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148
148화 새로운 방벽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아델라인이 미소와 함께 그를 맞이했다.
“이즐링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스틸웰 상무.”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덕분에요. 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들어와서 이야기하지요.”
아델라인의 제안에, 스틸웰은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길을 달려오며 들렀던 공작가의 본가 저택보다는 훨씬 아담하고 소박했지만, 그래도 세월이 은은히 스며든 정취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 느낌도 이내 닥쳐오는 현실의 서늘함에 파묻히고 말았다. 북부의 공단에서는 목재 수급이 더더욱 힘들어지고 있었다. 신대륙에서 목재를 수송하는 상선의 7할이 프랑크 해군에 사냥당하거나 가로막힌 초유의 사태는 스틸웰 공업뿐만 아니라 제국의 전체 산업을 차차 조여 오고 있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은 이즐링턴의 숲. 역대 연대장들이 방어벽으로 쓰기 위해 작정하고 키운 숲은 남작령 대부분을 덮을 만큼 커졌으며, 나무들의 수령도 높았다.
누구라도 탐낼만한 나무였지만, 그렇다고 서던 퓨질리어 연대의 반대를 무릅써 가며까지 얻어야 할 수량은 아니었기에 아무도 그 숲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 앉으시겠어요?”
아델라인이 자신이 앉을 자리의 맞은편을 가리키며 자리에 앉았다. 마일즈는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뒤, 시녀가 찻잔에 홍차를 따르는 것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때, 아델라인이 마일즈를 향해 물었다.
“오시는 길은 어떠셨나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마일즈는 한차례 정신을 가다듬었다. 잠시 차를 홀짝이며 시간을 번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래로 내려오니 날이 훨씬 따듯하고 온화했습니다. 여행의 피로를 잊을 만큼 따스한 햇살이 좋더군요.”
“다행이네요. 자, 그래도 사업가의 시간은 금과 같으니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아델라인의 말에 마일즈는 더욱더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즐링턴은, 벌목권을 판매할 의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건이 맞는다면 벌목 영역을 넓힐 수도 있습니다.”
아델라인의 말에, 마일즈는 침을 삼켰다. 군침은 확실히 아니었다. 시시각각 바싹 말라 가는 목을 조금이나마 적시기 위한 노력이었다.
과연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북부의 상황을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아델라인은 자신에게 어떤 조건을 제시할까.
“단, 조건이 있습니다.”
아델라인의 목소리가 마일즈의 귀를 파고들었다. 예상했던 말이었지만, 몸에는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말로 구슬릴 수 있는 상대도, 뇌물로 현혹시킬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거기다가 지금은 아델라인에게 완전히 추가 기울어 있는 상황.
여기서 너무 많은 것을 내준다면, 분명 형, 하워드와의 경쟁에서 뒤처질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그는 애써 갈등을 마음속으로 꾹꾹 누르며 아델라인을 향해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그러자 아델라인은 마일즈를 향해 조건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이즐링턴의 숲을 가로지르는 포장도로, 영지 내 주택가의 상하수도 시설, 그리고 100명가량이 거주할 수 있는 관사까지. 우선 인구 1만 명을 상정하고 영지의 기반 시설을 구축해 주십시오.”
“…….”
“목재의 가공은 이즐링턴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이 사업에서 이즐링턴의 인력을 우선 고용해야 한다는 건 더 말할 필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델라인의 말에, 마일즈의 손이 떨렸다. 그가 항의의 뜻을 담아 소심한 반박을 하려는 찰나, 아델라인의 손에 계약서가 들렸다.
“이것이 남부 재건 사업의 진행 속도 유지를 위한 목적의 벌목권 판매 조건입니다. 벌목권에 대한 비용에 대해서는 협상을 통해 결정할 예정입니다. 수량은 대략… 이 정도.”
아델라인이 계약서를 건네자, 마일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수도 남부 재건 사업의 진행을 3개월간 유지할 수 있을 만한 물량에서 아주 살짝 웃도는 분량이었다. 목재를 다른 곳에 팔 수도 없으며, 그런데도 영지의 기반 시설은 직접 돈을 들여 지어 줘야 했다.
그러나 이걸 받지 않으면, 재건 사업의 진행에 문제가 생길 것은 분명했다. 스틸웰 공업 대신 루멘시아 백작가를 밀어줬던 남부당이 이 상황을 놓칠 리 없었다.
그의 미간이 더욱 좁혀지며, 고뇌로 가득한 그의 머릿속을 내비쳤다. 결국 한참을 고민한 끝에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아델라인이 또 다른 계약서를 내밀며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벌목 구역을 확대하는 조건입니다.”
그러자 그는 계약서를 들어 내용을 살폈다. 그 내용을 읽어 본 그는 아델라인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훨씬 더 넓어진 벌목 영역은 물론이고, 10년간 지대 면제, 지방세 면제. 공작령 내 사업 우선 고려 대상자 등등.
아델라인이 먼저 내밀었던 계약서와 달리 호의적인 내용으로 가득했다. 혹시나 독소 조항이 포함되어 있을까, 마일즈는 꼼꼼히 계약서를 살폈다.
