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97)
학생회장 선거전 (10)
정적이 감도는 오필리스관.
중앙복도로 통하는 출구를 가만히 막아서고 있던 로르텔 케헬른.
그 모습을 본 직스는… 나란히 뛰쳐나가던 타냐의 어깨를 휘어잡았다.
“으, 읏?!”
그대로 직스는 타냐의 몸을 통째로 끌어당겨서 자기 등 뒤로 숨겼다.
“아흣!”
직스의 강한 악력에 이끌려 비틀거리던 타냐가 몸의 속력을 겨우 다잡았다.
“가, 갑자기 왜…”
“가만히 있어.”
직스의 직감은 어지간해선 거의 들어맞는다. 야생에서 살아오며 갈고 닦아온 육감은 위기상황에서 그를 몇 번이고 구해주었다.
이번에도, 직스의 육감은 불안한 비명을 지른다.
자고 있던 참인지, 레이스 재질의 슬립 원피스에 가벼운 털실 외투를 걸치고 있는 모습. 파도처럼 웨이브가 흐르는 풍성한 적갈색 머리칼도 완전히 풀어헤친 상태다.
“로르텔.”
직스는 생전 에드의 인간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입장이다.
에드의 진가를 알아본 자들은 대개 에드와는 각별한 사이가 되었으니, 좁은 인맥일지라도 에드의 지인들은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인간들이 많다.
로르텔 역시 에드와는 충분하리만치 각별한 관계였다는 점을 알고 있기에, 직스는 조심스레 자세를 가다듬었다.
검 손잡이를 쥐고는 있지만, 어지간해선 로르텔과 전투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로르텔의 마법 실력과 순발력은 그 깐깐한 글래스트 교수조차 그녀의 이름을 A반에 올려놓게 만들 정도였다.
허나, 실전 감각과 전투 센스에 대해서만큼은 직스를 따라올 레벨까지는 안된다. 싸운다면 아마 직스가 이긴다.
단순 화력전으로 간다면 직스가 열세일지도 모르겠으나, 가진 능력과 주어진 환경을 극한까지 활용하는 일대일 실전 전투에서는 직스를 이길 수 있는 자가 극히 드물다.
그러나 로르텔의 진정한 무서움은 전투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로르텔 케헬른은 일단 목표로 한 자는 반드시 파멸로 이끄는 자다. 그녀의 양부조차도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아리땁고 고고한 외관이나 기품있는 언행에 속아 그녀를 자애롭고 선한 부호라고 여겨서는 절대로 안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직스 에펠슈타인은 확실히 알고 있다. 그녀는 가시가 돋은 장미다. 그 가시에는 코끼리조차도 순식간에 독살하는 맹독이 몇 겹이나 발려있다.
이 실베니아 아카데미에서 절대로 적으로 돌려선 안되는 자를 꼽는다면… 여유롭게 세 손가락 안에는 반드시 들어간다.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문을 막고 기다리고 있던 그 모습. 아무리 봐도 호의적인 상태로 보이지 않는다.
─에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이 분명하다.
루시가 밖에서 저렇게까지 난리를 피우고 있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그렇기에, 직스는 일단 타냐를 뒤로 숨길 수밖에 없었다.
“어서 대피하는 게 좋을거야, 로르텔.”
직스가 그렇게 말을 던지자, 어둠 속의 로르텔이 찬찬히 고개를 들었다. 에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그녀의 심정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타냐를 향해 무슨 생각을 품게 만들었을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로르텔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고개를 든 로르텔은… 의외로 단아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직스 너는… 지금까지 탈출 안하고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니?”
평소처럼 정돈된 어조.
복장만 좀 더 편하고 격식이 없을 뿐이지, 언제나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은 모습에 직스는… 오히려 위화감을 느꼈다.
직스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로르텔을 가만히 응시했다.
“위험한 상황이잖아. 어서 대피해야지. 안 그래, 직스? 그리고 타냐 너도.”
타냐조차도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일까.
그러나 적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진 않아서 뭐라 대꾸하기도 그렇다.
“로르텔.”
직스는 검 손잡이를 쥔 손을 풀지 않는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에드 선배님에 대한 소식은 들었나?”
로르텔의 미간이 슬쩍하고 떨렸다.
어지간한 눈썰미로는 캐치해내기 힘든 아주 미약한 반응이었지만, 눈치가 빠른 직스는 그 감정의 요동을 알아보았다.
