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91
91화 북쪽으로, 북쪽으로
철썩, 철썩!
화창한 하늘, 거세게 부는 바닷바람. 아델라인은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봤다. 먼바다로 나와 질주하는 클리퍼의 속도는 답답하지 않고 좋았다. 벌써 몇 대의 배를 앞질러 간 건지. 역시 티 레이스 우승자의 칭호를 가져간 배다웠다.
그때, 아델라인의 옆에서 안드레이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난간을 붙잡고 매달린 그는 넘실거리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제기랄… 우웁!”
만화 같은 데서는 무지개로 처리해 주지만 현실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아델라인은, 고개를 돌린 채 조용히 안드레이의 등을 툭툭 두드려 줬다. 그 덕분인지, 안드레이는 빠르게 일을 치를 수 있었다.
“파병 많이 갔다면서, 뱃멀미를 심하게 하네?”
“파병을 티 클리퍼로 하지는 않습니다… 보통은 수송선으로 느릿느릿 이동하지… 우웁!”
안드레이가 다시 한번 속에 있는 것을 쏟아 내자, 선원들은 불쌍한 듯 그를 바라봤다. 정장 차림의 안드레이가 난간에 매달려 토를 하는 모습은 꽤나 진귀한 장면이었다.
“알렉스도 뱃멀미해?”
“그 양반이 심했으면 심했지, 저보다 덜하지는 않을걸요…….”
이제는 반건조 오징어라도 된 듯 난간에 몸을 걸친 안드레이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메슥거리는 속을 진정시켰다.
“그러면 스워포드나 팩은?”
“그 친구들은 해군 출신이라 좀 덜하지요. 우리 중대만 해도 해군 출신이 몇 됩니다. 아무래도 해군에는 실전 경험이 있는 인원이 많으니까요. 스워포드는 해병대 부사관, 팩은 선의 보조였습니다.”
“그렇구나.”
안드레이는 이제 속이 어느 정도 안정된 건지, 수통의 물로 입을 헹구고는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공녀님께서는 멀미를 별로 안 하시는군요.”
“그러게, 나도 이럴 줄은 몰랐는데.”
아델라인은 잠시 고민을 한 뒤, 안드레이를 바라보며 실실 웃었다.
“알렉스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원래 사람은 하나에 꽂히면 다른 사소한 건 다 잊으니.”
잠시 먼 바다를 바라본 안드레이는 아델라인을 향해 질문했다.
“중대장님의 뭐가 좋으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라 단정하기는 힘드네. 그냥. 알렉스니까 좋은 거야.”
“그렇습니까.”
“반대로 물어볼까? 알렉스랑 오래 붙어 있었다면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지요. 물론 중간에 인사 배치 때문에 떨어져 있던 시간도 있고.”
“알렉스의 어떤 점이 좋았기에 오래 같이 일한 거야?”
“뭐 별거 있겠습니까. 자기 할 일 잘하고, 대원들 상황도 캐치해서 잘 챙겨 주고. 그래도 그 무엇보다도…….”
안드레이는 피식 웃으며 먼 바다를 바라봤다.
“항상 우리를 설득하려 하는 모습이. 싸울 이유를 제시해 주는 점이 중대장님을 따라 미친 짓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하죠.”
“그렇구나.”
아델라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좋은 상관이기는 했구나. 알렉스는.
그래서 알렉스의 파견 중대는, 소설의 마지막에서도 한 명의 탈영병도 없었던 거구나…….
아델라인은 소설의 마지막, 그리고 알렉스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처절하리만큼 완고하게 버티고 버티며 반란군을 상대로 막심한 피해를 준 알렉스의 파견 중대.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곳에서 그렇게까지 버틴 걸까 알 수 없었다. 대체 뭘 지키기 위해서 알렉스는 도망도 치지 않고, 항복도 하지 않은 채 버틴 걸까. 그때, 아델라인의 머릿속에 알렉스가 해 준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라이플 여단은 절대 패배하거나 굴복해서는 안 되니까요.’
패배하거나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뭘까. 왜 패배와 다름없는 승리도 승리라고 쟁취하려 드는 걸까.
“…안드레이.”
“말씀하십시오.”
“알렉스가 한 말 중에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서.”
아델라인은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한 다음, 안드레이를 향해 물었다.
“라이플 여단은 절대 패배하거나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게… 무슨 의미야?”
