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98)
학생회장 선거전 (11)
직스 에펠슈타인은 항상 직감을 쫓아 살았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야생의 세계에서 그의 목숨을 부지해준 것은,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야성적이고 본능적인 직감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정돈된 체계 속에서 이성적인 판단만을 하며 살아온 로르텔과는 정반대다. 그녀와 일일이 대립각을 세우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온실 속의 화초들은 상상도 못할 경험을 잔뜩 하며 살았다.
초원의 맹수들로부터 숨고 도망치는 일이 거의 일상이었다. 매일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것도 별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직스는 어지간한 일로 겁을 먹지 않는다. 당황하거나 공포를 느끼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서는 마른 침을 삼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위기감. 등골이 싸해지고 숨이 가빠지는 공포감이 직스의 등허리를 엄습했다.
“으윽… 이러다 감기 걸리겠네.”
비를 뚫고 한달음에 달려온 예니카의 모습.
그리고 출구를 가로막고 서있는 로르텔의 소름끼치는 정적.
직스 에펠슈타인은 생전 에드 로스테일러의 인간관계에 대해 꽤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상황을 받아들이는 속도 또한 빠르다.
로르텔은 이미 에드의 사망 소식으로 인해 반쯤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는 걸 잘 알았다.
그녀의 음험한 속내를 알 수 없다는 찝찝함이 남아있지만, 어쨌든 일대일 전투라면 직스가 로르텔에게 밀릴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예니카 페일로버가 난입하는 것은… 직스조차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변수였다.
하여튼 에드 로스테일러는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는지, 여복 하나는 기묘할 정도로 타고난 인물이다.
제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가 많은 것이야 그 사람 능력이니 뭐라 할 수 없긴 하다. 원래 야생의 세계에서도 잘난 수컷이 암컷을 여럿 거느리는 것이야 그리 신기할 일도 아니었다. 그게 문명의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냐 하는 것은 너무 복잡한 문제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는 썩 좋지 않은 변수다.
무엇보다 예니카 페일로버는… 에드의 지인 중에서도 가장 그에게 헌신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로르텔마저도 저렇게 차가운 분노에 휩싸여있는데, 한층 더 감정적인 예니카 페일로버가 아무렇지 않을 리 없다.
적어도 직스의 상식에서는, 에드의 사망 소식을 접한 예니카가 가만히 있을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기에…
“널 찾아다녔어, 타냐.”
예니카의 그 말에… 마른침을 꿀꺽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직스는 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풀지 않고 곁눈질로 타냐를 돌아보았다.
타냐는 몸을 덜덜 떨면서 이미 벽 구석까지 몰려 있었다.
차갑게 식은 로르텔의 분노에는 사람을 소름끼치게 만드는 서슬퍼런 느낌이 있었다.
그나마 예니카는 생각 이상으로 멀쩡해보이는 느낌이 조금 있긴 하다.
그럼에도 타냐는 예니카에게 뭔가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 것인지… 공포에 떨면서 눈물을 글썽대고 있는 것이었다.
직스 또한 본인이 타냐의 상황이었다면 얼마나 무서웠을지 상상해보았다. 낭떠러지 위에서 밧줄을 타는 기분일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타냐의 편을 들겠다는 것은 다소 무모한 판단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스는 자기 직감을 믿기로 결심했다. 에드와 타냐를 두루 지켜봐왔던 직스는. 타냐에게 직접적인 살해 의사는 없었을 거라는 모종의 확신이 계속해서 샘솟았기 때문이다.
예니카와 로르텔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아무리 직스라고 해도 무리다.
직스는 결투의 대가다. 기술과 경험, 그리고 타고난 전투 감각은 학교 내에서도 견줄 자가 그리 많지 않다.
허나 그에게도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예지에 가까운 예측 능력과 순발력, 실전 감각도 결국… 대처하기 곤란할 정도로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는 큰 의미를 가지기 힘들다.
상대가 인간으로서 검술과 마법을 구사하는 ‘결투의 대상’이라면 직스는 어지간해선 패배하지 않지만, 수많은 정령 군단을 내세워 물량과 화력으로 승부하는 예니카를 상대로는 상성이 너무 안좋다.
