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101
101화 그믐 없는 그믐날
한겨울, 새해를 나흘 정도 남긴 연말의 새벽은 뼈가 시릴 정도로 추웠다. 골목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폐건물은 살을 에는 바람 한 가닥 막아 줄 수 없었다.
칼날같이 매서운 찬 바람에 손이 곱을 법도 하다만, 폐건물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진녹색 제복의 대원들은 말없이 무기를 손질하고, 달빛에 편지를 비춰 보는 등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알렉스도 마찬가지. 탄약포를 뜯어 피스톨에 화약을 부어 넣은 뒤 탄환을 넣고 꽂을대로 탁탁 다지고 있을 때, 옆으로 베르티에가 다가왔다.
다른 라이플맨과 달리 피스톨 한 자루와 스패드룬 한 자루를 양 옆구리에 찬 베르티에는 알렉스의 옆에 털썩 앉았다.
“…제식 라이플은?”
“막사에 놔두고 왔지. 어차피 라이플 쓸 바에는 검 쓰는 게 더 편하니.”
찰칵.
베르티에는 검집에서 스패드룬을 살짝 뽑았다 집어넣으며 알렉스의 질문에 답했다. 그러자 알렉스는 피식 미소 지으며 베르티에를 향해 물었다.
“어쭈, 이제는 막 나가겠다, 이건가? 반말도 하고 말이야.”
“어차피 우리 대사관 인원들은 도약병들이랑 같이 퇴출하라는 지시가 나와서 말이야. 빌리 미첼 중위랑 부하들은 알아서 전사 처리해 주게.”
베르티에의 말에, 알렉스는 허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 한동안 보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자, 마음속에는 시원섭섭한 감정이 돌았다.
“주재무관 노릇도 끝나는 건가?”
“영전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도로 가게 되었다는군. 왕실 군사고문단으로.”
“축하하네.”
찰칵.
탄환 장전을 마친 알렉스는 부싯돌 망치를 당긴 뒤 숄더 홀스터에 피스톨을 넣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침묵이 돌았다.
잠시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안, 알렉스는 대원들을 바라봤다. 몇몇 대원들이 목에 건 로켓을 열어 안에 있는 그림을 보고 있었다. 아마 대부분이 가족이나 애인의 초상화일 것이다. 그 모습을 보자, 약간 부럽기도 하고 후회도 들었다.
저런 거 하나 만들어 둘걸. 지금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헛헛한 후회의 감정을 또다시 한숨과 함께 털어 낸 알렉스는 시계로 눈을 돌렸다. 20분 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눈을 감자, 아델라인의 미소가 눈앞에 나타났다. 아델라인의 화사한 미소를 떠올리자 살을 에는 매서운 바람과 손을 곱게 만드는 추위가 절로 잊히는 듯했다.
추위를 잊은 알렉스가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짓자, 바로 옆에 있던 스워포드가 불안한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으십니까, 중대장님.”
“…아? 어, 어.”
다행히 알렉스가 곧바로 반응하자, 스워포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그에게 물었다.
“몇 분 남았습니까?”
알렉스는 시계를 꺼내 바라봤다. 10분 전. 저 멀리서 낮고 묵직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소리를 들은 대원들 몇몇은 고개를 들고 장비를 고쳐 잡았다.
“10분 남았다. 일하러 가자.”
알렉스의 말에, 대원들은 일제히 장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야 할 일들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따로 설명하거나 연설을 해 용기를 북돋을 필요는 없었다. 그저 그들은 동료들끼리 뭉쳐 대기해야 하는 각자의 위치로 향할 뿐이었다.
알렉스를 비롯한 파견 중대원도 마찬가지. 그들은 각자의 장비를 챙긴 채 폐건물에서 나와 뒷골목 모퉁이 곳곳에 드리운 어둠에 몸을 숨겼다. 여전히 초침은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시침이 새벽 4시를 가리킴과 동시에, 베른하르트 공방이 있는 방향에서 일제히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경매장도 덩달아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대응은 꽤 빨랐다. 10분이 지나자 굳건한 경매장의 철창문을 열고 수백 명의 사병이 무기를 든 채 오와 열을 맞춰 공방으로 향했다.
한 20분이 더 지났을까, 베른하르트 공방 상공에서 신호용 로켓이 하늘로 쏘아 올려졌다. 경매장에 있던 적 주력이 계획대로 교란에 속았다는 뜻이었다. 밝은 빛을 내며 터진 로켓의 불꽃이 하늘을 밝히자, 이윽고 경매장 주위에서도 총성이 울렸다.
