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99)
학생회장 선거전 (12)
말 머리 모양의 체스말을 검지 끝으로 툭툭 건드린다. 기사를 상징하는 체스말이었다.
그대로 톱니처럼 세워진 체스말의 머리 끝을 꾹꾹 누르다가, 그대로 힘을 줘서 밀어보면 대각으로 조금씩 기울여진다.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는 선에서 체스말을 휙휙 기울이던 손가락은, 이내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선까지 밀리는 순간 타닥대는 소리와 함께 체스판 바닥을 구르고 만다.
그렇게 기사는 죽었다. 기물 교환을 위한 버림수였던 것이다.
홀로 창가에 앉아 체스 기물들을 이리저리 옮기던 페니아 황녀는 나긋하게 한숨을 흘렸다.
흘러내린 백금발 머리칼을 휙하고 묶어올렸다가, 다시금 풀어헤치고서는 또 한숨을 거나하게 내쉬었다.
그녀는 우울한 기분이었다.
바로 방금, 호위대장 클레르에 의해 전해들은 소식. 바로 에드 로스테일러의 사망 소식이었다.
아직 정확한 전말이 제대로 파악되진 않았지만, 학사 쪽에서 일차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무래도 로스테일러 가문의 세력에 의해 암살당한 듯 하다는 것이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어서는…”
에드 로스테일러와는… 애증의 관계였다는 표현이 가장 알맞은 것일까. 그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었다.
사실은 페니아 황녀 쪽이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마음의 빚이 쌓여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을 전해듣고 나니, 그와의 만남들을 다시금 회고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첫단추부터가 그리 좋지 않았고, 서로 간에 골칫거리였던 시간이 훨씬 더 길었던 느낌이다.
만약 죽은 에드 로스테일러를 다시금 일으켜 페니아 황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끔찍하리만치 상성이 안맞는 인간이었다고 회고할테지.
그 정도로 페니아 황녀는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눈엣가시 같은 인간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페니아 황녀는 클로엘 황실의 지고한 제 3황녀다.
파문당해 평민 신분이 되어버린 에드 로스테일러와 그 격의 차이를 비유해보려거든 하늘과 땅이라는 은유로도 모자라다.
그런 페니아 황녀가 에드 로스테일러의 사망 소식 하나에 비탄에 빠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뭐 얼마나 각별한 사이였다고 이렇게 우울해한단 말인가.
그래도, 로스테일러 가문에 대해 끊임 없이 의심을 품고 살았던 페니아 황녀에게 있어서… 그 울타리를 뛰쳐나온 에드의 존재는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적어도 이리 허무하게 죽어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꼬이고 꼬인 이 관계성을 어떻게든 풀어보고자… 밀려있던 일정들 대부분을 취소하고, 취소 안된 일들은 앞당겨 처리하면서까지 그와 제대로 대화를 나눌 시간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그 일정도 어느새 당장 다음 날로 다가오고 있었건만, 로스테일러 가문은 페니아 황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뿌득.
문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게 제 입에서 난 소리라는 사실을 알고서 페니아 황녀는 새삼 놀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체스판에나 만지고 있는 제 모습이… 마치 패배한 도사견 같다.
자애의 황녀라 하며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게 다 무슨 의미란 말인가.
페니아 황녀는 군주로서 무언가를 행할 때마다, 무엇 하나 온전하게 제 뜻대로 된 적이 없다.
그녀가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굳이 나서서 권세를 휘두르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적극적으로 황위를 노리는 두 언니들은 때때로 대중의 뜻을 거스를지라도, 옳다 생각한 일을 뚝심있게 밀어붙였지 않았나.
원래 정치적 결정이란 것들은 대부분 양날의 칼인 법이다. 무엇 하나를 얻는 게 있다면, 또 무엇 하나를 잃어야하는 경우가 많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희생시켜야만 하는 일도 수도 없이 많을 터.
체스판 위를 나뒹구는 나이트 위로 에드 로스테일러의 모습이 겹쳐서 피어오른다.
