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ilure Marquis is a genius RAW novel - Chapter (126)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26화(126/200)
16장 위장 : 뭉클한 망나니
내가 다이아 등급 의뢰서를 만지작거리자 이를 지켜본 중년 사내가 펄쩍 뛰며 만류했다.
“어이쿠!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겐가?”
“보는 그대로입니다만.”
“브론즈 등급 모험가가 어째서 다이아 등급 의뢰서를 기웃거려?”
“그래 봐야 아울베어 열 마리 아닙니까? 해볼 만하다고 봅니다.”
시종일관 태연한 내 모습에 사내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자네 아울베어를 실제로 본 적은 있고?”
아울베어를 실제로 본 적이 있냐라···
북부에서 심심하면 잡는 게 아울베어였다. 그 숫자가 어찌나 많은지 순찰 한 번 돌 때마다 세 마리씩 잡아오고 그랬다.
옆에 있던 캠벨도 PTSD가 오는지 질린 표정이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아울베어 서식지 한가운데 빠져 죽을 뻔했지.
심지어 난 아울베어 똥까지 찍어서 먹어봤다. 그 구역질 나는 맛이란···여기까지 설명하겠다.
“물론 본 적도 없겠지. 다 이해해. 높은 등급의 의뢰를 받아 단번에 점수를 얻고 싶을 거야. 자네 같은 사람 많이 봐왔네.”
중년 사내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객기 부린 모험가 중에 오래 살아남는 녀석을 못 봤어. 자네도 목숨을 소중히 하게. 내 아들 같아서 하는 말이야.”
“실례지만 누구신지?”
아까부터 오지랖을 부려대길래 이름을 물었다.
“아하! 내 이름을 얘기 안 했군. 나는 브론이라고 하네. 벌써 경력만 십오 년째인 잔뼈 굵은 모험가시지. 선배라 불러도 좋네.”
꼰대력이 가득 느껴지는 아재다.
캠벨을 슬쩍 봤더니 그도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도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게 영 쓸모없는 정보는 아니라 일단은 말상대를 해주었다.
“혹시 등급이 어떻게 되십니까?”
“크흠흠! 난 실버라네!”
“십오년 해놓고···실버요?”
내 질문이 너무 직설적이었을까.
브론의 얼굴이 시뻘게진다.
“크흠! 자네 실버를 무시하는가!”
“무시는 아닙니다만···시간에 대비해서 조금 낮은 등급이 아니신지.”
“브론즈에서 얼마 해보지도 못하고 죽어나가는 모험가가 부지기수네. 이 바닥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게 강한 자야.”
자꾸 자신의 등급이 거론되는 게 불편한 듯 브론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다이아 등급 의뢰서에는 손 떼게. 브론즈는 브론즈 등급 의뢰만, 실버는 실버 등급 의뢰만 받을 수 있어. 그것이 이 바닥 규칙이네.”
그런 규칙이 있었다니 금시초문이다.
브론 아재가 하는 말이 영 신뢰가 안 가서 길드 직원에게 다시 물어봤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
“네, 맞습니다. 모험가는 등급에 맞는 의뢰만 수행할 수 있어요. 이는 자신의 능력을 초과한 의뢰를 수행하다가 일어날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죠.”
“혹시 예외는 없습니까?”
“예외는 없습니다만, 자신보다 높은 등급의 모험가와 파티를 맺으면 한 등급 높은 의뢰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칸님 같은 경우는 실버 등급 의뢰까지는 수행하실 수 있겠네요.”
어쨌든 브론 아재의 말이 옳았다.
이게 바로 십 년 실버의 짬밥인가.
아참, 십오 년이지. 정정한다.
다시 게시판으로 가서 의뢰서를 훑어보았다.
-실버 등급 의뢰-
[오크 다섯 마리] 15점 [랫맨 부족 섬멸] 30점확실히 실버 의뢰가 브론즈 의뢰보다 점수가 짭짤하다. 기왕 하는 거면 브론즈 의뢰를 생략하고 실버 의뢰부터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최소 실버 등급 모험가 한 명이 필요하다.
나와 캠벨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브론 아재에게 머물렀다.
팔짱을 낀 그는 잔뜩 삐쳐있었다.
아무래도 자기를 못 믿고 창구에 가서 물어봐서 속이 상한 모양이었다.
“크흠흠! 또 무슨 일인가? 난 바쁘니 용건만 간단히 하게.”
이 아재 단단히 삐졌네.
“선배.”
“···자네 지금 뭐라고 했는가?”
“선배라 했습니다만. 이제 모험가가 된 새내기로서 십오년이나 이 바닥에서 살아남은 대단한 경력자를 선배라고 부르지 그러면 뭐라고 부릅니까?”
