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199
199화 에필로그
육군본부, 본부장 집무실.
그곳에서는 수년간 자리를 지켜 왔던 한 장성이 천천히 자신의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열여덟 초임 소위부터, 쉰아홉 육군본부장까지.
그 모든 세월을 정리하는 손길이건만, 그의 손은 한순간의 미련도 지체도 없었다.
바로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바쁜가?”
그 물음에, 필즈먼은 고개를 들어 문가를 바라봤다.
일흔여섯의 한 노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닙니다, 앉으시지요.”
필즈먼은 그렇게 말하며, 책상 앞 소파를 가리켰다. 그다음, 그는 직접 집무실 한편의 스토브로 다가가 물을 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보좌진들도 해산된 지라, 차를 대신 끓일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괜찮지. 오랜만에 자네의 차를 맛볼 수 있게 되었군.”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 앉은 뒤, 찬장에서 찻잎을 꺼내는 필즈먼을 바라봤다.
이내 물이 끓자, 주전자에 찻잎과 물을 넣은 필즈먼은 쟁반에 찻잔과 다과를 담아 주전자와 함께 테이블로 가져왔다.
찻물이 우려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노인은 필즈먼을 향해 말했다.
“아쉽지 않은가?”
“무엇을 말입니까?”
“이렇게, 군 생활의 끝을 해임이나 다름없는 사임으로 맺는다는 것이.”
그 질문에, 필즈먼은 잠시 노인을 바라본 뒤 주전자를 들고 노인 앞에 놓인 찻잔에 홍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아쉬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끝내려 했던 군 생활인데.”
“그런가.”
자신의 잔에 차를 따르는 필즈먼을 보며,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차를 음미하는 시간을 가지고, 노인이 그를 향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그때나 지금이나 차를 지지리도 못 타는구만.”
그 말에, 필즈먼도 피식 웃어 보였다.
“앞으로는 제가 직접 내려 마셔야 하니, 앞날이 어두울 뿐입니다.”
“그래도, 이 맛이 가끔 떠오르긴 했네. 이 지독하게 쓴 홍차의 맛이.”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수십 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언제나처럼 숙취에 찌들어 있을 때, 자네가 차를 타 줬지.”
“그랬었지요. 그게 벌써 41년 전이라니.”
필즈먼은 그렇게 말하며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 지독히도 쓴 홍차였다.
언제나처럼 살기 위해 술에 취해 길가에 널브러져 있던 한량 황자를 단번에 깨워 버릴 만큼 쓰디쓴 홍차.
노인은 그 홍차를 맛본 뒤, 다과로 손을 뻗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래서, 앞으로 계획이 있나?”
노인의 물음에, 필즈먼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를 바라봤다.
“계획 말입니까?”
“그래, 노후 계획 말일세. 할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촌 동네로 가서 꽃밭이나 일구자 하려 했지.”
그 말에, 필즈먼은 천장을 바라봤다.
“글쎄요. 일단은…….”
잠시 생각한 뒤. 그는 노인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비르텐에 가 볼 생각입니다. 여행을 겸해서.”
그 말에, 황제는 찻잔을 내려놓은 뒤, 생각에 잠겼다.
“비르텐…….”
잠시 뒤, 그는 고개를 들어 필즈먼을 바라봤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시지요.”
“알고 있었나?”
밑도 끝도 없는 질문. 그러나 그가 묻고자 하는 내용을 간파한 필즈먼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가 처음 마주한 알렉스는 황제의 아들이 아니라, 서던 퓨질리어 연대의 몇 안 남은 생존자였다.
“모든 건 제 변덕이었습니다. 리처드가 제게 말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가.”
필즈먼의 말에,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 세월 동안 고생 많았네.”
노인의 말에, 필즈먼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에게 말없이 경례하는 것으로 답했다.
한 시대를 소리 없이 지탱한 이에 대한 경의였다.
* * *
11월 말. 낙엽이 지고 완연히 겨울 날씨로 들어선 어느 날.
한 남성은 의회 정문에 서서, 시계를 바라봤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조금 남은 상황. 그가 시계에서 시선을 돌린 뒤 담뱃갑을 꺼내 연초를 입에 물자, 의회 정문과 담벼락에 주욱 놓여 있는 촛불들과 꽃다발들이 눈에 들어왔다.
담벼락과 정문 기둥으로 시선을 돌리자, 탄환이 박힌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도 아닌, 수없이 많은 탄흔이 눈길을 잡았다.
