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ilure Marquis is a genius RAW novel - Chapter (172)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72화(172/200)
20장 혈통 : 대면한 망나니
온천에서의 소동이 끝난 후. 나는 황제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할까 기대하면서.
물론 돌발행동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한 상태였다.
만약 우리를 죽이겠다고 군사를 풀면 황제를 더는 믿을 수 없다고 판단, 사막왕 가젤의 편에 서서 제국의 멸망을 앞당길 생각이었다.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황제는 궁에 들어가고 나서 정확히 일주일 후에 메리보 주점으로 전령을 보내왔다.
일주일이 걸린 이유는 자기 나름대로 레이놀드 사건에 대해 알아보는데 걸린 시간이겠지.
놀랍게도 황제는 자신의 심복인 한스 기사단장을 직접 보냈다. 메리보 주점에 앉은 그는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최근에 격렬한 다툼이라도 있었나? 실내가 거의 다 부서져있군.”
“웬 미친놈이 찾아와서요. 조만간 복구할 계획입니다. 주문을 뭐로 하시겠습니까?”
“음료는 됐네. 이곳에서 만날 사람이 있어서.”
“잠시 기다려주시지요.”
연락을 받고 파헬과 함께 한스를 만났다. 저번과는 다르게 가면과 후드를 쓰지 않고 정체를 드러냈다.
“또 뵙는군요.”
“···1황자님을 뵙습니다.”
황제에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한스가 파헬을 보고 부복했다.
“뒷골목 왈패일 뿐입니다. 이러지 마시지요.”
“샌디 황후님은 저도 기억합니다. 호위기사들이 배고플까봐 매일 찐 감자를 가져다주셨죠. 그분의 아드님을 황자로 모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한스의 시선이 옆으로 돌았다.
무시하기에는 내 외모가 너무 눈에 띄었다.
“그쪽은 누구지?”
“헤논 로이드 백작입니다.”
“소문의 그 사내인가.”
한스도 최근 내 이야기를 접한 모양이다.
나를 위아래로 훑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동시에 질식할 것만 같은 압박감이 몰려들었다. 마치 태산이 쿵쿵대며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헤논 로이드가 대륙의 여덟 번째 별에 어울리는지 가늠하려는 의도다. 과연 전사답다고 해야 할까. 순수한 호승심을 마주한 내 입에 미소가 걸렸다.
평범한 기사라면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하고 사지가 후들거릴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세븐 스타를 전부 만났다. 칠대사도의 상당수와도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였다.
이미 내 안에 존재하는 내면의 그릇은 대해와 같이 넓어진 상태. 한스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단전에서 삼원마나를 끌어올려 쏘아지는 기세를 부드럽게 흘렸다. 교과서에 실릴 법한 적절한 대처. 한스는 전력을 다해 뿜어낸 기세에도 미동도 없는 나를 보고 눈썹을 꿈틀댔다.
“젊은 나이에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허나 자네는 엘든 왕국민. 어째서 타국 간의 전쟁에 끼어드는가?”
“제국이 무너지면 대륙이 흔들립니다. 어찌 남의 일이라 손 놓고 구경만 하겠습니까?”
“맞습니다. 로이드 백작은 저를 도와주고자 멀리서부터 달려왔습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레이놀드와 어머니의 죽음은 영원히 어둠 속에 묻혔겠죠.”
파헬의 변호를 들은 한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속주머니에서 황제의 편지를 꺼내놓았다.
“폐하의 전언입니다.”
편지에 적힌 내용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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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놀드 사건의 진실을 알아냈다. 이에 책임을 통감하는 바, 조만간 알렉스 황태자를 폐위시키고 그 자리에 파헬을 임명하겠다.
샌디 황후의 죽음에 관한 진실도 발표하겠다. 암살을 꾸민 흉수가 제임스 공작임을 공개하며 그 책임을 묻겠다.
당연히 제임스 공작은 부정하겠지. 나를 폐위시키려고 총력전을 벌일지도 모른다. 이는 곧 제국의 분열과 멸망으로 이어질 터.
그렇다고 썩은 상처를 가리고 덮어서 곪게 놔두는 게 답일까. 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길 또한 제국의 멸망으로 귀결된다.
어느 쪽으로 가든 제국이 무너진다면, 차라리 진실을 밝히는 쪽이 맞지 않을까. 적어도 이쪽 길은 소생의 기회라도 있을 테니.
