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179
179화 전열 정비
“…베르티에 중령?”
제국 육군의 붉은 제복을 입고, 삼각모까지 옆에 내려 둔 은발 녹안의 남성. 근 몇 개월 만에 다시 보는 얼굴에, 아델라인은 놀라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던 베르티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중위 빌리 미첼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분하고 여유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오던 중, 그의 배에서 조그마한 소리가 울렸다.
꼬르륵.
그 조그맣고 애달픈 배곯이에, 방금까지 여유가 넘치던 베르티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를 만났던 사교장에서 봐 왔던 모습과는 살짝 동떨어진, 인간적인 면모였다.
“마침 점심을 먹으려던 참이었어요. 따라오세요. 그 뒤에 서재에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아델라인의 제안에 머쓱 웃어 보인 베르티에는 순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미리 언질이 간 건지, 식당에는 두 사람분의 식기와 식사가 놓여 있었다.
아델라인은 베르티에에게 자리를 권하며 식탁 앞에 앉았다. 그러자 하녀들이 빠르게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홍차 괜찮으신가요? 커피가 좋으시다면 커피도 있습니다.”
“커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는 길이 약간 피곤했었거든요.”
베르티에의 말에, 아델라인은 시종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의 앞에는 커피잔이 놓였다. 아델라인이 사람들을 물리자, 두 사람은 각자 앞에 둔 음료를 홀짝이며 식사를 시작했다.
푸짐한 식사를 앞에 둔 베르티에는 접시 위의 베이컨을 포크로 집어 들며 말했다.
“그나저나, 아직 전쟁 중인데 이렇게 저를 초대하셔도 되나요? 엄연히 적국의 장교인데.”
“뭐, 그렇다고 저택에 들인 손님을 박하게 대할 수는 없지요. 편하게 드세요.”
가벼운 대답 후 아델라인은 식사를 이어 나갔다. 그러자 베르티에도 빠르게, 하지만 정갈하게 식사를 해치워 나갔다. 분명 난잡한 몸짓은 아니었지만, 마치 동영상을 배속으로 돌린 것처럼 베르티에의 앞에 놓인 음식은 빠르게 사라져 갔다.
다행히 모자라지는 않았는지, 음식이 절반 정도 사라지자 베르티에의 손놀림도 한차례 느릿해졌다. 그래도 아델라인의 먹는 속도보단 빨랐지만.
베르티에가 한차례 급한 허기를 달랜 걸 확인한 아델라인은 샐러드를 포크로 집으며 그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프랑크 왕실 군사 고문단의 오스카 미셸 베르티에 중령께서 빌리 미첼이라는 성의 없는 이름으로 제 앞에 나타나신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성의 없다니, 매닝햄 대위가 신경 써서 골라 준 이름인데요. 대위가 들으면 서운해하겠어요?”
베르티에는 계속해서 음식을 먹으며 아델라인을 향해 말했다.
“알렉스가 골라 준 이름이라고요?”
“뭐, 제가 생각해도 성의 없는 이름이기는 하지만요. 만약 아이가 생기시면 작명은 남작께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가볍게 농담을 하며 식사를 이어 나가는 베르티에. 하지만 아델라인이 그를 계속 응시하자 베르티에는 식기를 놓으며 아델라인을 마주 봤다.
“이유. 이유라…….”
베르티에는 잠시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저는 무관이기도 하지만 외교관이기도 하니까. 이번에는 외교관으로서 제국을 찾은 것이지요.”
“외교관, 요즘은 외교관도 가명을 쓰나요?”
“상황이 상황이니까요. 황궁이나 팔레트 가를 드나들려면 이런 장교 제복이 눈에 덜 띌 테고.”
“…….”
“이미 전반적인 사항은 물밑에서 끝냈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조율해야 하는 세부 사항이 있어서. 조약이라든지, 국경이라든지, 외교 관계 재설정이라든지…….”
