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167
167화 로피츠 공작이 남긴 지침
“그린우드 부의장님.”
“이즐링턴 남작.”
아델라인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그린우드는, 주치의가 보좌관의 도움을 받아 공작을 들것에 실어 나가자, 문을 닫으며 질문을 던졌다.
“옆에 있는 사람은?”
“안드레이 레이크 집사입니다. 작년까지 파견 중대 소속이었습니다.”
아델라인의 소개에, 그린우드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파견 중대 출신이라면 믿을 만했다.
“…그래, 차를 세 잔 준비하지. 두 사람 다 앉게나.”
그린우드가 직접 스토브에 물을 올리며 소파를 가리키자,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그를 바라봤다. 잠시 뒤, 물이 끓자 찻주전자에 찻잎과 끓인 물을 넣은 그린우드는 소파에 앉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가져오라는 것은 챙겨왔나?”
“네. 여기 있습니다.”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서류철을 그린우드에게 건넸다. 그린우드는 세 사람분의 차를 따른 뒤, 서류를 받아 들고 처방전과 진단서를 빠르게 훑으며 말했다.
“치료 목적의 약은 꾸준히 처방되었고, 재작년부터 진통제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군. 처방 빈도도 잦아지고. 하지만 원인은 불명…….”
수많은 자료를 단번에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그린우드는 진단서의 핵심을 집어낸 뒤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알고 있었나?”
“아니요. 저도 오늘 연락을 받은 뒤 대책을 수립하던 중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런가. 그러면 유관 부처에 이 내용을 공유하겠네. 빠른 대응 고맙네.”
그때, 아델라인은 또 다른 서류철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러자 그린우드는 이게 뭐냐는 표정을 지으며 서류철을 받아 들었다.
“그 서류철에는 올해 6월 초부터의 의료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
“대부분 내용은 방금 보신 기록과 동일합니다.”
그 말에, 그린우드는 급하게 서류철을 펼쳐 꼼꼼히 서류를 읽어 내렸다. 잠시 뒤, 그의 입에서 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모르핀.”
“그렇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통제할 수 없는 혼란을 일으킬 여지를 방지하고 싶었습니다. 상황이 우리 손으로 제어될 수 있는 한.”
아델라인의 즉답에, 그린우드는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 기울이며 그 너머로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모르핀의 높은 효과에 비례하는 중독성은 아직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학계에서는 꾸준히 모르핀 처방에 대한 자격 요건을 높이자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로피츠 공작이 모르핀을 복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정치적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아델라인의 판단은 그녀가 둘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도덕적인 관점은 잠시 제쳐 두더라도.
“그렇군.”
눈앞의 여인은 더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에게 무리한 부탁을 해 오는 순진한 귀족 영애가 아니었다. 1년 전과 달리, 필요하다면 그녀는 기꺼이 회색지대로 발을 디딜 수 있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흙탕물이 튀는 게 무서워 주변 사람이 막아 주길 바라는 구중궁궐 속 공주님이 아니라, 흙탕물로 뛰어들 때 같이 뛰어들어 등을 맞대고 싸울 수 있는 동료.
그린우드는 서류철에서 진단서와 처방전을 끄집어낸 뒤, 스토브로 다가갔다. 스토브에 불이 켜지자, 그린우드는 그 종이들을 불길로 가져갔다.
종이는 매캐한 연기를 내며 빠르게 타들어 갔다. 그러자 안드레이와 아델라인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그 시선에 아랑곳 않고 남은 종잇조각마저 휘휘 흔들어 다 태운 그는 아델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로써 우리는 공범이네.”
그린우드는 아델라인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다른 말로 하면… 아군이지.”
“그 말은…….”
“지금은 로피츠 공작가가 흔들리지 않게 유지하는 것에만 힘을 써 주게.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지금 대연정 내각도 불협화음이 계속 생기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 로피츠 공작가에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면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발생할 거라네.”
