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52
52화 애런 휘태커
아델라인은 그 말에 아래를 향하던 시선을 피오나에게로 옮겼다. 그리고 루멘시아 백작가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오해요?”
아델라인은 태연함을 가장하며 피오나를 바라봤다. 그러자 피오나는 두 손으로 찻잔을 붙잡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말실수를 해서, 두 분을 오해하게 만들었어요. 그걸 바로잡으려고 계속 생각했는데,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이렇게 늦어 버렸어요.”
“계속 말해 보세요, 피오나.”
아델라인의 말에, 피오나는 천천히 차를 홀짝인 뒤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일부러 두 분 사이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어요. 그때는 단지 사교 시즌의 파트너일 뿐일 거라고 생각해서 대위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어요.”
“어떤 도움을요?”
“…아버님께서 군수 사업을 눈여겨보고 계세요. 그래서 저보고 매닝햄 대위에게 접근하라고…….”
그 말을 들은 아델라인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알렉스를 이용해 현재 육군본부장인 필즈먼 대장에게 접근하려는 그림. 그러자 아델라인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졌다. 그리고 그걸 느낀 피오나는 한껏 움츠러든 태도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지금이라도 사과를 드리고 싶어서요.”
“걱정 말아요. 제가 말을 전해 줄게요.”
아델라인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쩔 수 없었겠지. 이제는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워졌지만, 소설에서도 여주인공은 정략결혼을 할 뻔했었으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피오나는 아델라인의 대답에,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잠시 연신 감사를 표하는 피오나와 아델라인 사이의 실랑이 아닌 실랑이가 이어지고 나자, 어느새 시침이 많이 움직여 있었다.
그러자 아델라인의 머릿속에서 일정이 떠올랐다. 오늘은 구호소에 의사들이 오는 날이었지.
“그럼, 저도 다음 일정이 있어서.”
아델라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피오나도 따라서 일어나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구호소에 가시는 건가요?”
피오나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피오나가 아델라인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 전해 드린다는 걸 깜빡했네요. 구호소에 요긴하게 쓰인다면 기쁠 거예요.”
봉투를 건네받은 아델라인은 피오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뭔가요?”
그러자 피오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곡식들의 현물 권리 증서에요. 많지는 않지만, 받아 주셨으면 해서요.”
그 말을 하며 눈웃음을 짓는 피오나의 눈꺼풀 사이에서는, 일순간 눈빛이 반짝였다.
* * *
이제는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구호소에 도착한 아델라인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병사들에게 둘러싸였다. 병사들은 다가오려는 구호소의 빈민들에게 강한 눈빛을 쏘아 대며 접근을 막았다. 여차하면 들고 있는 머스킷에 꽂힌 총검을 겨누기라도 할 것처럼.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요.”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아델라인은 병사들을 이끄는 부사관에게 말했지만, 부사관은 고개를 저으며 아델라인에게 반론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여사님.”
“그건 맞지만…….”
아델라인은 병사들의 벽 너머, 꽃송이를 모아 만든 꽃다발을 든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병사들이 무서워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이 보였지만, 당장 옆에 있는 부사관과 병사들의 태도는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아델라인은 그 아이에게 손 한번 내밀어 보지 못하고 호위를 받으며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안드레이의 빈자리를 채운 가문의 사람들과 수도사단의 부사관들이 구호소의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천막은 항상 조용했지만 부지런했다.
“공녀님.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는지.”
아델라인이 파견한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아델라인은 손을 내저으며 집사의 인사를 받았다.
“바쁜 거 아니까, 그렇게까지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어. 그냥 잘 굴러가나 보려고 온 거야. 장부를 좀 봐도 될까?”
“아, 네. 잠시 기다리시면 마저 정리한 뒤 준비하겠습니다.”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천막 구석의 의자에 앉아 있던 사환에게 눈짓하자, 사환은 곧바로 일어나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아델라인은 천막 가운데에 마련된 테이블의 의자에 앉아 차와 장부를 기다렸다. 그때, 천막을 열고 한 명이 더 들어왔다.
“아, 아들러 집사. 임시 숙소 관련해서 경비대 의견이 좀 있어서. 이걸 참고하면 도움이 될 걸세.”