따라서 파헬 너에게 부탁하고 싶다. 사막왕 가젤을 설득해라. 그는 지금 무리해서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 공멸이 목적이다.
사막 왕국을 등에 업어야 제임스 공작과의 힘싸움에서 균형을 맞출 수 있다. 이는 너의 생존과도 직결된다는 점을 명심해라.
나는 선택했다. 이제 너만 선택하면 되느니라. 오늘의 결정이 샌디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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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의 필체는 담백했다.
빼곡히 들어찬 내용은 버릴 게 하나도 없었다.
한스 기사단장이 입을 열었다.
“조만간 폐하께서는 사막 왕국과의 교전을 위해 친정을 나설 예정입니다. 아마 제임스 공작도 따라나서겠죠. 여기서 파헬님은 사신 자격으로 사막왕께 가시면 됩니다.”
“사막왕을 설득하라니, 쉽지 않군요.”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어려운 임무가 되겠죠. 현재 사막왕은 화친을 거부하고자 보낸 사신을 모조리 처형하고 있으니까요.”
이쪽을 향해 살의를 품은 자를 동맹으로 포섭하라니, 아무리 어명이라지만 비상식적인 난이도다.
한편으로는 황제가 치밀한 사람이라 느꼈다.
편지만 봤을 때에는 파헬을 엄청나게 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을 살펴보면 조금 다르다.
만약 사신으로 간 파헬이 임무에 실패하고 사막왕에게 죽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에도 황제는 알렉스 황태자를 폐하고 제임스 공작과 싸울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실패할 경우, 황제는 시치미를 뚝 떼고 사막 왕국과의 전면전을 준비할 것이다. 제임스 공작과의 불안한 동맹을 계속 유지하면서. 레이놀드와 샌디의 죽음에 대한 진실도 땅 밑에 묻어두겠지.
황제는 사막 왕국이 아군이 되었음을 확실하게 인지한 뒤에야 비로소 움직일 거다. 그전까지는 꿈쩍도 안 한다.
한마디로 저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했다.
‘너에게 기회를 주마. 증명한다면 너의 편에 서겠고, 증명하지 못한다면 너를 외면하겠다.’
이 말이었다.
어떤 상황이 처해도 황제에게는 도망칠 구멍이 있으니, 노회한 너구리라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똑똑한 파헬이 내가 눈치챈 점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끝까지 대단하시군요. 폐하께서는.”
파헬과 달리 나는 황제가 기회를 줬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것만으로도 저번 온천 작전은 성공이다.
기회가 아예 없으면 모를까. 실낱같은 기회라도 주어진다면 반드시 잡아낼 수 있다. 여태껏 줄곧 바늘구멍을 뚫고 여기까지 도달했으니까. 이번에도 똑같이 하면 된다.
* * *
황제의 전언을 전달한 후 시온과 캠벨을 포함한 동료들이 너도나도 사신단에 지원했다. 심지어 오르네오 영감님까지.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번 작전은 나와 파헬만 가는 게 맞았다.
최악의 경우 사막왕을 포함한 왕국군 전체가 추격할 텐데, 동료가 많을수록 빠져나가기 힘들었다.
따라서 사막왕을 설득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파헬과 탈출에 가장 적합한 스킬을 가진 내가 따라가기로 했다.
멜브스 대평원.
오스딘 시티 남쪽으로 삼 일 거리에 있는 드넓은 평야에 이십만 대군이 대치하는 대장관이 펼쳐졌다.
사막왕 가젤의 군대 십만, 황제가 직접 끌고 온 제국군 십만, 마지막으로 제임스 공작이 데려온 십만 군대까지.
삼각형을 이루고 대치한 상황에서 나는 파헬과 함께 사막 왕국 진영에 다가갔다.
“멈춰라!!”
역시나 경계는 삼엄하다.
목책 너머로 겨누어진 화살과 적개심 가득한 눈빛의 향연.
웬만한 사람이라면 냉큼 도망치는 게 정상이지만, 나와 파헬은 웬만한 사람이 아니다.
“무슨 일인가?”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전령이다. 사막왕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 문을 열어달라.”
“전하께선 더는 제국의 혓바닥을 믿지 않으신다. 목숨이 아깝다면 이만 돌아가도록.”
“그럴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전하를 뵈어야 한다.”