“글쎄. 어떤 거 같아?”
“그래, 그냥 보내주진 않을 것 같군.”
“무슨 소리 하는 거니, 직스. 내가 너희들을 막아설 이유가 없지.”
눈을 지그시 감고 빙그레 웃는 로르텔의 모습은 여전히 여유롭다. 그러나, 타냐와 직스는 단 한걸음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런 단순 일대일 전투에서 내가 직스 너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니.”
로르텔 케헬른의 온갖 능력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읊는 게 입이 아플 지경이다.
허나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것을 뽑자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하는 괴물과도 같은 침착함이다.
타칸이 학생회관을 쳐부수거나, 글래스트의 마력탑이 학사에 솟아오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그녀는 절대로 당황하지도, 이성을 잃지도 않았다.
기계처럼 최선의 수를 찾아 행동하는 이성의 괴물이다. 언제나 심드렁해보이던 루시조차도 분노에 휩쓸린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녀는 이를 악문 채 차가운 이성을 유지한다.
그렇지만, 이성과 합리는 언제나 한 몸처럼 같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을 금전으로 환산해 저울질 해대는 상인의 삶을 살았지만, 그런 그녀조차도 합리의 저울에서 벗어나는 때가 있다. 바로 에드가 연관되어 있을 때다.
로르텔은 직스를 막아서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직스가 로르텔보다 전투 능력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뒤집어서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아니라… 타냐 혼자였으면 어쩔 생각이었던 거냐?”
차분하고 정돈되어 있는 모습이지만, 그 내면 또한 그러리란 보장이 없다. 저 소녀는 절대로 제 속내를 솔직히 드러내는 법이 없다.
그렇기에, 내면이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든 겉만 봐서 절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그러나, 때때로 은연중에 그 편린이 드러내는 때가 있다.
“찢어죽였겠지.”
타냐의 등허리를 타고 소름이 한줄기 내달렸다.
표정은 여전히 차분하고 정돈되어 있다. 목소리의 어조 또한 전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살집을 가르는듯한 날카로운 위협이 대기에 감돈다.
“운이 좋구나, 타냐. 동행해준 직스에게 감사해야겠는걸.”
미동조차 없는 로르텔의 호박색 눈동자에 타냐의 표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로르텔이 이 복도를 지키고 앉아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건 섣부른 행동이다, 로르텔.”
“맞아, 직스. 보아하니 너는 타냐의 편을 들고 있는 것 같구나.”
직스도 뭐라 말할 수는 없었다.
보아하니, 모든 정황 증거는 에드 암살의 범인을 타냐로 지목하고 있다.
이전부터 에드에 대한 악의를 꾸준히 드러내고 다녔던 타냐의 행보. 그리고 암살의 실행범으로 보이는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신들. 그들이 타냐의 명령을 받드는 직속 가신이었다는 사실까지 겹쳐진다. 어지간한 가신들은 주인의 명령없이 독단으로 행동에 임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일단 타냐의 결백을 한 번 믿어보기로 한 직스의 행동은… 이성보다는 철저히 감성의 영역이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타냐가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을 바라진 않을 거라고, 경험적 근거를 통해 추측한 결과일 뿐이다.
언제나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지향하는 로르텔이, 다소 감정적인 직스와는 끔찍할 정도로 성향이 안 맞는 이유다.
“그러니, 직접 죽이기보다는 일단 고문을 했겠지. 어떻게든 자백이라도 하면 또 다른 이야기잖아.”
빙그레 웃는 로르텔의 모습을 보며 직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저 여자는 역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한없이 차분해 보이지만, 분명하게 어딘가 비틀려 있다.
“손톱 관리 받은지 얼마 안된 것 같네, 타냐. 다행스러운 일이야.”
타냐가 휙하고 손을 뒤로 숨긴 채 벌벌 떨었다. 은연 중에 던진 로르텔의 그 말은 소름끼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일단 적어도 손톱은 멀쩡하지 못했을 거란 이야기는… 몇 번이고 가슴께가 떨리게 만들었다.
“아, 아니… 저는…! 아니에요…!!”
“관둬라, 타냐. 감정적인 주장만으로 설득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뭐라 말하려는 타냐를 직스가 차분하게 가로막았다. 로르텔 또한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그들에게 통과를 허락할 뿐이었다.
