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43
43화 연기와 재 아래에서
사박 사박 사박.
알렉스와 스워포드는 숨을 죽이고 달려 나갔다.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황이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저 멀리서 이질적인 발소리가 들렸다.
마치 쫓기는 듯한 발걸음. 이미 방화선이 설정된 이후라, 방화선 뒤 이재민들의 발걸음은 무거우면 무거웠지, 조급하지는 않았다.
‘우회. 퇴로 차단’
‘확인.’
알렉스는 뒤따라오는 스워포드에게 수신호로 지시를 내린 뒤, 총구를 들고 달려 나갔다. 몇 시간 동안 내리 달린 그의 무릎은 송곳으로 쑤시듯이 아파져 왔지만, 여기서 넘어질 수는 없었다.
그는 다른 생각을 했다. 수도사단은 언제쯤 올 수 있을까. 불은 꺼져 가고 있을까. 얼마나 죽고 다쳤을까. 대원들은 잘하고 있을까.
아델라인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안드레이가 온 걸 보니 서신은 제대로 전달된 것 같은데. 지금쯤 훈장 수여식을 위해 드레스를 입고 황궁에 갔을까.
보고 싶었다.
오늘은 사교 시즌의 마지막 날이니, 같이 춤을 추자 청할 생각이었다. 오늘을 위해 사냥 대회 때 망가진 제복을 대신할 새 제복을 맞추기도 했다.
그런데 하필 오늘. 하필 오늘…….
“빌어먹을.”
알렉스는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털어 냈다. 여기서 아델라인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때, 알렉스의 귓가에 무언가 스치고 지나갔다.
스칵!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곧이어 알렉스의 볼에 얇고 붉은 선이 생겼다. 알렉스의 옆에 있던 반쯤 허물어진 벽에는 한 뼘 길이의 강철 화살이 박혀 있었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보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한 사람이 이재민들을 수용하는 중인 대피소 방향으로 도망치는 게 보였다.
알렉스는 어느새 자신의 볼을 타고 흐르고 있는 피를 슬쩍 손으로 닦아 낸 뒤 그 방향으로 달려갔다. 여기서 잡아야 했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면 잡을 방법이 없었다.
알렉스는 허리춤에서 나팔을 꺼내 불었다. 주변에 아군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스워포드 만큼은 제때 도와주러 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때, 석궁을 들고 뛰어가던 검은 로브의 사내가 갑자기 뒤로 돌아 석궁을 겨눴다. 그러자 알렉스도 동시에 라이플을 그 사내에게 겨눴다.
로브의 그늘 아래, 붉은 안광이 알렉스의 푸른 안광과 스쳤다.
이내 두 사내는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리고, 알렉스의 눈앞에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연기를 관통하며 쇄도한 화살은 알렉스의 왼 어깨에 틀어박혔다.
“끄읍……!”
자칫하면 심장에 틀어박혔을 화살을 옆눈으로 흘끗 본 알렉스는 이를 악물며 신음을 참아 냈다.
그때, 알렉스의 귀에 발소리가 들렸다. 멀어지는 발소리가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소리였다. 알렉스는 반사적으로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두어 걸음 물러선 뒤, 허리춤에서 피스톨을 뽑아 들었다.
훅!
그 순간, 석궁을 쏘았던 남자가 한 손에 단도를 든 채 달려들었다. 알렉스는 두어 걸음 더 물러나며 간신히 그 공격을 피했다.
남자의 오른팔에는 총탄에 관통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입에 넣자, 남자의 목과 얼굴의 혈관이 순간 울룩불룩 튀어나왔다.
“끄으으윽!!”
그 사내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오른팔의 상처가 금세 아물며 깨끗한 맨살을 드러내 보였다. 알렉스는 그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분명 팔을 관통당했을 텐데.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알렉스는 하늘을 바라봤다. 이 근처에서는 아직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이래서야 본부소대의 저격 지원은 힘들 것이다. 전장을 옮겨야 했다. 이 사내가 언제든지 피난민들 사이로 숨어 버릴 수 있는 이곳이 아니라, 본부소대와 제3 수도경비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잠깐의 대치 상황. 알렉스는 계획을 세웠다. 얼기설기 짜인 계획이었지만, 이것에 기대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회복약의 반동을 이겨 내고 호흡을 가다듬은 그 남자는 붉은 안광을 띠며 다시 알렉스에게 달려들었다.
삭, 삭!
예리한 단검이 계속해서 알렉스의 급소를 스치고 지나갔다. 간발의 차로 계속해서 피하고 있었지만, 점점 알렉스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 갔다.
