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얼마나 깊게 이해할지는 미지수다.
그래도 글록트는 말하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었다.
– ‘타고난 능력 탓에 삶이 무료해지거나, 만사가 의미 없어보이고,’
– ‘부족한 사람들… 네가 너무나도 쉽고 간단히 해내는 일들에 평생을 바치는 자들도 발바닥에 채일 정도로 잔뜩 만나겠지.’
– ‘그러니까, 지금 그 느낌을 꼭 간직하거라.’
아프다는 감각조차, 먼 과거에나 느껴보았던 아득한 기억이 되는 날이 반드시 온다.
그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지금의 루시에게 알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적어도 글록트가 뭔가를 전달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이미 그 기억조차도, 먼 과거속에 퇴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쏴아아
봄비가 피부를 때린다.
오필리스관의 장미정원을 가로지르면, 시간 감옥에 갇힌 채 완전히 굳어버린 메이드들과 학생들이 석상처럼 도열해있다.
휘청거리며 그 사이를 걷는 루시는 모자를 꾸욱 눌러쥔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무겁게 몸을 누른다.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루시는 나태한 품성을 타고났음에도 삶에 열의를 지닌 자들을 존중하고 인정한다. 구태여 티를 내거나 돕지 않을 뿐이지, 범인들을 깔보거나 무의미한 존재로 폄하하는 일은 절대 없다.
더 말할 것도 없이 글록트의 영향이다.
반쯤 뜬 멍한 눈으로 라멜른 산맥지대를 거닐면서 살다보면, 그 늙은이가 삶에 가진 열의를 두눈으로 똑바로 지켜보고 살 수 밖에 없다.
긴 생애 동안 쌓아온 모든 업적들을 내려놓고, 왜소하고 추레한 노인이 되어 산 중에 홀로 남겨졌음에도 매일을 가치있게 살고자 노력해가던 자다.
정신을 차려보니 에드에게 호의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도, 궁지에 몰려서도 꿋꿋이 삶을 부여잡고 나아가던 모습을 내심 인정했기 때문일 터.
적어도 그는, 이리 허무하게 죽을만한 남자는 아니었다.
“…거짓말쟁이 영감탱이.”
언젠가 강대한 마법사가 되면 아프고 힘들다는 감정 또한 먼 과거의 잊혀진 기억이 되리라고 했었나.
허나 가슴께에 비릿하게 올라오는 것은 잊고 살았던 ‘통증’이다.
잃고 나서야 더 크게 다가오는 소중함이야말로 진짜로 가치있는 것이다.
루시는 이미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두 번은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모닥불에 두런두런 둘러앉아서 구운 생선을 쩝쩝대던 시간들이나, 책을 읽는 에드의 무릎 위에 드러누워서 멍하니 하늘이나 쳐다보던 때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었다.
허나 그런 것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을 터다.
사람이란 생물은 얼마나 유약한가.
온갖 고위 마법을 수족처럼 다루고, 역사적 천재들조차 고개를 가로저을 정도로 막대한 재능을 타고난 자신이지만…
그저 사람 하나 죽은 것 만으로도 이리 쓰라리고 아플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 콰앙!
그 때, 오필리스관 정문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나가던 루시의 발밑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엄청난 연기가 피어오르고, 뜨거운 열기가 일대를 덮었으나, 루시는 손을 한 번 휘젓는 것 만으로 모든 여파를 날려버렸다.
“나름대로 회심의 한 수 였는데.”
루시가 오필리스관 정문까지 걸어오는 것만으로도 어떤 자들을 제압했는가.
오필리스관 메이드장 벨 마이아, 4학년 마법부 수석 페트리시아나 블룸리버, 4학년 연금부 수석 도로시 화이트펠츠, 3학년 전투부 수석 드레이크 레이거스, 선임 메이드 14명까지.