“에드에 대해 할 말이 있는데─”
그렇기에, 예니카가 이야기의 운을 떼는 순간 되도록 피하고 싶었던 최후의 수를 감행했다.
– 콰앙!
마치 빛처럼 빠른 직스의 마법이 복도의 벽 한 켠을 부숴버렸다. 되도록 재산 피해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직스였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감당하기 힘든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우아아아?!”
“큭!”
순간적으로 덮쳐드는 격풍과 흙먼지 때문에 예니카와 로르텔이 휘청거렸다.
그 틈을 타 직스는 타냐의 허리를 휘감아 들고 무너진 외벽 사이로 몸을 던졌다.
비는 거의 그쳐가고 있었다.
조금 남은 빗줄기 사이로 격풍이 불어 온 몸을 때렸다.
퍼덕퍼덕 옷깃 휘날리는 소리와, 몸을 휘감은 부유감이 타냐에게 또 다른 공포감을 주입했다.
– 쿵!
바람 마법으로 몸을 휘감았지만, 그럼에도 착지의 충격이 완전히 완화되지는 않았다.
뒷문 쪽에 착지해서 겨우 몸을 다잡은 직스가 타냐를 내려놓았다. 이대로 오필리스관 뒤쪽 오솔길을 타고 서쪽 생활동으로 도주한다면, 어떻게든 숨을만한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대로 직스는 자세를 바로잡고 오필리스관 쪽을 올려다 보았다.
크게 한 번 숨을 집어삼킬 수 밖에 없었다.
거대한 불 도마뱀 한 마리가 외벽을 감싸안고 있고, 그 주변 상공을 온갖 유체정령들이 떠다니고 있다. 창가에 얼굴을 들이미는 집채 만한 늑대 한 마리도 덤이고, 하위 정령들은 어림잡아도 세자릿수에 가까워 보였다.
저만한 숫자의 정령을 한 번에 부리는 것은 몇 번을 보든 신기한 광경이다. 그 정령들은 하나 같이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던 듯한 모습이다.
더 말할 것도 없이, 타냐 로스테일러다.
그 사실을… 타냐 본인도 충분하리만치 깨달은 듯 하다. 이빨이 덜덜 떨리는 속도가 한층 더 가속되고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타냐 로스테일러.”
직스는 안면의 빗물을 몇 번 닦아내고는 자기가 두르고 있던 로브를 휙 펼쳐서 타냐에게 덮어주었다.
“이 뒤편 오솔길을 따라 뛰다가 갈래길이 나오면 서쪽 방향으로 꺾어라. 그대로 미친 듯이 달려가면 생활동이 나올거야.
일단 생활동에 들어갔으면 무조건 시가지 사이로 숨어들어라. 복잡한 곳일수록 더 찾기 힘드니까. 일단 추격을 따돌린 것 같으면 그대로 도움을 청할만한 곳을 찾아. 너는 로스테일러 가문의 후계자니까, 황실 권력이나 친분있는 귀족가 사람을 찾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지.
”
로스테일러 가문의 후계자. 그런 자에게 빚을 남겨두면 정치적 명분 혹은 사교적 지위 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될 가능성이 크다. 타냐의 목숨은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거래 명분이 되는 것이다.
“그… 그럼 직스 선배님은요…?”
“널 추격하지 못하도록 힘 닿는 데까지 막아주마. 예니카 선배님이나 로르텔을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적당히 막다가 때 되면 혼자 도망가는 정도는 할 수 있다.”
“어.. 어째서 그렇게까지…?”
“나도 네가 에드 선배님 친동생이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했다. 운 좋았다고 생각해.”
직스는 품에서 마공학용품 하나를 꺼내들었다. 석판에 붉은 구슬 네 개가 박혀있는 형태였다.
‘헬고의 날개 신발’, 일시적으로 몸을 민첩하게 만들어주는 물건이었다.
직스는 가죽끈을 이용해서 그 마공학용품을 타냐의 허리춤에 매어주었다. 그리고 타냐의 어깨를 잡고 몸을 뒤로 휙 돌려버린 다음, 팍 하고 등을 밀쳐버렸다.
힘에 못이겨서 몇걸음 달려나가다 자리에 멈춘 타냐는 뒤를 돌아 보았다.
