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8
8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들어가서 쉬어. 괜히 늦은 밤에 불러내서 미안해.”
“아닙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나이아의 도움을 받아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아델라인은 자신의 침실로 들어왔다.
문을 닫자, 코끝에 비린내가 느껴졌다. 이건 다름 아닌, 피 냄새였다.
“……!”
그리고 그 피 냄새의 원인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제야 왔군요.”
“…무슨 일이시죠.”
왼쪽 손목을 천으로 꾹 눌러 지혈하며 앉아 있던 알렉스가 달빛에 비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봤을 때 입고 있던 제복 차림이 아니라 사복 차림이었기에 생소했지만, 그래도 그의 외모만큼은 여전했다.
뚝. 뚝.
그러나 알렉스가 손목에 덧대고 있는 천이 온통 피로 젖어 결국 핏방울을 바닥에 떨어트리자, 잠시 외모에 넋이 나가 있던 그녀의 정신이 돌아왔다.
“다쳤어요?”
“오다가 조금 다쳤습니다. 중요치 않으니 본론을…….”
“본론이고 자시고, 그거 손목 베인 거 맞죠?!”
아델라인은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침대 머리맡의 물병을 가져와 손목을 씻어 냈다.
그러자 손목에 횡으로 길게 그어져 있는 붉은 선이 드러났다.
“…잠시만 기다려요.”
아델라인은 옷장으로 가서 손수건을 한 주먹 크게 쥐어 가져왔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자수가 박혀 있는 실크 손수건이었지만, 그녀에게는 그런 건 상관없었다.
아델라인이 손수건을 죽죽 찢어 붕대처럼 만들었다. 동방에서 온 실크로 만든 손수건을 아낌없이 찢는 모습에, 알렉스는 그녀에게 말했다.
“사람이 바뀌었다는 게 사실인가 보군요. 공녀.”
그 한 문장 안에는 그녀가 귀한 실크 손수건을 찢는 것에 대한, 그리고 손수 응급처치를 해 준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예예, 많이 바뀌었죠.”
물론 아델라인에게는 아무런 말도 귀에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오로지 손을 바삐 놀리며 손목에 천을 감는 데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아델라인은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이내 알렉스의 손목에는 그럴듯한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 실크 붕대를 보자, 알렉스의 마음속에서 어딘가 이상한 감정이 일렁였다. 그러나 그는 애써 그 감정을 무시하며 아델라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꽤 능숙하군요.”
알렉스가 절제된 감탄을 담아서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능숙하지요. 그래서.”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앞으로 의자를 끌고 온 뒤, 의자에 앉아 그를 마주 봤다.
“다시 볼 일이 있을 거라는 게 이거였나요?”
“계획과는 다르지만, 그런 셈 치지요.”
알렉스는 그녀를 응시했다.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시선에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마치 시간을 보는 것인 양 시선을 벽시계에 고정한 뒤 물었다.
“그럼 먼저 용건을 말하시죠. 손목을 다쳐가면서까지 여기 왜 몰래 숨어들어 왔는지.”
알렉스는 잠시간의 침묵 후 입을 열었다.
“나이아 레이크. 그녀를 왜 들인 겁니까.”
나이아의 이름이 나오자, 아델라인은 제 생각대로 상황이 흘러갔음을 알아챘다. 그러나 그녀는 그 어떤 감정도 표출하지 않은 채,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시녀를 한 명 새로 뽑고 싶었고, 때마침 아카데미를 졸업한 유능한 인재가 있다기에 고용했지요.”
“당신 가문에서는 평민 시녀를 들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람이 언제나 같은 선택을 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평민이라고 해서 유능한 인재를 놓치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고.”
아델라인은 사실을 조금씩 풀어내며 답했다. 그러나 전부 말하지는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고.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알렉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좋습니다. 어차피 나이아의 선택이고 본인이 좋으면 하는 거죠. 다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만약 나이아에게 문제가 생기면,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아래를 흘긋 내려다봤다. 여기는 3층이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에는 단 한 줌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가 창문 너머로 몸을 넘기려는 순간, 아델라인이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걱정되나요?”
