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112
112화 혼자 있을 시간
팔락팔락.
“로피츠 공작령에서 방곡령을 내리자, 주변 영지에서도 차례차례 방곡령을 실시했습니다. 덕분에 가문 단위로 곡식을 매매하는 건 막았습니다. 그러나 개개인이 팔아넘기는 것까지 막기에는 행정력이 부족합니다.”
전시사령부가 창설되었다고 하나, 필즈먼의 일상에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저 육군본부의 빈 사무실에 ‘해군 연락 장교단’이 둥지를 틀었을 뿐이었다. 평소대로라면 해군성에서 ‘전시사령부 수장은 해군으로!’를 외쳤겠지만, 이번의 전시사령부는 달랐다.
“소함대 블랙의 상황은?”
“…해군 군법회의에서 안건이 진행 중입니다. 소함대 블랙의 지휘관인 카터 대령이 임무 이탈 외 두 건의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필즈먼의 질문에, 다른 참모들과 같이 서 있던 해군 장교가 들고 있던 서류를 읽어 내렸다.
소함대 블랙이 저지른 초유의 사태. 변명할 거리조차 없는 상황에, 양 본부 간의 관계는 육군본부가 주도하게 되었다. 당연히 육군본부와 해군본부를 아우르는 전시사령부의 수장은 필즈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덕분에 곤란한 상황을 피한 이도 있었지만.
“소함대 블랙을 최대한 빨리 정상화하라고 해군성에 지시하도록. 주요 무역 항로의 제해권 장악을 서둘러야 물가 상승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을 거고. 우리에게는 한 척의 배가 소중하니. 알겠나, 윌포드 대위?”
“알겠습니다.”
“다음, 지역 연대는 얼마나 소집되는 중이고 예비역 소집은 얼마나 진행 중이지?”
“지역 연대는 지역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체로 중부와 북부 지역은 빠르게 지역 연대와 예비역의 소집이 이뤄져 대부분 훈련 2주 차와 그 이후 과정에 돌입했습니다. 그러나 남부 지역의 경우 소집 자체가 느린 상황입니다.”
“헌병대와 감찰대를 파견해 영지별로 지역 연대의 군적과 장비 현황을 다시 파악하도록. 거부하면 강제 집행해. 지금까지 매년 보조금 받아 처먹었으면 유지는 했어야지.”
“옙.”
“그래, 그러면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 각자 돌아가서 일해. 일하다 급한 사항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고.”
필즈먼의 말에, 장교들은 우르르 집무실을 나섰다. 그들이 떠나가자, 필즈먼은 달력을 바라봤다. 벌써 2월이 2일밖에 남지 않고 있었다.
“벌써 14년이 된 건가.”
후견인 같은 번거로운 건 들이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자신이, 유일하게 후견인을 들인 날이 벌써 14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 피비린내 나는 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리처드.”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한쪽 벽면에 걸린 깃발을 바라봤다. 서던 퓨질리어 연대의 군기. 지금은 사라진 부대의 군기를 바라보며 돌아오지 않을 대답을 잠깐 기다린 그는 다시 책상으로 시선을 향했다.
지금은 전쟁 중이었다. 앞만 보고 달리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뒤만 하염없이 보고 있을 수도 없었다.
* * *
[휴가가 끝나는 3월 10일까지 수도 파견 중대 관사로 복귀할 것을 명령함.]자신의 앞으로 날아온 명령서. 알렉스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한숨을 후우, 내뱉었다. 다리는 꽤 많이 나아졌다. 어쩌면 부상 이전보다도 더 나아진 것 같았다.
그는 서재에서 가져온 지도책을 바라봤다. 말을 빌릴 수 있다면 왕복 6시간밖에 안 걸리는 거리였다. 비록 그곳에 간 것은 두어 번밖에 안 되지만, 근처의 길은 알고 있었다.