사냥 대회 때 만났던 모습보다 훨씬 초췌해진 휘태커는 서류를 집사에게 건넨 뒤, 아델라인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여사님. 저번의 사냥 대회 이후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둘 다 바빴으니까요. 같이 차 한잔하실까요?”
“차는 언제나 환영이지요.”
아델라인의 권유에, 휘태커는 모자를 벗으며 아델라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사이 차를 준비한 사환이 두 사람 앞에 잔을 놓고 차를 따라 주었다.
휘태커와 아델라인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서로를 바라봤다. 사실 알렉스라는 연결고리가 없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휘태커 경감도 소설 속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고.
잠시 고민을 한 아델라인은 둘 사이의 하나뿐인 연결고리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알렉스와는…….”
“알렉스와는…….”
그러나 그 생각을 한 건 아델라인 자신만이 아니었는지, 둘의 입에서 동시에 똑같은 단어가 나왔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휘태커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질문하시지요. 무엇을 물으시려는지는 알겠지만.”
“그렇다면… 알렉스와는 무슨 사이인지 물어도 되나요?”
그러자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생각을 정리한 휘태커는 그녀를 향해 답했다.
“전장에서 이어진 연입니다. 그 친구 덕에 몇 번이고 목숨을 구했지요.”
“그런가요.”
그 이야기를 듣자, 조금 더 궁금증이 일었다. 전장에서의 알렉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도 될까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휘태커는 잠시 고민했다.
“재미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 * *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팔에 힘을 주고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나려 했지만, 요새의 벽면이 무너진 경사면에 드러누운 채로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의 바로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총포탄이 공기를 가르며 내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경사면에 드러누워 버린 그의 팔다리를 억누르고 있었다.
자신의 연대원들은 어디 있을까. 간신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이미 주변에는 죽은 자들과 죽을 자들만 있을 뿐이었다. 제복의 사소한 차이는 계속해서 자욱하게 이는 먼지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간신히 머리를 굴려 자문자답을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37 보병연대 부연대장, 애런 휘태커 소령이다. 여긴 어디인가. 여긴 호더빌이다. 호더빌의, 빌어먹을 성형 요새이다.
자문자답하며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휘태커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일어나십시오, 뒤지기 싫으면!!”
진녹색의 제복을 입은 자의 거친 손길에, 휘태커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다리에 힘을 주고 두 발로 땅을 디딜 수 있었다. 그사이 제복을 입은 남자는 어깨를 잡고 앞을 바라보게 만든 뒤 목덜미를 잡고 허리를 숙이게 했다.
“레이크 하사!! 37연대 영관장교!!”
“이쪽으로 데리고 오십시오, 선임위관님! 13연대와 51연대 잔존병력 모아 뒀습니다!!”
그렇게 휘태커는 거칠게 떠밀려 어떤 둔덕으로 굴러 들어갔다. 그 둔덕 아래에는 각기 다른 제복을 입은 병사들과 간부들이 있었다. 한 병사는 팔에 총탄을 맞은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어떤 부사관은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알아듣지 못할 웅얼거림을 계속 흘리고 있었다.
그사이 선임위관이라 불린 남자는 둔덕 아래로 뛰어든 뒤 들고 있던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잠시 뒤, 계속해서 산탄을 뿌리던 요새포 중 한 대가 포를 쏘기 직전 멈췄다.
그걸 확인한 선임위관은 휘태커의 목덜미를 잡은 뒤, 귀에 크게 외쳤다.
“지휘하십시오! 이 근처에 있는 영관장교가 소령님 포함 둘밖에 없습니다! 잔존병력이 전진해야 뒤에서도 병력이 올라옵니다!”
갑작스러운 요구. 자신이 조금 전까지 속해 있던 연대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데, 다른 연대의 잔존병력이 섞인 급조 부대를 지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눈앞의 이 경보병 선임위관에게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 나 같은 나약한 인간보다는.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선임위관의 한마디는, 찰나의 비겁한 생각을 지워 버리게 했다.
“여기서 주저하면 이 애들 다 죽습니다! 갑시다! 여기서 죽을 겁니까!!”