“큿, 크하! 크하하하!! 맞지. 맞지. 그래 우리 후배님! 궁금한 게 또 뭐 있는가! 뭐든지 물어보게!”
사람 참 단순하네.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닌 듯하다.
“질문이 아니라 저희가 이제 의뢰를 받고 싶은데, 실버 등급 의뢰를 받고 싶어서요. 혹시 같이 파티를 맺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흐음···”
브론은 턱을 긁적였다.
곤란한 기색이 역력하다.
“브론즈와 실버는 엄청난 차이야. 데려가는 건 문제가 아닌데, 괜히 갔다가 자네들이 죽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내 마음이 불편해진단 말이지.”
“아재,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 나와 부단장···칸은 엄청 강하다고.”
“누구나 입으로는 강하다고 떠들지. 그걸 실력으로 보여주는 건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야.”
“하이고 이 답답한 아재 보소. 그러니까···”
손을 내저어 캠벨을 만류했다.
브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챘다.
이건 이세계가 아니라 지구에서 살아온 내 경험이 보내온 신호였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돈주머니를 꺼낸 뒤 브론에게 슬쩍 다가가서 악수했다.
“그래도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브론은 나와 악수한 뒤에 느껴진 묵직한 감촉에 입가에 호선을 그린다.
“큿하하하!! 그래! 조금 위험할 순 있겠지만 이 무적브론님이 나선다면 안 될 것도 없지.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후배님들.”
삽시간에 태세를 전환하는 브론을 보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캠벨.
그를 보고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게 바로 사회생활이란다.
이번 기회에 먹을 것만 밝히지 말고 보고 배우렴.
* * *
우리가 선택한 의뢰는 오크 다섯 마리 사냥이었다. 점수는 15점. 첫 의뢰치고는 무난했다.
오크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으로 향하면서 브론의 입은 무슨 모터가 달린 것처럼 쉴 새 없이 움직여댔다.
“자네들은 이전에 어디에 있었나?”
“푸른매 용병단에 있었습니다.”
“오호라! 그 유명한 용병단에 있었다니. 그래서 자신감이 넘쳤구먼.”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브론은 나와 캠벨이 푸른매 용병단이라 해도 전혀 기죽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더욱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댔다.
“용병단에 있었으면 칼에 사람 피 좀 묻혀봤겠군.”
“가끔 영지전 참가한 경험이 답니다.”
“쯧쯧! 사람 좀 죽여봤다고 해서 몬스터도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자네 같은 용병 출신 모험가 많이 봤어.”
“그렇습니까?”
“당연하지. 사람하고 몬스터는 아예 달라. 특히나 오크는 신장부터 사람보다 훨씬 크고···아, 저 친구는 예외. 이것 참 말이 꼬이는구먼.”
브론 아재는 말은 많이 하는데 하면 할수록 점수를 깎아 먹는 신기한 재주가 있었다.
“아무튼 사람과는 완전 딴판이여. 자네들이 제법 건장한 체구이긴 하지만 농사나 짓던 농노병에게나 통하지, 몬스터에게는 무쓸모라는 사실부터 인지해야 하네.”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았지만 의뢰점수를 위해서 참았다. 돌아가서 브론 말고 다른 실버를 구하든지 해야지 원.
그의 수다를 듣다보니 어느새 오크 출몰 지역에 도착했다. 모험가 외 출입금지라는 나무 팻말이 땅에 꽂혀있었다.
운이 좋았는지 순찰을 돈 지 얼마되지 않아서 금세 오크를 조우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운이 좋은 게 아니라 북부에서 질리게 단련했던 직감 때문이었다.
땅바닥에 찍혀있는 발자국과 꺾인 나뭇가지, 그리고 특유의 비릿한 오크의 똥냄새로 발견한 것이다.
총 다섯 마리.
목표 개체 수와 딱 맞다.
“크흠흠, 내가 나설 때가 되었군.”
잔뜩 거드름을 피운 브론 아재가 팔을 휘휘 내저으며 앞장섰다.
“실버 등급 모험가가 얼마나 강한지, 브론즈와는 얼마나 다른지 견식해보게.”
오크들은 브론 아재를 보더니 눈을 회까닥 뒤집으며 달려들었다.
그들을 상대로 브론이 간결한 검무를 선보였다.
서걱! 서걱!
“오···”
“아예 허풍쟁이는 아니었네.”
나와 캠벨의 공통된 의견이다.
확실히 브론 아재는 십오 년 실버의 짬밥이 있었다.
오크 다섯 마리를 상대로 무난한 전투를 이어나갔다.
게다가 전투 도중에 입을 열어 우리를 가르치는 여유까지 보였다.
“몬스터는 인간과 달리 질긴 힘줄과 단단한 뼈를 가지고 있네. 이런 녀석들을 상대로 쓸데없이 화려한 기술을 쓰다간 골로 가기 십상이지.”
