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2
2화 그 엑스트라
다시 눈을 뜨자, 21세기 대한민국의 병상은 어디로 가고 어젯밤 창문으로 비치는 옅은 달빛에 의존해 봤던 아델라인의 침실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이 되며 햇빛이 들이치자, 화려해 보였던 방 안은 예상보다 더욱 화려한 모습으로 그녀의 눈을 자극했다.
“일어나셨나요, 아가씨?”
옆에는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아델라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여자의 손에서 어느새 다리의 깁스는 풀려서 치워지는 중이었다.
“…어. 그래.”
“곧 의원님과 가주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여자가 방을 나가고, 잠시 뒤 한 손으로 세기 어려운 수의 시녀들이 먼저 방으로 들어와 자신의 수발을 들었다.
처음 겪어 보는 융숭한 대접에 정신없는 것도 잠시, 이내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것마저 타인의 손으로 해결하는, 처음 겪어 보는 경험을 마치자 침실에는 낯선 사람 둘이 대기하고 있었다.
“일어났느냐. 몸은 어떻고.”
약간 무뚝뚝해 보이는 중년 남성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델라인은 열심히 소설 속 내용의 기억을 짜냈다.
그리고 답은 꽤 쉽게 나왔다.
“몸은… 괜찮습니다, 아버님.”
“그래. 근 일주일을 의식을 잃고 있었으니. 걱정이 컸다.”
그러나 아버님 즉, 프레데릭 소뮤아 로피츠 공작의 얼굴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일말의 걱정이나 안도도 없는 무기질적인 표정이었다.
옆에 있던 의사는 묵묵히 그녀의 몸 상태를 살핀 뒤 말했다.
“건강 상태는 일주일간 의식 불명 상태였던걸 감안하면 예상 내입니다.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시고 재활을 위해 하루 두 시간씩 산책이나 승마를 하면 빠르게 건강을 되찾으실 거로 예상됩니다.”
“알겠다. 그만 가 보도록.”
“알겠습니다, 공작님.”
로피츠 공작의 명령에, 의사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방 안에 둘만 남게 되자, 공작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쯧. 멍청한 짓을 하는 건 네 어미와 똑 닮았구나. 그런 곳을 갔으면 들키지나 말 것이지, 괜히 들켜서 일을 크게 만들고…….”
공작은 혀를 차며 아델라인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지금까지는 이 사건을 담당한 육군과 수도경비대의 취조를 네가 의식불명이라는 이유로 막았지만, 이젠 깨어나 버렸으니 일이 더 어려워졌구나.”
공작은 혀를 연신 차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 기억나는 게 있느냐? 뭐, 같이 갔던 트뤼도 백작 영애는 기억이 안 난다고 했던데.”
그 말에 아델라인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거라면 효과적으로 시간을 벌 수 있겠지.
“사실…….”
“뭣이냐.”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근래의 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억이 구멍이 뚫린 것처럼…….”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공작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이번에 암시장을 습격한 육군 라이플여단 파견 부대의 진압이 너무 강경하고 과격했으니. 수도 한가운데에서 귀족들도 있는데 총격전이라니.”
“…그런 일이 있었나요?”
아델라인이 진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자,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 만족한 공작은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만 답하면 된다. 손에 피는커녕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키운 내 딸인데, 사람이 죽는 모습을 처음 봤으니 충격 때문에 기억상실이 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
나름의 시나리오를 짠 공작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가다가, 아델라인을 돌아봤다.
“그 누구에게도 허튼소리 하지 말거라. 연기할 거면 제대로 유지해. 멍청하게 실수하지 말고.”
그렇게 말하는 공작의 모습에, 아델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공작 영애 같지 않은 아델라인의 모습에 더욱 만족했는지 공작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방을 나갔다.
그러나 아델라인은 달랐다.
라이플여단 파견 부대?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단어인데…….
아델라인은 머릿속에 남아 있는 소설의 내용을 뒤졌다. 그러다가 어느 한 장면이 그녀의 머릿속에 팍! 하고 떠올랐다.
‘우리는 육군본부장 직할 라이플여단 파견 중대입니다. 황태자 당신의 명령은 우리에게 그 어떠한 효력도 없습니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앞가림이나 잘하십시오.’
여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황태자가 자존심이 상하는 걸 무릅쓰고 놀고 있던 매닝햄에게 가서 도움을 청한 장면. 다른 인물들이 하나같이 도움을 줄 때, 매닝햄은 원론적인 이야기만을 하며 도움 요청을 거부했었다.
그 때문에 본격적으로 독자들의 눈 밖에 났었지.