“지나가렴.”
로르텔은 절대로 승산 없는 싸움을 걸지 않는다. 오로지 이기는 싸움만 하는 자다.
칼바람이 부는 사업 전선에서 철들 무렵부터 고고히 생존해온 자의 품격이다.
이곳은 로르텔 케헬른의 전장이 아니다. 검격과 마법을 교환하며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 물밑의 어둠에서 암약하며 전장 자체를 제 손아귀에 집어넣는 자다.
적으로 돌린다면, 반드시 끔찍한 꼴을 보게 된다.
에드를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저 여자 또한 적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 사실을 타냐도 모르진 않았지만, 현실이 되고 나니 다시금 온몸을 타고 공포감이 샘솟는다.
직스는 경계하는 자세 그대로 로르텔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정말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막을 마음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이 조차도 연기이며 계획에 불과한 것인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단순히 전투 능력이 강대하기만한 적이라면 따돌릴 방법을 찾아보든가, 다른 방식의 타협책을 찾든가, 아니면 근성으로라도 싸워서 이겨보겠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없이 교활한 로르텔 같은 자는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게 맞는 판단인지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 연막 속을 헤매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 오히려 더 머리 아픈 상대다.
그렇게 답이 없는 대치 상태가 계속될 무렵.
“그렇다면 로르텔…”
– 쨍그랑! 콰강! 캉!
“아, 으앗…! 앗!”
[ 조심 좀 해! 안 다쳤어?! ]“어, 응…! 안 다치긴 했는데… 어떻게 해 창문… 으아… 다 깨졌어… 이거 완전 고급품이잖아, 나 물어줄 돈 얼마 없는데… 어떡하지… 으으… 에엑…”
[ 이런 상황이 됐는데 창문 깨진 거 하나 일일이 범인 찾아가며 배상을 요구 하겠니? ]복도 한 켠의 창문을 부수며 미끄러지듯 들어온 소녀가 있었다. 창 밖으로 쏴아아 하고 들리던 빗소리가 직접적으로 복도의 안에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땋아내린 연분홍 빛 머리칼은 완전히 비에 푹 젖어있었다. 옷도 마찬가지다. 새하얀 블라우스도 감청색 스커트도 완전히 비에 눌러 붙어서 몸에 착 달라 붙어있었다.
젖은 스커트 한쪽을 쭉쭉 짜내며 강아지처럼 머리를 후두둑 흔들어 털어대더니, 타냐 쪽을 보고서는 화색을 지었다.
“앗, 찾았다! 타냐!”
그렇게 외치고 나니, 그제서야 복도의 분위기가 소녀의 눈에 들어왔다.
“…”
덜덜 떨고 있는 타냐와, 식은 땀을 삐질 흘리며 검에 손을 올리고 있는 직스. 그리고 차갑게 식은 눈으로 차분하게 그들을 노려보고 있던 로르텔.
“어.. 음… 나 혹시 분위기 파악 못한 거야…?”
예니카는 삐질대며 옷깃의 물을 짜내던 손짓을 멈췄다.
뒤이어서 창문을 통해 고개를 내밀고 있던 메릴다가 한숨을 흘렸다.
[ 아니, 오히려 딱 맞춰서 찾아온 모양인데. ]*
– 쏴아아
극에 달한 몸상태와 더불어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시야가 흐릿하다.
온 몸을 잡아먹을 듯 폭주하던 혈검술도, 이미 몸 상태가 한계에 달한 것을 눈치 챘는지… 모든 마력은 다 사라졌다.
검귀로서의 힘을 모두 끌어올리고 목숨까지 걸어가며 덤벼들었지만, 클레비어스가 루시를 상대로 상황적 우위를 점한 시간은 단 백분의 1초 뿐이었다.
그나마도 클레비어스가 이끌어냈다기보다는 루시의 방심이 만들어낸 결과다. 아이러니하게도 격차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빈틈이었다.
처음부터 루시가 온전히 집중해서 클레비어스와 싸웠다면, 상황적 우위는커녕 단 몇 초면 승부가 끝나있었을 것이다.
루시가 인명피해를 만들지 않으려고 힘을 조절해가며 싸우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정원 가득 펼쳐져있는 시간감옥들과 상공을 메운 마력구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정말로 클레비어스는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다.
