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ilure Marquis is a genius RAW novel - Chapter (175)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75화(175/200)
20장 혈통 : 재회한 망나니
기억이란 참으로 오묘한 존재다.
최근 기억은 그 당시 느꼈던 감정과 기분이 생생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방면으로 비틀리고 왜곡된다.
힘들었던 기억이 미화되어 좋은 추억이 되기도 하고, 행복했던 기억에 아련한 슬픔이 스며들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기억이 그렇진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지는 기억도 있다.
사막왕 가젤에게는 이십년 전 최후의 전투가 바로 그런 기억이었다.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악마와 새하얀 설원을 질주하는 몬스터. 정신 마법에 현혹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지휘관. 죽은 즉시 언데드가 되어 아군을 물어뜯는 병사.
인세의 지옥이 있다면 여기일까.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던 엘든 왕국 북부는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가젤에게는 악몽의 무대였다.
잘려나간 아군의 팔다리,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덜렁대는 눈알, 바닥까지 질질 끌리는 내장, 새하얗던 설원을 붉게 물들였던 시산혈해.
그중에서 가장 끔찍한 기억을 뽑자면 그건 바로······마왕 바알.
사막에서 태어나 한평생 사내답게 살아왔다고 자부한 가젤이었다. 그런 가젤도 마왕을 처음 봤을 때는 우두커니 망부석이 되어버렸다.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이랬다.
운명이 정해준 절대적 포식자.
뒤집을 수 없는 우열 관계.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떨리고 전신의 투지가 말라버려 산 채로 미라가 된 느낌은 어떤 단어로도 묘사가 불가능했다.
‘이대로···패배하는가.’
절망감이 뇌리를 휩쓸 때였다.
뒤편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동시에 마비되었던 근육이 제 기능을 찾았다. 고갈되었던 생기가 돌아왔다. 심장이 격하게 뛰며 혈류를 공급했다.
고개를 들었더니 쏜살같이 가젤을 지나치는 한 사내가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반짝이는 은발 머리카락은 햇빛에 비칠 때마다 눈부셨다. 밀가루를 반죽한 듯한 새하얀 피부와 조각 같은 아름다운 외모도 돋보였다.
그러나 가젤의 눈에 들어오는 건 따로 있었다.
한 치의 의심없이 마왕에게 돌진하는 투지와 올곧은 기개. 그의 등 뒤로 비치는 눈부신 후광.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각나는 용사 카일의 기억이었다.
*
가젤이 군대를 이끌고 제임스 공작을 공격했을 때, 상대가 인간이 아님을 눈치챘다.
“언데드를 또 볼 줄이야···”
빠득!!
이가 갈릴 정도로 지긋지긋한 존재였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피조물. 최후의 전투 당시에 수없이 베어넘겼던 적이기도 했다.
이제야 제임스 공작이 누군지 알아냈다. 수만의 언데드를 부렸던 까다로웠던 리치킹. 그놈이 황혼의 오만이자 제임스 공작을 연기했으리라.
“마왕이 봉인되고 죽은 줄 알았는데, 이십년 동안 잘도 숨어있었구나.”
다가오는 구울과 좀비를 사정없이 베어낸 사막왕이 리치킹을 향해 쇄도하려 했다.
허나 세상일이 어디 마음대로 되겠는가. 끝없이 밀려드는 죽음의 파도가 그의 진격을 막았다.
오히려 그는 아군을 독려하기 바빴다.
가젤이야 이전에 언데드를 상대해봤다지만 사막 전사의 대부분은 오늘 처음 어둠의 세력과 마주했다. 공포에 잠식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전군 끝까지 싸워라! 동료였다 해도 시체가 되었으면 가차없이 베어라! 머리통을 날려야 완전히 죽는다!”
숨이 가쁘게 차오른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여동생의 죽은 이후로도 꾸준히 훈련했으나 그만큼 술도 가까이했다. 축적된 알코올과 세월의 흐름은 세븐 스타였던 가젤마저 무릎 꿇게 했다.
“이대로 끝나는가···”
또다시 전신이 바싹 말라간다.
예전에 경험했던 일이다.
심지어 용사 카일마저 없다.
