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189
189화 거사
10월의 초입.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왼손 약지의 반지를 매만지며, 아델라인은 공작의 집무실 앞에 섰다. 아무리 상견례 비스무리한 자리를 가졌다지만, 그래도 청혼을 받고 이를 수락한 이상 가장에게 보고는 해야 할 것 같았다.
문 앞에 서서 잠시 뜸을 들인 아델라인은, 이내 호흡을 가다듬고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곧바로 답이 들려왔다.
“들어오도록.”
공작의 허락에, 아델라인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델라인이 안으로 들어가자, 외출 준비를 하는 듯 외투를 걸치고 있는 공작이 보였다. 그가 아델라인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질문을 했다.
“어디 가시나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번 추수절에는 조금 일찍 내려가려고 한다. 요양을 겸해서 한 한 달 정도 있다 올 듯하니, 수도의 일은 네게 맡기마.”
“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의회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의회는 그린우드 부의장이 직무 대행으로서 진행할 것이다. 그리고…….”
말을 하던 중 잠시 말끝을 흐린 공작은, 이내 하던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다. 우선 내가 공작령에 내려가 있는 동안은 수도를 되도록 벗어나지 말도록 해라.”
공작의 말에, 아델라인은 의문을 품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찾아온 용건은?”
“아, 그게…….”
공작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순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방향을 잃고 말았다. 바로 그때, 공작의 시선이 아델라인의 왼손으로 향했다.
“드디어 청혼을 받은 것이냐.”
핵심을 짚은 공작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귀를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공작은 표정의 변화 없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너는 이제 공작가를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자각할 수 있도록.”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아델라인에게 다가갔다.
“항상 가문을 우선시하라는 말은 안 하겠지만, 그래도 항상 더 나은 선택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거라.”
공작답다면 공작다운 조언에, 아델라인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공작은 지팡이에 힘을 주며 집무실을 나갔다. 그 뒤를 따라 나온 아델라인은 잠시 멍하니 멀어지는 공작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많은 이야기가 오갈 거로 생각했는데, 정작 몇 마디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끝나버린 대화. 붕 떠 버린 듯한 느낌이 잠깐 지나가자, 이내 정신을 차린 아델라인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며 고민을 했다.
“그러면… 뭘 하면 좋을까…….”
언제나처럼 데이트? 아니면…….
생각을 이어 나가던 중, 아델라인의 머릿속에서 지난날들의 기억이 떠올랐다. 잠깐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기억들에, 아델라인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 낯뜨거운 기억들을 간신히 머릿속에서 밀어낸 아델라인은 창밖을 바라봤다. 이미 준비는 다 끝낸 건지, 공작은 안드레이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오르는 게 보였다. 이내 안드레이까지 타자, 마차는 앞으로 나아가 정문을 나갔다.
그러자 비로소 이 저택에서 눈치를 볼 사람이 없어졌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러자 점점 아델라인의 머릿속에서는 낯뜨거운 생각이 연이어 떠올랐다.
“으으…….”
그 생각을 억누르려 노력한 끝에, 아델라인은 일단 서재로 돌아와 짤막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 놀러 올래요?]안부를 묻거나, 날씨에 관한 이야기를 하거나. 여러 잡다한 문장이 함께 쓰였지만, 본론은 딱 한 줄로 정리할 수 있는 편지였다. 편지를 다 쓴 아델라인은 봉투에 편지를 접어 넣은 뒤 테이블에 앉아 일을 하고 있던 나이아에게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이것 좀 파견 중대 관사로 보내 줄 수 있어?”
“네, 곧바로 보낼게요.”
나이아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아델라인에게 편지를 받아 서재를 나서 바깥의 시녀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델라인은 나이아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자, 그녀에게 물었다.
“이번 추수제 때는 계획 있어?”
아델라인의 물음에, 나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추수제 때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진짜? 스워포드랑도?”
풉.
아델라인의 물음에, 커피를 홀짝이던 나이아의 입이 분무기가 되고 말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이아의 떨리는 동공이 아델라인에게로 향했다.
“언제…부터…….”
마치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켜 버린 듯한 나이아의 모습에, 아델라인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였어?”
그러나 나이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델라인에게 다가왔다.
“공녀님.”
“응?”
“혹시…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오라버니에게는 말하지 않으셨죠?”
나이아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은. 근데 왜? 무슨 이유라도 있어?”
아델라인의 물음에, 나이아는 잠시 시선을 회피했다가 목소리를 죽이며 그녀에게 답했다.
“그게… 언젠가 오라버니가 제게 라이플맨과 절대로 사귈 생각 하지 말라고. 만약 사귀게 된다면 자기가 직접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릴 거라고.”
그 말을 듣자, 아델라인의 표정이 흠칫 굳고 말았다. ‘에이 설마’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동시에 ‘그래도 안드레이라면……?’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안드레이라면. 라이플맨이라는 직업의 위험을 알고 있는 안드레이라면, 분명 나이아가 스워포드랑 교제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안드레이에게는 스워포드의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릴 힘도, 의지도 있다. 그게 안드레이의 말을 단순한 공갈 협박으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였다.
“…혹시 앞으로의 계획은 있어?”
아델라인의 물음에, 나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넌지시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래도 본가가 스틸웰 공업인데… 라이플맨을 그만두라고 권유는 해 봤어?”
