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24
24화 사교 시즌 첫날
슥, 탁탁. 철컥!
희뿌옇게 밝아오는 새벽, 알렉스는 책상에 앉아 촛불에 의지하며 피스톨을 분해하고 부품을 일일이 점검했다.
고운 천에 강중유를 묻혀 닦자, 부품 곳곳에 끼어 있던 검은 탄매가 묻어 나왔다. 알렉스는 부품을 몇 번이고 닦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델라인. 아델라인 폰 로피츠.
세상에는 둘도 없는 악녀에 안하무인이라고 하지만, 그가 봐 온 바로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본 바로는 그랬다.
“후우우…….”
알렉스는 잠시 부품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부품을 닦아도 마음에 얹어진 이 감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동안 느껴 본 적 없던 감정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부품을 집어 들고 강중유를 묻힌 천으로 부품을 닦아 냈다.
어차피 자신은 평민이고, 그녀는 공작가의 외동딸이었다.
비록 자신에게도 그 간극을 좁힐 수 있는 수단이 있었지만, 그 수단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슥, 슥, 슥.
간신히 마음속에 인 동요를 가라앉히자, 그의 손은 더욱 빨라졌다. 흩어졌던 부품은 다시 한데 모아져 피스톨의 모양을 갖췄다.
피스톨의 공이에 새 부싯돌을 끼운 그는 공이를 당긴 뒤 방아쇠를 당겼다.
착!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자, 알렉스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서랍에서 탄약포를 꺼내 화약을 붓고 탄환을 넣은 뒤 꽂을대로 탁탁 총탄을 다졌다.
그때, 그의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와.”
그러자 문이 열리고 스워포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잠시 코를 킁킁거리더니 그에게 물었다.
“어우, 기름 냄새. 총기 정비하고 계셨습니까.”
“눈은 일찍 떠졌고 할 일은 없고. 잡생각 날 때 이거만 한 게 없으니까.”
알렉스는 회중시계를 봤다. 이제 슬슬 하루를 시작할 때였다. 황궁에서 사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고, 마찬가지로 중대에 내어진 관사에도 한둘씩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저도 가 보겠습니다. 점호는 하고 가야지요.”
“그래, 그렇게 해.”
스워포드가 문을 닫고 나가자, 알렉스도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을 시작했다.
낡고 버려진 건물이기는 해도 황궁은 황궁이라고, 조금의 보수가 이뤄지자 상하수도가 제대로 작동했다. 그는 수도에서 나오는 차가운 물로 몸을 씻으며 정신을 깨운 뒤, 옷장으로 향했다.
옷장 앞에 서자, 미리 다려 놓은, 평소에는 입지 않는 붉은색 제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붉은색 제복으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입어야 했다. 알렉스는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다.
‘이건 위장복이다, 녹색 라이플여단 제복이 그렇듯 이것도 위장복이다, 이게 더 안전하다.’
자기 암시를 마친 그는 붉은색의 육군 제복으로 손을 뻗었다. 제복을 다 갖춰 입은 그는 삼각모를 옆구리에 끼운 뒤 거울로 모습을 살폈다. 겉보기에는 멀끔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붉은색 제복을 입으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허리춤에 피스톨과 세이버를 장착했다. 그제야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가 방을 나서자, 그와 달리 녹색 제복을 입고 배낭과 장비를 챙긴 채 복도에 정렬한 대원들이 그를 바라봤다. 그들 중 한 장교가 알렉스를 향해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오우, 1등급 표적입니다 그려.”
그 말에 알렉스는 앓는 소리를 냈다.
“젠장, 누군 입고 싶어서 입나. 입어야 하니 입는 거지. 다들 집중!”
짝짝!
알렉스가 박수를 치며 주의를 집중시키자, 대원들이 모두 알렉스를 바라봤다.
“모두 제3 수도경비대와는 합동 작전 많이 해 봤지? 나는 아마 사교 시즌 동안 대부분 공석일 거다. 중대 지휘는 휘태커 경감이 맡을 거고, 각 소대는 소대장들이 지휘한다. 휘태커 경감 부재 시 1소대장이 중대를 지휘한다.”
그는 대원들을 바라보며 지시를 내렸다. 이미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지만, 병사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특히 황실 사냥대회는 사고가 자주 나는 행사이니, 배치되는 인원들은 꼭 인접한 사격조와 연락이 가능한 위치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하도록.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이상, 위치로.”