생채기 하나 없는 몸으로 그 정도 전력을 혼자 상대했다면, 적어도 이 오필리스관 내부에는 이 루시를 막아설 수 있는 자는 없다.
지금 루시를 막아선 소녀 또한 승기 따윈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테다.
2학년 연금부 수석, 참견쟁이 엘비라.
온갖 마공학용품과 연금술 시약, 기초 마법술로 무장한 그녀는… 애초에 실전 전투 능력은 다른 수석 학생들에 비해서 엄청나게 뛰어나지도 않다.
“좀 더 이성적인 사람일 줄 알았는데, 루시 .”
“…”
차갑게 식은 루시의 두 눈동자가 입구를 지키고 서있는 엘비라를 가만히 바라본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어느 정도는 이성을 유지하고 있지?”
오필리스관 상공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마력구, 시간 감옥에 갇혀 모조리 제압당한 메이드들, 루시가 부여한 마법식으로 가득한 장미정원.
말도 안되는 깽판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루시의 폭주에는 분명한 ‘선’이 존재하고 있었다.
불필요한 파괴 행위도 어느 정도 억제되어 있고, 인명 피해도 물론 없다. 정말로 이성을 잃는다면 오필리스관을 때려부술 용의도 있어보이긴 하지만, 그건 역시나 최후의 수로 남겨두고 있을 뿐이다.
오필리스관 학생들은 한창 탈출에 여념이 없다. 말단 메이드들이 중심이 되어 뒷문을 통해 뛰쳐나가고 있다.
엘비라는… 잠시라도 루시의 발을 묶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비켜.”
그러나, 그 조차도 오만이었을까.
마치 숲속에서 시야를 가리는 나뭇잎을 치우기라도 하는 듯이, 팔을 한 번 휙 내젓는 행동일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엘비라는 도저히 감당할 수도 없는 수준의 양의 마력이 몸에 부딪혀 왔다.
마법도 아니다. 단순히 마력을 구현화해 밀어붙이는 물리력에 지나지 않는다.
허나 엘비라의 몸은 그대로 화단 쪽에 내다 꽂혔다.
“어, 흑!”
힘의 차이는 충분하리만치 잘 인식하고 있었다.
엘비라의 진짜 목적은 정문 근처에 설치해둔 마공학용품이었다.
찰칵 소리와 함께 마력이 피어오르더니, 입구 쪽 기둥 뒤에 숨겨진 공간에서 마력들이 피어오른다.
단순한 힘으로는 루시를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상성과 법칙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제 아무리 강대한 힘을 타고난 루시라 할지라도 세상의 섭리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비가오면 젖고, 바람이 불면 옷깃이 휘날린다. 기온이 내려가면 춥고, 끓는 물은 이윽고 증발한다.
세상의 기초를 이루는 그런 섭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신 뿐이다. 섭리를 비틀어 꺾는 성위 마법이라 할지라도, 마력의 기초 원리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지 않는가.
그렇기에 엘비라는 마력을 통째로 ‘증발’ 시켜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입구 쪽 기둥 뒤편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제서야 엘비라가 가져온 온갖 마공학용품들이 루시의 눈에 들어왔다. 비밀 연구실에서 커다란 배낭을 꽉꽉 챙겨서 가져온 물건들이었다.
얼추 수십개는 되어 보인다. 하나하나 그 이름을 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정도로 막대한 양이다.
“흐읍!”
나가떨어진 엘비라가 입가를 스윽 닦으며 일어서고는, 미약한 마력을 통째로 모아서 새로운 마법을 발현시켰다.
루시 방향으로 손을 들어올리고 꽉 움켜쥐자, 설치해둔 갖가지 마공학용품들이 한 번에 폭주하기 시작한다.
크렉스 마력 분리기, 소음 발생기, 원소 회귀 자극기, 갈퀴손, 파동구, 환영 원반, 카틀란 마력 정화기….