직스는 이미 타냐에게는 관심도 없이, 정령들이 가득 매운 오필리스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타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를 악물고서는, 눈을 질끈 감고 오솔길 사이로 뛰쳐나갔다.
“후우우…”
깊게 한 번 심호흡한 직스는 검을 뽑아들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마력의 흐름을 체크했다.
생각보다 예니카의 추격이 늦다. 정령들에게 이미 동선이 보였으니 추격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을텐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추측해보건대, 로르텔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 하다.
목표로 하던 상대가 코 앞에서 도주했는데 넉살 좋게 둘이 대화나 나누고 있을 때인가. 애초에 그 둘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허나 직스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드의 사망 소식이 들려온 와중에 연적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둘 모두 슬픔에 빠진 복수귀나 다름 없을 터.
그 둘을 상대해야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적당히 타냐의 도주 시간을 벌다 자기도 도망치면 될 일이다. 그 정도 쯤은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그걸 알고 있다고 해서 식은 땀이 흐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서진 외벽 사이에서 정령사 하나가 몸을 드러낸다.
옷도 완전 홀딱 젖었고, 삐져나온 잔머리 몇가닥이 볼에 눌러붙어 한 없이 피폐해진 인상이다.
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매 위에 올라타자, 주변을 가득 매운 유체정령들이 모두 그녀의 뒤를 따라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 모습은 흡사 왕의 도래다. 한 손으로 길다란 떡갈나무 지팡이를 비스듬하게 들고, 천천히 지상에 강림하는 정령들의 여왕 그 자체다.
직스는 전투 자세를 취한 뒤, 천천히 지상에 착륙한 그녀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대로 석재 바닥 위에 폴짝 뛰어내린 그녀를 향해, 직스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지금에서야 제가 무슨 말을 하든 들으려고 하시지 않겠죠. 예니카 선배님. 그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합니다.”
검을 바로잡고, 직스는 비장한 자세로 이야기 했다.
“허나, 신념이란 사람에 따라 다 다른 것이니, 비록 모든 증거가 저 소녀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고 해도, 저는 제 직감을 따라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하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제 삶의 방식입니다…!! 저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직스라고 해서 예니카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건 또 아니었다. 그에게는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연인, 엘카 이슬란이 있다.
그렇기에 직스는 실연에 빠진 예니카에게 그 누구보다도 진심을 다해 외칠 수 있었다. 그 고통을 함부로 재단하지도 않는다.
“저 또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으니 잘 알고 있습니다. 상상만 해보아도 끔찍하리만치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건… 저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녀를 잃는다면 세상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살아온 세월이 무상해지고, 복수의 기회가 온다면 분노의 불꽃으로 온 몸이 불타오르겠죠. 그럴 수밖에 없을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예니카 선배님은 그 누구보다 에드 선배님을 사랑하셨으니까…!
”
“무.. 무슨…”
안타깝게도 직스 입장에서는 본인 혼자만 세상 진지하다는 사실을 알 방도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일의 전말에 대한 파악이 끝난 예니카의 입장에서 들어본다면, 이 같이 얼굴이 훅훅 달아오르는 이야기는 또 없는 것이다.
“이미 에드 선배님도 세상을 떠난 와중에 무엇을 가려 말하겠습니까.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에드 선배님을 연모하는 예니카 선배님의 마음이 얼마나 진지하고 아련했는지…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아… 아니…! 너무 큰 소리로 쩌렁쩌렁 이야기 하지마…!!!”
“그 마음의 상처는 쉬이 치유되지 않겠지만… 사랑이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임을 저는 굳게 믿습니다. 잃은 사랑일지라도, 에드 선배님을 흠모하던 그 뜨거운 마음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가슴에 남아 예니카 선배님의 일부가 되어 있을 것이리라 굳게 믿습크아아아아아악!!!”
-콰광! 카앙!
불정령의 화염이 작렬하고, 직스는 예상치도 못한 공격에 직격당해 나가 떨어졌다.
제 아무리 잔혹한 악의 세력도 변신 장면이랑 진지한 대사 치는 장면은 참고 기다려주는 법인데…
착한 예니카가 한참 진지한 이야기 털어놓는 와중에 말 끊고 냅다 공격할 거란 예상은 못한 것이었다.