구해줄 사람이 없다는 의미.
아득한 절망감이 심장을 옥죄였다.
“인간족 군주여, 여기 있었구나.”
데스나이트 하나가 가젤을 발견하고 검을 들었다. 칼날에서 시커먼 마나가 일렁이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손쉽게 해치우고도 남을 적이지만, 왜인지 가젤은 패배를 직감했다. 칼을 들어야 하는데 몸이 요지부동이었다.
“죽어라.”
칼이 내리치는 순간 가젤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파지지지직!!!!
새파란 전격이 온 사방을 뒤덮었다. 눈부신 빛이 두꺼운 눈꺼풀을 뚫고 들어왔다. 오러로 몸을 보호하던 사막왕조차 찌릿한 감각에 잔경련이 뒤따를 정도였다.
살며시 눈을 뜨자 주변은 초토화가 되어있었다.
주변에 바글바글했던 언데드는 숯덩이가 되었고, 직접적으로 검을 나눴던 데스나이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캬오오오오!!!!
산천초목의 분노가 이러할까.
지축이 위아래로 진동한다.
공기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하늘을 활공하는 아름다운 생명체와 그 위에 타고 있는 단 한 명의 인간.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은 그들에게서 시작되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막 출신에 세븐 스타인 가젤은 좋은 시력으로 용기사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헤논 로이드.
대륙의 여덟 번째 별. 십만 대군을 뚫고 온 사나이. 젊음에 비해 강한 무력은 물론이거니와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지혜를 갖춘 현인.
그의 진면목을 오늘에서야 발견했다.
캬오오오!!!
다시 한 번 힘찬 포효와 함께 드래곤을 탄 인간이 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방향은 오만이 있는 곳.
의도는 분명했다.
저 애송이가 십만 언데드를 부리는 리치킹을 잡겠다고 달려든 것이다.
어째서일까.
반짝이는 용의 은색 비늘에서 용사 카일의 머리카락이 연상된 이유는.
뒤죽박죽 섞인 기억에서 비롯된 단순한 착각일까.
꺾이지 않는 마음과 올곧은 기개.
투지로 불타는 눈빛.
과거에 기억하던 용사 카일과 똑닮았다.
“뭐하십니까?”
마침 도착한 파헬이 퉁명스레 말을 걸어왔다.
“자꾸 멍 때리실거면 뒤에서 쉬십쇼.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파헬조차 몰려오는 언데드 상대로 거침없이 검격을 흩뿌린다.
그제야 가젤은 깨달았다.
시간이란 가진 걸 빼앗기만 하는 무정한 약탈자가 아님을. 황폐한 들판에도 새로운 새싹이 자라고 있었고, 벌써부터 꽃봉오리를 피우려 했다.
이들에게 시간이란 그들을 성장시켜 줄 거름이자 꼭꼭 숨겨왔던 잠재력을 꺼내줄 최고의 조력자였다.
그랬다.
크게 달라질 건 없다.
다시 한 번 달리면 된다.
그때처럼 모조리 쳐부수고 악을 멸절하리라.
검을 세운 가젤이 우렁차게 외쳤다.
“전군! 돌격!! 나를 따르라!!!”
“와아아아아!!!!”
힘찬 함성이 뒤따랐다.
뿌연 안개처럼 모호했던 대평원 전투의 향방이 결정나는 순간이었다.
* * *
드래곤에게는 피어(fear)라는 기운이 흐른다.
태생부터 축복받은 그들이 뿜어내는 피어는 자신보다 격이 낮은 존재를 움츠리게 하는 효과가 있다.
성룡이 되어 한층 성장한 코코가 뿜어낸 피어에 앞을 가로막은 언데드 부대는 정신을 못 차렸다.
본래 정신력과 인내심이 강할수록 피어를 잘 버티는데, 언데드가 되어 생명에 대한 증오밖에 남지 않은 시체들이 견딜 리 없었다.
그나마 우두머리라 할만한 데스나이트와 리치마저도 드래곤을 보고 도망가기 바빴다.
서걱!! 서걱!!
도주하는 적은 최고의 사냥감이다.
숫자가 너무 많아서 지휘관급 언데드 위주로 솎아냈다.