실베니아에 입학한 뒤로 매 시간을 쪼개가며 연구해왔던 갖가지 마공학용품들, 그야말로 엘비라의 학사 생활의 정수라고도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온갖 마공학용품들은 제각기 그 용도가 다르다. 이 상황에 딱히 어울리지도, 애초에 전투용 마공학용품이 아닌 것들도 잔뜩 있었다.
그러나, 엘비라는 그 용도대로 마공학용품을 ‘활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모두 제 피붙이 같은 소중한 발명품들이지만… 엘비라는 망설임 없이 제일 앞에 있는 ‘크렉스 마력 분리기’를 폭주시켰다.
마법의 분파 중 하나인 연금술은 마력 그 자체의 성질을 학술적으로 분석하는 데에 특화된 학문이다.
타고난 감응력만으로 마력을 휘두르는 마법사들과는 궤를 달리 하는 ‘마력에 대한 이해’. 연금부 수석인 엘비라의 전문 분야라고도 할 수 있었다.
“어디… 이것도 뚫어 보든가…!”
엘비라가 품 속에서 ‘진홍 수정 시약’을 꺼내들어서 집어던졌다.
재빨리 반응한 루시가 손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시약병을 허공에서 터뜨려버렸지만, 애초에 시약을 뿌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엘비라는 재빨리 화단 뒤편에서 튀어나왔다.
– 쿠구궁, 쿵! 쿵!
진홍 수정 시약은 일시적으로 마력 자체의 유동성을 증대시켜주는 윤활유 같은 존재다.
마공학용품의 발동에는 당연히 마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신의 마력을 특정 물건에 주입시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간단한 구조의 마공학용품은 마력을 그렇게 많이 잡아먹진 않지만, 구조가 복잡하고 어려워질수록 상당한 양의 마력을 잡아먹는 것이다.
진홍 수정 시약의 원래 목적은 그런 마공학용품을 사용하기 위한 마력의 흐름 자체를 조금 더 민감하게 바꾸는 것에 있다.
같은 마력량이라도, 진홍 수정 시약의 영향을 받고 있다면 더 원활하게 마공학용품에 주입할 수 있게 된다.
일종의 보조 시약에 불과하지만, 연금술사들에겐 나름대로 유용한 물건이다.
물론, 지금 엘비라가 진홍 수정 시약을 던진 의도는 완전히 달랐다.
– 쿠궁, 쿠궁, 쿠궁!
폭주한 ‘크렉스 마력 분리기’가 주변 일대의 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주변으로부터 마력을 흡수해서, 연결된 마공학 용품에 효율적으로 마력을 제공하는 ‘회로’역할을 하는 장치다.
그러나, 과부하해서 폭주해 버리면, 주변 마력을 닥치는대로 잡아먹어버리는 괴물이 된다.
연결된 마공학용품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되면 그 폭주도 멈추게 되겠지만, 문제는 마력 분리기에 연결된 마공학용품들은 엘비라가 거진 평생을 바쳐 만들어온 모든 마공학용품들이 전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촉박해서 제대로 마력 효율을 계산해가며 연결하지도 못했다. 대충 우격다짐으로 회로를 밀어넣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거면 됐다. 애초에 ‘정상적인 작동’은 엘비라의 목적이 아니다.
진짜 목적은 마력을 흡수하는 것 그 자체에 있다.
진홍 수정 시약에 의해 윤활된 루시의 마력은, 어떻게 걷잡아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마공학용품들에게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마력 분리기를 중심으로 갖가지 마공학 용품들이 모두 폭주하기 시작한다.
폭발하고, 환영을 만들어 내고, 큰 소음을 내며 장미정원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온갖 조명들이 밝게 빛나며, 연기를 내뿜고, 마력을 발산해대는 모습은… 흡사 거대한 마력 공장과도 같다.
아무렇게나 엉망진창으로 회로를 연결한 마공학 용품이다. 마력 효율은 거의 바닥에 가깝다.