예니카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귀까지 빨개지고 눈시울은 붉어진 채로 부들부들 떨며 직스를 지팡이로 푹푹 찔러대고 있었다.
“에드 안 죽었어! 에드 안 죽었다고! 그니까 제발 그만 좀 해….!!”
*
코를 킁킁대면, 착 가라 앉은 향긋한 풀내음이 새삼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느낌이 있다.
오두막 한 켠에 쌓아놓은 건초더미에서 그런 산뜻한 풀내음이 밀려올 때가 왕왕 있다.
루시는 그런 풀내음을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니기에, 그러려니하고 몸을 뒹굴곤 했다.
그러나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들은 그런 풀내음이 뭐가 그리 싫은지, 품격을 유지해야 한다며 루시에게 향수를 뿌려대곤 하는 것이었다.
메이드들의 양팔에 들려 옮겨지다 보면 이따금씩 맡게되는 향긋한 프리지아 꽃 향기.
과연 고급품답게 별 관심 없는 루시의 코에도 꽤나 향기롭게 느껴졌으나,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몸에 배인 풀내음을 없애야하나 싶은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런 말을 툭 던지니, 메이드들이 루시에게 하는 말이 참 가관이었다.
향취라는 것은 반복해서 배이다보면 어느새 몸에 안착해, 자기 자신의 체취로 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매일처럼 연초를 피워대는 자의 몸에선 언제나 무겁게 가라앉은 연초의 향취가 나고, 유년시절을 복숭아 밭에서 뛰놀며 자란 소녀는 언제나 향긋한 복숭아 향기가 머릿결을 타고 흐른다는 것이다. 루시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메이드들은 사뭇 진지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초동 대처’랜다.
뒤늦게 몸에 배인 체취를 눈치 채봐야 그 때와서 그걸 바꾸기는 영 힘들다.
막 몸에 그 냄새가 배이기 시작할 때 대처를 시작해야 체취도 조금씩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할 일이 많다. 일단 관련한 사람들 다 한자리에 모아두고 한 번에 이야기 해야겠지. 시간은 촉박한 편이네… 금방 학사 사람들이 들이닥칠테니…”
난데 없이 그런 쓸 데 없는 기억이 떠오른 이유를 짚어보려는 순간, 비에 젖은 얼굴을 슥슥 쓸어내리며 에드가 말했다.
별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에드의 묵직한 목소리가 귀에 스며드는 것만으로 루시는 등줄기가 훅훅 타들어가는 듯 했다.
얼굴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어 모자룰 꾹꾹 눌러 내리며, 루시는 괜시리 타오르는 제 가슴에 너무나도 큰 위화감을 느꼈다. 이런 느낌 자체가 생전 처음이므로 당연한 일이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내 사정도 설명해둬야겠고… 그렇다고 너무 많이 알려져도 곤란하니… 음… 일단 클레비어스랑 엘비라… 그리고 직스와 로르텔한테까지는 알리는 게 맞겠지. 타냐는 예니카가 찾으러 갔고… 그래, 일단은 비 좀 그만 맞고 내부로 들어가자.”
“어..”
드디어 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해, 루시는 겨우 질문을 던졌다.
“뭐…라고…?”
“…그럼 그렇지, 안 듣고 있었냐. 아무튼 내 사정이 있었으니 설명을 해줄테니까 같이 가자고.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 하자 뭐 그런 얘기였다. 그리고 우리끼리 말을 좀 맞춰야 사후 대처가 좀 편해질테고… 너 이거 빼도 박도 못하고 징계위원회야. 게다가… 클레비어스랑 엘비라도 꽤 다친 모양이니 사과해야지.”
“사… 사과…?”
“그래, 걔넨 널 막으려다가 다쳤으니까. 보아하니 엘비라는 긴 시간동안 만들어왔던 마공학용품을 거의 다 잃은 것 같고, 클레비어스는 피를 무슨 폭포처럼 쏟아냈던데.”
“그… 그건… 나라고 해서…”
루시라고 아예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반쯤은 이성을 잃은 상태였지만, 루시는 나름대로 앞길을 가로막는 자들을 최대한 온건하게 제압하려 했다.
