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88
88화 트레포드 항으로
오전 4시. 평소라면 불침번을 제외한 대부분 인원이 잠자고 있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대원들은 이미 거의 텅 빈 관사에서 짧은 수면을 취하고 일어나 커피로 잠기운을 물리고 있었다.
머나먼 길을 떠나가야 했다. 머나먼 길을 떠나는 거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길 끝에는 그 어떤 때보다도 복잡한 작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적으로 부담되기 쉬운 상황이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침묵 속에서 피어오르는 커피 향으로 그 부담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복도 끝, 중대장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사람 몸뚱이만 한 배낭을 멘 알렉스가 복도에 나타나 정문을 향해 걸어가자, 대원들도 마찬가지로 잔에 남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켠 뒤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밖은 추웠다. 어느새 입김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올 정도로 기온이 낮아져 있었다. 알렉스는 하아아― 긴 한숨을 토해 낸 뒤,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 새벽하늘을 바라봤다.
어느새 동이 터오고 있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이기 충분한 빛이 주어지는 시간.
박명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원 확인하자. 소대별로 집합 및 점호 후 보고해.”
“알겠습니다.”
알렉스의 지시에, 각 소대의 소대원들이 집합해 인원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소대에 한두 명씩은 이번 작전을 위해 새로 편성된 소대가 아니라, 기존 소대로 가서 점호를 받으려 기다리는 모습이 나타났다. 다행히 그들은 이내 금방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소대에 들어가 점호를 받았다.
사소한 잡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런 잡음이 알렉스의 눈에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마치 이런 사소한 징조가 나중에는 큰 고난으로 확대될 것 같다는 조짐이.
“1소대 이상 무.”
“2소대 전원 집합 완료.”
“3소대, 이상 없습니다.”
“외인 소대 전원 집합했습니다.”
“본부소대, 마차 안내조 4인, 대사관 연락조 2인 외 집합 완료.”
본부소대를 지휘하는 알렉스 대신, 남아 있는 본부소대원 중 가장 고참인 팩의 보고를 끝으로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알렉스는 어슴푸레한 새벽녘의 빛을 빌려 회중시계를 꺼냈다. 조금 전 항해용 정밀 시계를 보고 조율한 시계는 어느새 5시를 향하고 있었다.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일부러 아델라인이 찾아오지 못하도록 안드레이에게 부탁하고, 아델라인에게는 거짓말까지 했다. 만약 떠나기 직전 그녀의 얼굴을 본다면, 발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나 지금은 어째서인지, 아델라인이 더욱 보고 싶었다. 며칠 전의 자신이 참 원망스러워졌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할걸.
그러나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었다. 후회해 봤자 돌이킬 수는 없었다. 알렉스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어 내며 휘하 장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가자. 2열 종대로, 접선 장소까지 속보로 이동한다. 1소대, 2소대, 본부소대, 3소대, 외인 소대 순으로. 이동 간 침묵 유지한다. 출발.”
알렉스의 지시가 떨어지자, 대원들은 순식간에 대열을 갖추고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본부소대의 대원 둘은 중화기와 탄약, 천막 같은 기자재를 적재한 짐마차에 올라타 말들을 깨우고 마차를 천천히 몰기 시작했다.
황궁을 나서는 건 문제가 없었다. 5월 궁의 사건 이후 황태자의 친위대와 알렉스의 파견 중대는 개 닭 보듯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친위대가 무슨 행동을 하든, 파견 중대가 무슨 행동을 하든, 서로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는 상황이었다.
단 한 차례의 검문도 없이 황궁을 나서고 텅 빈 새벽의 거리로 나오자, 그 누구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100명의 군인이 대열을 맞춰 행진하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 아니었다. 신문 배달을 하는 소년은 그들을 향해 동경의 시선을 보냈으며, 내전의 혼란을 겪었던 노인은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다양한 시선을 받으며, 그리고 비쳐 오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수도 외곽에 위치한 역참에 다다르자, 미리 수배해 뒀던 포장마차들과 그 마부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었다.
