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141
141화 영주로서 내디딘 첫걸음
잠시 뒤, 아델라인의 몸을 안고 있던 팔에서 힘이 풀렸다. 아델라인이 반걸음 물러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붉어져 있는 알렉스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제 좀 마음이 괜찮나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로 얼룩져 있을 자신의 얼굴이 부끄러웠는지, 그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뭐. 옷이 망가지는 것도 아닌데.”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알렉스가 바라보고 있던 비석을 올려다봤다. 마지막 비석은 비르텐 회랑이라는 지명과 함께 15년 전의 2월 28일이라는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아델라인은 알렉스가 하염없이 그 비석을 바라보고 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머나먼 타향에서 묻힌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이었기에, 알렉스는 희미해진 기억을 되짚어 그들을 떠올리고 있던 것이었다.
“…다들 어떤 분이셨는지, 기억하시나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손을 들어 한 사람의 이름을 짚었다.
“2 중대장님은… 연대장님께서 바쁘시면 애들을 대신 가르쳐 주셨던 분이에요. 주로 수학을 많이 가르치셨죠. 그리고… 연대 보급관님은 가끔씩 부식이 남으면 몰래 아이들에게 하나씩 챙겨 줬었죠.”
알렉스는 천천히 비석의 이곳저곳을 짚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 목소리는 단순히 과거에 만났던 사람을 떠올리는 게 아니었다.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복잡한 감정이 오롯이 묻어나는, 깊고도 묵직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알렉스는 한참 동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러던 중, 너무 자신만 말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알렉스가 말을 멈추고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아. 제가 너무 혼자 떠들기만 했나요?”
그러나 아델라인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어 그를 안심시켰다.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알렉스가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놓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니에요, 내가 말했잖아요. 함께 기억하게 해 달라고.”
“…고마워요.”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렇게 잠시 뒤, 감정이 차분히 가라앉자 둘 사이에는 옅은 어색함이 감돌았다.
그때, 알렉스의 입이 먼저 열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은 해 보셨나요?”
“아니요, 아직은요. 뭐 안드레이가 제안한 일은 다 하면 될 것 같은데. 더 할 일이 있을까요?”
그러자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델라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예요. 이즐링턴의 남작으로서, 이 땅을 다스리는 영주로서 할 수 있는 일 말이지요.”
“힌트라도 주시면 안 될까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다면…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말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세요. 그러면 될 거예요.”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네. 아델라인이 할 수 있고, 아델라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알렉스는 그 말을 남긴 뒤 슬며시 아델라인의 손을 놓았다.
“자, 그러면 저는 제 대원들에게 가 볼게요. 한번 고민해 보세요.”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아델라인을 뒤로 한 채 멀어졌다. 혼자 남은 아델라인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대체 그게 뭘까.”
아델라인은 고민에 빠진 채 막사 건물로 들어왔다. 그러자 나이아가 기다리고 있었던 듯, 그녀에게 다가왔다.
“공녀님. 머무실 곳이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머물 곳? 어디인데?”
“전대 남작께서 머물던 참나무 저택입니다. 이 지역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저택이라 며칠 전부터 정비를 시작했는데, 방치되어 있던 기간에 비해 상태가 좋아 빠르게 준비가 끝났습니다.”
나이아의 말에, 아델라인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그 저택.”
그러자 나이아도 시선을 회피하며 자신 없다는 목소리로 답을 했다.
“조금 전에 밀든 하사님하고 스워포드 상병님이 전체적으로 점검했다니 괜찮지 않을까요…….”
“…….”
“그 저택 말고는 머무실 곳도 없고… 그렇다고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뺏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이아의 말에, 아델라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가 보자.”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마차에 올랐다. 그러나 마차를 탄 게 무색할 정도로, 마차는 순식간에 저택에 다다랐다. 타고 내리는 시간을 생각해도 고작 1분밖에 안 되는 거리에, 아델라인은 뻘쭘한 표정으로 나이아에게 제안했다.
“다음부턴 걸어 다닐까?”
“그래도 될 것 같네요…….”
아델라인은 시선을 돌려 저택을 바라봤다. 물론 야밤의 달빛에 비친 모습과 한낮의 모습을 비교하기에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저택은 꽤 멀쩡해 보였다. 저번에는 마치 곧 쓰러질듯한 모습이었는데.
“저번에 왔을 때랑은 조금 달라 보이네.”
“저번에는 어땠는데요?”
“다 쓰러져 가는 모습이었지. 물론 안은 나름 멀쩡했지만. 아마…….”
아델라인은 표정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피오나. 피오나가 머무르고 있었으니 그랬겠지만.”