경매장 주위에서 차례차례 울리는 총성 한 번에 사병 한 명이 쓰러졌다. 순식간에 밖에 나와 있던 사병들이 모두 쓰러지자, 알렉스는 옆에 서 있는 대원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월 건, 철문 따.”
“알겠습니다.”
의지할 건 달빛밖에 없는 상황에도, 2인 1조를 이루는 월 건조의 부사수는 어깨에 2미터가 넘는 총을 얹은 뒤 사수를 향해 눈짓했다.
쾅!
사수가 방아쇠를 당기자, 굉음과 함께 굳게 닫힌 철문의 잠금장치가 우그러지며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알렉스가 지시를 내렸다.
“파견 중대, 가자.”
알렉스의 한마디에, 대원들이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경매장 외문을 넘어선 파견 중대와 화기 중대는 안뜰에서 간간이 튀어나오는 사병들을 제압하며 정문으로 향했다. 높이가 족히 3미터는 넘어 보이는 육중한 나무문은, 밖의 상황을 간파한 내부 인원에 의해 잠겨 있었다.
문고리를 한번 흔들어 본 알렉스는 뒤에서 따라오던 스워포드를 향해 지시했다.
“스워포드, 폭약통!”
“설치합니다, 물러서십쇼!”
알렉스의 지시에, 스워포드는 배낭 바깥 주머니에 꽂아 두었던 폭약통을 꺼내 문고리에 설치한 뒤,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서너 걸음 물러서 벽에 몸을 붙였다.
그러자 문고리가 터져 나가며 힘없이 문짝이 열렸다. 그러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라이플맨들이 안에서 바리케이드를 쌓느라 허둥지둥하던 사병들을 일제히 쓰러트렸다.
“본부소대! 들어가자!”
본부소대에 지시를 내린 알렉스가 안으로 들어서자, 복도에 전시된 유물과 미술품들이 벽에 설치된 랜턴들의 빛을 받아 빛나는 게 보였다.
미학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도 입을 벌린 채 연신 감탄사를 흘릴법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알렉스에게는, 그리고 라이플맨들에게는 어떠한 감흥도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
“죽어라!!”
모퉁이 뒤에 숨어 있던 한 병사가 알렉스를 향해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당황하지 않고 주저 없이 피스톨을 뽑아 방아쇠를 당겼다. 수백 년 전 거장에 의해 그려진 명화에 피와 뇌수가 잔뜩 뿌려졌지만, 알렉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
“파견 중대, 화기 중대! 상황 보고!”
“화기 중대 사상자 무!”
“파견 중대 경상 2! 전원 작전 속행 가능합니다!”
두 중대에서 이어진 보고를 들은 알렉스는 피스톨에 탄환을 장전하며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파견 중대 집합! 지하로 내려간다! 고가치 표적의 생포를 우선시하되, 필요시 사살도 허가한다!”
그러자 파견 중대의 라이플맨들은 빠르게 알렉스를 지나쳐 지하로 내려갔다. 목표는 셋. 보름달 계획에 참여한 마법사 셋이었다.
* * *
“일어나셨습니까.”
아침이었다. 테이블 위에서 잠든 아델라인이 잠에서 깨 고개를 들자, 안드레이가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 체념한 듯한 표정을 한 안드레이의 시선 끝에는 눈물에 젖어 반쯤 울어 있는 알렉스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잠시 고개를 푹 숙이며 옅은 한숨을 내 쉰 안드레이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설마 했는데, 결국은 보셨군요.”
안드레이의 말에, 아델라인은 눈물로 짓무른 눈가를 비빈 뒤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안드레이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숨길 거면 더 꼼꼼히 숨겼어야 했는데. 요즘 감이 많이 무뎌졌나 봅니다.”
“…언제 받은 편지였어?”
잔뜩 쉬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오자, 안드레이는 침실에 마련되어 있던 물병과 컵을 가져와 물을 따라 건네주었다.
물을 보자 갑자기 목이 아파져 온 아델라인이 컵을 받아 들고 벌컥벌컥 물을 마시자, 안드레이는 다시 한번 물을 따라 주며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매닝햄 대위님이 마지막으로 수업하시던 날 부탁한 편지입니다. 책상 위를 정리하다가 침대에 올려놓았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군요. 제 부주의입니다.”
“아니야… 내가 멋대로 가져와서 본 건데…….”
아델라인이 조금 나아진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안드레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모르겠어. 혼란스러워.”