비참하고도 슬픈 일이지만,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또 다시 패배했다. 패배에는 이미 질릴만치 익숙해져 있었다.
“으, 크흑… 윽…”
백날 몸을 일으켜보려 바닥을 밀어도, 몸은 채 절반도 일어서지 못한 채 힘을 잃는다. 그대로 고개만 들어서 올려다보자, 로브를 입은 사내 하나가 클레비어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장미정원에 들어서자마자 일단 주변부터 확인했다. 마치 주변에 누가 보고 있으면 곤란하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피한 장미정원에는 그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시간 감옥에 갇혀버린 학생들이나 메이드들은 당연히 의미가 없고, 기껏해봐야 클레비어스나, 옆에 고꾸라져 있는 엘비라 정도다.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물안개까지도 자욱하니, 인기척이 있다한들 쉽게 그 얼굴을 확인하기 쉬워보이진 않았다.
루시를 막아선 중위 물 정령 ‘암사자 레이시아’는 순식간에 그 형체가 사라졌다. 척 보기에도 불안정해 보이는 현현이었다. 한계에 달한 힘을 겨우 끌어내서 소환한 모양새다.
그 결과, 남아 있는 자라곤 루시와 엘비라, 클레비어스, 그리고 로브를 쓴 남자 뿐이었다.
가까이서 올려다보니, 그 얼굴을 그제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귀족적인 이목구비에 짧은 금발을 늘어뜨린 소년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뭐야.. X팔…”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상반신을 겨우 지탱하며, 클레비어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살아있었잖아. 개자식아.”
“…”
“어, 커흡…”
피를 한차례 흘린 클레비어스가, 이를 악물고 에드를 올려다 보았다.
“진짜.. 개.. X팔…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윽.. 크윽…”
“네가 버티고 있었구나. 클레비어스.”
“그래… 왜… 꼽냐…??”
주룩주룩 내리는 빗줄기 사이에서 고개를 푹 수그린 만신창이의 소년은, 쌓여있던 억하심정과 울분을 기어이 토해내고 만다.
“꼽냐고…! X팔…!!”
그 누구도 뭐라하지 않았다. 클레비어스의 분노는 그저 자격지심일 뿐이다. 그래도 에드는 가만히 듣고 서있어주었다.
다만, 에드의 시선엔 모종의 놀라움이 느껴졌다.
클레비어스는 ‘나태한 루시’를 상대로 거진 10분에 가까운 시간을 버텨내었다.
지금 이 학사 안에서 그게 가능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클레비어스의 전반적인 전투 능력을 줄줄이 꿰고 있는 에드마저도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차마 생각지 못했다.
“그래… 진짜… 개같이 쳐맞았다… 나도 알아… 나 진짜 개같이 추하고, 멍청하고, 찌질한 X끼인 거 나도 안다고… 내가 제일 잘 알아… X팔…!!”
클레비어스는 파르르 주먹을 떨며 이를 악물었다.
“나도 알고 있었어. 덤벼봤자 개짓거리라는 거. 목숨 걸고 난리를 부려봤자 발 끝에도 못 미칠 거 다 알고 있었는데… 그래… 그래서 튀고 싶었는데, X팔 발이 안 움직이는데 나보고 어쩌라는거야…”
그 겁쟁이의 눈동자에 비친 장미정원은 온통 머저리들로 가득차 있었다.
저런 괴물을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달려들어 어떻게든 해보려는 바보 천치들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간감옥에 갇힌 메이드 장과, 그 후임 메이드들. 어떻게든 막아보려던 학년 수석들… 마지막에는 언제나 클레비어스를 상대로 투덜거리던 소녀 연금술사까지.
이런 바보 천치들은 클레비어스가 살아가면서 질리도록 봐왔던 군상이다.
그들을 뒤로한 채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며, 도전하지 않고, 불가능이라 규정하며, 구태여 머리를 들이밀지 않으며 살았다.
모두가 클레비어스에게 그러길 바랬다. 그것이 현명한 것이라 가르쳤고, 클레비어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줍잖게 검귀의 피에 도전하다 또 몇 명이나 죽여나갈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패배에 익숙해지면 그로인한 고통도 잊게 된다. 자존심도 완전히 닳고 닳아 감정이 동하지도 않는다. 누군가 자신을 겁쟁이다, 도망자다 모욕하더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 온다.
분명 그럴 것인데.
