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ilure Marquis is a genius RAW novel - Chapter (113)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13화(113/200)
15장 모함 : 고발된 망나니
아르니아 대륙 중부.
벨라누스 신성국.
칼론 제국 안에서 자치령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이 나라는 벨라누스교를 신봉하는 교인들이 건국한 나라다.
크기 자체는 엘든 왕국보다도 작지만 역사는 무려 일천 년이 넘어간다.
무엇보다 벨라누스교 자체가 대륙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진 종교라서 칼론 제국도 쉬이 건들지 못한다.
그런 벨라누스 신성국의 정중앙에 위치한 홀로니움 대성당.
바로크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거대한 성당은 정갈하고 깔끔한 느낌을 풍겼으며 지붕에 달린 커다란 원형돔이 조형미의 방점을 찍었다.
마음이 경건해지는 이 성당을 보며 신성국 교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을 방문하여 자신의 죄를 뉘우치거나 신의 위대함을 찬양했다.
그런 홀로니움 성당의 가장 심처.
일반 교인은 출입이 불가한 제한구역에는 널찍한 기도실이 하나 있었다.
종교인에게 검소란 단어는 편견이라는 듯 온갖 값비싼 장식품과 고급스러운 가구로 가득한 방.
성당에는 응당 있어야 할 신의 조각상이나 성물조차 없어서 이곳이 과연 기도실인지 사치스러운 귀족의 방인지 헷갈리는 공간이었다.
그 한가운데에서는 젊은 여인 한 명이 푹신한 가죽 소파에 반쯤 몸을 뉘인 채 술을 병째로 꿀꺽꿀꺽 마시고 있었다.
“언제 오는 거야?”
불량한 자세로 툴툴대던 그녀는 연신 뒹굴대다가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똑똑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는 새하얀 법복을 입고 들어온 중년의 대주교.
근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푸근해서 누가 봐도 대주교에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성녀님을 뵙습니다.”
대주교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
여인의 정체는 성녀였던 것이다.
벨라누스교에서 유일하게 교황과 비벼볼 만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만인의 추앙을 받는 대륙 유일의 성녀.
바로 눈앞에 있는 여인 레플리의 정체였다.
“야. 프란시스. 왜 이렇게 늦어. 뒤질래?”
성녀의 언행은 모두가 존경하고 떠받드는 여인의 말투라기엔 지나치게 저렴했다.
심지어 프란시스 대주교의 나이가 예순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더욱 말이다.
기분이 나쁠만 한데도 대주교는 오히려 두려움 가득한 기색으로 무릎을 꿇고 성녀에게 복종했다.
“죄송합니다. 요한님이 수련할 때는 방해하지 말라고 하셔서 부르는데 오래 걸렸습니다.”
“요새 일처리가 영 별로다?”
“죄송합니다.”
극구 머리를 조아리는 프란시스 대주교를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보던 성녀 레플리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에게 맡길 임무가 있어.”
“하명하시지요.”
“엘든 왕국으로 가라.”
대주교의 눈이 커졌다.
“엘든 말씀이십니까?”
“그래.”
“거기서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헤논이라는 애송이가 하나 있거든? 놈이 악마에 빙의되었다고 누명을 씌운 다음 요한을 시켜서 심판해.”
매일 같이 신을 찬양해도 부족한 성녀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놀라운 건 프란시스 대주교의 반응.
그는 사람을 죽이라는 계획을 듣고도 낯빛의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평온하기까지 했다.
마치 이런 음모를 전에도 많이 진행해본 듯 했다.
“외부 조력은 있습니까?”
“힐튼이란 가문에서 알아서 판 깔아준대. 너는 가서 칼춤만 춰.”
“명을 따르겠습니다.”
고개 숙인 대주교.
별안간 그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온다.
“모든 것은 바알님의 뜻대로.”
그리고 이에 응답하는 성녀의 대답.