완강한 거부 의사를 표하자 싸늘한 살기가 전신을 휘감았다. 대화를 나눈 전사를 포함한 병사들이 칼을 빼들고 우리를 둥글게 둘러쌌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면 어쩔 수 없지. 그만 죽어라.”
다가오는 병사가 칼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너무나 느린 몸짓이다. 칼날이 땅에 닿을 때쯤, 나는 이미 그의 어깨를 발판 삼아 하늘로 도약했다.
“뚫고 들어간다!”
“미친놈인가? 이걸 들어가겠다고?”
“막아라! 다 달려들어!”
[윈드 컨트롤] [헤이스트] [순보]바람 스킬로 속도를 올리고 하늘로 치솟았다. 공기를 박차고 단숨에 문을 넘었다.
파헬도 나태에게 가르침을 받은 암살자. 수준급 물도마뱀 발걸음에 헤이스트 바람 버프를 더해서 목책을 넘었다.
“드루이드란 참으로 신기하군요.”
“감탄은 나중에. 일단 달려.”
바깥쪽 소란을 들은 병사와 팔라딘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그 광경은 마치 검은 파도가 밀려오는 듯했다. 휩쓸리는 순간 사막왕을 만나기는 요원해진다. 계속해서 새로운 길을 뚫어야 했다.
다행히 나에게는 다수를 상대하기 쉬운 스킬이 있었다.
[우드 컨트롤] [강화된 바인드]땅에서 솟은 나무뿌리가 적들의 발목을 속박했고,
“어억! 이게 뭐야!”
“풀어라!”
“질겨서 잘 안 끊어집니다!”
[크리스탈 컨트롤] [크리스탈 실드]갑자기 솟아오른 수정벽이 추격조의 경로를 제대로 가로막았으며,
[우드 레인]쏟아지는 나무 고드름에 방패를 위로 들어 목숨을 보전하기 바빴다. 당연히 그들이 들어올린 방패는 좋은 발판이 되었다. 나와 파헬은 이를 뛰어넘고 단숨에 중앙으로 향했다.
가젤의 천막은 찾기 쉬웠다. 가장 크고 화려한 천막이 사막왕의 거처였다. 근처를 지키던 팔라딘의 수준도 높았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하지만 강함은 상대적인 법이다. 왕국에서 정예 전력이라 평가받는 팔라딘도 나에게는 가벼운 수준이었다. 검에 오러를 뿜으며 휘두르자 맞상대하던 녀석이 경악했다.
“뭐야? 소드마스터?”
당황할 때는 이미 오러 블레이드가 그의 샴쉬르를 날린 후였다. 무기를 잃은 팔라딘의 복부를 발로 차버렸다. 녀석은 정통으로 얻어맞고 가젤왕의 게르로 빨려들어갔다.
결국 게르에 발을 디뎠다.
마침 사막왕은 안에 있었다.
십만 대군을 뚫고 사막왕 만나기.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였다.
가젤의 첫인상은 뭐랄까···사내다움의 정석이었다. 웃통을 벗고 있어서 조각 같은 근육질 몸매가 훤히 드러났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그의 강인함을 더욱 강조했다.
“네놈은 누구지?”
“헤논 로이드.”
“애송이로구나.”
또다시 중압감이 나를 덮쳐온다.
한스 기사단장도 그렇고, 사막왕 가젤도 그렇고, 왜들 그리 기세로 압박하려고들 하는지 원.
당연하게도 통하지 않았다. 꿈쩍도 안 했다. 게다가 방금 전 십만 대군의 포위방을 뚫고 온 나다. 이미 무력은 인증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기개는 있는 놈이군. 제국인도 아닌 놈이 여긴 무슨 일로 왔느냐?”
“이 전쟁을 끝내러 왔다.”
“건방진 놈이로군.”
가젤이 술병을 집어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지막 알코올 한 방울까지 짜낸 그가 술병을 옆으로 집어던졌다.
“모두 물러가라. 이놈들과 대화를 나눠보겠다.”
“전하! 저들의 무위가 심상치 않습니다. 호위 없이는 위험합니다!!”
“위험? 나 가젤이 외국의 새파란 애송이에게 당할까봐 걱정되느냐?”
“그게 아니오라···”
“듣기 싫다. 모두 물러가라!”
결국 전부 게르에서 나갔다.
가젤과 나, 파헬 셋만 남았다.
“이제 좀 조용해졌군.”