제 아무리 천재 마법사라고 할지라도, 그 정도 수준의 마력량을 혼자서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마법의 위력으로 승부할 수 없다면, 법칙으로 승부하는 게 연금술사의 방식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상대는 법칙조차도 뛰어넘는 강자였다.
– 화악!
순식간에 마력이 빨려들어가는 상황에서 루시가 고른 선택지는, 걷잡을 수 없이 빠져나가는 마력을 어떻게든 휘어잡는 것이 아니라… 마력을 오히려 발산해내는 것이었다.
폭주된 마공학용품들은 오히려 밀려들어오는 마력들을 감당하지 못한 채… 하나 둘씩 폭발해버리기 시작했다.
-쾅, 콰앙!
-콰강, 콰가가강!
모자를 움켜쥔 채 가만히 서있는 소녀를 배경으로, 엘비라가 평생을 바쳐 만들어온 마공학용품들이 일제히 터져나가기 시작한다.
“미… 미친 건가…”
엘비라는 상처를 쓸어내리며 숨을 집어삼켰다.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대강 저 모든 마공학용품이 폭발했을 때 들어갈 마력량은 계산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단위가 천문학적이다. 도저히 학술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의 양이 아니다.
폭발 속에서 뒤돌아보는 루시의 눈동자가 사뭇 섬짓하다.
아무런 감정조차 보이지 않는 듯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 안에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 소녀를 막아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 ‘불가능의 영역’이란 이런 것이다.
구태여 불가능한 일에 머리를 들이박는 일은 멍청한 짓이다.
엄습하는 공포에 저절로 뒷걸음질이 쳐진다. 그러나 엘비라는 이를 악물고 다시 바로 섰다.
“이렇게 된 거… 입구라도 부숴버리면…!”
그대로 기초 불 마법을 발현시키려고 했으나, 루시의 손짓 한 번에 엘비라는 그대로 바닥에 내다 꽂혀서 제압당하고 말았다.
채 1초도 걸리지 않는 순간이었다.
“어, 커흑…!”
엘비라는 비로 범벅이 된 대리석 바닥을 굴렀다. 넘어지면서 혀를 씹었는지 입가에 알싸한 쇠맛이 감돌았다.
그대로 루시의 바로 앞까지 굴러오고 나니, 엘비라를 내려다보는 루시의 눈이 똑바로 보였다.
원초적 공포가 몸을 엄습한다.
루시의 눈에는 아무런 살의가 없다. 당연하다. 인명 피해를 낼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죽일 필요가 없다면 절대로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그리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모종의 확신이… 엘비라의 뇌리에 맴돌았다.
지금 이 소녀를 방해하는 건 미친 짓이다.
뇌가 그리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빗줄기 사이로 뻗어나간 엘비라의 손은 루시의 발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
루시는 별 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오히려 먼저 말을 꺼낸 건 엘비라였다.
“그대로 가면… 후회할 걸…”
입만 살아있는 것인가. 그렇진 않다.
“슬픈 건 알겠는데, 이런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진 않으니까… 부디 떠나보낸 사람을 좀 생각해주란 말야…”
“…”
“에드 선배님도… 이런 걸 바라진 않았을 거 아니야…”
한동안 빗줄기가 쏟아지고만 있었다.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내리는 봄비는 세상 모든 것들을 공평하게 때린다.
“그건… 타냐를 만나고 나서 판단할 일이야.”
엘비라를 내려다보던 루시가 시간계 성위마법, ‘시간 감옥’을 발현하려는 순간이었다.
– 카앙!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빠른 검격이었지만, 루시를 벨 수는 없었다.
다만, 엘비라와 루시를 떨어트려 놓을 순 있었다.
순식간에 그 사이를 파고든 인영(人影)이 다시 한 번 루시 쪽으로 검격을 날리자, 루시는 얼른 장미 정원쪽으로 크게 몸을 날려서 거리를 벌렸다.