그린우드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여기, 남작에게 의장이 남긴 유사시 대응 매뉴얼이네. 코트 안에 있더군.”
그린우드는 그렇게 말하며 아델라인에게 밀랍 인장으로 봉인된 편지를 건넸다. 겉면에는 공작의 필체로 쓰인 짤막한 문구가 있었다.
[어떠한 이유로든 직무 불능 상태에 처해 있을 경우, 이즐링턴의 남작, 아델라인 폰 로피츠에게 전달할 것.]그 문구를 확인한 아델라인은 떨리는 손끝으로 밀랍 인장을 뜯어 안을 들여다봤다. 그러자 몇 가지 항목이 적혀 있는 종이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 피터 그린우드 부의장에게 직무 불능 상태를 알리고, 편지에 동봉된 열쇠를 사용해 의회 집무실 책상 왼쪽 첫 번째 서랍에 있는 봉투를 찾아 그에게 전달할 것.– 시장 상황을 관찰하며 공공의 이익과 가문의 이익이 공존하는 방향으로 가문의 재산을 운용할 것. 최소한의 이득을 취하며, 기준 금리 이상의 이득은 사회에 적극적으로 환원할 것.
– 의원직을 일시적으로 승계하되, 의회의 통상적인 입법 기능이 유지되는 한 의원으로서의 활동을 자제할 것.
– 로피츠 공작가의 방계 가문에 상황을 알리고 본가의 방침을 따를 것을 권유할 것.
– 3개월 이상 직무 불능 상태가 유지될 경우, 유일한 직계 후손인 아델라인 폰 로피츠는 가주 권한을 인수할 것. 이때 의원직은 승계하되, 의장직은 사임할 것.
– 이 편지를 보는 단 한 명에게, 행운이 함께하길. 프레데릭 소뮤아 로피츠.]
“…여기, 열쇠가 있네요.”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그린우드에게 봉투에서 나온 자그마한 열쇠를 건넸다.
“의회 집무실 책상 왼쪽 첫 번째 서랍에, 부의장님을 위한 매뉴얼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린우드는 그녀의 손에서 열쇠를 집어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잠시 기다려 주지 않겠나, 의논할 게 남아 있을 테니.”
“기다리겠습니다.”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식어 버린 찻잔을 들었다. 바로 그때, 문이 큰 소리를 내며 거칠게 열렸다.
“노크는 잊어 먹었나? 무슨…….”
그린우드가 한 성깔 하는 목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돌리자, 그의 눈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문고리를 붙잡은 마일즈가 들어왔다.
“부수상님?”
“로피츠 공녀도 있는 줄은 몰랐는데, 무슨 일이지?”
“일단 문을 닫아 주십시오, 무슨 일입니까.”
그린우드의 말에, 마일즈는 문을 닫고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그 동작에서 묻어 나오는 조급함에, 나머지 세 사람은 절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남부당 놈들이 일을 저질렀다. 이 미친 새끼들이……!”
* * *
헬리온의 갑판에서 맞는 밤바람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달이 지고 해가 뜨기 전, 오직 별빛만을 의지해 달리는 HMS 헬리온의 갑판은 등화관제를 위해 담뱃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알렉스는 하늘을 바라봤다. 해군 장교들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도 별자리를 볼 줄 알았다. 4일 전 수도 근처에서 봤던 북극성은 어느새 눈에 띄게 낮아져 있었다.
바로 그때, 알렉스의 어깨에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손을 뻗자, 그의 손에 양철 컵의 질감과 함께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홍차다. 한잔해.”
윌포드의 목소리에, 알렉스는 잔을 넘겨받고는 입으로 잔을 가져갔다. 설탕을 넉넉하게 탄 홍차는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있던 얼굴 근육을 풀리게 했다.
알렉스가 천천히 홍차를 두어 모금 음미하고 나자, 윌포드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해병 25명, 수병 25명, 부사관 3명, 임관 5년 차 해군 중위, 2년 경력의 선의, 그리고 입대 6개월 차 선의 보조 한 명.”