“모든 것은 바알님의 뜻대로. 강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황혼교의 숙원이 코앞에 다가왔으니 분발하도록 해.”
“명심하겠습니다. ‘색욕’이시여.”
그랬다.
여인은 황혼교의 7대 간부 색욕이었다.
“해야할 얘기는 얼추 다 했으니 이제 귀여운 요한이를 만나러 가볼까?”
색욕 레플리는 세숫물로 진한 화장을 지우고 민낯을 드러냈다.
치렁치렁한 금발을 질끈 묶은 다음 속살이 훤히 드러나는 튜닉 대신 전신을 가리는 성녀복을 입고.
프란시스 대주교와 함께 기도실을 나와서 옆방으로 입장했다.
옆방 또한 똑같이 기도실이었다.
그러나 면적만 동일할 뿐 앞선 방과 달리 이곳 분위기는 천지차이였다.
성물과 신의 조각상으로 가득한 이곳은 벽 너머로 들리는 장엄한 오르골 소리가 찬송가를 연주하며 신성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성녀님, 오셨습니까?”
기도실에는 선객이 있었다.
2m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
벨라누스 신성국 무력의 무려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이단심문관이자 집행자 요한이었다.
“형제님, 반가워요. 늠름한 당신의 모습을 보니 이 또한 벨라누스님의 축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색욕은 아까 옆방에서 보였던 모습과는 백팔십도 뒤바뀐 태도를 보였다.
술에 취한 채 바알을 찬양하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벨라누스만을 바라보는 신실한 여인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이런 색욕을 바라보는 요한의 눈빛에는 존경과 흠모가 가득했다.
“위대한 벨라누스님의 화신이시여. 당신을 뵙게 되어 내면의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저 또한 기쁨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요? 오늘 기도를 드리던 차에 벨라누스님이 슬퍼할만한 소식을 들었답니다?”
레플리의 말을 들은 요한의 동공이 확장됐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동쪽의 작은 변방국에서 악마에 씌인 자가 나타났다더군요.”
“저런!”
“그래서 저는 기도를 드리면서도 하염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레플리의 눈에서 옥구슬 같은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우는 연기가 어찌나 일품이던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애간장이 다 녹을 지경이었다.
성녀의 슬픔은 벨라누스교의 슬픔과 동일시하는 요한이 가슴을 쾅쾅 치며 광분했다.
“그곳이 어딥니까? 보내만 주십시오! 이 요한이 성녀님을 대신하여 벨라누스님의 분노가 얼마나 뜨거운지 직접 보여주겠나이다.”
“부탁드려도···될까요?
“물론이죠. 맡겨만 주십시오. 성녀님.”
“이십년 전 최후의 전투에 참여하셨고 현 세븐 스타인 당신이라면 믿을 수 있겠죠. 형제님의 고생을 벨라누스님께서도 반드시 알아주실 겁니다.”
성녀의 말에 감격에 찬 요한이 성물에 대고 키스한 뒤 가슴에 성호를 그렸다.
“벨라누스님께 영광을!”
“영광을!”
“기필코 악의 무리를 근절하고 오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형제님. 프란시스 형제님과 함께 다녀오세요.”
“알겠습니다.”
요한과 프란시스가 기도실을 나갔다.
퇴장하기 직전에 성녀와 대주교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프란시스가 슬쩍 소매를 걷어 보였다.
팔뚝에는 칠망성과 가운데 붉은 눈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황혼의 표식이었다.
* * *
엘든 왕국.
수도 폰타노.
내가 레베카 왕녀의 최종 부마로 간택되었다는 소문이 전 왕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찰리 힐튼 남작이 부마가 되리라 예상했던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은 아연실색했고.
반면에 대다수 평민들은 내가 부마가 됐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오히려 파티를 열며 기뻐했다.
“사생아 출신 악마살해자가 부마가 되다니. 그야말로 인생역전이로군.”