첫 평가는 완전히 바닥을 쳤었지만, 가면 갈수록 제 진가를 보여주던 에드 로스테일러는… 살아만 있었다면 정말 가문의 위세를 빌리지 않고 뭐라도 해낼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 죽음은 한없이 무의미할 가능성이 더 높겠지.
페니아 황녀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을 내어 그의 의견을 경청하고, 감정의 골을 해소하고, 자존심을 내려놓아 더 진득하게 그와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수많은 가능성들이 있었다.
바쁜 일정과, 알량한 자존심, 그리고 반복된 실패로 바닥친 자신감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아선 것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자각하고, 그와 만날 일정을 잡기 위해 밀린 업무를 죄다 몰아 처리했지만… 비참한 운명의 칼날이 그녀보다 조금 더 빨랐다.
그것은 변명의 여지 없는 큰 실패다. 페니아 황녀 자신은 그 죄책감으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
고개를 돌려 책상을 보면… 한창 학생회장이 되겠답시고 모아두었던 여러 자료들이 가득하다.
여러 국가에서 모여든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학생들. 페니아는 그 사이에서 대표가 되어 학사 권력을 휘두르고자 했다.
그것은 클로엘 황실의 권력에 비한다면 손톱만큼도 안될 정도로 미약한 권력이지만, 적어도 이 실베니아 안에서는 독자적인 영역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줄 터.
단순히 황실의 비호만에 기댄 제 3황녀로서 끝나지 않고, 이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으로서 독자적 지위를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 황실을 배경으로 두는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의 입지.
그것이, 페니아 황녀가 바라보았던 첫 번째 지향점이었지만.
“나는… 권력을 잡아선 안되는 사람이야…”
잠시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이 읊조리는 것으로, 페니아 황녀는 생기 잃은 두 눈가를 갈무리했다.
– 똑, 똑.
그 때, 방문에서부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입장을 허가하자, 끼익대며 천천히 문이 열리고, 그의 호위기사 클레르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옆에는… 완전히 비와 진흙에 범벅이 된 로브를 뒤집어 쓴 채로, 헉헉 숨을 몰아쉬고 있는 타냐 로스테일러가 있었다.
*
장소는 오필리스관 중앙 현관이었다.
비는 거의 그쳐서 구름 사이로 별빛이 보인다. 상황도 어느 정도는 일단락 되었다.
루시의 시간 감옥 마법으로 인해 동상처럼 굳어버린 사람들은 일단 그대로 내버려뒀다. 에드의 생존 여부를 알고 있는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맞출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미 대피가 마무리된 오필리스관은 정적으로 감돌았다. 몇몇 학생들이 남아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당장 눈에 보이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학생들을 대피시키던 말단 메이드들도 모두 자리에서 뜬 듯 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처할 시간적 여유는 거의 없었음에도 확실히 엘리트 인력들다웠다. 수뇌부가 모조리 당한 상태에서도 서로 간에 재빠르게 담당 구역을 나눠서 거진 15분만에 모든 학생들을 대피시킨 것이다. 아마 교수동 쪽으로 이동해서 이쪽 상황을 보고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 다 모였군…”
생활동 외곽에 있는 오필리스관은 생각보다 교수동과의 거리가 그렇게 가깝지 않다.
이제 막 오필리스관의 이변을 보고 받았다고 하면, 여기까지 들이닥치는 데에 아무리 서둘러도 10분은 걸릴 것이다.
시간이 많지 않았으므로, 일단 핵심만 빠르게 전달하려고 했으나… 모인 인원들의 상태가 정상적이진 않았다.
우선 클레비어스는 정신을 잃은 상태다. 엘비라와 함께 힘겹게 부축해서 한 쪽 기둥에 기대어 놓았다.
그 뒤, 엘비라는 클레비어스의 옆에 무릎을 안고 앉아서 가만히 일행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기도 하고, 상황이 뭐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궁금한 부분도 많았을 것이다.