HMS 헬리온에서 자원한 인원들을 하나하나 짚어 준 윌포드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인원수 모자라면 차출이라도 하려 했는데, 하나같이 다 손들고 자원하더라.”
그 목소리에는, 한때 그들의 함장이었던 이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위험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누구 하나 손 내리는 놈들이 없더라.”
“…….”
“세이드, 찢어 죽일 놈 맞지. 애들을 납치하고 온갖 실험을 자행해, 기어코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 낸 일등공신이니까. 하지만…….”
윌포드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옳은 일을 위해 자원한 부하들을 말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라이플맨과 달리 제대로 된 전투 훈련도 못 받은 그들을 무한히 신뢰할 만큼 단순하지도 않았다. 그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알렉스는 그를 향해 공수표를 건네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최대한 노력해 보지. 아무도 다치지 않도록.”
그것이 공수표라는 걸 아는데도, 윌포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서서히 주변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천문박명이 지나고 항해박명의 시간이 찾아왔다.
실루엣만 보이던 갑판이 약간의 빛을 더 받으며, 그 위에 서 있는 대원들의 면면을 비췄다. 긴장이 가득한 눈들이 번뜩였다.
“56명, 아니, 144명 모두 살려 와라. 모두.”
이제는 남이 아니게 된 라이플맨들까지 숫자에 집어넣은 윌포드는 알렉스의 손에서 양철 컵을 돌려받은 뒤 함교로 올랐다.
갑판에 있어야 할 포는 오베른 앞바다에 버린 지 오래. 명패를 떼고, 해군기를 내린 채 민간 상선이 사용하는 국기를 깃대에 내건 헬리온의 겉모습은 민간 상선에 가까웠다.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윌포드는 망원경을 들어 올렸다. 남해 무역로의 쇠퇴와 함께 버려진 화물 거점의 허름한 창고와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미 오베른의 화려함에 감춰져 있던 추악한 모습을 본 이상, 의구심을 품을 이유는 없었다. 저기에도 분명,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있겠지.
자신의 역할은 라이플맨들과 자원한 부하들을 이 섬에 데려다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렇기에 그의 마음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끓어올랐다.
“복명복창 금지, 모든 갑판원 및 장루원 위치로, 투묘 준비, 상륙 병력 중앙 갑판 대기.”
윌포드는 지시를 내리며 타륜을 돌려 한참 방치된 티가 나는 휑한 부두로 배를 틀었다. 바람을 한껏 돛에 안고 부두를 들이받을 정도로 속도를 낸 윌포드는, 곧바로 소리 높여 지시를 내렸다.
“투묘!”
윌포드의 지시가 갑판을 울리자, 곧바로 선원들이 닻을 떨궜다. 그러자 배는 순식간에 뱃머리를 틀었고, 그러자 헬리온은 부두에 우현을 긁으며 멈춰 섰다.
잠깐의 충격이 배를 흔들자, 알렉스는 자신의 장비를 챙기며 단 한마디를 외쳤다.
“상륙!”
그러자 라이플맨들을 선두로, 각자의 무기를 든 이들이 순서대로 배에서 내렸다. 그사이 돛대는 점차 바람을 가득 안으며 활처럼 휘기 시작했다.
“잘라!”
윌포드의 지시에, 닻줄을 끊어 낸 헬리온은 다시 바람을 한껏 품으며 부둣가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타륜을 잡은 윌포드의 귀에 아득한 총성 한 발이 들려오는 것을 시작으로, 격렬한 총 포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듣자 당장 타륜을 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이 배는 그들을 도울 포 한 문도 실려 있지 않았다. 가 봤자, 짐만 될 것이다.
“…빌어먹을.”
그 짤막한 한마디를 짓씹듯 중얼거린 윌포드는, 옆에 서 있던 부장에게 타륜을 넘긴 뒤 함교를 벗어났다.
헬리온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지만, 섬에서 들려오는 총성은 그의 귀를 떠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