에메랄드 빛 오러 블레이드가 번쩍일 때마다 데스나이트가 소멸하고 리치가 고통에 겨워 이지를 상실했다.
한참 녀석들을 잡다보니 어느새 리치왕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새하얀 백골의 외형을 한 오만. 그가 걸친 흑색 로브 끝자락이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였다. 스태프를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한 그의 동공에서 푸른 귀화가 넘실댔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용기사가 나타나다니.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네놈은 누구지?”
“헤논 로이드.”
내 이름을 들은 오만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역시 저놈은 나를 알고 있다.
“네놈이었구나. 사사건건 내 계획을 방해한 녀석.”
“나도 너 이야기 많이 들었다. 아주 사방에 똥을 뿌리고 다니더라?”
“흐흐흐···도대체 어디서 이런 놈이 튀어나왔는지···변방 후작가의 망나니, 아비가 세븐 스타라는 것만 제외하면 별 볼 일 없는 녀석이었는데 말이야.”
갑자기 숨통이 조이고 호흡이 가빠졌다. 급하게 삼원마나를 끌어올렸지만 오히려 몸 상태가 더 나빠졌다. 이어서 떠오르는 시스템창.
[리치왕의 저주에 걸렸습니다] [패시브 스킬 자정작용 발동] [모든 상태이상에 면역입니다] [저주가 해제됩니다]다시금 호흡이 편해지고 얼굴색이 편해졌다. 기세로 압박한 게 아니라 내가 모르는 저주를 썼던 모양이다.
어쨌든 드루이드 스킬로 해제해서 지금은 멀쩡했다. 리치왕은 내가 저주에도 끄떡없자 이상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한낱 필멸자가 드래곤을 사역하고 내 저주를 견디다니.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모르겠으면 직접 알아내봐.”
셀프 서비스는 기본이지.
오만의 턱뼈가 살짝 벌어졌는데, 그게 웃는 표정임을 깨달았다.
“좋아. 어디 한 번 잔재주를 부려 보아라!”
오만이 스태프를 휘두르자 나를 둘러싸던 언데드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코코가 다시금 피어를 뿜어냈지만 이번에는 소용없었다. 리치왕에 대한 두려움이 드래곤의 대한 두려움을 넘어선 것이다.
크아아아악!!
수없이 몰려오는 대군.
인해전술로 깔아뭉갤 셈인가.
순순히 당해줄 이유는 없다.
[우드 컨트롤] [크리스탈 컨트롤] [골렘 소환]우드 골렘과 크리스탈 골렘 수십 기가 튀어나왔다. 이 정도면 전차여단 수준의 전력이다. 거대한 덩치의 골렘은 등장하자마자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 안다는 듯 언데드를 향해 쇄도했다.
압도적인 파워에 직격 당한 구울과 좀비가 단숨에 뭉개졌다. 데스나이트의 검날도 좀체 통하지 않았고, 리치의 흑마법에는 내성을 지녔다.
골렘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언데드를 무자비하게 휩쓸었다. 살육병기란 단어가 딱 어울리는 무위였다.
저절로 포위 진형이 무너졌다.
이틈을 노리고 연계 스킬 콤보.
[우드 레인] [크리스탈 레인]스피어에서 레인 기술로 발전한 드루이드 스킬. 역시나 다수를 상대로 효율이 좋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나무와 돌 고드름이 폭풍우가 되어 내리쳤다.
언데드는 방패로 위로 들어 떨어지는 죽음의 비를 가로막을 지능이 없기에 융단 폭격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팔다리에 나무나 돌조각 좀 박힌다고 녀석들이 죽진 않지만, 어쨌든 기동성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넘어진 좀비와 구울들은 점차 쌓여서 본의 아니게 바리케이드를 형성했다. 자연스레 뒤에 대기하던 언데드는 경로가 막혀 우왕좌왕했다.
병목현상을 보이며 바글대던 언데드 무리를 위해 선물을 주기로 했다.
수많은 돌과 나무 조각이 손에 달라붙어 커다란 주먹을 형성했다.
최상급 드루이드로 승급한 덕분에 웬만한 거인족만한 주먹이 만들어졌다.
“죽어라.”