그사이 식사를 마친 베르티에는 다시 커피로 입가심을 하며 대화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못 본 사이 유명 인사가 되셨더군요. 특히 증권 거래소에서.”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었네요. 돈도 꽤 많이 묶이게 되었고.”
“아깝게 되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일찍 오는 건데.”
의미심장한 베르티에의 말에, 아델라인은 들고 있던 식기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은으로 만들어진 포크가 맑은 소리를 내며 대리석 바닥에 떨어지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아델라인은 그들을 물린 뒤, 베르티에를 향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 * *
다음 날 저녁.
내일을 준비하며 오늘의 작업을 마친, 침묵에 잠긴 공장의 한 사무실에 사람들이 모였다. 다들 수수한 복장으로 자리했지만, 그런데도 그들의 면면은 공장의 분위기에 녹아들 수 없었다.
수십 년간 시장의 흐름을 지켜봐 오고, 그 흐름을 타기도 하며, 때로는 그 흐름을 꺾고 조절한 관록은 결코 옷감의 수수함으로 감출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사이에 껴 있는 마일즈 스틸웰마저 위압감을 느껴 경직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태산 같은 묵직함을 품은 이들이 다 들어오고 나자, 바깥에서 가볍고 경쾌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남성용 구두와는 다른 소리가, 얇은 사무실 문을 뚫고 들어왔다.
또각또각. 소리가 다가올수록, 사무실 안에 자리 잡은 중년들의 머리에서는 빠르게 주판알이 움직였다. 경제인 포럼에서도 한곳에 모이기 힘든 이 거물들을 데려다 놓고, 서른도 안 된 귀족 영애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달칵.
그들의 계산이 끝나거나 말거나, 사무실의 얄팍한 문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다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마친 아델라인은 원래 자신의 자리였던 것처럼 자연스레 상석을 차지했다.
“크흠…….”
“에헴…….”
몇몇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침음성을 흘렸다. 이들을 한자리에 모은 건 아델라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파랗게 어린 아델라인이 상석을 차지하는 걸 곱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아델라인이 옆구리에 끼고 나타난 서류 봉투에 시선을 옮겼다.
대체 뭘 들고 온 걸까. 저기에는 뭐가 담겨 있을까.
수많은 후보가 떠올랐지만, 아직 그것의 정체를 특정 지을 단서가 없었기에 그들은 입을 다문 채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이렇게 함께해 주실 것을 청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턱.
아델라인은 그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번 서류 봉투로 향했다.
“다음 한 주간의 행동 방침을 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께서 보내 주신 전문가들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역시 이런 사항은 결정권을 지닌 여러분들과 직접 의논해야겠지요. 그 전에.”
아델라인은 경제인들을 주욱 훑어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여기서 나가실 분들을, 먼저 알아보고자 합니다.”
모두의 이목이 아델라인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에 개의치 않고, 아델라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을 했다.
“지금 나간다면, 공작가에서 지난 한 주간 여러분들이 매입하신 주식을 사겠습니다. 즉, 여러분들의 원금을 보전해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아델라인이 직접 관리하는 공작가의 현금 가용 능력은 이미 4할을 겨우 웃도는 상황. 여기서 한두 명만 이탈해도, 공작가의 현금은 바닥날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아델라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다른 모든 이들의 시선에 의문이 담겼다.
그리고 그 의문을 설명하듯, 아델라인은 그 이유를 밝혀 나갔다.
“앞으로 저희가 해야 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어려운 것에 비해, 얻는 것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걸 속일 생각은 없기에, 이렇게 미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델라인은, 자신을 향하는 시선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달리 말하자면, 나가려면 지금뿐입니다.”
아델라인의 단호한 말이, 조용한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정적이 방 안을 채웠다. 그 정적을 깬 것은, 공작과 비슷한 나이대의 금융업자. 그는 손을 들어 아델라인의 시선을 끈 뒤, 그녀를 향해 요구했다.
“두 가지만 답해 주시겠습니까?”
“질문을 먼저 들어보고서 결정하겠습니다.”