그 외에 직스는… 중앙 현관 한 구석에서 예니카에게 머리를 휙휙 숙이며 사과하고 있었다. 예니카는 머리 끝까지 빨개진 채로 볼을 부풀리고 있었는데, 직스답지않게 예니카에게 뭔가 실례되는 언행을 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르텔로 말할 것 같으면… 반대편 구석에서 양 손바닥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안고 있었다.
이쪽은 이쪽대로 열기가 올라와있는 모양이었다.
“뭐하냐, 로르텔.”
“…”
로르텔은 어깨를 감싸고 있는 외투를 휙 당겨입고 옷 매무새를 다듬더니, 에드의 얼굴을 보고선 빙그레 웃었다.
“역시 무사하셨네요, 에드 선배님.”
“그래. 괜히 걱정끼친 것 같아서 미안하다.”
“아뇨. 걱정이라뇨. 상식적으로 천천히 생각해보면 에드 선배님이 그리 쉽게 죽고 그러실 분이 아니라는 건 다 알 수 있는 걸요. 생각해보니까, 저한테 일러주신 마공학용품 제작식 중에 분명 목숨 부지에 도움되는 델 헤임 모래시계 같은 것도 섞여 있었고요.”
로르텔은 빙그레하고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상인은 언제나 평정과 이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 법이거든요. 충격적인 소식이긴 하지만,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도 전에 이성을 잃고, 마음이 흔들리는 일은 없어야지요. 그렇지, 직스?”
“…”
예니카의 옆에서 식은 땀을 뻘뻘 흘리던 직스는 잠시간 턱을 주억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그렇지, 직스?”
“…어, 흠…”
“그렇지, 직스?”
“아… 그렇지… 로르텔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었지….”
무언의 압박이라도 느낀 것일까. 직스는 얼굴을 슥슥 쓸어내리며 그리 이야기 해두었다.
“다만… 확실히 정황증거만 보았을 때는 타냐 양이 굉장히 수상한 건 사실이었거든요. 그래서 타냐양을 좀 압박을 해서, 그게 사실이라면 자수하도록 한 번 유도해봤을 뿐이에요. 그 과정에서 뭐 아주 약간의 위협이 오가곤 했는데, 딱히 신체적인 해코지를 가하진 않았거든요.”
“그래… 그렇긴 했지…”
직스는 무언가 켕기는 것이라도 있는지, 계속 턱을 주억거리면서 무서워하는 눈으로 로르텔을 쳐다보고 있었다.
“과연… 이게 상인의 처세술이라는 것인가… 진짜 어느 쪽인지 판단이 안선다…”
직스의 반응이 뭐 어쨌냐는 듯, 로르텔은 빙그레 웃으면서 차분히 이야기했다.
“제가 고작 이 정도 일로 에드 선배님이 죽을 거라 생각했을 거 같아요? 걱정도 유분수지. 다만…”
로르텔은 일어서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까치발을 들고서는 에드의 목 언저리 옷깃을 확 잡아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불쑥 내밀어서 에드의 얼굴을 가까이서 확인해본다.
“이성적인 판단이라는 게 꼭 생각대로 되는 건 아니라서요.”
그대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서는 빙그레 웃는 것이다.
“막상 실제로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니까 안심이 되고 마는 걸 보니… 사실은 조금 걱정이 쌓여있긴 했나봐요.”
묵은 걱정이 가슴을 타고 밀려내려가는 듯한 감각. 로르텔은 확실히 안도의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제 걱정을 시킨 건 맞는 것 같네요, 에드 선배님. 세상에 공짜 없듯, 이렇게 걱정한 제 마음에도 걱정비를 지불해주시는 게 맞겠어요.”
“뭐?”
그렇게 말하고서, 로르텔이 확 안기려는 순간이었다.
까치발을 들었던 발이 내려가고 에드의 가슴께에 얼굴을 들이미는 순간,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소녀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
로르텔이 진심으로 놀라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 언제나 평정을 유지하는 그녀이기에, 대부분은 놀라는 척을 하는 얼굴일 뿐이다.