지금 당장에라도 피스톨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이 정도로 가깝다면, 당장에라도 이 남자의 가슴에 납탄을 박아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속으로 되뇌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자.
알렉스는 그 말을 속으로 되뇌며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총탄 한 발로 제압하지 못한다면, 이미 한쪽 팔을 쓸 수 없는 알렉스는 더더욱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 사내가 알렉스의 가슴을 걷어찼다. 그러자 알렉스는 잔불이 남아 있는 잿더미 위로 볼품없이 나동그라졌다.
“끄으윽…….”
알렉스는 하늘을 바라봤다.
알렉스의 시야 가득 들어온 하늘은, 방금 전 그의 위로 펼쳐져 있던 하늘과 달리 푸르렀다.
“죽어라!!”
남자가 쓰러진 알렉스를 향해 단검을 역수로 쥐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잠시 뒤, 알렉스의 귀에는 자그만 폭음이 들렸다.
알렉스가 쓰는 제식 라이플보다 묵직하고 날카로운 총성이었다.
퍽!
단검을 든 남자의 어깨에서 피가 튀며, 잠시 움직임이 멎었다. 그 틈을 타, 알렉스는 곧바로 피스톨을 들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그 남자는, 총에 맞은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곧이어, 또다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알렉스의 귀에 들려왔다.
퍽.
또 한 번 뒤에서 충격을 받은 그 남자는, 그대로 알렉스의 위로 엎어졌다. 그 뒤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중대장님!”
한 손에는 석궁을, 다른 한 손에는 알렉스의 라이플을 들고 달려온 스워포드는 곧바로 등에 화살이 박힌 남자의 시신을 치우고 알렉스의 왼팔을 잡아 일으켰…….
“아, 아, 야, 야!”
“아이고, 여긴 언제 침 맞으셨대.”
허겁지겁 알렉스의 왼팔을 놓은 스워포드는 곧바로 오른팔을 잡고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자, 전투의 흥분으로 가려져 있던 부상들이 일제히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공원으로 가십시다, 팩 병장도 거기 있으니까.”
“그래…….”
알렉스는 간신히 다리에 힘을 준 뒤, 스워포드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스는 습관적으로 그 소리를 분석했다. 전열보병. 최소 연대급 이상. 스워포드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말라비틀어진 입술 사이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수도사단.”
입헌군주정 수립 이후, 의회가 수도로 병력 진입에 동의한 경우는 손에 꼽았다. 알렉스의 파견 중대가 세 번째 정도일까.
“허.”
알렉스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이런 변수를 만들어 낼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알렉스는 잠시 시계를 바라봤다. 아델라인과 원래 약속했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약속이 뭐고 시간이 뭐겠냐마는.
“스워포드.”
“옙.”
“나 응급 처치 받고 있을 테니까, 경비대에서 말 하나만 빌려다 줘.”
스워포드는 그 말을 듣자 당황한 표정으로 알렉스를 바라봤다. 그러나 알렉스의 표정을 본 스워포드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알렉스는 스워포드를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신경 써 줘서 고맙다. 루멘시아 백작가에서.”
그러자 스워포드는 놀란 표정을 잠시 지은 뒤,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고마우면 술이나 한잔 사십시오. 사업가 피가 흐르는지라 남들 연애사업도 눈에 밟히나 봅니다.”
“말은.”
퍽.
알렉스의 힘없는 주먹이 스워포드의 어깨를 툭 쳤다. 그들은 어느새, 이재민들로 가득 찬 공원 앞에 다다르고 있었다.
* * *
이재민 구호소가 된 공원. 아델라인은 공원 한가운데 세워진 천막 안에서 수도사단의 한 장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면… 지금 가지고 계신 영수증과 잔여 물자를 인계해 주시면 통합해서 이재민 구호를 진행하겠습니다. 민간에서 들어올 기금이나 구호물자는 대리인을 선정해 관리해 주시면 협조하겠습니다.”
“안드레이 레이크 집사가 제 대리인으로서 협조를 위해 여기에 남을 것입니다.”
아델라인이 대리인을 선정하자, 장교는 수첩에 메모한 뒤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영애.”
아델라인은 장교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한 번 몸을 가눌 때마다 체력이 확확 줄어드는 게 느껴졌지만, 오늘의 일정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공녀님, 지금 출발하시지 않으면 수여식에 늦습니다.”
옆에 있던 장교의 시계를 빌려 시간을 확인한 나이아가 아델라인의 귀에 속삭였다. 그러자 장교는 아델라인을 향해 제안했다.