남자는 담배를 물고 성냥갑을 꺼내며, 마차를 타고 오며 읽었던 신문 기사의 내용을 떠올렸다. 신문 기사의 내용과 담벼락의 탄흔을 연관 짓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잠시 탄성을 흘린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놓여 있는 꽃들과 양초들과 달리 주변에는 꽃들과 양초들을 파는 아이들이 없었다. 하나 정도는 있을 법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없자, 남자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었다.
“…….”
잠시 입에 연초를 문 채 고민을 하던 남자는 성냥을 그어 입에 물고 있던 연초에 불을 붙인 뒤, 그것들을 담벼락 위에 올려놓았다. 바로 그때, 한 여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데이비드 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에, 데이비드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금발의 한 여성이 그에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아름다운 얼굴에 일순간 혹할 법도 했지만, 데이비드는 경계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안 걸까.
바로 그때, 여성이 먼저 자신을 소개하며 악수를 청했다.
“아델라인 폰 로피츠입니다.”
그 말에, 데이비드는 일순간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신문을 통해, 그리고 편지를 통해 이름은 잘 알고 있었다.
제6대 로피츠 공작, 그리고 현재 제국 의회를 대표하는 의장. 신문에서 초상화는 봤지만, 실제로 보니 훨씬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트레포드 해운조합 해상 보험부의 데이비드 헤센도르프입니다.”
“헤센도르프.”
낯선 도이치계 성씨에 아델라인이 의아하다는 듯 한 번 중얼거리자, 데이비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설명을 했다.
“외가 쪽 성입니다. 어머니께서도 잘 모르는 남작 가문의 성씨라는데. 직계는 아니었겠지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그 말에, 데이비드는 담벼락의 꽃들과 양초들을 눈에 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께서는 40년 넘게,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트레포드의 항구에서 여관 일을 하셨습니다. 선원들을 상대로 하는 싸구려 여관이지요. 술을 팔고 방을 내주고 선원들을 중개하고. 귀부인이 할 일은 아니죠.”
그 말을 들은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시간을 흘려보내고, 그녀는 데이비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편지로 연락했었지요.”
“네, 제가 황제 폐하의 조카이고, 황위 계승자다… 라고 하셨었지요.”
그 말을 한 데이비드는, 머리에 쓴 중절모를 벗었다가 다시 쓰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안 한다, 답하러 왔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그 말에, 데이비드는 담뱃갑에서 연초를 꺼내 물며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제 어머니께서는… 유달리 젊을 적 이야기를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유가 분명 있으셨겠지요. 분명.”
“…….”
“그렇지 않고서야 선황제의 은혜를 입으실 만큼 고귀하신 분께서 스스로 고된 여관 일을 자처하실 리가.”
그 말에, 아델라인은 담벼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후 2시부터 자정까지. 황태자의 반란은 열 시간 만에 진압되었습니다.”
아델라인은 꽃다발들과 양초들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열 시간 동안, 의회의 경비를 맡았던 제3 수도경비대는 전체 인원 850명 중 538명. 황태자 군을 분산시키기 위해 황궁에서 교란 작전을 펼쳤던 라이플여단 파견 중대는 80명 중 55명이 전사했죠.”
신문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구체적인 수치에, 데이비드는 숫자가 주는 무게감에 잠시 성냥갑을 꺼내 들던 손을 멈췄다.
그 모습을 흘끗 본 아델라인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황제가 사라지고 신분제가 철폐된다면, 존재 명분이 사라지는 귀족들이 위협을 느끼겠지요.”
그 말에, 데이비드는 성냥갑에서 성냥을 꺼내 긋고는 연초에 불을 붙이며 중얼거렸다.
“저는 골수 공화주의자 겸 자유당 지지자라서. 귀족이든 뭐든.”
“공화주의자라도, 내전을 바라지는 않겠지요. 열 시간에 수백 명씩 죽어 나가는 내전을.”
그 말에, 데이비드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없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물었다. 이내 아델라인이 입을 열어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 정국은 불안정해요. 의회는 의결 정족수를 간신히 웃돈 상태로 굴러가고 있고, 아직 황태자와 황후 일파를 곳곳에서 색출해 내는 중이지요. 이 상태에서 귀족들마저 불안 요소로 만들 수는 없어요.”
그 말에, 데이비드의 눈이 흔들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주가는 요동치고 있었고, 해상보험의 보험금은 계속해서 치솟고 있었다. 황태자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위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있으신가요?”
갑자기 틀어진 대화의 주제에, 데이비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답했다.
“…열 살 된 아들놈이 하나 있습니다. 공작께서는?”
