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87
87화 두 가지 부탁
철그럭.
안드레이의 방에 들어온 알렉스가 어깨에 메고 온 가방을 내려놓자, 금속들이 부딪히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서늘하다 못해 쌀쌀해진 저녁이었다. 그런데도 이마에서 땀을 흘리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안드레이는 눈빛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선물이다.”
“…무슨 선물이길래 이렇게 살벌합니까?”
안드레이가 그렇게 말하며 더플백 입구를 열자, 석궁이며 카빈, 화살과 탄약포들이 안드레이의 눈에 들어왔다.
“요즘 세상이 살벌하잖냐, 그래서 가지고 온 거다.”
“어디서 구한 겁니까?”
“요즘 제3 수도경비대가 장비를 좀 폐기 처분하고 재보급했더라. 몇 개 상태 좋은 거 업어 왔지.”
“…하아.”
안드레이는 한숨을 푹 쉬며 카빈을 들어 보였다. 기마 경비대원들이 쓰기 편하도록 설계된 카빈은 머스킷이나 라이플보다도 훨씬 짧고 가벼웠다.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안드레이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질문을 했다.
“그리도 걱정되십니까?”
알렉스는 침묵했다. 열 마디 말보다 무거운 침묵에 담긴 답을 읽은 안드레이는 석궁과 탄약들을 꺼내 상태를 살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시지요.”
“그렇지.”
“언제 출발하십니까.”
“4일 뒤, 박명에. 해가 짧으니까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지. 트레포드까지 가야 해.”
알렉스는 잠시 고민을 한 뒤, 급하게 덧붙였다.
“내가 직접 말할 테니까, 너는 안 말해 줘도 돼.”
“직접 말하실 겁니까?”
“어, 그리고 나오지 말라고도 할 거야.”
알렉스의 말에, 안드레이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지금도 가기 싫어 죽겠는데, 그날 얼굴 보면 더 가기 싫을 것 같다. 도와줄 거지?”
안드레이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으로 대답을 들은 알렉스는 품속에서 인장으로 봉인한 편지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이거.”
알렉스의 편지를 받은 안드레이는 겉을 살펴봤다. 아델라인의 이름이 적혀 있는걸 보아, 아델라인에게 전하면 될 편지였다.
그런 편지를 굳이 자신에게 준다는 건…….
“단순 훈련은 아닐 거로 예상했지만. 많이 힘든 임무입니까? 안 쓰던 것을 쓰시고.”
“어떻게 꼬일지 모르니까. 그동안은 맡길 사람이 없었던 거고.”
알렉스의 말에, 안드레이는 묵묵히 자신의 전 상관을 바라봤다. 알렉스의 입으로 직접 ‘어떻게 꼬일지 모른다’라고 말하는 모습은 굉장히 낯설었다.
어렵고 위험한 임무면 솔직하게 어렵고 위험한 임무라고 말하는 게 알렉스의 평소 모습이었다. 어떻게 꼬일지 모른다, 라는 애매한 표현은 알렉스와 함께 일하면서 듣지 못했던,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이제는 라이플맨이 아니어서 그런 걸까. 이제 안드레이 자신은 알렉스의 부하도, 라이플 여단의 동료도 아니어서 그런 걸까. 안드레이는 입안에 감도는 씁쓸함을 목구멍 너머로 넘긴 뒤 알렉스를 바라봤다.
“항상 어려운 일만 맡기시는군요.”
안드레이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내가 직접 전할 편지는 못되니까.”
“압니다, 알아요. 그냥 푸념 한번 해 봤습니다. 자, 이제 슬슬 수업하러 가셔야죠.”
안드레이의 말에, 알렉스는 시계를 본 뒤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았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안드레이가 그를 멈춰 세웠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그래도 편지는 보내실 수 있겠지요.”
안드레이의 말에,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고 안드레이의 방을 나선 알렉스는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재 앞에 다다르자, 그는 가볍게 노크했다.
“들어와요.”
문 너머에서 아델라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알렉스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미소 띤 얼굴로 알렉스를 맞았다.
“어서 와요. 안드레이랑 이야기는 끝났나요?”
“조금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많이 기다렸습니까?”
알렉스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그동안 수업했던 내용을 전부 시험 치는 날이자, 알렉스가 훈련을 가기 전 마지막 수업을 하는 날이었다.
당연히 아델라인의 책상 위에는 그동안 수업을 받아오며 필기해 둔 메모들이 올려져 있었다.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의자 옆에 마련된 그의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준비는 다 되셨나요?”
“긴장이 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요.”
아델라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알렉스도 고개를 끄덕이곤 시험을 시작했다. 알렉스가 질문하면 아델라인이 답하는 형태의 시험. 그동안 해 온 수업 내용은 적지 않았지만, 아델라인은 착실히 알렉스의 질문에 답해 갔다.
그렇게 30분 동안 계속해서 문답이 이어지고 나자,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생했어요, 이제 사관학교 갓 졸업한 소위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겠네요.”
“…끝난 건가요?”
“네, 끝났어요. 잠시 휴식을 가지죠.”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시험을 치느라 긴장해 있던 몸을 이완시키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축 늘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그녀는 시녀에게 차를 부탁한 뒤 알렉스를 향해 질문했다.
“출발은 언제 해요?”
안드레이에게 받은 질문과 같은 질문. 하지만 알렉스의 대답은 달랐다.