서걱! 서걱!
“단순한 가로베기! 세로베기! 찌르기! 세 개만 기억하게. 나머지 응용동작도 결국 이 세 기술의 조합과 연계일 뿐이야. 사실 연계도 필요 없어. 가로베기 하나만 잘해도 실버는 금방일세.”
서걱!!
마지막 오크의 목이 떨어졌다.
브론 아재가 뿌듯한 얼굴로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훔쳤다.
“자! 확실히 봤지? 이게 바로 브론즈와 실버의 차이···”
“조심!! 뒤에 뭐가 옵니다!”
쿵! 쿵! 쿵! 쿵!
지축이 울리며 풀숲을 뚫고 엄청난 거체가 나타났다.
푸른 피부에 방망이를 든 놈은 트롤.
괴랄한 재생력과 무식한 힘을 지닌 중대형급 몬스터였다.
“흐억! 트롤이잖아? 마수의 숲에서나 있을 몬스터가 왜 여기까지 나온 거지?”
대경한 브론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만큼 트롤은 오크와는 규격을 달리하는 미친 몬스터였다.
쿠워어어어!!!
우리를 인식한 트롤이 포효를 내지르며 마구 달려오기 시작했다.
“제기랄! 그동안 어떻게 버텼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애써 몸을 일으킨 브론이 달려오는 트롤을 향해 검을 갖다대며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자네들은 도망치게! 저놈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야. 내가 여기서 시간을 끌 테니 길드에 가서 골드 등급 이상의 모험가를 불러오게.”
오호라. 이건 좀 감동인걸?
보통 이런 경우에는 새내기 모험가 따위 버려두고 줄행랑치지 않나.
가르치기 좋아하는 꼰대인 줄 알았는데 나름 책임감 있는 아재였다.
호의를 받았으니 갚아줘야지.
검자루에 손을 살짝 얹은 채 앞으로 나섰다.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어서 물러나게! 도망쳐! 쓸데없는 오기가 통하지 않는 상대라니까!”
쿠워어어!!
트롤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뿜어내는 콧김과 더러운 타액이 육안으로 확인된다.
도망치기 글렀다고 판단한 브론이 낙심한다.
“아, 신이시여···”
그가 신을 찾음과 함께 그어지는 검격.
빗살처럼 일(一) 자를 그린다.
서—걱!
그와 동시에 실금이 그어졌다.
트롤의 목이 아니었다.
그보다 두꺼운 몸통이 갈라졌다.
1÷1=2
지구에서 배운 수학은 엉터리다.
한 놈을 한 번 나눴더니 두 덩이가 되었다.
푸른 피가 폭우처럼 쏟아지며 거대했던 트롤의 상하체가 깔끔하게 분리되었다.
쿠웅!!
얼마나 무거웠는지 트롤이 지면에 부딪히자마자 먼지 구름이 풀썩 올라왔다.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본 브론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다.
“이게 대체···”
그 수다스럽던 브론이 기쁘게도 말을 잃어버렸다.
결국 다시 찾을 것 같긴 하다만.
피를 털고 천마검을 납검했다.
“가로베기. 이거 맞습니까?”
“어···응?”
“선배님께서 가르쳐주신 가로베기를 똑같이 따라해봤습니다만.”
한참 후에야 정신 차린 브론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그거 맞아요. 가로베기 맞습니다.”
“왜 갑자기 존댓말 쓰세요?”
“크흠흠, 나도 모르게···아무튼 잘했네. 자네의 가로베기는 만점일세!”
* * *
“자네 그 소식 들었나?”
“최단 시간에 실버로 승급한 모험가 파티 말이지?”
“곧 골드 등급으로 올라간다더만.”
“제기랄, 나도 그렇게 고속 승급이나 해보고 싶다.”
최근 갈라나흐 모험가 길드에는 한 모험가 파티가 연일 화제에 올랐다.
파티를 결성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실버등급 의뢰를 모조리 휩쓸고 이도 모자라 골드 의뢰까지 싹쓸이 한 파티.
이 때문에 순간이지만 의뢰가 바닥나서 모험가들이 단체로 길드 본부에 항의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이 파티의 의뢰 해결 속도는 경이적이었고 확실했다.
단신으로 트롤을 베어넘겼다니, 잠자는 오우거의 엉덩이를 치고 살아 돌아왔다느니, 별의별 소문이 퍼졌는데 다들 믿진 않았다.
그래도 칸-캠벨-브론 듀오의 실력 하나만큼은 모두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축하합니다! 벌써 점수가 999점이세요! 의뢰 하나만 더 수행하시면 곧 1000점으로 골드로 승급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파티가 워낙 잘 나가다 보니 길드 직원도 최대한 친절하게 응대하려는 자세가 느껴졌다.