그러나, 이번엔 진짜였다. 그녀는 잠깐이나마 확실하게 당황하고 있었다.
로르텔을 휙하고 밀어낸 루시가 제 양팔을 앞으로 내밀고 방어자세를 취한 모습이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이 이상 다가오지 마!’ 라고 외치는 듯한 모습에… 로르텔은 잠시간 벙찌고 말았다.
루시 메이릴이 어떤 인물인가. 언제나 반쯤 잠든 멍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이 뭘 하든 하품이나 해대는 그런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소녀가 필사적으로 에드에게의 접근을 막는 모습을 보고서, 로르텔은 가슴 한 켠에 잠들어있던 불안감이 눈을 뜨는 것을 느꼈다.
팔을 휙휙대며 볼을 부풀려대는 모습은… 누가봐도 질투심에 어쩔줄 몰라 몸이 먼저 튀어나가고만 소녀다.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로르텔을 노려보는 루시지만… 방어자세를 취하며 뒤로 빼던 엉덩이가 에드의 몸에 툭하고 닿자, 갑자기 짜릿한 전기가 온몸에 통하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서 반대로 휙 몸을 빼내는 것이다.
틈만 나면 에드에게 달라붙어서 육포를 씹고 있거나, 심지어는 심심하면 한 번씩 에드의 배 위에서 잠들어 있던 소녀 아니던가. 겨우 이 정도 스킨십으로 볼이 홍당무가 되어서는 뒷걸음질을 해대는 모습이 누가봐도 부자연스럽다.
“…”
그 광경은 로르텔 뿐만이 아니라, 직스에게 연신 사과를 받고 있던 예니카에게도 여지없이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루시 메이릴이 예니카와 로르텔에게 별 다른 의식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세파에 초연하고… 어딘지 모르게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 같은…. 그런 묘한 신선 같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마력을 부리며 모두의 경외를 한 몸에 받지만, 정작 그런 본인은 이렇다 할 자부심을 느끼는 일도 없고, 의욕을 내는 일도 없으니… 정말 사람이라기 보다는 배경 인물 같은 느낌이 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소녀가 누군가에게 정을 주고, 연모를 품고, 눈치를 보는 일이 존재할 수나 있을까. 그게 그다지 현실성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예니카든 로르텔이든 은연 중에 루시에 대한 의식을 어느정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아주 작은 가능성도 언제나 염두에 두고 대처하는 버릇이 쌓인 로르텔은 가능성 자체는 의식하고 있었으나… 이렇게나 갑자기 현실이 되어 나타날 줄은 몰랐다.
“루… 루시… 너어…”
예니카가 뭐라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에드가 루시의 머리 위에 턱 하고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처럼 루시를 당겨서 제 옆구리에 끌어안고,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차분히 누른 것이다.
그것은 이제 에드에게 있어서 스킨십이라고 불릴 수도 없는 것이었다.
사실 에드는 이미 루시와 부대낄만큼 부대낀 입장이라, 어깨 좀 끌어당겨서 옆구리에 착 붙였다고 해서 그런 걸 일일이 각별한 스킨십으로 의식하진 않는다.
항상 추근덕 대며 들러 붙는 루시에게 익숙해질만큼 익숙해지고 만 것이다.
허나, 작금의 루시에게 있어서 그것은 재앙과도 같은 기습이다.
애석하게도 루시는 에드 로스테일러에 대한 모든 인식의 전환점을 막 거쳐온 참이다.
에드에 대한 의식도 완전히 새로이 구축되어, 이제는 착실히 남녀로서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건 철저히 루시의 사정일 뿐이다.
에드는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루시를 대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하다.
“—!”
뭐라 말도 못한 채로, 입을 확 틀어막은 채 루시의 얼굴에 터질 듯이 열기가 밀려올라온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는 일이다. 온갖 일을 하며 부대껴 살던 때도 아무렇지 않게 심드렁한 얼굴로 가만히 있던 소녀가, 이제와서 이런 움직임 하나 하나를 의식해대니 대체 세상 누가 헛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허나 입장과 인식이 바뀌면 반응도 바뀔 수밖에 없다. 사람이란 게 그렇다.