“동화도 이렇게 쓰면 욕을 먹어. 로이드 자작은 정말 대단해.”
“그래도 다행이지. 사생아면 태어날 때부터 귀하게 자란 귀족과는 다를 테니까.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의 고충을 잘 알아주지 않을까 싶네.”
가장 노난 건 음유시인들이었다.
이들은 마치 연예잡지 기자들처럼 연일 나에 대한 찬양을 가사만 조금씩 바꿔서 쏟아냈다.
주점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에 헤논 로이드라는 이름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엘든 왕국민의 생활에 스며들었다.
한편.
안드레의 저택.
집안 내부는 수많은 귀족들이 보낸 선물 공세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어지러웠다.
본래 안드레는 수도에 장기간 거주한 적이 없던 탓에 저택에는 사용인이 적었다.
이런 와중에 내가 최종 부마로 간택되었고 현재 안드레의 저택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너도나도 선물과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 바람에 이를 관리해야 하는 하인과 하녀들은 다크서클이 눈 밑까지 처진 채 바쁘게 움직였다.
“미안하군.”
“그럴 것 없습니다. 저희는 모두 기쁘게 일하고 있으니까요.”
안드레의 대답.
안드레는 수다스럽고 다정다감한 성격이 장점이라 생각했는데 이번 기회에 또 다른 장점을 찾았다.
머리가 꽤 좋은지 선물을 받자마자 누가 어떤 선물을 보냈고 그 값어치가 얼마인지 적은 명단을 작성했다.
귀족들의 편지 또한 친제국파와 반제국파, 그리고 영향력 순으로 분류해서 답장을 달리 보내주었다.
이런 류의 일처리는 하녀 출신 시온과 용병 출신 캠벨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안드레의 보조는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은혜는 꼭 갚겠다.”
“저번에 도적에게서 목숨을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칩니다. 그보다도···”
안드레의 눈동자에 붉은 귀기가 번뜩였고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조금만···”
“알았다.”
미리 피를 담아놓은 유리병을 건네주자 다급하게 받아든 그가 단숨이 원샷을 때렸다.
내 피를 맛보는 안드레의 얼굴에는 황홀감이 서렸다.
“정말이지···전설로만 전해지는 세계수의 눈물이나 신들의 음료라는 넥타르도 이보다는 못할 겁니다.”
뱀파이어가 된 안드레는 주기적으로 유리병에 담은 피를 마셨는데, 다른 사람의 피보다도 드루이드인 내 피를 강력히 선호하는 모습이었다.
나로서는 피에 목마른 뱀파이어가 최선을 다해 나를 도와주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피를 뽑는 행위가 생명력 회복이 빠른 나에게는 그다지 부담되는 행위가 아니어서 뱀파이어와의 공조는 꽤나 이득이었다.
“내 피가 어떤 면에서 좋은 거지?”
“맛이 좋음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의 피를 마셨을 때와는 흡수되는 에너지가 틀립니다. 마치 피를 마실수록 강해지는 느낌이랄까요.”
“그렇군. 대략 삼 년 치 피를 담은 유리병을 네 개인 창고에 두고 가겠다. 저장량이 떨어지면 와서 또 받아가.”
“감사합니다.”
안드레와의 대화를 끝내고.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호넷 백작이 오늘도 날이 밝자마자 나를 찾아왔다.
“왕녀님이 부르십니다. 부마님.”
황금 갑주를 입은 그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부마로서의 예를 갖추는 것이다.
전면에 비상하는 유니콘이 조각된 왕실전용 8두마차를 타고 입궁했다.
미리 기다리고 있었는지 정원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레베카 왕녀가 나를 보자 냉큼 달려와서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오셨군요. 자작님. 아니지. 헤논이라 부르기로 했죠.”
“얼굴 좋아 보이네.”
“그럼요. 제 속마음을 제일 잘 아는 남자가 반려가 되었으니까요. 이보다 기분이 좋을 순 없죠.”