데이비드는 그가 평소에 같이 일하던 사람들끼리 으레 주고받듯 가족에 대해 무심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아델라인은 아직 미혼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그가 당황하며 시선을 돌렸지만, 아델라인은 데이비드가 사과하기도 전에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배에 손을 올렸다.
“쌍둥이라네요.”
그 말에, 데이비드는 물고 있던 담배를 입에서 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직 결혼은 안 하셨다고 알고 있는데.”
“식은 아직 안 올렸지만, 약혼은 한 상태에요. 파견중대장이었죠.”
그 말에, 데이비드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황궁에서 파견 중대가 펼쳤던 기적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활약이 내전을 열 시간 만에 끝내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도, 신문으로 읽어서 알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며,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와 애 아빠는 혼란한 세상을 살아왔지만, 아이들에게만큼은 평화로운 시대를 물려주고 싶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세상에 이바지할 수 있게.”
그 말에, 데이비드의 눈앞에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범하게, 무난하게, 행복하게 살아오던 가족들의 얼굴이.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 혼자 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숙이며 데이비드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데이비드. 답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러자 데이비드는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갔다. 아델라인이 의회로 들어가려는 찰나, 뒤에서 한 노인이 다가왔다.
“이야기는 잘 끝냈나 보구만.”
그 목소리에, 아델라인은 곧바로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폐하.”
“그만두게, 곧 때려치우려고 이리저리 둘러보는 사람인데.”
“육군본부에 가셨다고 들었는데.”
“가는 사람 배웅은 해 줘야지. 그 친구 성격에 화려한 걸 원하진 않겠지만, 외로이 보내는 것도 그렇지 않겠나.”
그 말을 하며, 황제는 꽃다발을 담벼락 밑에 내려놓았다.
“…왜 직접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황제는, 아니 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델라인에게 황실의 또 다른 일족이라며 한 사람의 이름을 알려 줬을 뿐, 그 무엇도 직접 지시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황실의 정원을 직접 다듬으며 하루를 보내고, 여유 시간에는 펜을 들어 매뉴얼을 작성했다. 마치 후임을 맞이하는 것처럼.
그렇기에 아델라인은, 초대 로피츠 공작이 했던 것처럼 새로운 황제를 만들 준비를 해야 했다. 초대의 일기장마저 없었다면, 데이비드에게 황제 자리를 제안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리라.
그 질문에 황제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새 시대의 시작은 새 세대가 준비해야 하는 법 아니겠나.”
그 말에, 아델라인은 담으로 시선을 돌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무책임한 어른이시군요.”
“미안하게 되었네.”
“아닙니다, 알렉스도 그렇게 방치하셨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 말에, 황제는 멋쩍게 웃은 뒤 아델라인에게 물었다.
“대위, 아니… 소령은 지금 어떤가?”
“차차 나아지는 중이에요. 예전처럼은 아니겠지만 가볍게 뛸 수 있을 정도까진 나을 수 있다고 하네요.”
“다행이군.”
노인은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은, 담벼락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잊히지가 않습니다.”
“잊고 싶은가?”
“그건 아닌데…….”
아델라인의 뭐라 말해야 할지 망설이는 표정에, 노인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죽음은 잊는 게 아니라고, 난 생각하네.”
황제의 말에, 아델라인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황제는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벗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얇은 금 사슬에는, 낡은 반지 하나가 꿰여 있었다.
“묻어 두게 되더라도 기억하는 거지. 그 안쪽에 적혀 있듯이.”
황제가 목걸이를 건네자, 아델라인은 그 목걸이를 받아 들어 반지 안을 살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승리했어도, 승리를 위해 치러야 했던 값을 기억해야 하네. 그게 너무 고통스러우면 잠시 묻어 두는 한이 있더라도. 그게 산 자의 도리겠지.”
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난 가 보겠네. 행복하게나.”
“어딜 가십니까?”
그러나 황제는 말없이, 손을 들어 인사하며 자신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황제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찰나, 아델라인의 곁으로 알렉스가 다가왔다.
알렉스는 아델라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벗은 진녹색 제복 대신, 붉은 제복을 입고 아델라인에게 다가왔다.
“누구였어요?”
알렉스의 물음에, 잠시 아델라인은 고민을 한 뒤 알렉스를 바라보며 애매모호한 답을 했다.
“무책임한 사람이요.”
“네?”
알렉스의 되물음에도 불구하고, 아델라인은 제대로 답해 주지 않은 채 그의 팔을 끌어안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자, 가요!”
“어디로요?”
알렉스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디든, 일단 가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늦가을 내지 초겨울.
그 모호한 경계의 하루는, 변함없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