“그걸 생각은 하고 있는 모양인데… 저도 함부로 밀어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아버님과 사이가 좋지 않으신 것 같기도 하고.”
나이아의 말을 들은 아델라인은 아,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러면 어쩔 수 없겠네. 그래도 늦지 않게 네가 직접 말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너무 늦으면 안드레이가…….”
“네… 최대한 빨리 방향을 정해 봐야겠죠.”
나이아는 고개를 끄덕여 아델라인의 말에 맞장구를 친 뒤, 터덜터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각자의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찰나. 조용하던 방 안을 노크 소리가 울렸다.
“공녀님, 답장입니다.”
집사가 가져온 답장에, 아델라인은 곧바로 봉투를 뜯어봤다. 그 안에는 짤막한 답이 담겨 있었다.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갑자기 생겨, 내일 즈음에나 여유가 생길 것 같네요. 끝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찾아갈게요.]그 말에, 아델라인은 순간 축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모처럼 둘이서 같이 시간을 보낼 기회라 생각했는데, 알렉스가 바쁘다고 하니 들떴던 마음도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시무룩한 아델라인의 모습에 나이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델라인을 바라봤지만, 이내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걸 아는 나이아는 다시 업무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아닌가…….”
아델라인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하고, 식사하고, 저녁을 지나, 밤이 찾아왔다.
금세 괜찮아질 거로 생각했던 실망감은 아직도 아델라인의 마음에 남아 쓸쓸함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
알렉스가 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 알렉스를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에 시계를 바라봤지만, 어느새 시침은 자정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분명 알렉스도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겠지. 그 생각을 하며, 아델라인은 애써 이불을 끌어 올리고 잠기운 하나 없는 눈을 꾹 감았다.
잠시 뒤, 전혀 잠이 오지 않아 양이나 세고 있을 무렵.
“벌써 자는 거예요?”
들릴 리가 없는 알렉스의 목소리에, 아델라인은 세던 양 따위는 내던지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달빛을 등진, 빛나는 깊고 푸른 알렉스의 눈을 마주하자, 도저히 현실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분위기가 느껴졌다.
코에 느껴지는 화약과 피 냄새에, 그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를 떠올려 버린 아델라인의 심장은 끊임없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꿈인가. 자신이 알렉스를 보고 싶어 만들어 낸 환상일까. 아델라인은 확신 없는 목소리로 알렉스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알렉스?”
한결같이 차가운 알렉스의 손으로는 도저히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힘들어, 아델라인은 그의 눈을 한없이 응시했다. 바로 그때, 알렉스가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께로 가져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벌써 자 버리면 어떡해요, 저는 기대하고 왔는데.”
두근거리는 알렉스의 심박을 느끼자, 아델라인은 눈앞의 알렉스를 잡히지 않은 손으로 만져 봤다. 허상이 아니었다.
“오늘 바쁘다면서… 어떻게 온 거예요……?”
믿기 힘들다는 듯 중얼거리는 아델라인을 향해,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바쁜 건 어제까지였고요.”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는 회중시계를 꺼내 아델라인에게 보여 줬다. 알렉스가 버튼을 눌러 뚜껑을 열자, 자정을 지난 시침이 보였다.
“오늘은 시간 낼 수 있어요.”
그 말과 함께, 알렉스의 입술이 아델라인의 입에 포개어졌다.
잠시 뒤, 열려 있는 창문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도 이기지 못할 온기가 침대 위에 가득 깃들었다.
* * *
수도 근교의 저택.
한때 남부 귀족 중 한 가문의 여름 별장으로 쓰이던 저택이었지만, 영지군 해산 파동으로 인해 경매에 넘어간 저택은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 지하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끄아아악―!!”
“아아아악―!!”
벽을 뚫고 들려오는 비명이 지하실을 가득 울렸다. 하지만 지하실 한편 휴게실에 앉아 여유로움을 뽐내는 피오나는 와인을 음미하며 시간을 죽일 뿐이었다.
그때, 휴게실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불과 몇 개월 만에 초췌하게 변해 버린 황태자가, 풀린 눈을 한 채 피오나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태자에게 다가갔다.
“전하. 시설은 다 둘러보셨는지요?”
피오나의 물음에,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꽤 잘 갖춰진 시설이더군. 언제부터 준비한 건가 영애, 아니… 황태자비?”
황태자의 물음에, 피오나는 황태자의 몸을 안아 주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당연히, 황태자 저하를 향해 연심을 품었을 때부터 준비한 것이지요.”
그러자, 황태자는 미소를 지으며 피오나를 끌어안았다.
“…황태자비를 만난 게 행운이오. 덕분에, 나와 어머니를 무너뜨리려는 세상을 뒤엎을 수 있게 되었소.”
그 말에, 피오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2 황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알렉스와 필즈먼에게 돌리며 황후를 부추긴 것도, 황후의 정치적 자산이 탐나 황후의 암살을 사주한 것도 황태자 본인이면서.
도저히 웃음을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는 이 상황에, 피오나는 애써 비웃음을 순화시키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로피츠 공작이 휴양을 위해 소수의 식솔만을 데리고 귀향을 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황태자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러자 피오나는, 황태자를 부추기듯 속삭였다.
“거사를 치를 때입니다, 황태자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