그녀는 꿈꾸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피가 가득 담긴 상자를 건네자 기쁨이 두 배가 되었다.
“저는 이제 당신이 아니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하지 마라.”
“하지만 사실인걸요?”
레베카는 유리병 하나를 잡고 피를 마셨다.
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마다 몸이 움찔움찔 떨리고 볼에 홍조가 서린 게 정말로 내 피를 즐기는 모양새다.
입술에 묻은 피까지 혀로 말끔하게 핥아 먹은 그녀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원래도 미녀인 그녀가 도발적인 시선까지 보내오는데 사내로서 끌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도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다.
“레베카, 앞으로에 대해서 의논해보지.”
“아···맞죠. 그래야죠.”
살짝 아쉬운 표정.
무엇을 기대한 걸까.
“뱀파이어가 됐으니 네 체력이나 지력은 이전보다 더 향상했을 거야. 왕국을 통치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거다.”
“헤논님은 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전혀 관여하지 않으실 건가요?”
“그래. 왕국은 오로지 네 통치를 따를 것이다. 나는 후작령 다스리기에도 바빠.”
레베카는 준비된 군주니 자리만 마련해줘도 잘할 것이다.
또한 그녀가 활약해줘야 여성도 정치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확립된다.
그래야 엘든 왕국민의 꽉 막힌 사고방식이 조금이나마 개선될 테고 말이다.
“헤논, 다 좋은데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어요.”
“무엇이지?”
“당신은 주로 후작성에 있을 테고 저는 왕실에 머무를 테니 우리는 거의 못 만나는 걸까요?”
견우와 직녀가 될지도 모른단 걱정에 풀 죽은 토끼가 된 레베카.
그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방안에 대해서도 생각해두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는 저번에 순례자 톰이 줬던 고대의 유물이 한가득이다.
그중에서 원거리를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 웜홀 생성기가 있으니 이것을 왕실과 로이드 후작성에 설치해서 때마다 왕래할 계획이었다.
이에 대해서 설명해주자 매일 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레베카가 뛸 듯이 기뻐했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한 나라의 왕녀와 어쩌다 이렇게 가까워지게 된 건지.
원래는 레베카와 인사 좀 하고 안면이나 트려는 목적이었는데.
사람일 어찌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 저 멀리서 호넷 백작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보니 심상찮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호넷 삼촌? 제가 불렀나요?”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하는 레베카.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호넷 백작이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왕녀님, 국왕 전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 * *
알폰소 드 아리안느 엘든 41세.
향년 65세로 서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마가 간택되어서 축제 분위기였던 왕국은 한순간에 슬픔에 빠졌다.
서거 당일 수도의 왕국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게를 닫고 왕성을 바라보며 엎드린 채 통곡했다.
장례식은 왕궁에서 진행되었다.
수도에 거주하는 귀족 전원이 참석했다.
지방에서 뒤늦게 소식을 들은 귀족까지 합세해서 장례식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로이드 후작과 힐튼 백작을 비롯한 주요 대귀족들은 엉덩이가 무거운 탓에 불참했고 대신에 서면으로 애도를 표했다.
“선왕 전하께서는 엘든을 비추는 참된 빛이자 희망이셨으며 우리는 전하의 그늘 아래 수십 년의 세월을 평안히 보낼 수 있었습니다···”
장례식을 진행하는 대신이 추모사를 이어나갔고 귀족들은 차례로 줄을 서서 하얀 국화를 헌화했다.
부마가 된 나와 레베카 왕녀 또한 헌화를 완료하고 상석에 착석했다.
헌화 시간이 끝나면 운구 전에 사흘 간 왕궁에 관을 두고 애도하는 기간을 가진다.
하지만 그전에 왕의 마지막 유언을 공표하는데, 유언장은 왕실의 수비대장이자 국왕의 최측근이었던 호넷 백작이 읽었다.