아델라인의 답에, 안드레이는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한 뒤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오늘은 몸 상태가 안 좋으신 것으로 나이아에게 전해 두겠습니다. 3일 뒤에는 신년을 맞아 황실에서 여는 연회에 참여하셔야 하니, 나이아도 오늘 휴식을 취하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알겠어…….”
아델라인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에서일어나자, 밤새 엎드린 상태로 보낸 탓인지 목이며 등이며 몸 이곳저곳이 아파 왔다.
간신히 몸을 가눠 침대에 몸을 누이자, 방금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잠기운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안드레이는 그런 아델라인에게 이불까지 덮어 주며 차분히 말했다.
“잘 될 겁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몸부터 챙기시지요.”
“…모든 게 괜찮겠지……?”
“당연하지요. 괜찮을 겁니다. 알렉스 그 양반이 쉽게 죽으려고. 아마 멀쩡히 눈앞에 나타날 겁니다.”
안드레이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아델라인을 안심시켰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건지, 아델라인은 순식간에 잠에 빠졌다. 그런 그녀를 배려하듯, 안드레이는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히, 아델라인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 * *
“베른하르트 공방이, 공격당했다고.”
깊은 새벽. 갑작스러운 통보 신호 전달받은 피오나는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분명 오베른의 세력들은 자신의 손안에 넣은 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마음껏 오베른을 이용해 자금을 벌어들이고 세탁할 수 있었다.
“어떻게 오베른을 손에 넣었는데…….”
오베른에서 얻은 자금으로 키운 사병들은 경매장이나 베른하르트 공방 등, 자신의 계획에 필요한 퍼즐 조각을 지켜 오고 있었다. 오베른에서 얻은 자금은 망해 가기 일보 직전 상태였던 루멘시아 백작가를 부활시키는 데 쓰였다. 마지막으로…….
“아직 ‘보름달’이 준비되지도 않았건만…….”
미완성 상태의 보름달 계획의 연구가, 오베른의 경매장 지하에 있는 암시장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만약 그 연구가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가 자신을 겨누는 칼이 되면, 그보다 끔찍한 상황은 없을 것이었다.
그때, 피오나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정보가 떠올랐다.
‘파견 중대가 프룬츠베르크에서 진행되는 연합 훈련에 참여했습니다.’
“…설마.”
지금껏 자신의 목줄을 조여 오던 파견 중대가 직접 오베른으로 간 것일까? 하지만 어떻게? 오베른에 무엇이 있는 줄 알고?
피오나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방 안을 빙빙 돌았다. 그때, 그녀의 눈에 한 장부가 눈에 들어왔다. 알렉스 매닝햄에게서 얻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장기말이 쓰던 장부.
그 장부를 보자 한 가지 가설이 피오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피오나는 서둘러 장부를 펼쳤다. 마법을 전개해 장부를 분석하자, 장부에 쓰인 모든 내용이 한가지 잉크로 주욱 쓰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같은 회사의 잉크라도, 제조 일자에 따라 성분이 다르다. 그런데도 수년간의 기록이 동일한 잉크로 쓰여 있다는 건…….
피오나는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젓고 눈을 부릅뜨며 장부를 집요하게 살폈다. 그 장부에는 자신의 지시대로 거래를 이행한 기록들이 펼쳐져 있었다. 하나의 항목만을 제외하고.
“…앤트워프 해운.”
장부를 아무리 뒤져 봐도, 앤트워프 해운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피오나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올랐던 그 가설이 단번에 완성되고 말았다.
“속았구나.”
가짜 장부. 애초에 알렉스 매닝햄 그자에게서 세이드가 얻은 장부는 세이드를, 그리고 자신을 낚을 요량으로 만든 미끼였다.
속았다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농락당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잠시 시간이 지나자, 머리를 넘어서 가슴속에서부터 분노가 일었다.
자신을 속인 알렉스에 대한, 그리고 그 알렉스 곁에 항상 붙어 있으며 자신을 방해해 온 아델라인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황후 암살 시도, 남부 대화재, 수도 재건사업 사업자 선정 같은 중요한 일을 진행할 때마다, 자신을 방해한 그녀를 떠올리자 당장에라도 끌고 와 온갖 고문을 가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자신의 목에 올가미가 걸려 있는 상황이었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빌어먹을 연놈들.”
피오나는 이를 뿌득뿌득 간 뒤, 박쥐처럼 생긴 마물을 소환했다.
“오베른에 있는 세이드에게 전해라. 지금 당장, 내가 지시한 대로 따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