물론 말도 안되게 강대한 루시의 마력 때문에 막아서는 입장에서는 그조차도 가혹하게 느껴졌을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엘비라와 클레비어스를 저렇게까지 만들 의도는 없었던 것이다.
루시는 별 생각도 없는데, 엘비라가 멋대로 마공학용품을 다 챙겨와서 폭주시켰고, 심지어 클레비어스는 혈검술의 발현을 위해 제 몸을 스스로 찔러대기까지 했다.
덤벼드는 것에 대처했을 뿐이다… 라는 것이 루시의 입장인 것이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루시의 입장일 뿐이다.
“누가 뭐래도 다치게 한 건 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냐. 나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책임소재가 있으니 같이 말해줄게. 이따가 같이 가자.”
“아무리 그래도…”
뭐라 반박해보려다가, 루시의 목소리가 다시 기어들어갔다.
에휴, 하고 한심을 쉬는 에드의 얼굴이 똑바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건 별 대단한 반응도 아니고, 에드 입장에서야 일상과도 같은 리액션이었지만… 루시는 가슴에 천둥이 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움 받는다. 한심한 사람 취급 받는다. 에드 로스테일러가 실망한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등줄기가 훅훅 달아오른다.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 따위는 개나 주고 살던 루시 메이릴이 아니던가. 아무데나 드러누워서 깃털 같은 숨을 내쉬며 낮잠을 자던 소녀다.
허나 에드의 그런 표정 한 번에 기도가 막힌 듯한 기분이 들어, 얼른 모자챙을 꽉 움켜쥐며 대답을 내놓고 마는 것이다.
“아, 알았어. 사, 사과할게.”
“…오, 그래. 현명하네.”
그 장대한 마력은 태산조차 뚫어버리고, 휘두르는 마법은 원로 교수들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소녀이건만.
에드 로스테일러의 말 몇마디가 뭐 그리 대단한 의미를 가지는지, 루시는 스스로도 납득이 되질 않았다.
생각을 정리해야만 하는 타이밍일까. 허나, 결론은 이미 나있는 것 아니던가.
그 감정의 정체가 연심이라는 것이 맞다면, 대체 왜 그런 마음을 품게 되고 만 것인가하는 의문이 마음 속에 또아리를 튼다.
여기서 지난 과거를 회상하고 만 것을 루시는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심장이 망치질을 해대는 통에 사고가 제대로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에드와는 꽤 긴 시간을 부대끼고 살았다. 사실 그랬다는 자각은 별로 없었다.
애시당초 에드의 캠프는 처음엔 그저 낮잠 명당 중 하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남자 또한 그저 캠프에 돌아다니는 관리인 같은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 분명 그리 감정이 동할 이유랄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년 좀 넘어가는 시간동안 캠프에 부대껴 살며 에드에게 추근덕 댔던 행동들을 뒤돌아 보면 어떤가.
에드의 오두막을 마치 제 집인양 들락거리고. 그가 매일 밤 잠에 들던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낮잠을 자고.
책을 읽던 그에게 들러붙어서 기어이 무릎에 드러눕고.
그의 어깨에 들려 발을 휘적대며 목제 쉼터까지 옮겨지거나, 모닥불 열기를 쐬며 등을 맞대고 멍하니 별하늘을 쳐다보거나, 두런두런 불가에 앉아 같이 밥을 먹거나.
그것이 늙은 마법사 글록트와 어린 루시의 관계라고 했다면,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지도 모른다.
늙은 스승과 어린 제자, 할아버지와 손녀, 관리인과 들러리. 뭐 어떤 관계로 비교해 설명을 해도 그럭저럭 납득이 될 터.
허나 그 기억에 이끌려 이런 일상에 아무런 거부감도, 거리감도 느끼지 못했다면 그건 크나큰 실책을 범한 것이다.
그 대상이 에드가 되고, 관계의 구도가 남과 여로 치환되는 순간, 루시의 머리에는 순식간에 피가 몰려온다.
훅훅 피어오르는 열기가 머리를 때리지만 이제와서 뭘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미래는 제 손으로 바꿀 수 있지만, 지나간 과거는 불변하는 것이 세계의 섭리다.