그 말에, 안드레이는 잠시 바다 어딘가로 시선을 돌렸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눈을 감고 고민을 하던 그는 먼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며 답했다.
“일종의 무기 같은 겁니다. 라이플 여단이 처음부터 만들고 지켜 온 무패의 역사.”
“그게 왜 중요한 거야? 무패라는 칭호가 주는 명예 때문에?”
아델라인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묻자, 안드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본 아델라인은 안드레이를 향해 추궁의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안드레이는 잠시 고민을 한 뒤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제가 만약 공녀님과 포커를 친다고 생각해 보죠. 열 판을 내리 이긴다면, 공녀님은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무슨 의도로 던진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델라인은 곧장 답했다.
“잘 치네, 조심해서 쳐야겠다. 아니면 치지 말아야겠다?”
“그런 겁니다. 라이플 여단의 가장 큰 무기는 엄선된 인원도, 유연하고 혁신적인 전술도, 값비싼 장비도 아닙니다. 바로 그 생각을 적에게 자연스레 심어 주는, 라이플 여단만이 가지고 있는 발자취지요.”
안드레이는 수평선 저 멀리 보이는 프랑크 왕국 국적의 상선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계속 이기기 위해 싸우는 거지요. 선임들에게 물려받아 유용하게 쓴 자산을, 후임들에게 넘겨줘야 하니까.”
그 말에, 아델라인은 알 듯 말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한숨을 푹 쉬며 안드레이를 향해 말했다.
“나는 이해가 잘 안 되네.”
“이해가 안 되는 게 정상입니다. 하지만, 그 덕택을 한 번씩 보고 나면 목숨 걸고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안드레이는 그리 말하며 시계를 꺼내 시간을 살폈다. 정오. 점심시간이었다. 때마침 선원들도 갑판으로 모여 점심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분명 식사조 대로 모여 갑판에서 밥을 먹을 테니, 아델라인과 안드레이가 자리를 비켜 주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자, 이제 점심시간이군요. 그럼 내려가실까요?”
* * *
“오늘 점심은 뭐냐.”
한 손에 반합을 든 채 자신을 바라보는 알렉스의 물음에, 열심히 솥의 내용물을 휘젓고 있던 팩이 그의 물음에 답했다.
“페미컨, 염장 고기, 비스킷 수프에 빵 곁들여 먹는 거죠. 뭐 있겠습니까?”
“젠장. 빵은 여기서 갓 구운 거라고 해 줘. 따끈하고 보드라운 갓 구운 빵.”
하지만 팩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봤다. 알렉스가 따라서 팩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자, 역참 창고에 있던 톱을 빌려와 한 손에 들고는 이를 갈고 있는 스워포드가 보였다. 스워포드의 앞에는 총검과 식칼에도 흠집밖에 나지 않은 몸통만 한 검은 빵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일단 창고에 있던 검은 빵부터 해결하기로 한 건 중대장님 아니십니까.”
“너네가 ‘먹을 수 있는’ 상태라고 보고했으니까 그런 거지.”
“예 뭐, 먹을 수 있기는 합니다. 먹을 수는.”
쾅!
톱이 헛도는 걸 본 스워포드는 결국 중대 비품을 담아 둔 짐마차에서 오함마를 꺼내 내리찍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빵 덩이는 오함마를 튕겨 내고야 말았다.
최후의 수단인 오함마마저 안 먹히자, 스워포드는 실성한 듯 헛웃음을 흘리며 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잠시 할 말을 잊은 알렉스는 팩을 향해 물었다.
“…먹을 수 있는?”
“…보급계원 놈들이 폐기 처분 귀찮아서 그렇게 적었나 봅니다.”
“그냥 수프만 먹자. 수프 양 늘릴 수 있어?”
“비스킷하고 염장 고기는 남아도니까요. 5분 내로 배식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준비되면 불러.”
알렉스는 지시를 내린 뒤, 공터 한쪽의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편지지를 꺼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아델라인에게.수도를 떠나온 지 둘째 날 아침입니다. 잘 지내고 계신 가요. 아마 이 편지를 부치고 있을 즈음이면 첫째 날에 쓴 편지가 아델라인에게 닿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알렉스는 재주 좋게 반합 뚜껑을 받침대로 사용해서 편지를 써 내려갔다. 스워포드의 빵 덩이를 향한 사투는 편지에 쓰기에 충분히 가볍고 좋았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는 편지지의 반절 정도밖에 채울 수 없었다.