“나 알폰소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이 유언장을 작성한다···”
유언장을 낭독하는 시간이 되자 장내의 모든 귀족이 귀를 쫑긋 세웠다.
내용은 길었다.
거의 세 시간 분량이었다.
국왕이 자신의 개인 재산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황금 촛대는 로든 남작에게 주고 왕실 봉토 200마지기는 라드네 자작에게로, 사랑하는 육촌 조카 오드리 남작 부인에게 생전 자주 사용했던 은잔을 선물하겠다······”
낭독은 길게 늘어졌지만 다들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내용에 집중했다.
원래 유언장의 본론은 끝단에 나오기 마련이었으므로.
“마지막으로···사랑하는 내 딸 레베카와 새롭게 부마가 된 헤논 로이드 자작.”
드디어 본론이다.
“나는 내 장례식이 모두가 슬퍼하고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진행되길 원치 않는다. 하나의 끝은 또다른 새로운 시작일지니. 헤논 로이드 자작이 엘든 왕실의 명백하고도 정당한 가족임을 다시 한 번 선언하고 내 장례식 중에 레베카의 즉위식과 로이드 자작의 국서 임명식을 동시에 거행하길 바라노라.”
국왕의 뜻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현재 부마가 된 내 위치는 상당히 불안하다.
간택식 결과에 대해서 힐튼 가문을 포함한 다수의 친제국파 귀족들이 인정하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이런 와중에 국왕이 나서서 내 입지를 공고히 해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죽었으니 유언으로라도 즉위식을 빨리하라고 독촉한 것이다.
아무리 이러쿵저러쿵 뒷말이 많아도 일단 즉위식과 임명식을 치러버리면 끌어내리기 어려워지니 말이다.
호넷 백작도 사전에 언질받은 게 있었는지 유언장을 다 읽자마자 나와 레베카를 보며 말했다.
“···이상으로 유언장 낭독을 마친다. 선왕 전하의 마지막 명에 따라 레베카 왕녀님과 로이드 자작께서는 즉위식과 임명식을 곧바로 준비해주시길 바랍니다.”
장내의 모두가 분분히 일어서서 새롭게 엘든의 태양이 될 레베카를 연호할 준비를 했다.
레베카 또한 자세를 고쳤다.
한편, 나는 친제국파 귀족 사이에서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있는 찰리 힐튼에게 시선을 두었다.
‘저놈이 가만있을 놈이 절대 아닌데.’
힐튼 가문을 모르면 몰라.
내가 여태껏 겪은 바로는 저놈의 집구석은 경쟁자 가문이 권력을 잡는 것을 순순히 두고 볼 작자들이 결코 아니었다.
즉위식 축사를 준비한 대신이 단상 위로 올라서려던 순간.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다.
장례식 내내 조용하던 찰리 힐튼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한 것이다.
“헤논 로이드! 네놈은 부마는 물론이거니와 국서가 될 자격도 없다!!”
역시나인가.
삽시간에 장내가 웅성대는 소리로 가득 찼고 분위기가 개판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경조사 전반을 주도하던 호넷 백작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찰리 힐튼 남작, 방금의 언행은 이해하기 힘들군. 설마 부마가 되지 못했다고 추태를 부리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더이상 부마와 국서 자리에 욕심이 없습니다. 그저 엘든 왕국의 미래만을 생각하며 극악무도한 자가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까 걱정했을 뿐입니다.”
호넷 백작이 불같이 화를 낸다.
“앞으로 레베카 여왕님의 옆자리를 지킬 예비 국서에게 극악무도한 자라니!! 당장 무례에 대해 사과하시오.”
백작의 호통을 들은 찰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특유의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백작의 말에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왕궁을 발칵 뒤집기에 충분했다.
“지금 여러분이 모인 이 자리에서, 헤논 로이드 자작이 악마에 씌였음을 고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