“뭐, 저희로서는 좋은 일이려나요. 일감이 줄었으니.”
“저주라도 걸려 있는 거 아니야? 마녀의 저택이잖아.”
“긍정적으로 생각하죠, 뭐. 밀든 하사님과 스워포드 상병님이 확인하시기도 했고. 자, 들어가요.”
나이아의 권유에, 아델라인은 안으로 몸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가자, 수도에서 데리고 온 시녀들이 하녀들을 통솔하며 저택의 곳곳을 청소하고 있었다.
현관으로 들어서는 첫 걸음. 무심코 아래를 바라보자, 아델라인의 눈에 알아보기 힘든 문자가 보였다. 그것을 읽어 보려 아델라인이 멈춰 서자, 반걸음 뒤에서 따르던 나이아도 덩달아 멈춰 그녀를 따라 아래를 내려다봤다.
“에드 네츄러렘 네츄러렘?”
아델라인의 서투른 낭독에, 나이아가 곧바로 정정하며 조금 더 교정된 발음으로 읽어 줬다.
“고대 제국어네요. 아드 네츄럴리엠 네츄럴리엠, 이라고 읽는 거예요. 저도 제대로 된 발음은 아니지만…….”
나이아는 오랜만에 보는 고대 문자를 해석하기 위해 잠시 뜸을 들인 뒤, 해석을 내놓았다.
“뜻은… 자연히, 아니, 당연히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만들기 위해. 라고 해석하는 게 맞겠네요.”
그 말에, 알렉스가 해 준 말이 겹쳐 들렸다.
“당연히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만들기 위해…….”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세요.’
그 순간, 아델라인의 머리에서 불꽃이 이는 듯했다.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전쟁으로 귀족가가 부담해야 하는 ‘도의적인 부담’이 늘자, 남부의 귀족들은 그 부담을 평민들에게 전가했습니다.’
‘제국민들의 통행권 및 이주권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보장된 권리 중 하나에요.’
당연한 것, 그리고 당연하지 않은 것.
당연히 주어진 것을 당연히 만들기 위해.
“…나이아. 해 줄 일이 있어.”
아델라인은 나이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녁에, 사람들을 모아 줄 수 있어?”
* * *
“그래서, 일단 사냥꾼들 지휘 관리는 밀든이 해 줘. 안드레이가 고용해 뒀으니, 지시에 문제가 있지는 않을 거야. 라이플맨 둘 데리고 사냥꾼들과 함께 협력, 주변 순찰 영지 경계, 넘어오는 사람 있나 확인해.”
“알겠습니다. 발견하면 어떻게 대응합니까?”
“티 나게 지켜보면서 접근해. 선제 발포는 허가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켜보는 눈이 있는 걸 알면 함부로 행동하기도 힘들 거야.”
알렉스의 지시에, 밀든은 수첩으로 메모를 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다음, 정찰은 서셈튼하고 그로쉬가 하자. 주변 영지 돌면서 상황 파악해. 괜히 숨어들려고 하지 말고, 그냥 분위기 파악만 하면 돼.”
임무 분담은 차근차근 이어졌다. 파견 중대의 위험 부담을 최대한 덜기 위해, 알렉스를 포함한 고작 8명만이 지원단으로 꾸려졌다. 인원은 적었지만, 해야 할 일은 적지 않았기에 고민과 의논이 계속 이어졌다.
산적해 있는 의논 사항을 하나하나 떼어 가며 논의를 이어 나가던 중, 잠시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그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스가 창가로 다가갔다. 막사의 창문을 통해 연병장을 바라보자, 수백 명의 사람이 웅성거리며 서 있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웅성거림을 귀에 담았다.
익숙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제한된 정보만을 가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라는 명령을 받는다. 아는 건 없고 추측만이 난무한다. 피어나온 불안감은 점점 전염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뚫고 벗어날 적극성은 없다.
그 뒤에 이어지는 건…….
“뭘 그리 생각하십니까.”
스워포드의 질문이 들려왔다. 그러자 알렉스는 시선을 살짝 돌려 스워포드를 흘겨보며 답했다.
“…호더빌. 그때가 떠올라서 말이야.”
“생뚱맞으십니다, 거…….”
그러나 들려오는 웅성거림에 잠시 말을 흐린 스워포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닙니다만. 여기는 호더빌도 아니고 17연대의 머저리들도 없습니다. 그리고… 남작께서 생각 없이 사람을 모으신 것도 아니겠지요.”