나머지 반절은 뭘로 채워야 하지.
알렉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안드레이나 다른 대원들이 편지를 못 써서 끙끙댈 때는 왜 그럴까, 속으로 질문을 던지기도 했는데, 이제 와서는 그 심정을 공감할 것 같았다.
아델라인에게 전하기에 지루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쳐내고, 그중에서도 민감한 정보를 추출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을 쳐내고 나니 남는 게 별로 없었다.
그때, 알렉스의 위로 그늘이 졌다. 알렉스가 위를 올려다보자, 라이플 여단 제복 차림의 베르티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배식 시작했습니다. 파코프스키 병장이 불러오라 하더군요.”
“벌써? 그럼 가야지.”
알렉스는 방금까지 쓰던 편지를 품속에 접어 넣은 뒤 반합을 챙겨 배식줄에 섰다. 병사고 부사관이고 장교고 할 것 없이 한 줄을 서 있는 상황. 줄 중간중간에서는 ‘이게 맞나……?’ 하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베르티에의 부하들도 있었다.
제국 군에서도 장교와 병사가 함께 밥을 먹는 건 흔치 않았다. 제국보다도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철저한 프랑크 왕국의 귀족인 베르티에가 보기에는 무질서나 다름없었다.
첫째 날이야 라이플맨들 틈바구니에서 적응하느라 의문을 품을 새도 없었지만, 둘째 날이 되자 이런 모습이 훨씬 크게 눈에 띄었다.
“한꺼번에 줄을 서는… 겁니까? 장교와 병사들이?”
“뭐, 여기서 장교 식당 따로 차려 주리?”
베르티에의 물음에 알렉스는 당연하다는 말투로 답했다.
“뭐, 경기병에서 유래된 도약병들은 잘 모르겠지만, 라이플 여단은 독립 대대 시절부터 장교 병사 구분 없이 밥은 같이 먹었지. 그편이 많은 부분에서 도움이 되기도 하고.”
“…신기하군요. 그나저나.”
베르티에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방금 편지는 로피츠 여사에게 쓰시는 편지입니까?”
“…봤냐?”
“쓰실 사람이 따로 있기는 합니까?”
“하긴.”
베르티에의 합당한 논리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할 여지 없는 훌륭한 추론이었다.
반합 가득 건더기가 넉넉히 들어간 수프를 받은 알렉스와 베르티에는 다시 나무 그루터기 근처로 돌아와 자리를 잡고 숟가락으로 떠먹기 시작했다.
식사는 길지 않았다. 우물가에서 물을 떠, 사용한 반합을 설거지하고 볕이 드는 자리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은 알렉스는 하늘을 바라봤다.
늦가을, 혹은 초겨울의 시리도록 맑고 푸른 하늘은 아델라인의 눈동자를 떠올리기 충분했다. 그녀의 눈동자도, 그가 바라보고 있는 하늘처럼 맑고 푸르렀다.
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발걸음을 돌려 수도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알렉스의 양쪽 어깨에 얹어진 견장이, 그가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었다. 그 견장에 깃든 군인의 의무가, 계속해서 북쪽을 바라보도록 그의 몸을 붙들고 있었다.
그때, 알렉스의 머릿속에 아델라인에게 남겼던 마지막 편지가 불현듯 떠올랐다.
출발을 앞두고 허겁지겁 편지를 쓰느라 자신도 모르게 써 버린 ‘사랑하는 아델라인’이라는 표현이 섞여 들어갔었다. 물론 다시 한번 훑어보며 대충 두 줄 긋기로 지워 버렸지만… 보려면 충분히 볼 수 있는 표현이었다.
“…사랑하는, 아델라인…….”
아델라인 앞에서 말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랑하는 아델라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하지만 만약 이게 자신의 착각이라면. 아델라인은 단지 자신을 친구로서 생각하고 있었던 거라면? 지금까지 있었던 몇몇 일들은 그냥 해프닝으로 여기고 있었던 거라면?
알렉스는 잠시 하늘을 바라본 뒤, 눈을 감으며 속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
아델라인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트레포드 항까지 와 준다면, 그때는 진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자고. 그렇지 않으면, 아델라인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적어도 이번 작전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접어 두자고.
알렉스는 당연히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조건으로 내걸며, 간신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설마. 그 누가 수도에서 동떨어져 있는 트레포드까지 자신을 보러 오겠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