“대체… X팔… 언제까지 쳐 도망만 치며 살아야 되는 거야…”
태산같이 몰려오는 군세에 검을 뽑아들고 돌격하던 영웅의 모습. 그림책 속에서 본 노튼데일 가문의 시조, 벨커스 노튼데일의 그림.
모두가 클레비어스의 피에 서린 검귀의 저주를 두려워하고 포기했지만, 홀로 끝까지 클레비어스를 노튼데일 가문의 일원으로 긍정하다 죽은 형.
학년 수석들조차 두려움에 떨던 고위 불 정령 타칸, 그 앞에 서서 끝까지 묘책을 마련해내던 에드 로스테일러.
하늘 가득히 솟은 마력탑들 사이에서 끝끝내 의지를 잃지 않고 글래스트 교수에게 달려들던 검성 테일리.
들이닥친 루시 앞에서도 끝까지 제 본분을 다하려 했던 메이드들, 학년 수석들, 그리고 엘비라까지.
그 머저리들이, 소년의 가슴에 뿌리박혀있던 패배주의를 좀먹어 들어간다.
시궁창 속에 드리워진 불빛처럼, 추하고 얼룩진 모습을 면전에 들이민다.
두 다리를 땅에 붙들게 만들고, 날이 다 빠진 검을 뽑아들게 만든다.
모두가 불가능이라 규정한 시련에 멍청이처럼 머리를 들이박게 만든다.
“진짜… 나는… 개 멍청한 버러지 머저리 쓰레기 X끼야… 나도… 알아… 안다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슬슬 쉬어야 할 때였다.
클레비어스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에드는 두서 없는 클레비어스의 욕지거리를 그냥 가만히 서서 끝까지 들어주었다. 끝끝내 정신을 잃은 클레비어스를 둔 채,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려는 참이었다.
“으, 흐읍…”
-쏴아아.
만신창이가 된 엘비라가, 클레비어스와 에드 사이에 끼어들어왔다. 이미 제압당해서 제 몸도 제대로 가누기 힘들어하는 것 같은 모습인데, 양팔을 휙 벌린 채로 클레비어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무래도 에드가 클레비어스에게 해코지라도 할 것이라 오해한 모양인지, 엘비라는 입술을 앙다물고 덜덜떨리는 팔을 내리지 않은 채 어정쩡하게 앉은 자세로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툭 하고 발로 차면 바로 나가떨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그래도 의지가 살아있는 눈으로, 파르르 몸을 떨며 어떻게든 보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
그 엘비라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에드는,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맙게 됐다, 엘비라. 클레비어스. 너희들 노력은 헛된 게 아니고, 정말 가치 있었다.”
에드의 입에서 그런 대사가 튀어나올거라고는 차마 상상도 못했는지, 엘비라의 동공이 휙하고 커졌다.
딱히 에드가 클레비어스에게 해코지를 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클레비어스의 분투는 에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엘비라는 아직도 에드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기에, 괜시리 불안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엘비라의 상상과는 달리 에드는 차분하게 엘비라의 어깨를 두어번 툭툭 두들겨 주었다.
그 손짓에, 엘비라는 그대로 몸에 힘이 빠져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당신은…”
“일단 쉬고 있어라, 내가 살아있는 걸 확인해 버렸으니… 너희 둘한테는 일러둘 얘기가 좀 많겠다.”
그리고, 에드는 조용히 로브의 모자를 내려쓴 채 뒤로 돌아서 나아갔다.
루시를 데리고 돌아가야 할 때였다.
*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히 찾아와 조금씩 마음을 좀먹어가는 저주다.
그렇기에 사람과 사람은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랜다.
세상 만사를 심드렁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살아가는 소녀에게도, 그 필사의 질환은 예외 없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다만, 소녀가 고독의 무서움을 헤아리지 못한 것은… 유년시절의 그녀에게 글록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름살 자글자글한 손으로 머릿결을 북북 쓰다듬어 주고,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곁에 앉아 있어주는 그 늙은이의 존재가… 고독의 무서움으로부터 소녀를 지켜주고 있었다.
허나, 그것을 스스로 자각하기는 영 힘들다.
그렇기에 잃고나서야 그 상실의 아픔을 깨닫고 고통받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 쏴아아
로브 모자를 내려쓴 소년의 모습을 본 루시는, 순식간에 몸의 힘이 풀릴 뻔 했다.