그러자 아델라인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래. 매닝햄, 그 짜증 나는 위인과 얽힐 이유가 없지. 그의 말대로, 자신의 앞가림이나 잘하면 그만이니까.
* * *
수도에 위치한 육군성의 휴게실. 마치 최전방이나 전장과는 따로 떨어져 있는 듯 푹신한 쿠션과 달콤한 음료가 가득한 곳이었지만, 알렉스에게는 결코 편하지 않았다.
항상 입는 진녹색 제복과 달리 붉은색의 모직 제복은 덥고 갑갑하기만 했다. 격식을 차려야 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이 옷을 입은 그는 지금 당장에라도 짜증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바로 앞에서 서류철을 펼쳐 든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경관 앞에서는.
“알렉스야.”
“대위, 알렉스 매닝햄.”
“진짜… 진짜 넌 항상 한결같다 진짜.”
매닝햄 대위, 알렉스 매닝햄은 자신 앞에서 한숨을 푹푹 쉬는 경관을 바라봤다.
흰색과 검은색이 대비되는 경비대의 제복을 입은 그는 서류철을 돌려 그에게로 밀었다.
“…좀 넘기자, 이번 사건은. 아니꼽더라도 넘겨 버리고 우린 손 떼는 게 나아.”
수도경비대의 제3 경비 대장 휘태커 경감을 찾아온 그에게 돌아온 답변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일이 꼬였다. 좀 많이 뒤틀렸어.”
휘태커 경감은 그에게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지금 백작가 영애가 트라우마를 호소하며 기억 안 난다고 드러누운 거 알지?”
“예. 알지요.”
방금 전에 조사하러 갔을 때도, 멀쩡한 얼굴로 뻔뻔하게 말하는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알렉스는 차를 홀짝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 공작가 영애도 같은 전략을 쓰는 중이다. 트라우마를 호소하며 기억상실이 일어났는데, 교양수업으로 연기라도 배우는 건지, 어떻게 뚫고 들어갈 엄두가 안 나.”
“진짜요?”
“그래, 그러니까. 하아…….”
휘태커 경감은 한숨을 푹 쉬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여기서 손 떼자. 악성 재고는 떠넘기는 게 나아.”
그 말을 하며 착잡한 표정으로 담뱃대에 불을 붙이는 휘태커 경감을 보며, 알렉스는 넌지시 물었다.
“레이크 하사 기억나십니까?”
그 이름이 기억 난 휘태커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래. 저번에 그 밀주업자 뒤통수 깬 놈. 그놈이 왜?”
“…의병 전역 판정받았습니다. 정식 통보는 월말에 나오겠지만…….”
그 말에 휘태커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는 물고 있던 담뱃대를 입에서 뺀 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직 완전히 닳지 않은 그의 양심은 알렉스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게 만들었다.
“…….”
“그 아델라인이라는 공작가 영애 호송하다가 다리가 제대로 베였습니다. 공무 중 부상이라는 것을 인정받으려면 보고서와 증인이 필요합니다.”
그제야 알렉스가 왜 이 일에 계속 매달려 있는지 알게 된 휘태커는 그를 바라봤다. 알렉스는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겠냐고.
휘태커는 잠시 앓는 소리를 내다가, 알렉스에게 물었다.
“그 영애들이 증언을 거부해서 전상자 처리가 안 되면…….”
“연금이고 뭐고 없겠지요. 퇴직금 몇 푼 받고 끝날 겁니다. 걷는 거도 간신히 걷는데 지금.”
“이런 젠장.”
심란한 감정을 표정으로 한껏 드러내던 휘태커는 담배를 뻑뻑 피우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이 건을 계속 붙들고 있는 건 아직 진급할 계급은 많은데 기회는 얼마 없는 그에게는 치명적인 낭비였다.
그러나 양심은 계속 그의 마음속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좀 도와 달라고. 많이 돕지 않았느냐고.
“하아아……. 이거 내가 좀 더 묵혀 뒀다가 도저히 진급 안 될 때 써먹으려고 했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 속 서류철 사이에서 서류 하나를 꺼냈다.
정보 길드 아스테리오스 사건 파일.
“이거 그냥 너 해라. 그 하사 말에 싣고 작전 지역에 발만 담그게 해. 애들 입 맞추는 건 쉽게 할 수 있잖아.”
조작하라는 소리나 다름없었지만, 알렉스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달 말이 되면 전상자로 인정받지 못한 레이크 하사는 고작 돈 몇 푼과 함께 강제로 쫓겨날 것이고, 망가진 몸으로는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는 게 힘들 테니까.