내일모레 갈까. 알렉스는 고민했다. 그러나 아델라인이 눈에 밟혔다. 어제 아침에 받고 싶은 거 없냐고 묻는 아델라인의 질문이 떠올랐다. 물론 아침에는 간신히 대화 주제를 이리저리 비틀어 말을 얼버무렸지만, 그 의도는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알아 버린 건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델라인이 자신의 생일을 알아 버렸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무언가를 하려 하겠지.
생일 축하를 받아 본 건 열네 살 생일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생일이라 부를만한 날은 사실 생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생일을 구태여 먼저 밝히지도 않았고, 그래서 생일 선물도 받은 경험이 없었다.
라이플맨들은 이런 면에서 참 좋았다. 1년이 지나도 생일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길 법도 하다만, 아무도 구태여 알렉스에게 생일을 묻지 않았다. 그래서 아델라인을 상대로도 어영부영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는 건가…….”
알렉스는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내일 아침 출발하려면, 오늘은 필요한 물건들을 미리 준비해 두는 게 좋겠지.
알렉스는 평상복을 몸에 걸쳤다. 농촌의 읍내에 녹아들려면 역시 정장보다는 무채색의 모직 옷이 더 적합했다. 옷을 갈아입은 그는 필요한 몇 가지 물건을 챙겨 저택을 나와 읍내로 향했다.
오랜만의 귀향이었고 방문이었다. 빈손으로 찾아갈 수는 없었다.
* * *
“다행히 외곽의 농촌들도 방곡령이 잘 지켜지는 것 같네요, 문제는 다른 영지인데… 다른 영지의 행정력이 구석구석까지 닿지 않아서 곡식이 새 나가는 중인가 봐요.”
“이런…….”
읍내의 한 찻집. 소박한 차림으로 마실 나온 두 사람은 차를 천천히 홀짝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저택 안에서 보고서를 보는 것만으로도 로피츠 공작령 내의 일을 처리하는 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읍내로 나오자 조금 다른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주변 영지들에서 곡식이 유출되고 있었다. 당장 곡식의 가격을 평소보다 후하게 쳐주니, 급전이 필요한 몇몇은 그 유혹에 혹해 당장 먹어야 할 곡식마저 팔아 버린 것이다.
“막을 방법이 없는 게 애매하네…….”
“다른 영지니까요. 일단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겠죠. 협력을 제안한다든지 하는 방법도 있지만, 주변의 영지가 남부당 세가 강한 곳이어서…….”
나이아의 말에, 아델라인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재건위원회에서 스틸웰 공업의 손을 들어줬던 그녀가 주변 영지의 귀족들에게 호의적으로 보일 리 없었다.
“그나저나… 공녀님.”
“왜?”
“대위님 생일 말인데요…….”
나이아는 잠시 아델라인의 눈치를 본 다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혼자 계실 시간을 드리는 건 어떨까요.”
“…음?”
예상치 못한 말에, 아델라인은 떼어 내던 스콘 조각을 내려놓았다.
“무슨 말이야, 그게?”
“사실, 저번에 공녀님께서 처음 트레포드에 가셨을 때, 제가 대신 위원회에 참석했잖아요.”
“응.”
“그때, 마일즈 의원님께서 던컨 중령이라는 분을 한 번 언급하셨거든요, 지나가듯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돌아가신 대위님의 아버님과 함께 언급하셨어요.”
“…던컨 중령?”
“저번에 알려 주신 이름과 같은 성을 지니고 계셔서, 저택 지하의 문서 저장고에서 지난 신문 몇 부를 찾아봤어요. 그러니까 그 던컨 중령이라는 사람의 풀네임을 알아낼 수 있었어요.”
아델라인은 미묘한 시선으로 나이아를 바라봤다. 자신의 추측이 맞냐는 듯 눈빛으로 묻는 그녀에게, 나이아는 고개를 살짝 숙여 답했다.
“부고 기사였어요. 대략 14년 전 3월 중순 신문에 있는…….”