그녀의 질문에, 알렉스는 뒤를 돌아봤다.
“네?”
“그렇게 그녀가 걱정 되냐고요. 레이크 하사의 유일한 혈육이.”
그러자 알렉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나이아를 이용해 저를 압박하려는 것으로 느껴지겠지.
“뒷조사를 많이 하셨나 보군요.”
“뭐, 어찌어찌하다가 주워들은 게 많아서요.”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날카로운 눈빛을 애써 넘기며, 그를 바라봤다. 저렇게 째려보는 건 왜 또 멋있는 거지.
아델라인은 잠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생각을 다잡은 뒤 그에게 물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세이드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아스테리오스 길드의 지부를 한 명의 부하도 잃지 않고 무너뜨린 알렉스와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그럼 나랑 한 가지 거래를 해요.”
“무슨 거래?”
알렉스는 그녀를 계속 째려보며 말했다. 그런 그의 눈빛을 계속 받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들었지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선 버텨 내야만 했다.
“이번에 황실에서 무도회를 주최하는 거 알고 있죠.”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델라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날, 무도회장에 큰불이 날 거예요. 그리고 그 화재 속에서 황후가 암살당할 거고요.”
아델라인을 향한 알렉스의 눈빛은 ‘내가 널 어떻게 믿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 예상했던 반응이었잖아.
아델라인은 그의 냉담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들이 그걸 막아 줬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왜?”
“당신들은 황궁에서 근무하고 경비를 서잖아요.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자 알렉스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도대체 왜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 알 수 없었던 아델라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웃으시죠?”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알렉스는 손을 들어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
“첫째. 그날 아니, 그날을 포함한 한 주 동안 우리 중대는 비번입니다. 당장 가족들 얼굴을 몇 달째 못 본 사람이 수두룩 빽빽한데, 제가 부탁한들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래도…….”
그녀가 반박해 보려 했지만, 이내 알렉스는 또 다른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
“둘째. 귀족들은 우릴 병적으로 싫어합니다. 우리가 전장에서 적국 귀족 장교들 저격한 것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당장 지난 전쟁에서, 우리는 황후의 6촌 관계의 귀족을 저격했습니다. 그 부관들도.”
“…….”
“그 때문에 우리는 황궁 공식 행사에 투입되지 않습니다. 괜히 충돌이 일어날 수 있고, 또 그런 소위 ‘멋있는’ 일은 황실의 친위대가 다 가져가니까.”
“아무리 그래도… 황후잖아요! 제국의 달!”
그녀가 소리치자 알렉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 사람이 제 월급 줍니까? 그 사람이 제공해야 할 우리 중대 공관, 지금 10개월째 배정 못 받아서 천막 치고 땅굴 파서 지내고 있습니다.”
아델라인은 생각보다 열악한 그들의 환경에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친위대가 본래 서야 할 황궁 경비 근무, 우리가 서고 있습니다. 합리적인 임무 배정? 그런 건 현실에 없더군요. 그렇게 상부는 조금만 참아 달라 그러고 있고, 황실은 무시하고 있지요.”
알렉스의 눈에는 한이 서려 있었다.
아델라인은 왜 작중에서 그의 모습이 항상 소극적이고 게으른 모습으로만 나오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돈도 안 줘, 집도 안 줘, 대우도 개차반이야, 일도 떠넘겨.
아무리 긍정적인 사람이어도 소설 속 ‘매닝햄 대위’처럼 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게 소설 속의 진짜 현실인 건가.’
“뭐, 우리가 그때 비번이라면 적어도 우리는 책임을 피할 수 있겠군요. 간만에 친위대하고 황태자가 물 먹는 것도 볼 수 있을 거고.”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이아는 따로 뭘 안 챙겨 줘도 제 몫은 할 겁니다. 그러니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불합리한 처우로 그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는 아델라인에게 바싹 얼굴을 들이대고 말했다.