엘비라는 완전히 제압되어서 제 몸조차 가누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저 바닥에 고꾸라진 채 억지로 루시를 부여잡으려 했을 뿐이다.
그런 엘비라의 앞에 똑바로 서서 검을 들이민 남자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나는 진짜….. 미친 새끼야. 정신나간 놈이라고…!”
안 그래도 길고 우중충한 머리칼이 비에 젖어서 한층 더 음울해 보인다. 다크서클이 짙은 눈두덩이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2학년 전투부 수석, 클레비어스 노튼데일.
검귀의 피를 제어하지 못해 스스로 제 형을 죽이고, 가문에 버림 받아 음울한 삶을 살아오던 소년이었다.
“저딴… 괴물을… 어떻게… 어떡하라고… 나보고… X팔… 개.. X팔…!”
전력 차는 압도적이다.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학생들 중에서 루시 메이릴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없다.
백명이 보면 백명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규정지을 시련이다. 누가보아도 도망치는 게 정답이다.
도주의 기회는 많았다. 루시는 그를 적대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루시가 그를 적으로 여길만큼 클레비어스의 성정이 강인하질 못했다.
클레비어스는 도망자의 삶을 살았다.
제 명에 아로새겨진 숙명으로부터, 시련으로부터, 그리고 피의 저주로부터 언제나 도망만 치느라, 겁쟁이라는 멸칭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가 보아도 도망이 정답인 상황이다. 도망친들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비어스는 검을 뽑아들었다.
아직 오필리스관의 학생들은 전부 대피하지도 못했다. 메이드들도 모든 일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렇다. 구태여 불가능에 도전하는 짓은 멍청한 행동이다.
끊임없이 가슴 속에 되새겨왔을 그 문장이 다시금 클레비어스의 심장에 떠오른다.
일생동안 도망자의 삶을 살아왔던 한심한 패배자의 눈에, 장미정원의 전경이 눈에 박혀서 떨어지질 않는다.
장미정원에 가득 매워진 수많은 동상들은 패배자들의 흔적이다. 그렇다, 그들은 전부 패배자다.
루시 메이릴이라는 거대한 재해 앞에서, 패배를 예감하고 있음에도 덤벼댄 멍청한 놈들이다.
이 놈도 저놈도 모두 멍청한 새끼들이다. 학생들을 보호할 의무니, 정의니 하는 낭만적인 단어들을 따라 달리다 제 명에 못 죽을 모자란 놈들이다.
뒤에 쓰러져 있는 소녀 연금술사도 다르지 않다.
제 아무리 2학년 연금부 수석일지라도, 저런 괴물을 홀로 막아내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을 터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발인데, 두 발이 말을 듣질 않는다.
“여… 여긴… 못 지나간다… X팔 새끼야….!!”
애초에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시간이라도 끌 수 있다면 또 모른다.
클레비어스는 악을 지르며 검을 들고 루시에게 돌격했다.
매처럼 비상한 클레비어스의 몸이 루시를 향해 나아갔고, – 휘익 그리고, 루시의 손짓 한 번에 그대로 나가 떨어지고 만다.
마력탄을 버텨내지 못한 클레비어스의 몸은 그대로 큰 충격을 받고 화단 쪽으로 날아가서 굴러댔다.
이번 역시 결판이 나는데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 이런… 멍청한… 클레비어스…!!”
쓰러진 엘비라는 이를 악물고 화단 쪽에 피어오르는 연기만 쳐다보고만 있었다.
루시는 작게 한숨을 흘리고 엘비라 쪽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이윽고 다시 오필리스관 정문 쪽으로 걸어나갔다.
그 앞길을 막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
– 카앙! 카앙!
– 화악!
직스 에펠슈타인은 거의 모든 종류의 무기를 다룰 수 있다. 애초에 전투부로 입학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능력을 보유한 소년이었다.