대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한 알렉스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 여름 사교 시즌의 첫날은 굉장히 화창했다.
삼각모를 머리에 쓴 알렉스는 벽돌로 포장된 길을 따라 황궁의 중심부로 향했다. 이미 황궁의 정문부터 중앙의 알현 궁까지 이어지는 길은 온갖 마차로 가득 차 있었다. 사교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황제 내외 알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알현 궁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알현 궁 앞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마차에서 내린 뒤 궁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잠시 그 앞에 서서 아델라인을 기다렸다.
몇몇 영애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알렉스는 회중시계를 보며 그 시선을 무시했다. 어차피 그의 상대는 정해져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대위님. 혹시 혼자이신가요?”
알렉스가 고개를 들자, 그 앞에는 한 귀족 영애가 서 있었다. 아델라인보다 키가 작은 갈색 머리의 여성이었다. 살짝 특이한 점이라면 눈동자가 보랏빛이라는 점. 객관적으로 보면 흠결 없는, 귀여운 상이었다.
그는 회중시계의 뚜껑을 덮고 주머니 안에 집어넣으며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일행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아니요, 멋있는 장교분께서 혼자 서 계시길래 말을 걸어 봤어요. 아, 참. 제 소개를 안 했네요.”
그녀는 양손으로 치맛단을 잡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루멘시아 백작가의 여식, 피오나 루멘시아라고 합니다.”
* * *
아델라인은 10분째 1미터도 못 움직이고 있는 마차 안에 앉아 있었다. 분명 다른 세상일 텐데, 어째서 명절날 고속도로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 펼쳐져 있는 걸까.
이럴 때는 나이아만 한 사람도 없었다. 항상 재미있는 이야기나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 주니까.
“나이아.”
아델라인이 나이아를 부르자, 맞은편에서 신문을 읽고 있던 나이아가 고개를 들어 그녀의 부름에 답했다.
“네?”
“재미있는 이야기 좀 있어?”
그녀의 요구에, 나이아는 잠시 고민을 한 뒤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말씀하신 루멘시아 백작가에 대해 조사를 조금 해 봤어요.”
“그래? 나도 잊고 있었네.”
“요즘 같은 경우에는 사교 행사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의 의뢰가 많아져서, 제가 의뢰했던 정보 길드도 어젯밤에 간신히 기일을 맞췄더라고요.”
“그렇구나. 어떤 내용이야?”
그러자 나이아는 어깨에 멘 조그만 크로스백에서 종이를 하나 꺼냈다.
“귀족으로서의 가문의 역사는 그렇게 길지 않더라고요. 한 200년 정도. 초대는 황실의 마도 근위대 수석 마법사인 알프레드 루멘시아가 대마법사로 인정을 받고 단승 작위를 받았는데, 그 뒤로 두 세대 정도 연이어 가주가 대마법사로 인정을 받아 승계가 가능한 작위로 인정받았어요.”
“마법사 가문이었던 건가?”
아델라인은 머릿속으로 소설 속 내용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설 속에서 여주가 마법을 쓴 적은 없었다. 뛰어난 직감으로 무언가를 발견해 위기에서 빠져나온다는 내용은 있어도.
“그때는요. 하지만 지금 가주의 증조부 때를 기점으로 후대에는 마법사가 나오지 않으며 가세가 기울었어요.”
“아하… 잠시만.”
아델라인은 나이아의 말을 듣다가 문득 이상한 지점을 찾았다.
“그러면 그랜드 투어는 어떻게 다녀온 거야? 분명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몇 년 동안 여러 나라를 다니는 건데.”
“그거에 관한 이야기가… 다시 전대 가주인, 현재 가주의 부친 때부터 시작해요.”
“부친 때부터?”
“조부 때까진 가세가 가파르게 기울었어요. 마법사가 안 나오니 가신들은 떨어져 나가고, 주 수입원이었던 제자 양성도 불가능해졌거든요. 거기다가 기존의 인맥들도 전대 황제의 폭정에 숙청되는 게 반이었고요.”
“나머지 반은?”
“전대 황제가 쫓겨난 뒤 새로 수립된 입헌군주제 체제에서 처벌받는 게 반이었고요. 하지만 그 덕에 반사 이익을 얻었어요.”
“어떻게?”
“많은 귀족이 숙청되며 새어 나오는 장물들을 값싸게 모아 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팔고, 또 그 당시 국경에서 빈번해진 무력 충돌 때문에 발행한 전시 채권에도 투자했죠.”