아델라인의 말에, 그는 고개를 선선히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 물음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은 현재 마비 상태에 처해 있는 정계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몇 안 되는 자본가들입니다. 나머지는 자유당이나 남부당, 제국 정부와 깊게 얽혀, 기민한 대응을 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아델라인의 말에, 자본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금융업자는 또 다른 질문을, 아델라인에게 던졌다.
“두 번째.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이, 가치 있는 일입니까?”
그러자 아델라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려 했다.
“네, 당연히. 정부의 대응 여력이 정상화…….”
그러나 금융업자는, 아델라인의 말을 끊으며 질문에 살을 덧붙였다.
“제국 정계의 혼란, 알렉스 매닝햄 대위의 재판 등등. 부차적인 것을 다 걷어 내더라도.”
금융업자는 쓰고 있던 안경을 안경 닦이로 슥슥 닦은 뒤, 안경을 고쳐 쓰며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시장 경제의 흐름을 억누르고자 하는 우리의 발악이, 그 흐름을 따라가며 얻을 이득보다.”
안경을 고쳐 쓴 그는, 아델라인의 눈을 바라보며 질문을 마무리했다.
“진정, 가치 있는 일입니까?”
한평생 돈의 흐름만을 냉정하게 쫓았을 눈을 바라보며 아델라인은 잠시 생각했다.
금요일까지의 그녀라면 그 질문에 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황후와 피오나가 손을 잡았고, 피오나는 황후를 이용해 제국에 혼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혼란을 통해 제국에 타격을 입혀, 이득을 얻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가설에 불과했고, 가설 따위로는 이 자리에 앉은 관록 있는 이들을 설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아델라인 자신도, 그 근원으로 돌아가면 별 볼 일 없는 동기로 시작했다.
알렉스가 끌려갈 사문회를 막는 것도 아닌, 그나마 안면을 터 둔 피츠허버트 백작을 사문회장에 들여보내기 위해서였다.
공작가의 명운을 걸기에는 하찮다고 말할 수 있는, 하지만 아델라인에게는 다른 모든 것보다 중요했던 보잘것없는 이유였다.
그렇기에 아델라인은 집사들을 설득할 때는 내각의 예측 보고서를 들고 와야 했고, 네슬러 스틸웰을 설득할 때는 포사이스 교수와 그의 연구 결과물을 한 푼도 받지 않고 넘겨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답할 수 있었다.
알렉스를 위할 뿐이었던 개인적인 동기는, 모두에게 내보일 수 있는 대의이자 명분이 되었다.
“대답을 듣기 위해선, 남아 계셔야 합니다. 대답을 들으시겠습니까, 원금을 챙기시겠습니까.”
그러자 금융업자는, 잠시 고민을 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도 자리를 지키며 아델라인을 바라보자, 그녀는 그들의 시선에 응하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지금부터 이탈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들어오세요.”
아델라인의 힘 실린 목소리에,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그 문을 통해 한 남자가 들어오자, 몇몇은 그동안 어떠한 감정도 내보이지 않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사이, 아델라인은 페이퍼 나이프를 집어 들어 서류 봉투의 입구를 갈랐다. 그다음 봉투를 뒤집자, 두꺼운 서류 뭉치들이 테이블 위로 쏟아졌다.
그 보고서로 시선을 돌린 이들은, 잠시 뒤 하나같이 경악에 물들었다. 누군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류를 집어 들고 재빠르게 훑어 내렸다.
한 달 전, 프랑크 왕국의 주식 시장에서 발생한 주가 조작 정황과 그 자료들. 그것들은 마치, 지금까지 중앙거래소에서 발생했던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그 말인즉슨, 프랑크 왕국에서도 지금과 같은 주가 조작이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높은 확률로, 동일한 주체에 의해서.
그 자료들의 의미를 이해한 경제인들은 일제히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그 반응들을 보며, 아델라인은 입을 열었다.
“대답을 마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비록 그것이 빛나는 승리로 끝맺지 못할지라도.”
아델라인은, 자신에게 질문했던 금융업자를 응시하며 답을 맺었다.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