지금 휘두르고 있는 것은 벽난로 위에 장식되어 있던 예장용 레이피어였다. 이슬란 가문에서 배웠던 예식용 레이피어 검술에,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댄 응용 동작을 섞어서 활용하는 것이었다.
날아든 검격에 당황한 웨이드가 얼른 방어자세를 취했다.
찌르기 위주의 검격이 들어올거라 생각했으나, 직스의 동작에는 생각 이상의 자유분방함이 있었다.
‘아니… 이건…!’
애초에 무기의 제약을 받지 않는 직스의 능력에서는 빈틈을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북방 초원 지대를 거닐던 야수의 삶과, 이슬란 저택에서 문명을 받아들이며 귀족의 예를 학습한 삶.
그 둘이 아우러지며 완성된 검술은 지극히 실전적이면서도, 그렇다고 이론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되어 있지도 않다.
귀족의 검술을 극한까지 익힌 웨이드로서는… 상대하기 힘든 수준을 넘었다. 아예 상대할 수가 없는 레벨이다.
웨이드도 어디가서 꿀리지 않을 수준의 강자이긴 하지만, 검술로서 그를 상대하려거든 아예 익혀온 무예의 배경부터 뒤집어 엎어야 했다.
‘하지만… 빈틈이 없진 않다…!’
그렇게 말하며 순간적으로 벌어진 직스의 옆구리에 검격을 날리는 순간이었다.
-화악!
-카앙!
직스의 무게 중심이 완전히 왼쪽으로 쏠린 틈을 타 옆구리에 공격을 넣으려 했으나, 웨이드의 검은 튕겨나갔다. 웨이드는 순간적으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직스는 절대로 검을 튕겨낼 수가 없는 자세였다.
그러나, 이윽고 깨달을 수 있었다.
웨이드의 검을 튕겨낸 것은 직스의 검이 아니라, 마법이다. 발현된 바람 칼날이 웨이드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애초에 이쪽 빈틈은 일부러 내어준 것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목덜미를 검 손잡이로 얻어맞고 난 이후였다.
“커, 허억!”
그대로 직스는 웨이드의 복부를 걷어차 버렸다. 방 구석까지 굴러서 나가떠러진 웨이드는… 몇 번 격정적으로 기침을 해댄 뒤 겨우 몸을 가누고 일어섰다.
“더 할 거냐?”
“물론입니다, 직스 선배님.”
웨이드는 입가를 슥 닫고 일어서서 다시금 직스를 노려보았다. 그제야 격의 차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잊고 있었던 게 이상할 정도로 자명한 사실.
직스는… 마법사다. 검술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직스와 자신 사이에 세워진 격의 차이를 실감하고 만다. 그럼에도 웨이드는 씨익하고 웃었다.
“제가 이 정도로 포기할 것 같습니까? 직스 선배님.”
“…”
“크… 흐흐흑… 크큭… 저는 강자와 싸우는 걸 즐기는 사람입니다. 직스 선배님 같이, 마법부의 강대한 인간이랑 싸울 수 있는 기회가 이렇게 왔는데 제가 어찌 쉽게 포기하겠습니까.”
웨이드는 끌끌대며 웃더니, 다시금 검을 잡고 일어섰다.
“좀 더… 저를 즐겁게 해주시지요.”
직스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웨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서는… 천천히 이야기 했다.
“추하구나, 웨이드. 너는 승부를 즐기는 게 아니라, 승리를 즐기는 거겠지. 어느 정도 이길 수 있을 가능성이 보이는 놈들이 아니면 그런 승부욕을 불태우지도 않을테고.”
“뭐라고요?”
“애초에… 너는 그릇부터가 작다. 대답해봐라. 정말로 진정한 강자와 싸우고 싶었다면, 2학년 마법부 중에서 굳이 나를 콕 찝어서 승부를 걸 이유가 없지. 안 그러냐?”