콰아아아아앙!!!!
내려친 주먹이 모든 언데드를 짓눌렀다. 천둥소리가 들릴 때마다 언데드가 수십 마리씩 사라졌다.
이게 끝이 아니다.
코코가 입을 쫙 벌렸다.
안쪽에 작게 맺힌 마나의 기운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더니, 이내 거친 전기폭풍으로 변모했다.
파지지지직!!!
드래곤 브레스.
알고만 있었지, 직접 본 건 처음이다.
바람과 뒤섞인 전격이 사방에 몰아쳤다. 정면으로 부딪친 언데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살짝 빗맞은 적조차 과전류로 마비되어 쓰러졌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위력.
결국 나를 향해 다가오던 언데드 군단은 허무하게 무력화되었다. 이때까지 소요된 시간은 고작 오분이었다.
“보여줄 건 이게 단가?”
오만은 전투 내내 팔짱을 낀 채 방관하고 있었다.
혹시나 기습할까 언데드를 상대하면서도 계속 경계했는데, 끝까지 공격하지 않았다.
섣부른 공격보다는 확실한 전투 데이터를 쌓는 게 중요하다 판단한 듯했다.
“나무와 돌을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다루는군. 지금 보니까 드래곤도 자기 의지로 협력하고 있어.”
“잘 보았군.”
“이러면 결론은 딱 하나···네가 교주님이 그렇게 찾아대던 드루이드겠군.”
“맞다.”
순순히 긍정했다.
이 정도 스킬을 보여주고 오리발을 내밀어 봐야 믿어주지도 않을 테고, 슬슬 내 진짜 정체를 밝혀도 무방한 시점이다.
“듣자하니 소드마스터라 들었는데, 드루이드면서 소드마스터? 이거 완전 괴물이구먼?”
“깨달았으면 알아서 항복해라.”
“크크크크···아주 재밌어. 교주님이 어째서 널 찾는지 알 것 같군. 넌 내 흥미를 자극했다. 언데드로 만들어서 바쳐도 괜찮겠지.”
네크로맨서의 강점은 명확하다.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울 수 있기에 항상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수적 우위가 무의미해지는 순간 그만큼 무력한 존재도 없다는 뜻이다.
오만은 인해전술을 시도했고 나는 이를 손쉽게 타파해냈다. 그런데도 저런 여유라니, 비장의 수라도 남아있는 걸까.
“오래전부터 너를 주시했다. 정확히는 질투가 당했을 시기부터군. 그때부터 나는 네가 황혼에 큰 걸림돌이 되리라 느꼈다.”
“이것 참 영광이구만.”
“내 예감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너는 내 수제자 우르카를 죽이고 왕국을 삼키려는 계획을 박살 냈다. 그도 모자라 이제는 정면으로 내 앞을 가로막고 있지.”
“잡설이 길군. 시간이라도 끌고 싶은가? 그런 의도라면 당장 덤벼주마.”
“결론만 짧게 말하자면, 언젠가 너를 만날 것 같아서 선물을 준비해두었다.”
오만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언데드 사이를 헤치고 데스나이트 한 기가 튀어나왔다. 거무튀튀한 갑주에 깊게 눌러쓴 투구. 안쪽에서 붉은 안광만 촛불처럼 고요히 타올랐다.
“그래서 내 선물이 저 데스나이트인가? 여태껏 상대했던 놈과 별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오, 너무 속단하지 말라고. 축제는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탓!!
오만의 말이 끝나자마자 데스나이트가 나에게 쇄도했다. 여느 때와 같이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해서 막으려 했다.
그의 흑검과 나의 에메랄드 검이 부딪치는 찰나,
쩌어엉!!
“크윽!!”
전신에 퍼지는 묵직한 중량감.
저절로 몸이 뒤로 밀렸다.
이놈···힘이 장난이 아니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
서로의 검이 X자로 교차한 상황. 힘겨루기하는 와중에 데스나이트와 눈이 마주쳤다. 텅 빈 투구 속에서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구나. 동생아. 나를 알아보겠느냐?”
“!!”
이럴 수가.
듣자마자 알아차렸다.
데스나이트의 정체는 필립.
내 이복형이었다.