“4일 뒤, 아침 먹고 9시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9시… 혹시 배웅하는 건.”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눈을 바라봤다. 허락을 구하는듯한 눈빛에 알렉스는 순간 넘어갈 뻔했지만, 간신히 고개를 저어 답할 수 있었다.
“갈 때가 되니 훨씬 바빠져서요. 앞으로 3일 동안 처리해야 할 게 산더미네요. 분명 그날 아침에는 더더욱 바빠지겠죠.”
그때, 서재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차 내왔습니다.”
“들어와. 에리카는 어쩌고 안드레이가 차를 내왔어?”
“에리카는 차를 끓이다가 뜨거운 물에 데서, 제가 대신 가지고 왔습니다.”
안드레이는 쟁반 위의 찻잔과 찻주전자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안드레이에게 지시를 내렸다.
“주치의에게 데리고 가서 조치해 달라고 해 줘.”
“지금은 찬물로 손을 식히고 있는 중입니다. 어느 정도 환부가 식으면 보내겠습니다.”
안드레이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레이가 빈 쟁반과 함께 나가자, 아델라인은 직접 두 찻잔에 붉은 홍차를 따르며 알렉스를 향해 아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제 한동안은 솔잎차를 못 마시겠네요.”
“…안드레이가 취급하는 가게를 알고 있을 겁니다.”
아델라인의 말이 단지 솔잎차를 못 마셔서 아쉽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렉스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알렉스는 모르는 척 서투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훈련 가면 뭐 해요?”
“가서 동맹국 병력과 함께 병력 기동도 해 보고, 청군 백군으로 나눠서 모의 전투도 해 보는 거죠. 뭐 하루 중의 절반은 벌판 맞은편에 있을 프랑크 왕국 군이랑 그 동맹국 병력과 대치하는 일이겠지만요.”
알렉스의 설명을 들은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혹시, 군사 훈련이 실제로 무력 충돌로 이어진 경우가 있나요?”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죠. 하지만 많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괜찮을 겁니다.”
아델라인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많지는 않다니까, 단지 훈련으로 끝날 것이다. 알렉스가 다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아델라인은 속으로 여러 번을 되뇌며 찻잔을 비웠다. 그러자 알렉스도 따라서 찻잔을 비운 뒤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수업을 계속하죠.”
* * *
늦은 저녁. 그린우드는 의회당의 의장 집무실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들어오게.”
공작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린우드에게 들어오라 지시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공작은 보좌관 하나 없이 홀로 집무실을 지키며 서류를 읽어 내리고 있었다.
그린우드는 그 서류를 알고 있었다.
오늘 오전, 직접 그린우드가 전달한 서류. 바로 라이플 여단의 국외 군사작전 통보문이었다.
“자리에 앉게. 보좌관은 이미 퇴근시켜 버려, 차를 내오지 못하는 점은 양해 바라네.”
“…알겠습니다.”
그린우드는 순순히 책상 앞 소파에 앉았다. 그 뒤로,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라앉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침묵은 통보문의 마지막 장, 마지막 문장까지 곱씹어 읽은 공작이 탁탁, 서류를 책상에 내리치며 가지런히 정돈하는 소리와 함께 깨졌다. 공작은 한 손에 통보문을 든 채 의자에서 일어나, 그린우드의 맞은편에 앉았다.
공작이 입에 여송연을 물자, 그린우드는 성냥갑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공작은 손을 내저은 뒤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겨 자그마한 불꽃을 만들어 냈다.
치익.
여송연에 불이 붙자, 손바닥 위에 있던 불꽃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마법사인 줄은 몰랐군요.”
“허파에 헛바람이 든 어린 날의 흔적이네. 그때만 해도 마법사를 동경했고, 서재에는 마법서들이 책장 하나를 가득 채웠으니 시작은 쉬웠지. 물론, 재능이 없어 이 이상 발전하진 못했고.”
공작은 담배 연기를 들이마신 뒤 천천히 내뱉으며 그린우드를 응시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이 통보문을 준 목적은 무엇인가.”
“…절차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 그 절차. 국외 군사 작전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내각에서 의회를 향해 통보해야 한다. 다만 사안에 따라, 사전 통보 대상을 의장으로 제한할 수 있다. 이 경우, 의장은 60일 이내에 의회 전체에 통보 내용을 공지해야 한다.”
공작은 옅어져 가는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더 끼얹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60일이라. 절묘하게 이번 연합 훈련 기간과 겹치는군.”
“육군 본부장의 요청이었습니다. 작전의 보안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 방법을 취해야 했습니다.”
“가능한 외교적 조치를 전부 시도해 본 건가?”
“상황이 여의치 않고, 시간도 촉박합니다. 선택지가 제한적입니다.”
“…대위가 투입되는 건가.”
그린우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공작은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한번 담배 연기를 토해 낸 뒤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델라인이 어떤 아이였는지, 기억하고 있겠지. 솔직히, 그동안 좋은 모습을 보인 건 아니었네. 다만 그 모습에는 내 책임도 있어 어찌할 방법을 모르고 있던 것이었지.”
“…….”
“바뀌었네, 그 아이는. 그리고 그 아이의 변화에는 매닝햄 대위가 함께했지. 이제는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진 것 같더군.”
잠시 재떨이에 재를 턴 공작은 그린우드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아이가 다시 상실감에 빠져 헤매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네. 한 번이면 족해.”
“…육군 본부에 다시 한번 모든 상황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도록 요청하겠습니다.”
그린우드의 답에, 공작은 시가의 불을 끄며 답했다.
“고맙네. 그래 준다면 기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