“왜 이래, 루시. 로르텔도 나름대로 걱정을 해서 하는 말이니까, 너무 수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어. 막 감정이 가라 앉은 참이라 날이 서 있는 건 이해는 한다만…”
그렇게 에드는 루시의 심정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로르텔을 경계하는 루시의 행동에 주의를 주고 있을 뿐이지만…
루시는 그 말조차도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저 커다란 마녀 모자를 푹푹 눌러쓴 채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있을 뿐이었다.
– 투욱.
그런 루시를 잡아당겨, 에드에게서 떨어트려 놓은 것이 예니카였다.
“너, 너무 가깝잖아…!”
사실 이 반응도 어이 없는 것이었다.
예니카는 틈만나면 에드의 캠프에 들락거리면서, 루시와 에드가 불가에 들러붙어 앉아 있는 모습을 몇 번이고 본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심드렁하던 루시의 태도 때문에 아무런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던 예니카였지만… 지금의 루시 메이릴은 누가 봐도 묘하다.
그렇기에, 소녀로서의 직감이 몸을 움직인 것이다.
예니카의 품에 안겨 떨어져 나온 루시는… 그제서야 휙 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캬악 하고 날선 소리를 내더니, 예니카의 품에서 빠져나와서 정면으로 대치한 것이다. 그걸 보고 있던 로르텔의 시선도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
예니카와 로르텔, 그리고 루시가 서있는 중앙현관 사이에 잠시간 정적이 퍼져나간다.
“이건…!”
팔짱을 낀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직스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슬란 저택에 살 때 다 같이 한 번씩 보러나갔던 검투 경기보다도 훨씬 흥미롭다.
심지어 멀찍이 떨어진 좌석도 아니고, 바로 앞에서 직관이다. 직스가 호오- 하는 소리를 내며 제대로 관중석에 착석하려는 순간…
“저기~.”
기절한 클레비어스 옆에서 가만히 앉아있던 엘비라가 침묵을 깼다.
“우리… 시간적 여유가 많이 없는 거 아닌가…?”
“…”
그렇다. 사실 일행은 이렇게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에드가 생존했음에도 그 사실을 공표할 수 없는 이유를 간략하게나마 알리고,.
클레비어스와 엘비라에 대한 사과도 하고,
도망간 타냐도 찾으러 가야하고,
상황이 어쩌다 이리 되었는지 학사 측에 증언 할 때를 대비해 입도 맞춰 두어야하고, 그 모든 것들이 마무리되면 에드는 당장 이 자리를 떠야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직스는 그 아쉬움에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그래도 엘비라의 말이 맞았다.
“그래요. 일단 이야기부터 빨리 진행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선배님들.”
*
“어, 흡!”
클레비어스가 눈을 뜨자, 그 장소는 오필리스관의 정문 언저리였다.
루시한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은 여파가 남아있는지… 몸이 삐걱대고 있었다.
“뭐, 뭐야…! 뭐 어떻게 된…”
몸의 상처가 어느 정도 줄어 있었고, 지혈이 되어있었다. 약품이나 응급 의료용품을 사용했다기보다는, 직접적으로 마력을 활용한 치료다.
상반신을 겨우 일으켜서 주변을 둘러보자, 자기 바로 뒤에 엘비라가 가만히 앉아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히익대며 놀랐다.
“뭐, 뭐야…!”
어깨를 긁어보면 엘비라의 구불구불하고 길다란 오렌지색 머리칼이 몇 개 묻어져 나왔다.
상황을 보아하니 엘비라의 무릎에 뒷머리를 묻은 채로 꽤 오래 누워있었던 것 같다.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거야, 바보 같은 클레비어스.”
