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150
150화 시들어 가는 거목
황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옆으로 비켜선 풀턴을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황제를 바라봤다.
“폐하!”
“황후. 나한테 볼 일이 있다고 하였소.”
“네, 그렇습니다!”
그녀는 황제에게 다가가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공작이, 로피츠 공작이 황실을 향해 기어코 이빨을 들이밀었습니다!”
황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황제의 양팔을 잡으며 간절히 외쳤다. 자신의 목에 이빨이 들이밀어지는데 세상 누가 동요를 안 하겠는가. 아무리 로피츠 공작을 신뢰하던 황제라도, 이 소식을 들으면 그 신뢰를 의심으로 바꿀 것이었다.
“그러니 대비를 하셔야…….”
그러나 황후가 고개를 들어 황제의 눈을 바라보자, 그녀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황제는 평온하고 잔잔한 푸른 눈을 황후에게 향하며 되물었다.
“무슨 대비?”
“…당연히, 공작을 내치시고 황실의 권위를 세울…….”
“무슨 권위 말이오?”
황제는 자신을 잡은 황후의 손길을 부드럽게 걷어 낸 뒤, 책상 위에 있는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그다음, 물을 잔 가득 채운 그는 황후에게 잔을 건넸다.
“자, 들이키시오. 전장에 나가 있는 황태자 걱정에 정신이 혼탁해진 모양이니, 머리를 식히시는 데는 도움이 될 거요.”
황후의 눈빛이 대체 무슨 생각이냐 묻고 있었지만, 황제는 다시 한번 잔을 들이밀며 그녀에게 말했다.
“마시시오.”
그러자 황후는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잔을 들이켰다. 몇 번이고 숨이 차 뱉어 낼 뻔했지만, 그래도 잔을 비운 황후는 황제를 바라봤다.
“이제 좀 진정이 되었소?”
그 물음에, 황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감이 엄습해 왔지만, 황후의 눈은 여전히 희망을 품은 채 노구의 황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황제는 그 시선에서 몸을 돌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수많은 사람이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황궁과 수도가 그의 눈에 담겼다.
“황궁은 넓고, 그 수도는 더 넓구려.”
“그, 그렇습니다.”
“한데 어찌 이것으로 만족을 못 하시오?”
황제의 말에, 황후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자 황제는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로 흘긋 황후를 바라본 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비록 훌륭한 지아비는 아니나, 황후의 이름에 부족하지 않도록 이 황궁을 내어 주었소. 황궁의 곳간에 채워지는 금은보화로 체면치레는 부족하지 않게 했을 테지.”
그러자 황후의 동공이 흔들렸다. 수년, 아니 수십 년을 세상살이에 무관심한 척, 흙이나 파고 다녔으면서. 대체 언제부터 꿰뚫어 본 거지?
“황후, 그리고 황태자가 위험해지지 않는 선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주었소. 그런데 무엇을 더 바라시는 건가, 황후는?”
황제의 물음에, 황후는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두 팔 두 다리 같게 태어난 게 사람이라 하나, 그 사람 사이에는 엄연히 위아래가 있는 법입니다. 평민은 귀족을 떠받들어야 하고, 귀족은 황실을 보필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황후가 고개를 들자, 황제의 눈이 황후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계속하시오, 황후.”
“…….”
“하시오.”
나지막하나, 그만큼 황후의 귀에 들어오기에는 충분한 묵직함이었다. 그러자 황후는 몸을 떨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 순리가 뒤집혀 평민이 귀족의 목을 조르고, 귀족이 황실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형국입니다. 지엄하신 황명으로, 다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십시오.”
정적이 다시금 서재를 휘감았다. 기다리다 못해 황후가 고개를 들었을 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황후. 60년 전에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는가?”
황제의 물음에, 마흔여섯의 황후는 고민 끝에 간신히 입을 열어 그 물음에 답했다.
“태어나기 전이었습니다.”
“50년 전에는?”
“…태어나기 전이었습니다.”