“사단 직할 기병대를 동원해 영애의 마차를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아니에요, 그 정도로 대우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서두르면 될 일이에요.”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천막의 입구로 걸어갔다. 그때, 아델라인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폐가 안 된다면.”
“말씀하십시오, 영애. 영애께서는 자격이 되십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한 장교의 태도. 하지만 아델라인은 조심스레 그 장교에게 물었다.
“라이플여단 파견 중대의 중대장, 알렉스 매닝햄 대위는 혹시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그러자 장교는 잠시 고민한 뒤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파견 중대는 우리 사단 명령 체계에 속해 있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릅니다.”
“아, 아니에요. 그럼 수고하세요.”
아델라인은 서둘러 천막을 나왔다. 천막 앞에 기다리고 있는 마차에 나이아와 함께 올라타자, 마차는 병사들이 터 준 길을 따라 공원 밖으로 빠져나왔다.
불은 어느새 다 사그라들었는지, 하늘은 저녁노을의 주황빛을 되찾았다. 그 하늘을 본 아델라인은 나이아에게 물었다.
“…괜찮겠지?”
나이아는 그녀의 목소리에 묻어 나오는 걱정을 알아채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마차 안은 침묵에 빠졌다.
“나이아.”
“네.”
“아무거나 이야기해 줄 수 있어?”
“원하시는 이야기가 있으실까요?”
나이아가 조심스레 묻자, 아델라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거나. 오늘 일과 관련된 건 빼고.”
그러자 나이아는 잠시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그거 혹시 아시나요?”
“뭘?”
“파인애플을 파인애플이라 부르는 언어는 우리가 쓰는 제국 공용어밖에 없대요.”
빙의 전에도 몰랐던 이야기. 신기할 법도 했지만, 아델라인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았다.
아델라인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나이아에게 물었다.
“그러면 다른 나라들은 뭐라 부르는데?”
“아나니스라고 한다고 하네요. 대부분의 언어권에서.”
“신기하네.”
아델라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결국, 나이아는 더 말을 거는 걸 포기하고 아델라인을 살폈다.
그때, 아델라인의 눈이 번뜩 떠졌다.
삼각모를 왼팔 옆구리에 끼운 한 검은 머리의 육군 장교. 제복이 익숙하지 않은 건지, 그는 계속해서 옷깃을 매만지고 있었다.
마차가 점점 다가가자, 그 남자의 얼굴이 조금 더 또렷하게 보였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곧장 마부석 방향의 벽을 두드렸다.
“멈춰 봐요!”
끼익.
갑작스러운 요구에 마부는 급하게 마차를 멈춰 세웠다. 마부가 내려 계단을 설치하기도 전에, 아델라인은 직접 문을 열고 마차에서 내려 달렸다.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검은색 머리카락, 몇 번 안 입은 듯한 붉은색의 육군 제복, 거기다가 그 제복이 불편한 듯한 손 움직임.
그러나 그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자, 아델라인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영애?”
덜컥.
아델라인은 알렉스와 전혀 다른 인상의 장교를 보고는 몸을 돌렸다.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자, 알 수 없는 감정이 속에서 차올랐다.
슬픔, 부끄러움, 걱정 등등. 안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알렉스가 보고 싶었다. 뒤이어 허겁지겁 따라온 나이아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공녀님!”
“아…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아델라인은 몸을 돌려 황궁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마차를 타지 않더라도 가야 하는 길이었다. 황궁의 정문을 지나 알현 궁 앞으로 걸어가자, 여기저기서 붉은색 제복을 입은 이들이 아델라인의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알렉스처럼 보였다. 하지만 알렉스는…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제때 올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때, 아델라인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20분 정도 늦으셨습니다.”
사교 시즌 첫날. 알렉스가 회중시계를 주머니에서 꺼내 들어 보이며 했던 말. 그 목소리와 약간의 핀잔을 곁들인 어조까지 아주 똑같았다.
아델라인은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오늘은 뭣 때문에 늦으신 겁니까?”
얼굴에는 연고가, 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고. 왼팔은 부목을 댄 상태여서 코트를 제대로 입지도 못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짙은 피 냄새와 연고의 쓴 냄새, 그리고 매캐한 냄새가 아델라인의 코를 찔러 왔다.
그러나 아델라인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알렉스!”
와락.
알렉스를 껴안은 아델라인은, 이내 그의 품속에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당황한 알렉스는 잠시 주변을 돌아본 뒤, 조용히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보고 싶었어요. 아델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