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164
164화 한 소위의 이야기
“담배 피워요?”
노먼 앞에 내밀어진 연초 갑. 흡연자라면 꽤나 꼼꼼히 말아 둔 담배들을 보고 하나 집어 들만하건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끊었습니다, 함장님. 하지만 감사합니다.”
“함장님은 무슨, 대위라 부르세요. 함장직 짤린 지 1년도 안 지났구만. 아직도 함장 소리 들으면 속이 쓰려요.”
그렇게 말하며, 담뱃갑을 내밀었던 윌포드는 연초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성냥에 붙은 불이 머리 부분을 태우고 그 아래 나무를 태워 가는 걸 잠시 바라보던 그는 성냥개비를 바다로 휙, 던졌다.
바다에 떨어진 성냥개비가 가라앉는 걸 보며, 윌포드는 입을 열었다.
“…세이드라는 이름, 들어본 적은 있지요. 수도 남부의 지배자라면서요.”
“지배자였지요. 그 유명한 정보 길드 아스테리오스를 이끌었던. 이제는 남부 재개발로 설 곳을 잃었지만.”
“마법도 쓰고 오러도 쓴다면서요. 소문으로는 금세기 최강이라던데.”
“그동안의 기록을 보면 위협적인 무력을 지닌 건 확실하지요.”
“그런 놈들을 잡으러 간다고요, 노먼 중위?”
그의 물음에, 또 다른 목소리가 답했다.
“잡아야지.”
두 사람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돌아보자, 알렉스가 함교로 올라오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노먼이 가볍게 손을 들어 경례하자, 알렉스가 손을 들어 답하며 윌포드의 질문에 다시 한번 답했다.
“잡아야지. 그래서 우리가 가는 거고.”
알렉스는 윌포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료는 읽어 보고 왔을 거 아닌가?”
그러자 그는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신 뒤, 한숨과 함께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읽어는 봤지, 읽어는… 다만 믿기지가 않을 뿐이지. 말 편하게 해도 되나?”
“편한 대로.”
그러자 윌포드는 고개를 푹 숙인 뒤 천천히 들며 저 먼 바다를 바라봤다.
“내가 살다 살다 이런 기밀 작전에 동원될 줄은 몰랐다, 진짜.”
“이미 한 번 스스로 자원한 마당에 동원이 뭐 새로울 게 있다고. 우리도 합 맞춰 본 사람 쓰는 게 편하지.”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그냥 모른 척하고 버리고 갔어야 했는데.”
그는 거의 다 탄 연초를 바다로 던지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노먼은 알렉스와 짤막하게 이야기를 나눈 뒤 함교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 시계를 꺼내 본 윌포드가 조타수를 향해 지시를 내렸다.
“측풍이 세다. 우현으로 3포인트 선회.”
“우현, 3포인트!”
윌포드의 지시에, 수백 톤의 함선이 몸을 틀며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돛에 가득 채웠다. 이내 함선을 옆으로 밀어내던 장애물은, 어느새 함선을 밀어 주는 우군으로 변했다.
“소문이 돌더라.”
“무슨 소문.”
“4월과 5월, 두 달 동안 황후의 연줄로 득세하던 해군 파벌이 일제히 갈려 나갔어. 기밀 유출, 근무 태만, 배임 횡령 등으로. 그리고 그 뒤에는…….”
“필즈먼 대장이 있다고?”
“…….”
맞냐, 라고 묻는 듯한 윌포드의 시선에, 알렉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육군 대위밖에 안 되어서 모르지만…….”
알렉스는 윌포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해군본부장이 전시사령부 수장이 되어 육군성과 육군본부 의사 무시하고 육군의 인사에 개입하려 한다면 제대로 될 것 같나?”
주어와 목적어를 바꾼 알렉스의 질문에, 윌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될 리가 없었다. 전시사령부는 어디까지나 임시 조직이고, 전시 사령관도 마찬가지.
승전해도, 패전해도 군문을 떠나야 하는 자리이니, 못하겠다 싶으면 뻐기면 그만이다. 그 말인즉슨, 해군 내에서도 필즈먼과 손을 잡은 이들이 우세하다는 의미.
“…멍청한 질문을 했군. 뭐,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야. 덕분에 배경은 없어도 실력은 있는 이들이 조금이나마 더 기회를 얻을 수 있겠지. 하지만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어.”
“뭔가?”
“자네 후견인은, 황실과 맞설 생각인가?”
윌포드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육군과 해군. 무력을 독점하는 두 집단이라는 정체성은 비슷했지만, 그런데도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했다.
제국 해군의 전신인 왕립 해군. 왕의 함대였고, 입헌군주제 이후로도 변함없는 황실의 해군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한 해군.
그에 반해, 육군은 직접 황제를 끌어내린 이후 의회의 군대, 시민의 군대를 표방하며 스스로 왕립 육군이라는 정체성을 버렸다.
해군에게 육군은 반역자의 후예였고, 육군에게 해군은 구체제의 추종자였다. 40년이라는 세월은 그 가치관의 차이를 결코 흐려지게 만들 수 없었다. 그 간극을 알기에, 알렉스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윌포드는 답을 재촉하지 않았고, 알렉스도 변명하지 않았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낸 알렉스는 윌포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한 소위가 있었어. 다른 귀족들처럼, 귀족이라면 응당 군대에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육군에 자원했지.”