“그 10년 동안, 이 황궁에는 피가 마를 날이 없었지. 서른이 넘던 형제자매들은 고작 둘만 남았고.”
담담한 목소리가, 고요한 집무실을 채웠다.
“앉아 보니 딱딱하기만 한 황좌가 뭐라고 그리도 싸웠을까. 그래서 41년 전, 그러니까 황후가 다섯 살일 때. 나는 소리 없이 기뻐했소. 황좌에 들러붙어 끊임없이 피를 갈망하던 귀신이 날아갔다, 생각했으니. 하지만…….”
잠시 서른다섯의 자신을 회상한 황제는 황후를 다시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 혈향이, 어느새 세월에 날아가 버린 듯하구려. 그 비릿한 향을 맡지도 못한 채 황좌의 화려함에 취한 걸 보니.”
황제의 속마음을 알아챈 황후는 이를 꽉 깨문 뒤,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항시 조심하게나. 안 하던 짓 하면 탈이 나더라고.”
황제가 미소와 함께 뒤를 돌아봤지만, 어느새 서재에는 그 혼자만 남아 있었다. 잠시 황후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본 황제는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토마스.”
“말씀하십시오, 폐하.”
“자네가 공작을 찾아간 지 얼마나 되었지?”
“궁내부를 나간 이후로는 사적으로 찾아뵌 적은 없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걸음을 옮겨 찬장 앞으로 간 뒤, 그 안에서 브랜디 한 병을 꺼내 풀턴에게 건넸다.
“그래서 쓰나, 자네 상사였는데. 한번 찾아가게, 간만에 회포도 풀고.”
황제의 말에, 풀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폐하.”
* * *
늦은 저녁. 이제 막 영지에서 올라온 아델라인은 시녀들과 함께 짐을 풀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서류들은 일단 모두 서재에 둬, 알겠지?”
“네.”
“이것들은 저기에 일단 분류해 놓고. 차근차근하자고, 응?”
“알겠습니다, 공녀님.”
그렇게 차근차근 짐꾸러미를 풀고 분류하고 제 위치로 가져다 놓으며 시간을 보내던 중, 노크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공녀님,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집사의 말에, 아델라인은 곧바로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뒤 답했다.
“바로 갈게. 어디로?”
“집무실로 와 주십시오.”
“알겠어.”
아델라인은 곧장 걸음을 옮겨 집무실로 향했다. 공작의 집무실로 가자, 마치 올 것을 기다렸던 듯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들어오너라.”
아델라인의 발소리를 들은 듯, 안에서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 공작을 바라봤다.
“문을 닫아라.”
공작의 말에, 아델라인은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정적이 집무실을 감쌌다. 그러자 공작은 아델라인을 바라본 뒤,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앉거라. 그리 짧은 이야기는 아닐 터이니.”
그러자 아델라인은 한껏 긴장한 채 한쪽 소파에 앉았다. 그 맞은편에 앉으며, 공작은 그녀를 향해 말했다.
“이즐링턴에서 한 일들은 들었다. 어려운 상황을 풀어냈더구나.”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은 덕입니다.”
“그 도움을 이끌어 내는 건 네 능력이지. 겸손은 좋으나, 과도한 겸손 또한 독이다.”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잘했다. 아델라인.”
공작의 처음 들어보는 칭찬에, 그녀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공작이 자신에게 칭찬한 적이 있었나? 기억을 되짚어가던 중, 공작이 그녀를 향해 말을 했다.
“그러니, 잠시 쉬어 가거라.”
“…네?”
“사교 시즌에는 그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만 집중하거라.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누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거라. 파트너도 이미 알아봐 두었으니, 그렇게 알거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마일즈 스틸웰 상무, 이즐링턴 개발 사업의 파트너가 되었으니 명분도 충분하겠지. 알아 두거라.”
통보식으로 말을 건네는 공작의 말에, 아델라인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왜 마일즈 상무와 파트너가 됩니까!”