“…뭐, 뭐냐, 상황 어떻게 된 거냐? 나… 죽은 거냐…? 하긴, 그 정도로 삽질을 펐으니 멍청하게 죽었다 해도 할 말이 없겠구나…!”
“시끄럽게 굴지 좀 말고, 거기 근처에 앉아. 내가 다 전해들었으니까, 얘기해 줄거야.”
비는 완전히 그쳐있었다. 언제 그렇게 쏟아졌냐는 듯, 달밤에는 커다랗고 둥근 달이 하늘을 차지하고 있었다.
먹구름이 지나가 탁트인 하늘엔 온갖 별들이 소금처럼 박혀있다. 그 빛을 받으며, 클레비어스와 엘비라는 정원의 나무 밑에서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제 학사 직원들이 도착할 거야. 그럼 네가 루시를 막았다고 증언하면 돼.”
“뭐? 내가? 그, 그 괴물을 내가 어떻게 막았다는 거야!”
“구구절절 따지지 좀 마, 어휴. 다들 그렇게 하기로 입을 맞춰놨어. 그 이유는 내가 나중에 다~ 설명해줄테니까…”
엘비라는 클레비어스의 머리채를 확 쥐었다. 클레비어스는 악악 앓는 소리를 내며 엘비라의 손에 이끌려서, 그대로 그녀의 무릎에 다시 머리를 묻었다.
“…넌, 그냥 좀 쉬어.”
“아니, 이게 뭐하는 건데…! 아오…!”
그 상황이 썩 편치는 않은지, 클레비어스가 다친 몸을 이익대는 소리와 함께 일으키려 했으나… 엘비라는 콧잔등을 푹 눌러버렸다.
마공학용품을 다 부숴버리고, 클레비어스를 두들겨 팬 것에 대해서 루시가 정중히 고개를 숙인 건 의외의 일이었다. 클레비어스의 몸에 응급처치를 해준 것도 루시였다.
그 외에 보상 및 비밀유지금이랍시고, 당장은 현금이 모자라서 힘들지만 나중에 꼭 여유롭게 챙겨주겠다는 엘테 상회의 서약도 받아두었다. 로르텔이 그런 보증대리까지 해주는 모습은 의외라 엘비라도 꽤 놀랐다.
가문의 추격에 몰린 에드 로스테일러의 개인적인 상황은… 딱히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전후사정들을 구구절절 설명할까 싶다가도… 일단 엘비라는 클레비어스를 눕혀 놓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몇 번인가 몸을 이리저리 뒤틀던 클레비어스는, 이윽고 그 몸을 눌러대던 엘비라의 손길에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한 채 가만히 힘을 풀었다.
그렇게 잠시간 정적 속에 가만히 있다… 클레비어스는 제 손으로 눈가를 꾹꾹 눌러댔다.
“새삼… 이런 말을 해봐야 또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들겠지만…”
이제는 청량해진 하늘을 엘비라의 무릎에 누워 올려다본다. 그렇게 클레비어스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인생이라는 게…. 진짜 개같구나…”
클레비어스는 이미 경험적으로 충분하리만치 잘 알고 있었다.
엘비라 앞에서 이런 식으로 투덜대봐야, 그만 좀 징징대라며 늘 그렇듯 구박이나 당할 것이다.
허나, 엘비라는 피식 웃고서는, 그저 같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엘비라의 삶도 그리 순탄치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다.
허구헌날 언니들에게 참견만 받아오던 애니스턴 가의 골칫거리로서, 연금학회의 낙오자로서, 그리고 실베니아의 연금부 수석으로서.
인생 역경이라는 것을 구구절절 설명해볼까 하다가도, 그건 영 촌스러운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소녀는 그저 나지막이 이야기한다.
“네 말이 맞아, 클레비어스.”
학사 직원이 오기 전까지, 둘은 그렇게 한동안 별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드리워져 있던 먹구름도 어느샌가 간데 없다. 탁 트인 하늘이 시야에 꽉 찼다.
아득히 펼쳐진 별바다는 꽤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눈부신 빛만큼은 두 눈에 확실히 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