혹시나 환각을 보는 것이 아닐까 싶어 눈을 부벼 보지만 소년의 모습은 여전하다.
드라마틱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어가 안길만한 소녀는 아니다.
“미안하게 됐다. 루시. 미리 말 못해줬네. 사정상 좀 죽을 필요가 있었어.”
다만, 이제는 못들을 거라 생각했던 그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귀에 밀려들어오고 나서야, 현실감이 올라왔다.
“근데, 나는 나대로 목숨이 경각에 왔다갔다하는 급박한 상황이었어서, 뭘 미리 대처할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소식을 전할 틈이 없었다.”
멍하니 서있는 루시에게 에드는 빗줄기를 헤치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리고 면전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긴가민가 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루시에게 확실히 전달해준 것이다.
“나 살아있다. 자, 이렇게.”
루시는 그렇게 멍하니 에드를 올려다 보았다.
듬직한 몸이나 뻗어내린 금발 머리칼, 비에 젖어 희미하지만 그 몸에서 나는 풀내음까지도 에드 로스테일러가 맞았다.
표정은 역시 미동이다. 그러나 눈가에 뭉텅뭉텅 망울져 흐르는 것은 누가보아도 빗물은 아니었다.
별안간 코를 훌쩍거리더니, 폴짝 뛰어서 에드의 가슴께를 훑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얼굴을 다 젖은 에드의 옷깃에 파묻고는 비벼대는 것이었다.
“죽은 줄 알았단 말야.”
축축한 그 느낌은 루시의 목소리 치고는 듣기 힘든 어조였다.
차분하게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에드는 천천히 루시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대로 비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흐느끼는 루시의 몸을 한참 동안 꽉 눌러주었다.
봄비가 내린다.
길가에 쌓인 꽃잎이나 화단에 남은 꽃내음을 한 번 싹 훑고 내려가는, 그런 빗줄기가 지나고 나면 봄은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감정의 격류 또한 마찬가지다.
한 번 시원하게 내뱉고, 다시금 이성을 되찾으면, 안정적으로 정립되어 있던 관계에도 새로운 국면이 찾아오곤 한다.
그것은 작은 위화감에서부터 시작한다.
에드의 품에 안겨 울던 루시는, 그렇게 한참을 감정을 쏟아내고 나서야… 그 고독 속에 숨어있던 미약한 감정을 잡아채는데 성공한다.
에드의 얼굴 위로 글록트를 겹쳐보고 있던 루시였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에드를 향해 품은 감정과 글록트를 향해 품었던 감정 사이에는 근원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따뜻한 불가에 앉아 루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글록트의 주름살 자글자글한 손길과, 감정에 북받쳐서 눈물을 펑펑 쏟아대는 루시를 꽉 눌러주는 에드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그 감정은…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다르다.
천천히 비가 그치고, 어느새 구름 사이로 달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에드의 품에 안겨서 그 품에 눈을 비비고 있던 루시는 문득 숨을 집어삼킨다.
대체 그 차이가 무엇일까 하던 고민도… 이윽고 그 정답이 구체화 되어간다.
일단 자각했다면, 그 감정의 정체를 깨닫는 것은 일도 아니다.
-휘익!
-확!
문득, 에드가 깜짝 놀라며 몸의 균형을 다잡았다.
에드의 품에서 펑펑 울던 루시는, 갑자기 눈물을 갈무리 하더니 휙 하고 에드의 가슴을 밀어내고 고개를 치켜든 것이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에드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 본다. 놀란 것은 에드 뿐만이 아니라 루시도 마찬가지 였다.
아직은 그 눈가가 촉촉이 젖어있지만, 당황스러운 감정은 확실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마치 예상치도 못한 천적이라도 만난 듯한 길고양이마냥… 한 없이 눈을 떨고 있던 루시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루시?”
에드는 그냥 평범하게 루시의 이름을 불렀을 뿐이건만, 루시의 가슴에서는 불이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났다.
뭐라 대답하려다가 목소리가 떨려 말이 나오지 않자, 루시는 그대로 휙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학사의 고위 마법사들조차도 그녀 앞에서는 덜덜 떨 수밖에 없는… 루시는 그런 태산과도 같은 존재다.
그런 루시가 미지의 존재를 마주하는 듯한 얼굴로 덜덜 떨며 에드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엔 오로지 당혹감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