“이 어린 것아! 아직도 모르겠느냐!”
그러자 공작도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며 아델라인에게 외쳤다. 그러나 곧바로, 공작은 손으로 입을 가린 뒤 거칠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숨이 넘어갈 듯, 몇 번이고 기침하고 나서야 호흡을 가다듬은 공작은 급히 손으로 입가를 쓸어 낸 뒤 아델라인을 향해 외쳤다.
“사교 시즌만큼 중요한 시기가 어디 있다고 그러느냐. 정녕 네 상황을 모르겠느냐? 너는 하루라도 허투루 낭비하지 말고 아군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황후에게서 네 몸을 지키지, 이 아둔한 것아!”
처음 본 공작의 격정적인 모습. 빙의 직후에 만난 공작은 아델라인에게 비웃음 조로 말했을지언정, 저렇게 얼굴을 붉혀 가며 화를 내지는 않았다.
“한동안 대위에게서 떨어지거라, 그게 너희 둘에게도 이로운 일이야! 내 말 알아들었느냐?!”
그 말에, 아델라인의 눈에도 불꽃이 일었다.
“그게 어떻게 저희 둘에게 모두 이로운 일입니까?!”
“네 곁에 대위가 있으면 너에게 손을 뻗는 영식들이 좋은 마음을 품겠느냐! 지금은 그 손길을 향해 미소를 지어 희망을 줄지언정 그 손길을 쳐 낼 때가 아니라는 걸 정녕 모르겠느냐!”
그 말을 듣자, 찰나의 순간 아델라인의 입에서는 악의와 함께 비수가 빚어졌다. 그리고 그 비수는, 질끈 눈을 감은 아델라인의 성난 목소리를 타고 날아갔다.
“그리 아군을 만들라 하시는 분께서는 대체 어떻게 아군을 만드셨기에, 정작 공작 부인을 향한 비난을 막아 줄 아군 한 명 없으셨습니까! 말씀해 보시지요!!”
그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아델라인이 눈을 뜨고 공작을 바라보자, 그제야 그의 얼굴을 살필 수 있었다.
언제 진 건지 모르는 잔주름, 살짝 움푹 들어간 눈, 조금씩 면적을 넓혀 가고 있는 검버섯.
그리고, 그의 눈에서 만들어 내리라 생각지 못했던 옅은 물기.
그러나 그 물기가 물방울로 맺히기 직전, 공작은 고개를 푹 숙인 뒤 떨리는 손으로 문을 가리키며 외쳤다.
“더 이야기하기 싫다. 나가거라.”
공작의 말에, 아델라인은 머뭇거리며 한 걸음씩 물러갔다. 그녀가 집무실의 문을 닫고 나가자, 그제야 공작의 입에서는 억눌렀던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기침을 하고 있을 때, 또다시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내가 나가라 하지 않았…….”
“저입니다, 공작님.”
이 저택을 지켜 온 노집사의 목소리에, 간신히 공작은 초점을 맞춰 그를 바라봤다. 이미 노집사는 손의 물 잔을 공작에게 내밀고 있었다.
그 물 잔을 받아 든 공작은 입에 차가운 물을 머금은 뒤 입 안을 감도는 비릿한 무언가와 함께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공작이 잔을 내려놓자, 집사는 물병으로 잔을 다시 채웠다. 그사이, 공작은 책상 서랍을 열어 약통을 꺼냈다.
달그락. 큰 통에 비해 한없이 가벼운 소리에, 집사는 그에게 물었다.
“벌써 다 드셨습니까, 공작님.”
“아직 적잖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작의 말을 비웃듯, 약통은 단 두 알의 알약만을 뱉을 뿐이었다. 공작은 그 약을 입에 넣은 뒤, 물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겼다.
“이제는 말 하시지요.”
“…아직이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
공작은 그리 말하며 숨을 고른 뒤 집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지고 가야 할 짐이야… 내가.”
그 말을 듣는 집사의 눈에, 공작의 등은 한없이 작고 왜소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