하지만 나나 캠벨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매일 목숨 내걸고 몬스터를 싸웠던 북부에 비하면 여긴 그냥 애들 장난이었다.
심지어 나는 실제 악마도 만나보고 황혼교와도 몇 번이나 사투를 벌이지 않았던가.
“대단해! 후배님들 대단해! 곧 나와 같은 골드로 올 수 있겠구먼.”
내가 실버로 승급한 이후로 브론 아재도 골드로 승급했다.
십오 년 만에 실버를 탈출한 아재는 술을 마시더니 눈물콧물 다 쏟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수염 덥수룩한 아재가 그러는데 참 못 볼 꼴이었다.
아무튼 다음 날 아재는 아무 것도 기억 못한다고 했는데 그날 내내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얼굴이 기억나는 게 분명하다.
“벌써 골드라니···나도 자네처럼 실버에서 골드로 올라가려고 애썼을 때가 있었지.”
“무려 십오 년이었죠.”
“크흠흠, 그 얘기는 왜 또 하는가?”
아무튼 트롤이 나타났을 때 우리 대신 목숨을 걸어줬으니 그 보답으로 도와줬을 뿐이다.
골드로 올라가고 나서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고 골드부심 부리는 꼴이 확 갖다버리고 다른 골드 모험가로 대체하려다가 겨우 참았다.
“볼일 좀 보겠습니다.”
소변이 마려워서 뒷골목으로 향했다.
참고로 이세계는 매우 후져서 귀족이나 귀족과 함께 생활하는 사용인들이 아니라면 화장실을 굳이 따지지 않았다.
그나마 여자들은 가리개라도 하고 볼일을 보지만 남자는 노상방뇨가 일상이었다.
처음에는 나도 노상방뇨에 거부감을 가졌으나 벌써 아르니아 대륙에 온 지도 몇 년 차라서 이런 문화에 물들어버렸다.
솨아아아아
뒷골목에서 소변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의뢰 하나만 더 수행하면 골드.
골드가 되면 신성국으로 향할 수 있고 황금가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나태도 대단하군. 교주가 황금가지를 그렇게 원하는데도 일부러 안 찾고 있었다니.’
나태를 떠올리니 덩달아 시온 생각도 났다.
그녀와 떨어진 지 한 달도 안 됐지만 벌써 일 년은 지난 것 같다.
그만큼 시온은 아르니아 대륙에서의 내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여인이었다.
‘많이 강해졌을까.’
분명 강해졌을 것이다.
그녀는 <시온라이크>의 주인공이니까.
주인공 버프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시온이 나태보다도 강해졌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었다.
한참 상념에 잠겼을 때.
뒷골목 저편에서 웬 남자애 하나가 나왔다.
까까머리를 했지만 꽤 곱상한 녀석이었다.
‘저 녀석 뭐하는 거지?’
모험가 길드에서 오다가다 얼굴은 본 녀석이었다.
저런 어린애도 모험가를 하는 건가 싶어서 얼굴이 기억에 남는다.
손에 우유가 든 그릇을 들고 있는 남자애는 주위를 불안하게 기웃거렸다.
야옹~!
고양이 소리가 들리자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애옹아!”
이름도 지어줬나.
고양이를 발견하자마자 얼굴이 환해진 소년은 고양이가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였다.
“어디서 또 이렇게 다쳤니?”
고양이는 무척이나 배가 고팠는지 우유를 혀로 정신없이 핥아댔다.
소년이 고양이의 다친 다리를 빤히 쳐다보더니 살포시 어루만졌다.
그와 동시에 눈부신 빛이 퍼졌다.
스파아앗!!
포근하고 따뜻했다.
황홀하리만치 신성했다.
마음 한켠이 뭉클했다.
아르니아 대륙에 오고 나서 얼마 만에 느껴보는 안락한 기분일까.
리앙에서 탐욕의 환상안에 속았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진짜’의 느낌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창.
[성녀의 신성력에 노출되었습니다.] [피로가 회복됩니다] [체력회복량이 증가합니다] [모든 스텟이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성녀.
다른 무엇보다도 내 눈을 사로잡는 단어였다.
저 소년이, 아니지, 저 소년인 척하는 소녀가 성녀라고? 정말로?
야오옹!!
다리를 다쳤던 고양이는 빛이 퍼지고 나서 언제 그랬냐는 듯 힘차게 뛰어서 뒷골목으로 사라졌다.
단순히 만지는 것만으로 다친 다리를 치료한 것이다.
혼이 쏙 빠져서 나도 모르게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내 눈초리가 따가웠을까.
고양이에게 밥을 준 소녀가 고개를 돌리다가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히끅!!”
놀란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러더니 고양이 밥통을 들고 후다닥 골목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방금 뭐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