[부고: 리처드 C 던컨. 향년 45세.]나이아가 내민 쪽지에는 알렉스의 책에서 봤던 이름과 그 이름의 부고 기사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즐링턴의 남작, 서던 퓨질리어 연대 13대 연대장.피오룬 전역 비르텐 회랑에서 발생한 격전에서 중상을 입은 뒤 전사. 현지에서 장례식을 치름.]
기사의 중간에는 전사한 날짜도 함께 적혀 있었다. 그 날짜를 보자, 아델라인은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입을 손으로 가릴 수밖에 없었다.
“…….”
책에 적혀 있던 알렉스의 생일과 같은 날짜였다. 알렉스의 열다섯 번째 생일이, 던컨 중령의 전사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찾아보니까… 이 전투에 관해서 다룬 기사를 찾을 수 있었어요. 증원군이 도착했을 시점에는 연대 병력의 8할이 전사 내지 중상이었다고, 특히 장교와 부사관들은 전원 전사했다고 나와 있었어요.”
나이아는 슬픈 눈으로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그 당시 군기 호위 부사관을 맡고 계셨던, 스콧 매닝햄 중사도 아마 이 전투에서…….”
나이아가 말끝을 흐리자, 아델라인은 손을 살짝 내저었다. 더 들을 필요는 없었다. 왜 알렉스가 자신에게 생일을 말하지 않았는지, 어제 아침에는 왜 그리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리려 했는지. 이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2월의 마지막 날은, 알렉스에게는 그 어떤 날보다도 외롭고 추운 날이었던 것이다.
잠시 잔을 만지작거리며 수면에 흐릿하게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 아델라인은 나이아를 향해 조심스레 질문했다.
“서던 퓨질리어 연대는 그 뒤로…….”
“군기는 지켜졌기에 다시 재편성하자는 논의도 있었지만, 결국 잔존 인원을 다른 연대의 보충병으로 분산시키고 연대를 해산시켜 버렸어요. 자연히 그 뒤를 따르던 종군 가족들도 제국 본토로 귀환해 이리저리 흩어졌죠.”
“…….”
“던컨 부인도 1년 뒤에 급사하시고, 이어받을 사람이 없어진 이즐링턴은 곧바로 황실 직할령으로 귀속되었어요. 기본적인 행정 업무는 공작가에서 위임받아 진행 중이고요.”
나이아의 말에, 아델라인은 어느덧 미지근해진 홍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설탕을 넣었음에도 차가 씁쓸했다.
그때, 창밖으로 알렉스가 보였다. 읍내의 조그마한 상점에서 종이봉투를 품에 안고 나오는 그를 보자, 아델라인이 습관적으로 창문을 열고 그를 부르려 했다.
그러나 창문을 반쯤 열던 순간, 아델라인은 다시 창문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종이봉투에는 천으로 만든 붉은색 양귀비꽃이 한 묶음 담겨 있었다.
양귀비꽃.
나이아에게 문학 수업을 들었던 아델라인은 그 꽃말을 잘 알고 있었다. ‘쓰러진 병사’, 그리고 ‘위로’. 전사한 병사들의 무덤 위에 핀다 하여 그리고 제국의 병사들이 입는 붉은색 제복의 색을 띠고 있다 하여 추모의 의미를 담고 있는 꽃.
창문을 통해 알렉스의 모습을 잠깐 눈에 담은 아델라인은 이내 블라인드를 내렸다.
지금 그를 눈앞에서 마주한다면, 분명 자신은 지금 마음속에 가득 들어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알렉스는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달래 줄 것이다. 감정을 털어 내야 하는 건 당사자인 알렉스인데, 그런 순간마저 앗아 가고 싶지 않았다. 알렉스가 원하는 대로 온전히 그만의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것이 맞는 일이었다.
“…조금만 늦게 들어가자.”
아델라인은 식어 버린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 넣었던 설탕이 무색하게, 여전히 찻물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