아델라인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며 시간을 내어 주었다. 몇 분이 지나고 나자, 마일즈는 천천히 아델라인을 응시하며 옅게 떨리는 목소리로 생각을 말했다.
“온도 차가 크군요.”
“당연하지요.”
아델라인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 목을 축인 뒤, 창밖으로 보이는 이즐링턴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사업가가 아닙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지를 경영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지요.”
그녀는 또 한 번 홍차로 입술을 적신 뒤,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의 도움과 제때 찾아온 행운 덕에 고비를 넘겼지만, 제 능력은 그뿐입니다. 이 앞으로 나아가려면, 제 역량으로는 부족하겠지요.”
아델라인은 온화한 미소와 함께 마일즈를 바라봤다.
“상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용이라지요?”
“…그렇습니다. 모든 상행위는 약속에서 시작해 약속으로 끝나니까요.”
그러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첫 번째 계약서를 짚어 보였다.
“이렇게 말씀드리게 되니 부끄럽기도 하지만, 첫 번째 계약서는 일종의 시험이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무리한 조건들을 몰아넣었고.”
아델라인이 부끄럽다는 듯 눈웃음을 짓자, 마일즈도 머쓱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솔직히,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이 조건을 받아들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델라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함께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님.”
“계약서에 쓰인 대로, 이즐링턴의 지대는 10년간 받지 않을 거예요. 이후에도 검토를 통해 이 조건을 연장할 수도 있고요.”
아델라인은 마일즈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러니, 이즐링턴을 남부의 중심지로 키워 주세요. 저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 손을 본 마일즈는 허리를 펴고, 아델라인의 손을 가볍게 잡아 흔들었다.
“신뢰에 보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마일즈가 떠나고 나자, 저택은 원래의 분위기를 되찾았다. 아델라인은 테라스에 앉아, 나무들 사이로 저물어 가는 저녁노을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그때, 그 테라스에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델라인?”
한 손에는 와인 병을 든 채, 다른 손으로는 재주도 좋게 유리잔과 안주 접시를 든 채 나타난 그는 아델라인이 앉은 의자 옆에 마련된 테이블에 그것들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노을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그의 물음에 답했다.
“그냥, 이 풍경이 보기 좋아서요. 노을이 아름답기도 하고.”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알렉스를 향해 물었다.
“알렉스는 괜찮아요?”
“뭐가요?”
“이즐링턴이, 알렉스가 기억하던 것과는 많이 달라질 텐데.”
그러자 알렉스는 와인을 두 잔에 따르며 답했다.
“저야 뭐, 괜찮아요.”
운을 뗀 알렉스는 자신의 잔에 담긴 와인으로 입술을 축인 뒤,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마음에 담고 있었던 건, 이즐링턴이라는 공간이 아니에요. 이즐링턴이든 아니든 함께했던 사람들이지.”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아델라인에게 잔을 건넸다.
“이곳에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호기심에나마 그들의 이름을 들여다보는 사람들도, 그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려는 이들도 생기겠죠.”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그거면 충분해요. 그들이 잊히지 않는 것으로, 저는 만족해요.”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슬픔이 남아 있었다. 그 슬픔은 무슨 수를 써도 지워지지 않을 슬픔이었다.
그저 땅을 파묻고, 그 위에 화려한 저택을 짓든, 높이 치솟은 굴뚝을 가진 공장을 짓든, 하다못해 돌이라도 주워 석탑이라도 쌓아야 간신히 억누를 수 있는. 영원히 지지 않을 슬픔이었다.
아델라인은 잔을 내려놓은 뒤, 알렉스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알렉스에게 이보다 나은 위로는 없을 것이기에, 아델라인은 말없이 오늘따라 더 차갑고 시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차갑고 딱딱하던 손이 아델라인의 손길에 녹아 부드러워졌을 즈음, 알렉스의 입이 열렸다.
“아델라인은, 아쉽지 않아요?”
“뭐가요?”
“한 몫 당길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알렉스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아델라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한 몫 당겨서 뭐 하려고요.”
“뭐, 곧 있으면 사교 시즌인데, 드레스라도 한 벌 맞춰야 하지 않겠어요?”
“이미 드레스는 많네요, 수도 가면 방 하나가 다 드레스룸이고.”
아델라인은 비어 있는 손으로 와인을 홀짝이며 말했다.
“사람도 땅도, 다 거저 받은 것뿐이에요.”
아델라인은 어느새 어두컴컴해진, 그 대신 새로이 밤 풍경에 빛을 더하는 마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걸 밑천 삼아 장사하는 건, 어째 양심에 찔려서 말이죠.”
그 말에,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테라스는 어느덧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아델라인의 하늘색 눈동자만큼은 별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이래서 아델라인을 싫어할 수 없다니까요.”
그는 조심스레 아델라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볼에 닿았던 입술은 어느덧 입술에 맞닿고, 목덜미에 닿았다.
아직 날씨는 밤기운이 서늘한 늦봄의 밤이었지만, 그들에게만큼은 유난히 더운 초여름 밤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