갑작스레 나온 이름 모를 소위의 이야기에, 윌포드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도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범적인 장교였어. 잘 나가는 귀족 가문의 자제답게 가문에서는 아낌없이 지원을 해 주었고, 덕분에 부하들에게는 인망을 얻고 상관들에게는 신임을 얻었지. 그렇게 평화로운 군 생활을 보내던 중, 전쟁이 터졌어.”
“계속해 보게.”
“사실 전쟁이라고 해도, 그 소위의 가문이라면 충분히 그가 속한 보병연대를 통째로 본토에 남게 할 수도 있었어. 하지만 소위는 책에서만 보던 전쟁을 선망했고, 그의 가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소위를 전장으로 보내고 싶어 했지.”
“가문의 입지 때문인가. 흔한 귀족 가문인가 보네.”
“낸들. 아무튼, 전장에 와서도 할 일은 없었어. 가문이 가문인지라, 야전 사령부는 최전선에 그 부대를 밀어 넣을 생각이 없었지. 그러다가… 결국 전력을 온존하고 있던 그 부대는 전장에 투입되었어.”
알렉스는 머나먼 과거를 회상하듯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윌포드는, 순간 무언가를 떠올리고 알렉스를 바라봤다.
“그 전쟁에서 가장 참혹했던, 마지막 전장에.”
황실, 한 번도 투입되지 않은 보병 연대, 소위, 가장 참혹한 전장.
“…설마.”
“평화로운 시대의 훌륭한 장교라고 해서, 전장에서 멀쩡하리라는 보장은 없지. 결국 그 소위는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했고… 나도 했지.”
“…….”
“필즈먼 대장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실지는 몰라. 하지만… 적어도 나는. 필요하다면, 그렇다고 해 두지. 고작 대위 하나가 뭘 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탄식했다. 눈을 감자, 단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양팔 저울 한쪽에 올려놓아도, 미세한 차이로 반대편으로 기울어질 저울추.
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아름다운, 단 하나뿐인 사람.
“나도 지켜야 할 게 생겼으니 말이야.”
생각이 많은 듯한 알렉스를 본 윌포드는 이각모를 벗은 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빌리 미첼 중위가 프랑크 육군 영관 장교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차라리 그건 사정이라도 있으니.
간신히 생각을 정리한 윌포드는 알렉스의 눈을 들여다보며 질문을 했다.
“여사, 아니 남작은 아나?”
“…모르지.”
알렉스의 입에서 답이 나오기 전 흘려보낸 1, 2초 정도의 침묵.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눈치챈 윌포드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해군에는 미신이 많은데 말이야. 그중에는 ‘라이플맨과 엮이지 말 것’이라는 말도 있는 거 알아?”
그러자 알렉스는 피식 웃음을 뱉어 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와 함께 일해 온 해군 출신이 얼마나 많은데.
이미 군을 떠난 이들도, 아직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이들도, 그리고… 영원의 안식을 취하고 있는 이들도.
알렉스의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들은 윌포드는, 이각모를 다시 머리에 쓰며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뜻을 이제 알겠네. 빌어먹을.”
미워할 수 없는 놈들이었다. 빌어먹을 정도로.
* * *
“…진짜로 갔구나.”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황후는 빈 관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라이플 여단의 병사들이 머물던 관사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텅 빈 채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보자, 자신의 목을 옥죄어 오던 갑갑한 기분이 단번에 사라지는 듯했다. 그런데도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 가만히 관사를 지켜보던 중.
“황후 마마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녀의 뒤에서 줄곧 기다리고 있던 귀족 영애가 입을 열었다.
“이것으로, 저에 대한 신용이 생기셨는지요.”
“…….”
뒤를 돌아보자, 어둠 속에서 보랏빛 눈을 빛내는 20대의 영애가 보였다. 낮에 보았을 때는 그저 체구가 작은 보통의 귀족 영애라는 첫인상뿐이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황궁에 심어 두었던 필즈먼의 총구를 치워 내고 나니, 그녀의 제안에 신빙성이 생기는 듯했다.
“파견 중대를, 황궁에서 없앨 수 있다고 했나?”
“그 이상도 가능합니다, 황후 마마.”
보랏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피오나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여름밤의 공기를 타고 황후의 귀에 속삭여졌다.
“필즈먼 대장을 끌어내리고, 그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라이플 여단을 숙청하고, 로피츠 공작가를 무너뜨리면서 위선자들로 가득한 제국 의회를 해산시키고, 나약하고 의욕 없는 황제로부터 황권을 넘겨받아…….”
달콤한 상상들을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를 황좌에 앉히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피오나가 단 한 번 발걸음을 옮겼을 뿐이건만. 황후의 귀에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새 머릿속을 전부 장악하고 있었다.
“황자 저하를 죽이고도 얼굴색 한 번 변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알렉스 매닝햄 대위도.”
피오나는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장담했다.
“황후 마마 손에 넣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황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대의 말대로, 황태자는 본토로 복귀하고 있다. 다만 친위대에 적지 않은 손실이 있었다 하더군. 본가의 지원도 어려워졌으니…….”
“저희 루멘시아 가문이 기꺼이 지원할 것입니다. 최고의 장비, 최고의 인원으로.”
불길한 미소를 띤 피오나가 황후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