만족스러운 표정의 사막왕이 히죽 웃는다.
“너희는 내 부하를 뚫고 여기까지 왔다. 기개를 보여줬으니 인내심이 다할 때까지는 이야기를 들어주마. 어디 한 번 씨부려봐라.”
“저희가 원하는 건 간단합니다. 전쟁을 멈춰 주십시오.”
“여태껏 만났던 사신들과 똑같은 소리로군. 내가 개인적인 야심을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나? 전쟁의 빌미는 너희 황제가 제공했어.”
“전하께서는 황제가 샌디 황후 암살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그래. 그 전까지 사막의 분노는 멈추지 않는다.”
평행선을 그리는 대화. 여태까지는 쭉 그랬으나 이번에는 다르다. 우리에게는 파헬이라는 비장의 카드가 있기에.
“황제 폐하께서는 샌디 황후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실 겁니다.”
“그걸 나보고 믿으란 건가?”
“곧 알렉스 황태자도 폐하시겠지요.”
알렉스 이야기까지 나오자 사막왕이 자세를 바꾸었다.
“무슨 말이지?”
“폐하께서도 샌디 황후가 타살로 유명을 달리했음을 알고 계십니다. 심지어 누가 사주했는지도 알고 계시죠.”
“계속 말해라.”
“하지만 사주한 자는 폐하께서도 건들기 버거운 거물입니다. 이를 위해 가젤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막왕은 미간을 모으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황제가 알고도 못 건드는 존재라···제국에 그 정도 인재는 많지 않지. 혹시 제임스 공작인가.”
“그렇습니다. 폐하께서는 샌디 황후를 진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임스 공작에게서 지키지 못하셨죠.”
정확히 표현하자면 황제는 제임스 공작의 꾀에 넘어가 샌디 황후의 죽음에 일조했다.
다만 사막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서 날 것 그대로 이야기해봐야 역효과일 뿐.
보기 좋을 정도로만 살짝 포장지를 씌웠다. 황제가 샌디를 사랑했던 건 사실이니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좋아. 백번 양보해서 제임스 공작 때문에 황제가 사건을 덮었다 치자고. 헌데 그것과 알렉스 황태자는 무슨 연관이 있지?”
“상관있습니다. 왜냐하면 알렉스 황태자가 물러나야 비어버린 황태자 자리에 샌디 황후가 낳은 소생이 올라설 테니까요.”
“!!!”
그 단단했던 가젤도 지금만큼은 태연할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난 사막왕이 나에게 성큼 다가와 머리를 들이밀었다.
“똑바로 얘기해. 방금 뭐라고 했지?”
“샌디 황후의 소생을 황태자로 임명하신다 했습니다.”
“그러니까···나에게 조카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는 거냐?”
“따지자면 그렇게 되겠군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가젤이 이내 헛웃음을 터트렸다.
“크핫하하하하하!!!!”
배를 잡고 웃던 가젤이 새로운 술병을 열고 한 모금 털어넣었다.
“제법 재밌는 농담이었다. 한편으로는 불쾌하기도 해. 있지도 않은 조카를 들먹였으니 말이다.”
“전 진실만 말했습니다.”
“좋아. 그러면 증명해라. 만약 네 말을 증명하지 못한다면···넌 여기서 살아서 나가지 못한다.”
스산한 살기가 목을 죄어왔다. 아까 내리누르던 중압감과는 달랐다. 피부의 모공 하나하나가 아우성을 치며 경고했다. 나도 모르게 천마검에 손이 향하는 걸 가까스로 자제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역시 듣는 것보단 직접 보시는 게 맞지요.”
이때를 위해 데려온 파헬이다. 그가 후드를 훌렁 벗었다.
눈이 내린 듯한 백발 머리카락에 샛노란 토파즈 눈동자. 다른 건 몰라도 햇볕에 그을린 듯한 피부와 눈동자만큼은 판박이처럼 똑같았다.
가젤은 천천히 일어나 파헬에게 다가갔다. 파헬도 가젤의 강렬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사막 혈통을 타고난 사내들만의 교감일까. 거기까진 모를 일이다.
정적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가젤은 파헬에 대해 이것저것 묻지 않았다. 황제의 속임수라고 의심하지도 않았다. 단지 우묵한 눈빛으로 파헬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살아남느라 고생했겠구나.”
딱 한 마디. 짧지만 굵다. 가젤이 파헬의 혈통을 인정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