“그렇구나…….”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이아의 설명을 들었다. 나이아의 설명에는 아델라인이 소설에서 봤던 간략한 서술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정계에는 인맥이 없기도 하고 부를 다시 쌓는 과정에서 정직한 방법만 사용하지는 않아서 앞으로도 정계의 진출이 힘들 거예요. 다른 쟁쟁한 귀족 가문들과 비교하면 아직 위세가 작기도 하고요.”
“아하.”
아델라인은 나이아가 말해 주는 정보들을 머릿속에 넣었다. 그러자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쌓여 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아델라인은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지금쯤 원래 알렉스를 만났어야 했는데, 이대로라면 약속한 시각에 늦어 버리고 말 것이었다.
아델라인의 걱정이 통한 건지 마차는 슬금슬금 나아갔고, 어느새 알현 궁 앞에 다다랐다.
마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린 아델라인은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이 많아 한참을 두리번거린 끝에야, 간신히 알렉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손을 들어 그를 부르려던 그녀였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알렉스에게 미소를 지으며 재잘재잘 말을 하는 여자. 아델라인은 저 여자를 알고 있었다.
이 소설 속 세상의 여주인공, 피오나 루멘시아. 삽화로만 보던 사람을 현실에서 보자, 소설에서의 묘사가 더욱 체감되었다.
아델라인보다 훨씬 친절하고 귀여워 이야기 나누기 좋았는지, 알렉스의 얼굴에도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러나 그 대화도 잠시.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향해 손을 살짝 들어 보이며 다가왔다.
“아, 살짝 늦으셨네요. 공녀님.”
그 말을 듣자, 저번에 알렉스가 자신을 향해 이름을 불러 주었던 기억이 떠올라 더욱 마음이 동요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델라인도 알렉스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지내셨나요. 대위님.”
“걱정해 주신 덕분에. 이쪽은 피오나 루멘시아. 루멘시아 백작가의 여식입니다. 영애, 이쪽은 아델라인 폰 로피츠 공녀. 로피츠 공작가의 여식입니다.”
알렉스가 서로를 소개시켜 주자, 둘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녀님.”
“반가워요, 영애.”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고, 알렉스는 아델라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실까요?”
파트너로서 함께 들어가자는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어쩌면 이렇게 같이 다니는 게 마지막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아델라인의 마음속은 더더욱 복잡해졌다.
“그럼, 우리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알렉스가 그렇게 말하자, 피오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그래요, 안쪽에서 다시 뵐게요.”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맺혀 있었다.
“…….”
그러나 그 미소는 알현 궁의 정문에 펼쳐진 계단을 반쯤 오르자 싹 사라졌다. 그러자 아델라인의 마음은 더더욱 안 좋아졌다.
설마, 여주에게 마음을 품은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 때문에 작품 속에서 황태자와 대립을 하는 건가? 아닌데, 그러면 황태자가 도와 달라는 건 왜 거절했던 거지?
아델라인의 머릿속이 더더욱 복잡해질 때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알렉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우, 웃는 것도 일이네.”
그렇게 말한 알렉스는 빈손으로 자신의 광대를 잠깐 마사지하고 있었다.
“미소를 지어내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그나저나 오늘 왜 이리 늦으셨습니까?”
그는 회중시계를 주머니에서 꺼내 들어 보이며 살짝 핀잔 주듯 말했다.
“20분 정도 늦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웃음을 지어냈다고? 그럼 그 웃음은 가짜였던 거야?
갑작스러운 진실에, 아델라인의 주의가 흐트러지며 발목을 살짝 접질렸다. 그러자 그녀의 균형이 순간 무너졌다. 그때, 그녀의 몸이 갑자기 홱 당겨지며 알렉스에게 몸을 기대게 되었다.
알렉스는 그녀를 다시 바로 세우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러나 아델라인은 그 물음에 엉뚱한 질문으로 답했다.
“방, 방금. 미소를 지어내셨다고요?”
“그게 궁금했습니까?”
“당연하죠! 방금까지 웃고 있다가 표정 싹 굳으면 마음이 편하겠어요?”
아델라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알렉스는 그녀를 살짝 이끌며 계단을 올랐다. 아델라인이 마지막 칸을 디디고 계단을 모두 올라온 뒤에야, 알렉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 앞에서만 무표정이 되기도 합니다. 가면을 안 써도 되니까.”
그 말을 듣자, 아델라인은 어째서인지 부끄러움을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알렉스는 그런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자, 들어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