“스워포드, 잔금은 치렀어?”
미리 역참에 가서 마지막으로 마부들과 일정과 경로를 조율하던 스워포드를 향해 묻자, 그는 경례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경로 마지막으로 조율하는 중입니다. 역장님, 이쪽은 파견 중대 중대장님이십니다.”
스워포드가 알렉스를 소개하자, 마부들 사이에 있던 역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알렉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도 서부 역참의 안톤 위버 역장이요.”
“라이플 여단 수도 파견 중대 중대장, 알렉스 매닝햄 대위입니다.”
알렉스가 거친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고개를 먼저 숙이자, 역장도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답했다.
“마차를 수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돈 되니 하는 거지. 트레포드까지 간다고.”
“그렇습니다.”
“포장마차 열 대에 마부도 열 명. 말은 역참마다 바꿔 주는 것이 좋을 거고. 가는 길에 있는 역참들에 이야기는 해 뒀으니 먹고 자는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야. 마련하느라 쉽지는 않았네.”
“감사합니다.”
“무얼. 날이 추우니 난 먼저 들어가 보겠네.”
역장은 입에 담뱃대를 물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며 역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대원들은 포장마차에 각자 들고 온 군장을 넣고 몸을 실었다. 그때, 역마차 한 대가 대열의 맨 뒤에 슬쩍 따라붙어 멈춰 섰다.
멈춰선 마차에서는 정장을 입은 은발의 신사가 알렉스의 대원 두 명과 함께 내려 다가왔다. 그 신사는 아침 햇살을 등지고도 녹안을 빛내며 알렉스를 향해 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이네, 대위.”
“말투.”
“…….”
“제국군 가득 들어찬 트레포드 항에서부터 프룬츠베르크 공국까지 먼 길을 가야 하는데, 그런 식으로 하면 다 들키지 않을까?”
알렉스의 답이 정해져 있는 물음에, 베르티에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리 나이가 비슷하다고 해도 베르티에는 프랑크 왕국 군 중령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한 달 넘게 제국군 틈바구니에서 지내야 하는 이상, 프랑크 왕국 소속이라는 걸 들켜서 좋을 일은 없었다.
그렇게 그는, 앞으로 한 달 넘게 달고 있어야 하는 새로운 관등 성명과 함께 알렉스에게 경례했다.
“중위 빌리 미첼 외 5인, 집합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복장은?”
“…챙겨 왔습니다.”
“입고 다닐 수 있도록. 마차로 이동하는 3일 동안 대원들과 말을 트고 입을 맞춰야 하니, 정장보단 그린재킷이 어울리겠지.”
알렉스의 말에, 베르티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뭐 어쩌겠는가. 까마득한 윗선에서 이미 서로 합의 본 사항인데. 고작 중령… 아니 이제는 중위가 된 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곧 출발한다. 10호차 뒤를 잘 따라올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베르티에가 돌아가자, 알렉스도 발걸음을 옮겨 대열 한가운데의 5호차로 향했다. 5호차의 짐칸에 배낭과 장비를 올려놓은 뒤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라탄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곧이어 선두 마차에 탈 1소대장이 모든 마차의 인원수를 확인한 뒤, 다시 마차에 올라타자 총 열두 대로 이뤄진 마차 대열이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덜컹, 덜컹. 규칙적인 마차의 진동은 알렉스를 천천히 잠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의식이 깊은 잠에 빠지기 직전, 짧은 꿈이 알렉스의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화사한 꽃밭, 화사한 날씨.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화사하고 보기 좋았던 건.
자신을 향해 해맑게 웃는 아델라인이었다.
* * *
“…역시. 떠났네.”
한낮. 무엇이 아델라인의 발걸음을 이끌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알렉스와 그의 파견 중대가 거하던 관사 앞에 다다라 있었다.