* * *
“그렇게 된 인연이었습니다. 통성명은 한참 뒤에야 했지만.”
“아하. 호더빌. 들어 본 것 같기는 해요. 제2 황자가 그곳에서 전사하셨다고. 그런 사연이 있었던 줄은 몰랐네요.”
아델라인의 말에, 휘태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가 질문할 차례. 그러나 대화의 틈새를 노리고 있던 집사가 헛기침을 하며 순서를 가로챘다.
“여기 있습니다, 공녀님.”
“아, 고마워. 잠시만.”
장부를 건네받은 아델라인은 피오나가 줬던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집사는 그 자리에서 봉투의 봉인을 뜯은 뒤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곡물 권리 증서이군요.”
그 말을 들은 휘태커는 집사의 손에 들린 권리 증서를 바라봤다. 뒷면에 찍힌 발행 일자와 서명을 본 휘태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권리 증서를 낚아챘다.
“잠시만, 잠시만 보겠습니다.”
수첩을 꺼내 권리 증서의 일련번호, 서명, 발행 일자 등등을 적은 휘태커는 다른 페이지를 펼쳐 일련번호를 대조했다. 성 조지 병원에서 죽은 그 증권가가 거래했던 권리 증서의 일련번호 중 하나와 일치했다.
“이거, 누구에게서 받으신 겁니까?”
* * *
그날 밤. 수도 동부의 한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알렉스는 조용히 한 이름을 읊조렸다.
“…피오나 루멘시아.”
알렉스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양손에 나무 잔을 들고 온 휘태커가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귀족 가문이라 함부로 건드리면 위험하다.”
알렉스는 그 잔에 담긴 액체를 입에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핫초코. 어느새 서늘해진 밤공기에 어울리는 음료였다.
알렉스는 핫초코를 홀짝이며 고민했다.
“같은 보라색 눈동자라고 접근하면 안 되겠죠?”
“바다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섬동네로 좌천되고 싶냐?”
휘태커의 말에,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한 말이었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피오나가 건넨 곡물 권리 증서가 ‘우연히’ 얼마 전 사망한 한 증권가의 거래로 발행되었다고 해도, 그게 피오나를 상대로 수사를 진행할 수 있는 명분은 되지 못했다.
그냥 ‘선물로 받았어요’ 하면 그만이니까.
“그쪽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냐?”
“…일단 어떻게든 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알렉스의 말에, 휘태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누군가가 심하게 다치거나 죽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다음 작전은 언제… 이런 것도 대답하기는 힘들겠지.”
“죄송합니다. 뭐 필요한 일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냐. 그냥.”
그런 말을 한 뒤, 자신의 잔에 든 핫초코를 홀짝이던 휘태커는 알렉스를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알렉스 네가 무슨 일을 하는 중인지는 알아?”
“누가 말입니까?”
“로피츠 여사. 너한테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에, 알렉스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말로 뭐라 하기 쉽지 않은 감정이, 알렉스의 머릿속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걸 옆에서 본 휘태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직 안 말했나 보군.”
“어떻게 알려 드립니까, 선배님께도 못 알려 드리는데.”
“아니, 그 전에.”
휘태커는 알렉스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어느 날 갑자기 훅, 사라질 수 있다는 건 아냐?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마시던 상대가 다음 날 영원히 잠이 들 수 있다는걸?”
“…….”
그 말을 들은 알렉스의 표정이 굳어지자, 휘태커는 잔에 얼마 남지 않은 내용물을 쭈욱 들이킨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말했다.
“잘 생각해라. 전쟁 치를 때면 몰라도, 남들 다 평화롭게 살 때 혼자 슬퍼하는 건 생각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다.”
휘태커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치레로 손을 저은 뒤 천천히 자신이 왔던 길을 걸어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알렉스는 어느새 식어 버린 잔을 들고 중얼거렸다.
“아직 그럴 용기가 부족한가 봅니다, 저는…….”
알렉스는 그리 말하며 싸늘하게 식어 버린 핫초코를 단번에 들이켰다. 분명 달콤한 핫초코임에도, 그의 입에서는 어쩐지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