길다란 레이피어의 끝이 다시금 웨이드를 향한다.
“마법부의 2학년 수석은, 내가 아니라 루시 메이릴이잖아.”
그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애초에 직스는 웨이드의 속내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던 셈이다.
“불가능이라고 규정지어버리고, 논외로 취급해버리면 편하겠지. 실제로 도저히 이길 가능성이 보이질 않으니까. 애초에 이길 수도 없을테고 말이다.”
“그건… 당연한…”
“그래. 그게 네 그릇이다.”
직스의 검격이 다시 한 번 웨이드의 검에 내다 꽂혔다.
“크, 윽…!”
웨이드는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였다. 그대로 검을 주고 받으며, 직스가 웨이드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이야기 했다.
“손에 힘 꽉 줘라. 이 겁쟁이 새끼야.”
언제나 중후한 모습처럼 보이는 직스가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조차도 웨이드를 당황시키기 위한 전략의 일부였을까.
직스가 미리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웨이드가 쥐고 있던 검은 그대로 손에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방심한 사이에 검면을 그대로 발로 차버렸기 때문이다.
– 카강, 캉!
그대로 허공을 몇 바퀴 돈 웨이드의 검이 바닥을 굴렀다.
직스의 레이피어는 웨이드의 목 언저리에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이, 이건….”
“핑계 거리를 찾고 있나? 아니면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이유라도 찾고 있나?”
그대로 웨이드는 동공을 몇 번 떨었다.
항복 의사를 표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압도적으로 밀린 상황에서까지 저항을 하는 건 미친 짓이기 때문이다.
저항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미친 척하고 레이피어의 검면을 움켜쥔 채로 몸을 들이밀거나, 어디 한 군데 찔릴 각오로 검을 집어들 생각을 하거나, 어쨌든 치명상을 감수할 각오만 있다면… 방법론이야 무궁무진 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덤벼봐야 상처만 늘어날 뿐이란 것을… 웨이드는 경험적으로 지긋하리만치 잘 알고 있었다.
그 공포에 못이긴 웨이드는… 천천히 양 손을 들어올려 보였다.
“그래… 그게 네 한계다.”
– 콰앙!
– 쿠우우웅!
오필리스관의 입구쪽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난 것이 바로 그 이후였다.
*
그것은 검격이라기보단 거대한 포탄에 맞은듯한 흔적이었다.
단 한 번의 검격으로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오필리스관의 입구 쪽을 지지하고 있던 기둥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있었다.
– 쿠우웅, 쿵!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연기가 피어오른다.
어느샌가 화단에서 다시 뛰쳐나온 소년은 이미 머리에서부터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다시금 루시의 앞길을 막아선 모습은… 인간이라 부르기도 뭣한 귀기가 흐르고 있다.
비에 젖어서 완전히 눌러붙은 앞머리 때문에, 그 표정도 눈매도 전혀 보이질 않는다.
다만 다리를 다쳤는지… 한쪽 무릎을 꿇은 구부정한 자세로, 검집에 꽂힌 검을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못 이긴다.
그렇다면 시간이라도 끈다.
시간을 끈다고 해서 뭐 어떻게 해결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해줄 백마탄 초인이라도 나타나서 전부 정리해줄 거라는 희망이라도 품어보지만, 역시 그건 영 헛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내리는 빗줄기. 입구가 무너진 오필리스관.
피칠갑이 되어서 검 손잡이를 쥐고 있는 검귀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앉아 있다.
평소처럼 내지르던 욕지거리도 없고, 겁에 질려서 딱딱 부딪히던 이도 오늘따라 소름끼칠 정도로 조용하다.
정적 속에서 앉아 있는 검귀의 주변은 완전히 시간이 멈춘 듯 해서…
쓰러져서 바라보고 있던 엘비라는 숨을 내쉬는 것조차 잠시 망각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