그는 서류철을 훑어봤다.
휘태커가 말한 대로 이건 비장의 수라고 불릴 만한 건수였다. 정보 길드라고는 하지만 허용 가능한 범위보다 훨씬 더러운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놈들이었다.
“우리가 조졌던 인신매매 조직 놈들과도 연결되어 있네요.”
“그래. 우리가 후속 지원으로 들어가겠지만, 주력은 너네가 해. 그냥 내 이름 좀 올려 주면 간섭은 안 할게.”
“제가 지휘해도 됩니까.”
“언제는 네가 지휘하지 않은 적이 있었냐. 나야 항상 이름만 올렸지.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최대한 조달해 줄게.”
월말까지 3주 남짓의 시간, 만만치 않은 적, 거기다가 지치고 피로한 부하들.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공작가의 그 뭐 같은 영애님은 평민 출신 하사관 한 명은 신경도 쓰지 않을 테니, 증언해 줄 리가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작전 안을 가져오겠습니다.”
* * *
일주일 뒤.
“좋아… 그러면.”
아델라인은 시계를 바라봤다. 자정의 야심한 시각.
일주일 동안 재활이라는 명분으로 산책과 승마를 하고, 기억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라고 외부에 내보이기 위해 공작이 붙여 준 가정교사에게 기본적인 예법과 교양 지식을 익히며 점점 흐릿해지는 소설 내용에 대한 기억을 강화했다.
아직 공작가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발소리를 죽이고 침대에서 나와, 미리 준비해 둔 옷을 입었다.
어찌어찌 빨래 건조대에서 슬쩍해서 숨겨 둔 하인의 옷. 다행히 사이즈는 약간 클 뿐 아예 못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평범한 모직물 셔츠와 바지를 입은 아델라인은 거울을 봤다. 평민의 옷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고귀한 외모였다.
뭐 어떠랴. 여차하면 모자로 얼굴을 가리면 되니까.
그다음, 그녀는 보석함에서 그동안 눈여겨본 반지와 장신구들을 잔뜩 챙겨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에 넣었다.
현금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게 없는지라, 어쩔 수 없이 이것들을 전당포에 맡기고 환전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근 일주일 동안 세운 계획을 바탕으로, 그녀는 다시 해야 할 일을 상기했다.
정보 길드 아스테리오스로 가서, 서브 남주 중 하나인 세이드를 만나 거래를 한다. 비단 주머니 속의 금품들과 소설을 읽으며 알게 된 세이드의 비밀, 그리고 앞으로 그가 마주할 위기에 대한 정보까지.
“이걸로… 해내야 할 텐데.”
자신은 여주처럼 그를 상대로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할 머리도 담력도 없었다. 그러나 해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아군을 만들어야 했다.
강력하고 든든한 아군을 만들어, 동아줄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야 했다. 소설 속 세상, 그것도 소설 속에서 비춘 적이 거의 없던 2년 전의 세상이니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나를 구해 줄 동아줄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적어도 내게 위협이 될 요소를 없애야 했다. 그런 점에서 세이드를 포섭하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완전히 무너진 아델라인의 숨을 끊는 건 세이드의 아스테리오스 길드였으니까.
“그럼, 가 볼까.”
그녀는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천천히 침실을 나섰다.
다행히 야심한 밤이라 사용인들은 얼마 없었다.
그녀는 부지런히 마구간으로 향했다. 다행히 마구간지기는 머리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자고 있었다.
“옳지. 캐러니, 옳지.”
며칠간 승마를 하며 친해진 아델라인의 애마가 그녀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다행히 안장도 주변에 걸려 있었고, 마구간지기가 했던 작업을 눈여겨봐 두었다.
“끙… 안장이 왜 이리 무거워.”
생각보다 무거운 안장을 캐러니의 등에 올리고, 다른 마구들도 장착했다.
그다음 살금살금, 마구간지기가 깨지 않게 조용히 마구간을 벗어났다. 다행히 온순한 명마인 캐러니는 그녀의 의중을 아는지 푸르륵 소리 한번 안 내고 잘 따라와 줬다.
그렇게 어느 정도 멀리 나왔을 때, 그녀는 캐러니 위에 올랐다.
“자, 그럼 가 볼까?”
며칠간 승마를 하며 감을 익힌 아델라인은 캐러니에게 말했다. 똑똑한 캐러니는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천천히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그래. 이건 좋은 조짐이야. 이 기세로… 튼튼한 동아줄이 되어 줄 서브 남주를 쟁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