“단단히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알렉스는 창가로 걸어간 뒤 창문 너머로 몸을 던졌다. 마치 뛰어내린 것 같은 그 동작에, 아델라인은 창가로 달려가 밖을 내다봤다.
그러나 창문 아래의 풀숲에는 쓰러진 사람 따위는 없었다. 오직 그림자에 녹아들어 사라져 가는 실루엣 하나만이 보일 뿐이었다.
“진짠데…….”
아델라인은 창문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분명 황후는 암살당할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황태자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뀐 황태자의 인생에는 아델라인의 목을 치는 일도 있었지, 아마.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만은 안된다는 말이다.
절―대.
“그래서 누구에게 어떻게 도움을 받냐고…….”
그녀는 중얼거리며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
막막하디 막막했다.
* * *
“…흥미롭네.”
공작가 저택의 마부 숙소.
마도구로 아델라인과 알렉스의 대화를 도청하고 있던 세이드의 얼굴에 흥미로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몇 달 전, 자신의 길드로 의뢰가 들어왔었다.
황후를 암살해 달라는 꽤나 위험한 의뢰. 원래라면 받아들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수지 타산이 안 맞으니까.”
황후가 암살당하면 당연히 사회 전반에 경계심이 높아질 거고, 그러면 자신들같이 음지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힘들어진다.
단기적으로는 꽤 짭짤해도 장기적으로는 영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협상을 하러 온 이의 얼굴을 보자, 그 생각은 완전히 뒤집혔다.
“역시, 피보다는 권력인가.”
세이드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 단기적으로도 장기적으로도 꽤나 해 볼 만한 일감이었다.
“그나저나… 저 영애님은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저번에 우리의 아지트에 아무런 초대도 없이 온 것도 그렇고…….”
과거 아델라인은 그냥 평범한, 머릿속이 버터크림으로 가득 차 있는 허영심 가득하고 제멋대로인 귀족 영애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까 철부지 귀족 영애가 멋모르고 남이 가자는 대로 인신매매를 통해 상품을 공급받는 그런 불법 암시장에 발을 들이지.
하지만 그녀가 일주일 동안 정신을 잃은 뒤로, 점점 다른 모습을 보였다.
평민 여자를 하녀도 아닌 시녀로 들이지를 않나, 사용인들을 챙겨 주는 모습을 보이지 않나.
“이러면 공작의 생각도 조금 바뀌겠는걸.”
만약 어떻게든 그녀가 조력자를 구해서, 혹은 직접 암살 기도를 무력화한다면 그녀를 향한 세간의 평가가 바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조금 전 알렉스와 아델라인의 만남은 정말 위험했었다.
만약 둘이 손을 잡았다면, 이 암살 시도는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을 테니까. 오히려 크게 타격을 입은 뒤 간신히 체계를 유지하고 있는 아스테리오스 길드가 역으로 무너질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직 시간이 있고 기회가 있었다.
그녀가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게, 혹은 불가능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 정보를 믿지는 않는 모습이었지만, 혹시 모르니 알렉스 쪽에도 손을 써야 했다.
“그러면 역시… 이 부분은 계약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 고용주와 이야기를 나눠 볼까.”
세이드는 마법으로 전서구를 소환했다. 이미 그가 전하고자 하는 건 전서구의 발목에 매여 있었다.
“자, 그럼. 고용주는 어떤 생각이실지 한번 볼까.”
세이드가 손을 놓자, 그의 손에 붙들려 있던 전서구가 창문을 통해 밤하늘 저 너머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온통 회색빛이던 전서구는 이내 어두운 밤하늘에 녹아들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왕이면 계약을 유지해 주는 게 좋겠지만. 내 복수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말하는 세이드의 손에는, 알렉스의 손목을 훑고 지나간 단검이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