스워포드의 말에, 알렉스는 다시 시선을 돌려 연병장을 바라봤다. 아델라인이 나이아와 함께 걸어와 사람들 앞에 섰다.
“…….”
알렉스는 창가에 몸을 기댄 채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걱정과 우려, 그리고 그것보다 큰 응원의 마음을 담아서.
* * *
아델라인은 사람들 앞에 섰다. 제대로 된 연단을 마련할 시간도 여유도 없어, 아델라인이 오를 연단이라고는 공작가에서 필요한 물건을 가져올 때 사용했던 짐 상자 하나가 다였다.
자신을 향한 시선이 쏟아졌다.
걱정, 우려, 두려움. 아델라인의 키는 눈앞의 남자보다 작았지만, 무심코 눈을 마주친 그의 몸은 움찔,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자, 자신의 이름 뒤에 붙어 있는 ‘로피츠’라는 성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었다.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건만, 그 존재만으로도 눈앞의 평민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평생을 귀족들 아래에서 살아온 그들에게, 자신은 한없이 두려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델라인은 상자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모두를 눈에 담기에는 약간 부족했다. 순간, 아델라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지가 스치고 지나갔다.
“모두, 자리에 앉도록 하라.”
아델라인의 말에, 군중들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이내,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앉기 시작했다. 당연하다는 듯, 그들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또다시 정적이 군중들 사이를 휘감았다.
예상했던 행동이었지만, 바라던 행동은 아니었다. 아델라인은 상자 위에 걸터앉으며, 군중들을 향해 말했다.
“편히 앉도록.”
아델라인의 말이 그 정적을 깼다. 그러자 더욱더 당황한 표정을 지은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한평생 귀족을 떠받들며 살아온 그들에게는, 아델라인의 말이 낯설 뿐이었다.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니다. 편히, 바닥에 앉도록. 이렇게.”
아델라인이 바닥에 털썩, 앉았다. 공작가의 외동딸이 평민들과 같은 바닥에 앉은 것이다. 그러자 서서히, 하나둘씩 아델라인을 따라 바닥에 앉았다. 그러자 그제야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상자 위로 올라갔다.
“그래. 그렇게 앉아서 들어 주도록. 내가 키가 크지 않아서, 상자에 올라도 모두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서.”
아델라인의 말에, 사람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의구심. 두려움과 걱정만이 가득하던 눈빛에, 한 가닥 의구심이 깃들었다.
“다들 알겠지만, 내 이름은 아델라인 폰 로피츠이다. 로피츠 공작가의 외동딸이며, 제국 3급 훈장을 받은 여사이고, 지금은 이 이즐링턴의 남작 작위를 받아 여기 서 있다.”
아델라인의 말에, 사람들의 눈빛에는 또 한 번 한 가닥의 의구심이 더해졌다. 그렇게나 대단한 사람이, 왜 방금 자신과 같은 바닥에 앉은 건가. 귀족이라면 감히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칠 수도 없었던 이들이었기에, 의구심은 점점 커져 갔다.
“사실, 이즐링턴을 와 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월의 마지막 날, 있는 것이라고는 몇 채의 폐가와 버려진 막사, 그리고 마녀의 저택뿐인 이곳에 우연히 발을 디디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었고, 그렇기에 앞으로도 버려진 땅으로 남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델라인은 지난날 이즐링턴을 찾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연설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너희들은 이 땅으로 귀족들의 손길을 피해 도망쳤고, 나도 이곳의 영주가 되어 여기 왔지. 마치 너희들을 쫓아온 것처럼.”
아델라인의 말에 많은 이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고향을 떠나 도망친 탈주자들. 그것이 여기 모인 이들의 공통점이었다. 다시금 사람들의 눈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아델라인의 말이 분위기를 뒤집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만들기 위해. 이즐링턴의 영주이자 서던 퓨질리어 연대의 연대장들이 품어 온 문장이고, 내가 이곳에 온 이유이다. 너희들을 쫓아온 것이 아니라.”
그러자, 아델라인을 향한 시선이 하나둘씩 바뀌어 갔다.
“너희들이 떠나고 싶다면, 떠나라. 당연한 권리이다. 너희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당연한 권리이다. 우물을 파 물을 마시고 싶다면 그렇게 하고, 밀을 빻아 밀가루를 얻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고, 빵을 구워 먹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당연한 권리이다.”
사람들의 눈에서 두려움이, 그리고 걱정이 걷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희망이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 당연한 것들을 위해, 나는 이 땅의 영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너희들을, 내 영지민을 지키고 보듬을 것이다. 그러니…….”
아델라인은 숨을 고른 뒤,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말을 맺었다.
“두려워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