평소에는 소란스럽지는 않아도 사람 사는 티가 났던 관사가, 지금은 고요함에 휩싸여 약간 으스스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마당에, 그냥 발걸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아델라인은 천천히, 관사 안으로 발을 디뎠다.
마치 누군가 올 거라는 것을 예상했듯이, 문은 삐걱대는 소리 하나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한낮의 햇빛만이 창문으로 비치는 건물은 바깥과 달리 어두컴컴했다.
사람 흔적 하나 보이지 않는 텅 빈 고요한 공간이었지만, 아델라인의 머릿속에서는 이 건물 안에서 알렉스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재생되고 있었다.
사교 시즌에 처음 알렉스의 관사를 방문해 차를 마셨던 순간.
필즈먼 대장을 만나고, 소설 속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알렉스가 감추고 있던 비밀을 알게 된 순간.
재건위원회의 첫 본회의가 엉망이 되어 알렉스에게 하소연했던 기억.
황후가 준 목걸이를 돌려주고 돌아와 같이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
그 모든 순간이 너무 생생해서, 아델라인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알렉스가 어디 위험한 일을 하러 간 것도 아닌데, 당장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델라인은 어느새 알렉스의 집무실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들어가도 되는 걸까. 잠시 주저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아델라인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알렉스가 쓰던 책상이 보였다. 평소에는 온갖 서류와 필기구가 올려져 있던 책상 위에는 양철통 하나와 편지 하나만이 올려져 있었다.
양철통을 열자, 알렉스와 이 집무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때마다 이 방을 가득 채우던 향이 아델라인의 코를 간질였다. 솔잎 향. 안에는 솔잎차가 반 정도 담겨 있었다.
아델라인은 그 옆에 있던 편지를 집어 들었다. 예상대로, 자신에게 쓴 편지였다.
[결국 오셨군요. 미안합니다. 떠나기 직전 아델라인을 보게 된다면, 발걸음을 뗄 수 없을 것 같아 일부러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편지의 첫 문장을 본 아델라인은 순간 울컥, 감정이 밀려 올라왔다. 분명, 이 편지는 알렉스의 부탁을 어기고, 9시에 맞춰 그를 찾아왔을 자신에게 쓴 편지일 것이다. 그런데도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탓하지 않고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3일 동안 마차를 타고 가야 하고, 일주일 동안 수송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야 합니다. 가능한 편지를 꾸준히 보내겠습니다만, 연락이 닿지 않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게서 오는 편지가 끊기더라도 걱정은 하지 말아 주세요.]“…걱정. 안 할 건데.”
아델라인은 어느새 붉어진 눈시울을 훔치며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눈물이 나오는지, 아델라인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곧 출발 시간이군요. 다시 만날 날이 되면 1월도 절반가량 지나가 있을 테지요. 몸조심하고, 황실 연회에 갈 때는 든든히 챙겨 입고 가십시오. 감기 걸릴라. 혹시 감기에 걸리게 된다면, 옆에 있는 솔잎차를 남겨 뒀으니 챙겨 가서 드십시오. 몸에 좋습니다.]그 말에,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솔잎차가 든 양철통을 꼬옥 품에 안았다. 어느새 편지는 마지막 줄만 남겨 두고 있었다.
[항상 건강하고, 매사에 노력하십시오. 돌아오면 다시 시험 칠 거니까, 복습도 열심히 하시고.사랑하는 아델라인에게. 알렉스가.]
아델라인이라는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에는 가로로 두 줄이 찍찍 그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랑하는.
그 단어를 보자, 아델라인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멍하니 그 단어를 바라본 그녀는 알렉스의 편지와 솔잎차를 담은 양철통을 꼭 안은 채 관사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남아 있었다.
이 두 줄 긋기로 어설프게 지워 버린 단어에 담긴 진심을, 직접 눈앞에서 입으로 자백하게 만들겠다고.
아델라인은 서둘러 마차를 향해 뛰며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