몸에 배는 체취를 잘 제어하려면 초동 대응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허나 매사 나태하고, 언제나 무감각한 루시가 그런 센스있는 초동 대처를 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향기라는 건 의식하지 않으면 이미 몸에 배어 있는 것인가.
참 애석하게도, 연심 또한 그와 마찬가지인 것이니. 루시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심경의 변화가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조차 없지만, 이미 그녀의 머리칼부터 옷깃, 모자에 이르기까지 에드 특유의 묵직한 풀내음이 피어오른다.
뒤늦게 그 마음의 이변을 자각해봐야, 이제와서 그걸 뒤집어 엎기에는 이미 모든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초동 대처라는 것은 대부분 그 시기를 놓치면 의미를 잃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방법론이라고는… 이제야 시간차를 두고 타오르는 가슴을 어떻게든 제어할 방법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건만.
“보아하니 넌 딱히 다친 데도 없어보이네. 하긴 그렇겠지. 어쨌든 시간 없으니까 얼른 들어가자.”
방심하면 다시금 숨이 멎어들어오는 것은, 쌓아놓았던 감정의 골이 한 번에 밀려올라오고 있기 때문일 터다. 타이밍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아니, 그… 으…”
“안 그래도 예니카가 타냐를 찾느라 고생 좀 하고 있었을 거야. 또 신세를 지고 말았으니, 얼른 가서 일 마무리 짓고 뭐라도 해줘야지.”
그 이름 예니카 페일로버가 거론되는 순간, 루시는 본인도 도저히 알 수 없는 행동을 취하고 만다.
“…?”
급하게 몸을 돌려 오필리스관 쪽으로 향하던 에드. 그의 옷 소매를 꽉 안아서 잡아 끌고 있는 모습은… 마치 떼라도 쓰고 있는 것 같아서.
“….??”
에드는 물론이고, 정작 그 행동을 취하고 있는 루시마저도 눈을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소녀는, 독점욕이라는 것에 겨우 눈을 뜨기 시작한다.
“꼬… 꼭 지금 바로 가야 돼?”
이건 또 쉽지않은 이야기였다.
*
“허억… 허억…!!”
숲을 가로질러 달려가던 타냐는 돌부리에 걸려서 거하게 넘어지고 말았다. 진흙 바닥을 몇 번 구르다가 겨우 몸을 다잡았다.
“이… 이대로 가면… 생활동이… 나올 거야…”
울상을 지으며 몸의 진흙을 몇 번 털어내던 타냐는 다시금 심호흡하고 몸을 일으켰다.
“사… 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이… 일단은… 살아야 해… 살아남아야 해…!”
타냐는 눈물이 솟아오르려는 걸 이를 악물고 참아낸 채,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일단… 도움을 청할 곳.. 로스테일러 가문과 접점이 있는 곳….”
당장은 목숨 부지가 중요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황족 숙소다. 로스테일러 가문은 황실 주요 관리들을 많이 배출한 만큼, 황실과의 접점도 깊다. 당장 가주 크레핀 로스테일러부터가 클로엘 황제의 최측근이다.
황실이라면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물론 이 빚을 가만히 두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당장 기댈만한 곳 중에 그 이상 가는 곳은 없었다.
“일단… 다리를 움직여야 해…! 쉬면 안돼… 분명… 나를 쫓아오고 있을 거야… 잡히면… 정말 잡히면 안 돼…”
애석한 일이지만… 그 누구도 타냐를 쫓아오고 있지 않다…
“그리고… 오라버니에 대한 살해 혐의… 이것도… 벗어내야만 해… 진상을.. 알아내야 해… 허억.. 허억…!”
참으로 슬픈이지만… 사실상 살해 혐의도 이미 벗었다…!
“절대… 잡히면 안돼…!”
굳이 말해봐야 슬픈 일이지만… 전부 쉐도우 복싱이다…!!
허나 궁지에 몰린 타냐가 그걸 알아챌 방법은 없었다.
결국 누가 됐든 그녀에게 해줄 말이라곤 하나밖에 없었다.
그저 굳세어라…. 타냐 로스테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